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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성자 프란체스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오상빈 옮김 / 애플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위대한 성자, 프란체스코
니코스 가잔차키스가 쓴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창피하게도 프란체스코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의 성당 이름으로 또 성인의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 그의 생애라든지, 그가 살아온 방식이나 그가 행한 말들, 그가 행한 일들에 대해서 도무지 아는 것이 없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한동안 그런 무지가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다. 이 책 덕분에 나는 이 지구를 살아간 한 성인에 삶에 대해서 피부에 와닿듯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이 책은 한 성인에 대해서, 또 한 인간에 대해서 세세하고 차분하게 다루고 있다. 소상하게 적힌 일화들이 때론 너무 환상적이어서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가 한 말과 행동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은 이 글에 더욱 빨려들어가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작가가 “나는 진리 그 자체보다도 더 진실된 이 전설을 쓰면서 영웅이자 위대한 순교자인 프란체스코를 향한 경외심과 사랑에 압도당했고, 때로는 경탄에 빠지기까지 하였다.”(7쪽)고 고백하는 것처럼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위대한 순교자에게 경외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투쟁하고 가난과 결혼한 이 성인의 모습에서 삶과 진리, 신앙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프란체스코의 전기이면서도 지루하고 딱딱하지 않다. 이것은 예술로 승화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인 기록을 그대로 서술한 것이 아니고 작가가 임의대로 재구성한 부분이 있는 소설이다. 그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지 않고 긴 분량에도 꽤 흥미롭게 읽어나가고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성인에 대해서 이렇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소설 형태로 훌륭하게 소화해낸 작가의 능숙한 솜씨 덕분일 것이다.
이 책은 아시시의 도성 안에서 레오 형제와 프란체스코 신부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프란체스코가 단지 위대한 성자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 처음 프란체스코의 모습은 놀라운 것이었다. 부유한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여자가 살고 있는 창가 아래에서 노래나 불러대는 한량이었다니! 그러나 그는 레오 형제를 만나서 변하게 되고 20세에 회개하여 모든 재산을 버리고 평생을 청빈하게 살게 된다.
“우리 기독교의 최대의 힘은 전형적인 윤리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덕목 안에 도사린 부정, 오만, 악의, 불명예를 완전히 뒤바꿔놓으려는 피땀 어린 투쟁에 있는 것이오. 언젠가는 루시퍼(사탄)야말로 하느님의 오른쪽 자리에 서게 될 가장 영광스런 천사가 될 것이오. 미카엘이나, 가브리엘, 라파엘이 아니라 마침내 루시퍼가 그 무시무시한 암흑을 빛으로 바꿔놓으며 제일의 천사가 될 것이오.”(30쪽)
처음에 프란체스코가 하는 말은 정말 본문 그대로 유려했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시퍼야 말로 하느님 오른쪽 자리에 서게 될 것이라는 대담하면서도 강렬한 말이 이 책의 흥미를 돋구고 프란체스코라는 성인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죄인에게도 구원의 희망이 주어질 수 있다. 그것은 루시퍼(사탄)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타락한 천사라 할지라도 그것이 오히려 하느님에게 올라갈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는 말이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주님, 당신의 모습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빵 뒤에도, 입맞춤 뒤에도, 갈증과 굶주림, 그리고 숨결 뒤에도 숨어 있습니다. 오 주님, 제가 어떻게 당신을 피하여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142쪽)
프란체스코는 회개한 뒤에도 끊임없이 번민한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도, 기적을 체험해도 마찬가지다. 이런 부분이 성인은 인간적으로 보게 했고, 소설의 갈등 요소로 작용하여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계속 읽게 만들었다. 또한, 평범한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성인의 심리를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기도 하였다. 끈임없이 책임과 의무에서 도망가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심리 중 하나이다. 그것이 또한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고 있다면 더욱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고민하고 주저하면서도 결국 신념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어디에나 하나님이 있다는 깨달음 속에서 도망가지 않고 숨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경이롭게까지 느껴진다. 이 소설은 이런 감동으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이 소설에서도 하느님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는 그것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겐 언제나 절제라는 테두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 테두리 바깥에 계십니다. 저는 하느님 쪽으로 다가가고 있어요, 주교님.”(155쪽)
이 소설에서는 가끔씩 머리를 툭치는 경탄스러운 문장이나 구절들이 나온다. 위의 문장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에게는 절제라는 테두리가 있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윤리나 의무 등 모든 것에 바깥에 있다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새삼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 문장은 결국 이 소설 전반에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문장이기도 하다. 프란체스코가 행한 많은 일들이 인간의 시선으로 볼 때는 기이하고 잘못된 것들이 많다. 즉, 절제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난 윤리적이지 못한 행위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의 시선이다. 인간의 시선을 벗어나 하느님의 시선으로 봤을 때, 프란체스코는 분명 하느님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레오 형제도 물론 알고 있다시피 하느님은 언제나 옳아요. 지금까지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의 작은 문제만, 우리의 작은 영혼에만 신경을 써왔지요. 우리가 걱정하던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느님께 구원을 받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결단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영혼도 구제하기 위해 투쟁해야 해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버려두고 어떻게 우리 자신을 구원하겠어요? 레오 형제, 당신도 똑똑히 들었지요? ‘앞으로 가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설교하라!’고 말이에요.”(228쪽)
