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이영수(듀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SF작가이자 영화 평론가인 얼굴없는 작가 듀나의 신작 단편집이 출간됐다. 자음과 모음에서 출간된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1998년부터 2010년까지 발표한 작품들을 고루 수록했다. 그 사이에 출간된 단편집들이 있었지만, 사정상 실리지 않았던 단편들부터, 최근에 발표한 단편들까지 한데 묶은 것이다. 이 단편집의 미덕은 일단, 분량이 짧은 엽편을 포함하기도 했지만, 작품 수가 열 세편이나 된다는 것이다. 2006년에 출간 된 『대리전』(이가서)이 4편 밖에 수록되지 않았고, 2007년에 출간 된 『용의 이』(북스피어) 역시 경장편인 「용의 이」가 실려 있긴 했지만 작품 수는 역시 4편에 불과했다. 두 권의 단편 수를 합친다고 해도 8편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2002년에 출간된 『태평양 횡단 특급』(문학과지성사)이 12편의 단편을 수록했던 것에 반해, 그 뒤의 두 권은 작품 수가 적은 탓에 금방 읽어버리고 독자가 약간은 아쉬운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충분한 작품 수와 두께를 갖고 있는 덕분에 독자가 충족감을 느끼게 된다.(개인적으로는 단편집은 여덟 편 이상 수록되어야 충족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숫자만 놓고 보면 싱글앨범과 정규앨범의 차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들의 퀄리티도 일정한 편이라 만족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오래전에 쓰인 글과 최근에 쓰인 글이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퀄리티가 크게 떨어지는 작품이 없고 일정하다. 또한, 대부분의 작품에서 작가의 일정한 톤이 느껴진다. SF와 환상 단편이 섞여 있지만 이질적인 느낌도 적고, 작품 배치도 신경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다만 표지는 조금 아쉬운 느낌을 받는다. 내용과 큰 연관이 없으며, 책을 읽지 않고 디자인한 느낌이다. 성의가 부족한 느낌이다.)

SF와 판타지.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 수록된 열 세편의 글들은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상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또한, 초기 단편집과 달리 변화된 새로운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기존에 단편집을 읽어온 독자라면 듀나의 새로운 우주를 읽으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작품집을 통해 듀나를 접하게 되는 독자라면 듀나의 차가운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경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동전 마술


동전마술은 [대산문화] SF꽁트 코너에 실린 엽편이다.(이 코너에는 듀나 말고도 송경아, 이영도 작가의 SF꽁트 글이 실렸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인데,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다. 이정기라는 남자와 김민정이라는 여자는 서로 억지로 끌려나온 선을 보게 된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김민정은 갑자기 재미있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핸드백에서 백 원짜리 동전을 꺼낸다. 그리고 눈앞에서 동전을 집어 던지자, 동전은 사라져버린다. 김민정은 마법이라고 설명한다. 남자는 그 마술을 이후에 다른 사람과 결혼한 이후에도 잊지 못한다. 과연 그 동전마술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이 엽편은 끝까지 그 비밀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독자에게도 같은 의문을 남겨 놓는다. 다양한 방향으로 생각할 여지가 많기 때문에, 더 인상에 남는 글이다.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이야기도 있는 법이다.



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


예전에 장르잡지 『판타스틱』에 실렸을 때, 읽은 글이다. 7년을 넘게 사귄 남자친구의 머리 위에 돌연 물음표가 보이게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야심차게 쓴 작품이라기보다는 단순한 발상에서 시작한 소품 같은 이야기처럼 보였다. 물음표를 보는 여자는 주인공 혼자가 아니었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자 다른 목격자들도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은 그 현상이 전염된다는 것을 깨닫고 국내 뿐 아니라 세계로 범위를 넓혀 추적해나간다. 이윽고 현상의 원인이 밝혀지고 전지구적인 현상의 형태가 드러난다. 이렇게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넘어가며, 점진적으로 이야기가 커지는 구조에서 오는 재미를 가지고 있는 단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마치 소설의 도입부에서 끝나는 것처럼 갑자기 이야기가 중단되기 때문에 소품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이야기는 결국 현상의 정체를 밝히기 보다는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다가 돌연 주인공과 남자와의 관계로 이야기가 갈무리 되면서 끝나버린다. 그러나 이미 점층적으로 발전해나간 이야기의 뒷부분이 궁금하기 때문에 허탈한 느낌 역시 받게 된다. 만약, 그 뒤로 이야기가 이어져서 좀더 방대한 모험이 펼쳐져도 흥미롭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주인공은 또한 걸맞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이야기가 중단된 것 같기도 하다.



메리 고 라운드


세 여자의 삼각 관계가 기묘하게 그려진 단편이다. 이 작품 역시 판타스틱에 실렸다. 은주와 현아가 살고 있는 집에 갑자기 정화가 찾아온다. 현아와 정화는 애인 사이였고, 은주는 말주변이 없는 후배였다. 소설은 세 명의 화자가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처음에는 갑자기 들이닥친 정화의 시점이다. 정화는 처음으로 현아와 가까운 은주를 질투하고, 경계하다가 끝내 자신의 오피스텔에 은주가 머물면 어떻겠느냐고 말한다. 그러자 현아는 충격적인 사실을 토로한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진행한 화자, 정화에게 너는 1년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시점은 이제 은주로 옮겨간다. 은주의 시점에서 셋의 관계는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은주가 바라본 정화와 현아의 모습은 새로운 정보를 담고 있다. 은주는 정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항상 정화 앞에서 말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부터, 정화가 죽고 난 뒤에 현아를 위로했고, 현아와의 섹스는 일종의 스리섬이라는 것까지. 은주는 정화의 애인이었던 현아를 통해서 그때서야 정화를 소유하게 된다. 그런데 1년 만에 정화의 유령이 그들 앞에 갑자기 나타났고, 은주와 현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극을 하며 정화의 유령을 유지시켰던 것이다. 그것을 깬 것은 현아였고, 은주는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아의 시점이 나타난다. 정화와 은주의 시점을 거친 후에 보는 현아의 시점은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시선으로 서로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총체적으로 알기 때문에 재미있다. 그리고 자칫 평범한 유령이 등장하는 소설로 빠질 뻔한 이야기는 현아의 시점에서 서술되면서 전혀 다른 느낌으로 변한다. “꼭 초자연적으로 해석할 필요도 없다.”(54쪽)라는 말은 소설을 다른 국면으로 이끈다. 현아가 가지고 있는 CD들 중 3분의 1 정도가 원래 정화 것이라는 것, 17년째 현아와 동거 중인 곰 인형도 정화가 남긴 것, 그 반대로 현아의 버릇이 정화에게 옮아간 것도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초자연적인 유령이 아니라도, 남은 물건들과 버릇들로 인해 죽은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통찰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일상에서 친구와 가족 간에 물건과 버릇이 전염되고 옮아가면서 자신의 것이 사라지고 흐려지는 현상에 공감을 하면서 소설을 읽게 된다. 이로써 이 소설은 진부한 유령 소설의 클리셰에서 벗어나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세 사람의 관계에 다시 집중하며 소설을 읽어나가게 한다. 낯선 인물 관계와 유령을 등장시키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진행한 이야기 등이 인상적인 소설이다.



A, B, C, D, E, & F


온라인의 익명성을 가지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구성한 엽편이다.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재미있다. A와 B는 채팅으로 만났는데, A는 B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3자의 입장에서 알아보기 위해서 C라는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내서 접근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재미있게 흘러간다. B는 A가 가상으로 만들어낸 친구인 C에게 오히려 관심을 갖는다. 그 사실을 안 A는 이번에는 C의 가상의 남자친구인 D를 만든다. 그러자 B는 E라는 가상의 여자를 만들어서 D를 유혹한다. 점입가경이다. 실제로도 여러 개의 다중 아이디를 만들어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떠올라서 더욱 재미있는 소설이었다.(그런데 흥미롭게도 작가의 말에 따르면 트위터도 없고 핸드폰에 카메라도 달려 있지 않던 시절 이야기라고 한다.) 온라인의 익명성을 풍자하면서 위트가 잘 녹아들어가 있는 글이다. 게다가 현실적인 기반이 있으면서도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환상적으로 변이되는 점도 재미있다. 읽으면서 내내 미소를 짓게 되는 글이었다.



호텔


짐 캐리가 주연한 『트루먼쇼』처럼, 일상이 모두 중계되는 미레에 ‘호텔’이라고 불리는 곳. 호텔에 사는 사람들은 플레이어라고 불린다. 시스템에 지배하에 있는 인간들은 호텔에서 구세대의 삶을 모방한다. 이것은 플레이다. 작가의 말에 나온 것처럼 먼 미래 버전의 MBC 프로그램인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프로그램을 연상해도 될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용의 이』에 실린 단편 「거울 너머로 가다」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거울 너머로 가다」에서도 시스템이 떠오르는 ‘정글’이 창조한 화자와 화자의 어머니는 우주에 중계되는 재현되는 멜로드라마 연기를 펼친다. 「거울 너머로 가다」가 1인칭 화자를 주인공으로 같은 배경에서 극단적인 세계 지배로 넘어가며 전환의 충격을 준다면, 「호텔」은 이야기 구조가 그렇게 극단적인 변화를 겪지는 않는다. 이야기는 「호텔」에서 시작해서 A급 플레이어인 딸 시유가 호텔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그 중간에는 시유가 비밀 연애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주인공이 시유와 사귀게 된 D급 플레이어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면서 이 ‘호텔’과 ‘시스템’, ‘관람자’들의 관계, 즉 배경 설정이 드러난다. 이 소설의 재미는 이렇게 독특한 설정을 펼치고, 그 설정 안에서 인물들이 갈등을 겪고 결말을 맺는 부분들에서 생겨난다.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도, 마치 멜로드라마의 재연을 끝나고 난 뒤의 배우들의 삶이 궁금하듯,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멜로드라마를 재연하며 살아가는 소설 속 인물들의 훗날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다.(어떻게 보면 가상의 소설 속 인물들이 또다시 가상의 멜로드라마를 연기하는 것은, 가상 속 가상을 다루면서 메타 소설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앞으로 이 세계는 어떤 식으로 변해갈지, 호텔을 떠난 시유와 D급 플레이어는 개척지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지, 그 삶이 주인공이 생각한 것처럼 시스템이 유도한 또 다른 재연 드라마일지. 우리의 삶은 호텔 속 플레이어들과 많이 다른가, 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의 삶 역시 인류가 수차례 반복한 멜로드라마를 재연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앞의 다른 소설들처럼 일상과 연계되는 지점들이 소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소설 자체의 현실감과 재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과 세금


「죽음과 세금」은 계간 『문학과 사회』에 게재되었던 단편이다. 채승우라는 남자가 자신의 증조부 죽음에 의심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채승우의 생각은 처음에는 단순한 음모론처럼 시작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살이 붙고 진상에 다가간다. 그러나 소설의 화자는 채승우가 아니라 채승우가 진상에 다가가는 단체의 인물이다. 이 소설의 재미는 이렇게 모든 상황을 다 아는 인물이 한 사람을 관찰하는 데서 오는 재미, 또 그러면서 소설 속 세계관을 드러내는 부분에서 재미를 준다.

소설의 세계관은 흥미롭다.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외계 병원균에 감염되어 죽었지만, 므두셀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생존자들은 건강상의 혜택을 입는다.(‘므두셀라’는 969살까지 살았다는 성경 속 인물의 이름이다. SF작가 로버트 A. 하인라인은 SF 연작인 ‘미래사 Future History’ 시리즈에서 22세기에 평균수명 200살이 넘는 신인류 종족을 ‘므두셀라의 아이들’이라고 명명했다.) 므두셀라 바이러스는 놀랍게도 인류에게 젊음과 불사를 부여했다. 90억 넘는 인구가 실질적인 불사신이 된 세계. 한정된 지구라는 공간에서 이 불사는 축복만은 아니다. 정부는 결국 비밀리에 사람들의 수명을 조율하기로 결정한다. 사람들마다 고유의 가치를 통해 수명이 결정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이지만 한편 끔찍한 미래상이기도 하다. 불사신의 세계가 결코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로 그려지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면서도 흥미로운 것이다.



소유권


2002년 출간 된 『태평양 횡단 특급』에 실린 단편 「첼로」에는 텔렉 로봇이 등장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영향을 받은 이 ‘로봇’을 다룬 단편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절대로 완성되지 않을 미완성 픽스업 fix-up 소설의 일부로 씌어졌다.”(309)고 한다. 「소유권」은 텔렉 로봇이 또다시 등장하면서 완성되지 않은 미완성 픽스업 소설의 또 다른 일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첫 문장을 살펴보면 ‘텔렉 로봇’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지 최소 50년은 되었을 거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첼로」 시절부터 역시 최소 50년은 지난 시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첼로」에서 상세하게 나왔던 ‘텔렉 로봇’의 단점들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개량된 로봇이거나 스토리 전개 상 굳이 중복 설명되지 않는 것 같다.)

텔렉 로봇을 소유했던 이가 죽자, 부양품이 된 텔렉 로봇은 분배법에 따라 불법 빈곤자에게 양도된다. 그런 까닭에 한 남자가 여섯 살 소녀 모습의 애완용 텔렉 로봇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남자는 희귀한 텔렉 로봇을 수집가에게 팔아서 그 돈을 가지고 투자를 해 불법 빈곤자 신세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3개월 뒤에 그는 다시 시스템 리스트에 목록이 올리고 공무원인 소설의 화자는 다시 남자를 만나게 된다. 남자는 텔렉 로봇을 팔지 않았다. 그리고 로봇의 공연을 보여준다. 그는 로봇을 스타로 키울 생각인 것이다.

놀랍게도 로봇은 1년여 동안 성공을 하고 기자가 화자를 찾아와 질문을 던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시스템의 대사가 찾아온다. 시스템은 인간 두뇌의 능력을 초월했고, 인간 이해의 가능성을 초월했다. 그런 시스템의 대사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은 여기에서 흥미가 커진다. 지구의 주인, 비물질적인 신경망으로 지구 전체를 독점하고 있는 시스템과 로봇은 과연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일까.

마지막에 이르러서 화자는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사건은 전복되고, 예정된 일들이 벌어진다. 앞서 「호텔」에 등장한 ‘시스템’은 이 소설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실체가 드러난다. 불가사의하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구를 뒤덮고 모든 것을 관조하고 조율하는 존재. 마치 시스템은 신을 은유하는 듯이 읽힐 수 있고, 텔렉 로봇은 마지막에 새로운 기능을 첨가해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부분에서 천사를 직접적으로 비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숭고함, 성스러움, 인간을 초월하고, 우주의 모든 법칙에 통달해 있고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지만 인간들은 결코 시스템의 답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이런 묘사들은 일반적인 신의 개념을 물리적인 기반의 시스템으로 바꿔놓은 것처럼 보여 재미있었다. 소유권을 얻은 것처럼 보인 남자가 사실은 반대로 소유 당했었고, 로봇은 계획대로 자립해서 나간다. 소유권을 휘둘렀던 남자는 시스템의 존재 이유를, 사람들의 소유의 미련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믿어버린다. 그것이 진실일까. 남자가 만들어낸 방어기제일까. 우리는 무엇을 소유하고, 소유할 수 없는 것일까.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이 단편집의 표제작인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계간 문예지인 『자음과 모음』 창간호에 실렸던 작품이다. 2008년 가을 호에 실린 이 단편은 단독적인 작품이 아니라, 픽스업 소설로 기획된 것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방대한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다섯 편의 단편이 묶인 픽스업 소설과, 같은 우주를 다룬 단편들로 쪼개졌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이 이야기들의 도입부에 해당된다. ‘제저벨’이라는 제목으로 묶인 픽스업 소설은 완성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역시 행운을 빌어주시라.”(364)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한 마디로 ‘제저벨’ 픽스업 소설의 도입부이자, 같은 우주를 다룬 단편들의 도입부인 셈이다. 듀나의 링커 바이러스 우주 세계관의 도입부 격인 단편으로 그러한 특성이 작품을 읽어보면 잘 나타나 있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어떻게 인류가 초월적인 과학 기술의 발전 없이 우주 너머로 퍼지게 되었는지, 그로 인해 어떤 우주가 펼쳐졌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 단편을 읽지 않고는 같은 우주를 다룬 작품들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낯선 용어들조차 이 단편에서 자세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이름들은 기본적으로 숙지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듀나의 링커 우주에서는 이 용어들이 아무런 설명없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단어처럼 자연스럽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지상종


기네스(타입 A) - 건설과 제조를 담당

웨인(타입 B) - 주변의 사물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죽였으며 그 잔해들을 기네스에게 재료로 전달.

쿠퍼(타입 C) - 신중한 성격의 군인으로 수동적인 방어에만 몰두

올리비에(타입 D) - 건물형 구조물. 기네스가 웨인과 쿠퍼의 도움을 받아 만드는 구조물.


우주선


가르보(타입 A) - 거대 우주선

아자니(타입 B) - 물고기 모양. 가르보와 행성을 연결하는 셔틀선. 타입 C인 드뇌브를 품고 있다. 아자니가 떨어뜨린 지상종이 정착하면 행성의 궤도에 정거장이 생겨나는데 그 정거장이 타입 D인 ‘디트리히.’

드뇌브(타입 C) - 카르티에 브로치처럼 생긴 작은 비행체. 주로 정보 수집이나 작은 물건들을 채취하는 역할.

디트리히(타입 D) - 지상종이 정착하면 행성 궤도에 생겨나는 정거장.


소설 속 웬디 홉스는 카메라가 달린 단순한 로봇을 만들어 ‘아자니’(타입 B)에 태운다. 아자니는 이틀 뒤에 돌아왔고 화성의 올림푸스 화산에 건설 중인 침략자들의 식민지 사진을 담아온다. 700유로의 푼돈으로 화성 여행이 성공한 것이다. 그 뒤로 지구인들은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아갔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청수가 여자친구인 연아에게 차인 종로 버거킹 2층의 회상부터 시작한다. 소설의 현재 시점은 청수가 이미 우주의 낯선 행성에서 생존을 위협받는 때이다. 막 우주로 진출하는 시점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다. 일단, 등장인물이 한국인이 나온다는 것, 낯선 행성에서 청수가 보게 되는 버려진 버스에는 ‘희망교회 외계 선교 사역단 2011’ 같은 글자가 자체에 새겨져 있다는 것. 그리고 주요 갈등인 북한 사람을 마주치게 되는 것 등이다. 그러면서 소설은 자연스럽게 북한에서 일어났던 외계 바이러스의 전염과 이후 세계 각국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리고 그 외계 바이러스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설명한다. 북한을 멸망으로 몰고 간 질병은 ‘링커’(linker)라는 별명이 붙은 범우주 바이러스 네트워크의 환경 통합 과정이었던 것이다. 북한인이 고립된 채로 시행착오를 일으키며 죽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은 별다른 피해 없이 링커와 공생할 수 있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공산주의 국가를 설정과 결합해서 자연스럽게 인류가 범우주 바이러스 네트워크 환경 통합 과정을 겪었는지를 설정하고 설명한 것이다. 소설은 이후 북한인 진호의 시점에서 진행되다가 브로콜리 평원에서 혈투를 보여주며 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작가가 설정한 새로운 우주관을 설명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진행하며 필요할 때마다 적절히 설명을 한다. 새로운 우주관의 재미와 이야기 자체에서 오는 재미가 잘 어우러져 있는 작품이다. 즉 여러모로 균형을 잘 잡은 소설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이야기를 비극적으로 잘 끝맺을 뿐만 아니라 무수한 세월을 거치면서 모든 게 잊히고 사라져 새로운 생명체로 뒤덮인 행성으로 변이하는 것은 씁쓸한 감정과 경이로움을 함께 느끼게 만든다.




여우골


“세조 시절 의주에 이생이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어릴 때부터 성품이 곧고 이치에 밝아 주변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으나, 때가 옳지 않아 과거를 보지 못하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단편. 보다시피, 설화처럼 이야기가 진행되며, 문체도 그에 어울리게 쓰인 단편이다. 이야기는 제목에 나온 ‘여우골’에 가게 된 사람을 다룬다. 작가는 자기 식으로 쓴 「요새지이」 단편이라고 밝혔다. 장르 문화 잡지 『판타스틱』 2007년 8월호에서 처음 읽었던 글로, 당시에도 흡인력 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전설의 고향’을 보는 듯하면서도, 인간 거죽을 뒤집어쓰는 묘사에서 기괴한 분위기가 영상보다 짙다. 여우들의 존재가 태고적 괴물처럼 서술된 부분이 인상적인 단편. 전체적으로 암울한 이야기이며, 결말은 씁쓸한 느낌이 크다.



정원사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하이텔 시절의 쓴 단편이라고 한다. 편하게 읽어내려 갈 수 있는 단편이었다. 주로 대화로 이루어진 단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교수와 젊은 여자 연구원의 티격태격 다투는 대화가 글에 활기를 불어넣고 꽤 재미있었기 때문에 가독성이 높은 글이었다. 폐쇄된 스페이스 콜로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돌연변이 식물이 발견된다. 교수는 항성 간 통신으로 연구원과 대화를 나누며 식물의 정체를 밝히려고 한다. 사건의 전말은 의외이거나 대단한 것은 아니다. 소품 같은 글이지만, 하이텔 시절 단편이라는 점에서 오는 다른 소설들과의 이질감 때문에 돋보이는 글이다.



성녀, 걷다


맨 앞에 실린 「동전마술」과 마찬가지로 『대산문화』(2005년 여름호)에 실렸던 엽편이다. 이 글 역시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인상에 오래 남았다. 유럽의 어느 마을에 ‘성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걷고 있다. 이것이 마법이라면 환상소설이고, 외계 기술이 들어갔다면 과학소설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글에서는 이 동상이 걷는 원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 동상의 신비로움이 부각되고, 글에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동상은 아주 느리게 걷는다. 그렇기 때문에 흥미롭다. 글에서 ‘성녀는 산책 중’이라는 경고문이 쓰인 안내판이 있다고 하고, 록 스타를 둘러싼 팬들처럼 ‘사랑해요!’나 ‘내 이름은 아무개예요!’라고 쓰인 플래카드들이 세워져 있다는 표현도 입가에 미소를 띄게 만들고 그 풍경을 생각해보면 동화적이고 따스한 느낌을 받는다. 이 글에서 묘사되는 이미지들은 다 강렬하고 아름답다.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도 이 글의 매력이다. 성녀는 도시 밖에서 481년을 보냈으나,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성녀의 관점에서 보면 한 달은 1초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성녀에게는 한 시간 반 정도 밖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녀의 관점에서는 481년을 한 시간 반으로 보낼 테니 주위 사물은 순식간에 깜빡이며 형태를 바꾸는 기괴한 모습일 것이다. 글에서 던지는 여러 의문들, 성녀는 1시간 반 동안 인간의 존재를 인식했을지, 또 다른 동료를 원할지. 이런 시간의 흐름이 다른 존재에 대한 사유는 여러모로 재미있다. ‘성녀’ 같은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인간보다 시간의 흐름이 몇 천 배 느린 외계인과 인간보다 시간의 흐름이 몇 천 배 빠른 외계인이 있다면 어떻게 소통을 할 수 있을까. 이미 이 우주에는 그런 존재들이 많으나 서로를 인지하지조차 못하는 것인지.



안개 바다


이 단편은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서 시작을 다룬 링커 우주 배경으로 쓰인 신작 단편이다. 이 단편집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단편이기 때문에 더욱 반갑게 읽게 된다. 앞서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 대한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링커 우주를 배경으로 한 다섯 편의 ‘제저벨’ 픽스업 소설과 같은 우주를 다룬 단편들로 쪼개졌다고 말했다. 이 단편은 바로 같은 링커 우주를 다룬 단편에 해당된다.

이 책에 없는 ‘제저벨’ 픽스업 소설은 계간 『자음과 모음』에 세 편이 실려 있다. 『자음과 모음』 2008년 겨울호에 「제저벨-로즈 셀라비」2009년 봄호와 여름호에 「제저벨-시드니」가 상, 하로 나뉘어 수록되었고, 가을호에는 「제저벨-레벤튼」이 실렸다. 세 편의 단편 모두 많은 분량과 흥미로운 플롯으로 충분한 재미를 충족시키는 글이다. 그렇기 떄문에 완성된 ‘제저벨’ 픽스업 소설이 기대되는 것은 당연하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를 비롯해서 제저벨 연작들, 그리고 「안개 바다」까지 소설 구성상, 배경을 설명하는 파트와 본격적인 이야기 파트가 나뉘어 있다. 그것은 링커 우주를 배경으로 한 단편의 특성으로 보이는데, 링커 우주의 특성상 행성의 생물들은 모두 복잡한 진화 과정을 겪기 때문이다. 즉, 일반적인 지구와는 전혀 다른 모습과 상황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고, 독자에게 본격적인 이야기를 보여주기 앞서, 먼저 배경을 길게 설명해야 할 까닭이 필요한 것이다. 설명이 노골적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이야기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면도 있지만, 링커 바이러스를 통한 다양한 행성의 환경과 생물들의 모습 등은 그 자체로도 매우 흥미롭기 때문에 특별히 지루하다는 느낌은 받지 않는다. 또한, 설명이 끝난 뒤에 독특한 배경 위로 펼쳐지는 이야기 역시 속도감 있게 진행되기 때문에 흡인력이 대부분 높다.

이 단편집에 실린 두 편의 링커 우주 단편 말고도, 제저벨 픽스업 소설 등 듀나의 독자적인 우주관인 링커 우주는 아주 다채로운 세계이다. ‘유전자의 난교’라는 표현이 들어갈 정도로 수많은 유전자들이 섞이고 다양하게 폭주하듯이 진화하는 우주의 모습은 마치 수백 가지 형태와 색깔의 꽃들이 일제히 피어나는 광경을 목격하는 듯하다. 각각의 글을 읽을 때마다 유전자가 마구 날뛰고 변화 중인 세계의 모습이 소설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 뒤에 인물들의 이야기 역시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처럼 숨가쁘게 진행되곤 한다.

이 단편 역시 처음에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행성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었는지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환갑을 넘긴 노인들이 해안에 마을을 만든다. 그리고 다들 여러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는데, ‘마티아스 볼츠만’은 혼자 살아남는다. 링커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그는 늙지 않고 오히려 더 젊어지고 건강해지기까지 한다. 200년이 흐르고 그가 정착했던 ‘한스카’는 이제 400만이 넘는 개들이 두 발로 걸으며 독일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링커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진화한 개들은 볼츠만의 영향을 받아 두 발로 걷고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갖고 있는 행성에 애견가인 ‘마마 케펠’은 길잡이를 고용해서 도착하고 8개월 동안 머물다가 돌연 죽음을 맞는다. 길잡이는 이제 행성을 떠나려고 하는데 시장의 부탁을 받게 된다. 배경 설명이 끝나고 본격적인 모험으로 이야기는 전환된다. 소설은 인물명이나 과학선에 번호를 매기며 장이 나누어져 있다.

이야기는 시간 순서대로 차분하게 전개되는 편이다. 여러 인물들이 나오지만 주요 사건은 간결한 편이고, 중요 인물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많이 복잡하지 않다. 개들이 걷고 말하는 문명이 있는 한스카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세계관이었고, 후반부에 터지는 사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도 강렬하고 스릴도 있어서 흡인력 있게 읽었다.

프롤로그 격인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 이어 본격적으로 링커 우주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단편 같았다.




디북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문학 장르소설 코너에 실린 단편이다. 첫 번째 실린 글이기도 했다. 또한, 작년에 황금가지에서 게재한 단편들만 묶은 『오늘의 장르문학』에도 동일하게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 가상현실을 배경으로 한 단편이다. 가상현실 속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고, 그것을 추적하다가 마침내 놀라운 진실과 맞닥뜨리게 되는 단편이다. 가상현실에서 인간들의 세계가 끝나는 현상까지 치닫는데, 그 속도감이 뛰어나고 드러나는 진실이 충격적이다. 『용의 이』에 실렸던 단편들처럼 세계가 전복되고 몰락하는 이야기다. 작가의 탈인간중심주의 소설의 사례 중 하나로 보였다. 네이버에 올라왔을 때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책으로 읽어도 다시금 강한 충격을 받는 글이었다.



감상을 마치며



시스템에 저항하지 못하고 좌절한 남자들의 이야기


작품이 집필된 시기가 각각 다른데도 불구하고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대로 “수록된 글들의 과반수는 전에도 언급한 적 있는 소위 ‘좌절한 남자들’이야기다. 도대체 왜 내가 이들을 그렇게 자주 등장시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361) 이 단편집에는 공통된 특성이 몇 개 엿보인다. 그 중 하나는 남자 화자가 많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전의 단편들과 비교하면 특히 비율이 높다. 꼭 화자가 아니더라도 관찰 받는 대상이 남자인 경우가 전체적으로 많으며, 그들은 모두 약자고 좌절을 맞게 된다. 이는 반대로 다른 단편들에서 여성이 주체가 될 경우 세계를 멸망시키거나 전복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상기하면 흥미로운 대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좌절’하는 요소인데 바로 주인공을 둘러싼 ‘시스템’이다.(꼭 ‘시스템’이 아니라 「죽음과 세금」의 정부, 「정원사」의 컴퓨터, 「안개 바다」의 링커 바이러스, 「디북」의 우리 등도 마찬가지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인물들은 ‘시스템’에 저항하거나 세계를 전복시키거나 몰락시키는 대신 체념하고 받아들이며 좌절하는 경우가 눈에 띈다. 여기서 ‘시스템’은 굉장히 많은 상징을 가질 수 있다. 종교적인 신, 우리를 둘러싼 제도,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등 있는 그대로 미래를 그린 사고 실험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읽고 해석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는 것은 좋은 작품의 미덕 중 하나이다. 작품이 단순할수록 독자는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어진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단편들은 분량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유를 하게 만든다. 이야기의 재미뿐만 아니라 여러 생각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다.



여전히 유지되는 듀나의 냉정한 시선


이렇게 다른 점이 있다면 또한, 여전히 이전 단편들과 같은 점도 많이 있다. 특히, 듀나 작품 전반에 걸쳐 볼 수 있는 탈인간중심주의, 냉정함 등이다.


“그런데 혹,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이 작가가 참으로 냉정하구나’라고 느끼신 독자가 있다면, 어느 정도는 정확하게 본 셈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영수의 글에는 감상주의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다.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가 ‘냉정’을 넘어 인간과 세계에 대해 ‘냉소’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심을 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작가들이 ‘감정의 과잉’으로 좋은 글을 망치는 것을 보아온 필자로서는 이영수의 ‘냉정’을 긍정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영수는 인간과 세계를 ‘직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아이디 DJUNA를 사용하여 한 영화잡지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들을 관심있께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동의하리라. 그는 세계의 부조리한 모순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끈질기게, 그리고 ‘냉소’가 아닌 ‘냉정’을 유지하며 예리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 『나비전쟁』, 추천사-「이영수, 기발하고 치밀한 이야기꾼」, 곽동훈, 오늘예감, 1997년


14년 전 출간된 듀나의 단편집 『나비전쟁』에 실린 추천사에도 역시 듀나의 냉정함을 언급하듯이 듀나 작품 세계 전반에 보이는 건조하고 차가운 시선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다른 작가들과 차별되는 매력적인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SF 특유의 감성과 함께 결합되어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듀나는 인간 중심주의적 속박에서 탈피함으로써 암울하지 않고 비극적이지도 않은 인간의 몰락을 그려보일 수 있었다. 기계 문명을 자연과 우주의 거대한 변전 속에서 파악하는 듀나의 소설은 냉정한 어조로 SF적 상상력의 폭을 확장한다.”

― 『태평양 횡단 특급』, 해설-「인간과 기계」, 김태환, 문학과지성사, 2002년



인간의 몰락을 넘어 무한한 우주의 진화에 뛰어든 인류의 모습


『면세구역』, 『태평양 횡단 특급』, 『대리전』 까지만 해도 주로 지구를 배경으로 한 단편의 비중이 높았고, 표제작 역시 그러한 성향의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용의 이』에서는 작가가 완전히 낯선 행성을 무대로 삼더니,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서는 링커 우주라는 무한한 행성과 은하로 독자를 초대한다. 링커 우주는 이제는 지구와 인간의 몰락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더욱 넓혀 온 은하까지 바라본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링커 바이러스를 통해 인류를 온 은하에 펼쳐 놓았다. 이제 작가는 각각의 행성에 초점을 맞춰 관찰하고 그 결과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지구로 한정해 놓았던 작가의 실험장을 은하로 넓힌 것이다. 크기를 측정할 수 없는 거대한 놀이터다. 또한, 진화라는 메커니즘을 결합시켜 독자가 예측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자유자재로 갖고 놀 수 있는 범우주적인 장난감을 선보인 셈이다. 이전에 「펜타곤」이나 「첼로」 같이 픽스업을 염두에 두었지만 집필되지 않았던 글들과 달리 본격적으로 이미 세 편의 단편이 완성되어 있는 링커 우주의 「제저벨」 시리즈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제저벨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나올 링커 우주를 배경으로 한 단편들도 얼마나 낯선 행성과 폭발적으로 진화된 생물을 가지고 역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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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2-08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듀냐책이 나왔네요.혹 이전 단편집과 겹치는 것이 있나요?

twinpix 2011-02-09 01:44   좋아요 0 | URL
듀나의 개인 단편집과 겹치는 단편은 없어요.^^/ 네이버에 올라왔고 최근 출간된 공동 단편집 [오늘의 장르문학]에 실린 단편 {디북}만 여기에도 실려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