하느님이 언제나 옳다는 부분부터 강렬하게 다가왔다. 말 그대로 하느님은 언제나 옳다. 이 단순한 진리가 이 책에서는 왜 이렇게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그건 프란체스코의 생애가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비틀리고 잘못된 행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고통이 따르고 있고 지나치게 가혹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하느님은 언제나 옳다. 그렇기 때문에 프란체스코의 생애도, 그를 따른 사람들의 생애도 언제나 옳다. 이것이 진리다.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영혼에 구제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위의 대사처럼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투쟁을 했다. 거리에서 돌을 맞으며 설교를 했고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수도회를 만들었다. 그의 유지는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주여, 제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당신을 사랑한다면 반월도를 손에 쥔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시어 천국의 문을 제 앞에서 모두 닫아버리십시오. 그리고 제가 지옥이 두려워서 당신을 사랑한다면, 영원한 지옥의 불길 속으로 저를 던져버리십시오. 그러나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면,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당신의 팔을 벌려 저를 맞아주십시오.”(250쪽)
이토록 진실된 구애가 있을 수 있을까. 프란체스코의 기도는 내 가슴에 깊이 남았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 영생을 바라고서, 지옥이 두려워서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있다. 진심으로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에 신앙을 가진 척 위장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어린이가 달콤한 사탕을 바라듯이, 무서운 형벌을 피하려는 듯이 무언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것이다. 실로 유치한 마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단순하고 이성적인 생각으로 교회를 다니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진실된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참된 신앙이다. 무엇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에 믿는 것이 진실된 믿음이다. 이 책에서는 그런 주장을 이렇게 직접적인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 하느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지금 이 순간 저는 사탄도 가련히 여겨집니다.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불행하고 가엾은 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한때 하느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당신을 부인하고 당신 곁을 떠나 위로받을 곳 없이 허공을 헤매고 있습니다. 자매들이여, 그가 어찌하여 위안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이 그에게 천국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달콤한 추억을 그대로 회상할 수 있는 그가 어떤 식으로 위안을 받겠습니까? 우리는 그 사탄을 위해서도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우리의 한없이 너그러우신 주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셔서 그가 돌아와 대천사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도록 우리가 기도를 올립시다.
사랑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여자에게 주어진 위대한 역할입니다. 사탄은 피에 굶주린 추악한 짐승이지만 그의 입에 입맞춤을 해준다면 그는 대천사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완전한 사랑입니다!”(489쪽)
사탄조차도 가련하게 여기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프란체스코는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불행하고 가엾은 자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이 얼마나 대단하게 느껴지던지. 또한 사탄에게조차도 입맞춤을 해줘야 한다고, 그것이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이나, 죄를 많이 지은 사람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사랑’이라는 말이 그런 비유를 통해 실감나게 다가온다. 그는 참으로 예수처럼 많은 비유를 사용했고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말들이 쉽게 이해가 갔다. 실천하기는 어려운 말들과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들이 많았고 무의식 중에 내 안에 깃들어서 체화되는 것들도 많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고행이 나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것 같았고, 내 영혼이 씻겨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형제들이여, 앞으로 전진하십시오. 나의 축복과 함께 앞으로 나가십시오. 형제들에게 말솜씨가 있다면 말로 설교하십시오. 그렇지만 되도록 형제들의 목숨과 행동으로 설교하십시오. 말보다 고귀한 것은 행동입니다. 그러면 행동보다 높이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침묵입니다. 나의 형제여, 하느님께 이르는 모든 계단을 끝까지 오르시길 바랍니다. 말로써 행동으로써 설교하고, 혼자가 될 때는 주님이 계시는 성스러운 침묵 안으로 들어가십시오.”(518쪽)
말보다 고귀한 것이 행동이라는 말에 절실히 공감이 갔다. 지금 세상에 단순한 말로 설교를 하거나 전도를 하려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역시 말보다 고귀한 것은 행동이다. 목숨과 행동으로 하는 설교를 보고 싶다. 또한 침묵의 중요성, 하느님과 자신이 일대일로 만나 침묵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프란체스코는 바위 위에서 한 뼘 정도의 높이로 허공에 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두 팔을 십자가처럼 올린 채로 조용하고도 기묘하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가 날아가버리면 큰일이라는 생각네 나는 전속력으로 바위에 올라가 그의 옷깃이라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조금 전처럼 조용하고 기묘하게 바위 위로 내려와 앉았다.(590~591쪽)
레오 형제는 천국도 지옥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끔찍한 꿈을 꾸고 깨어난다. 그 뒤에 보게 되는 것은 프란체스코가 공중 부양을 하는 모습이었다. 성인들은 많은 기적들을 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프란체스코 성인이 가장 유명한 것은 예수님이 입은 다섯 곳의 성흔이 나타난 것이지만, 나는 그 전에 이 부분에서도 꽤 신기하면서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 전에 겪은 신비한 체험들 역시 인상적이었지만, 이 부분은 특히 영상적으로 이미지가 제대로 그려져서 재미있었던 것이다. 레오 형제는 프란체스코가 하늘로 오르는 환상을 증표라고 생각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언젠가 내가 이야기한 적이 있지요. ‘절대로’나 ‘언제나’라는 말은 하느님의 말이라고. 그 말은 그분만이 하실 수가 있어요……. 자, 이제 가보십시오. 하느님의 얼니 양,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자칫하면 늑대에게 통째로 잡혀먹힐 뻔했으니!”(594쪽)
‘절대로’나 ‘언제나’가 하느님의 말이라는 것이 인상깊게 다가왔다. 우리는 수시로 ‘절대로’나 ‘언제나’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만이 허용된 말이고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말이라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오는 것이다. 인간에게 ‘절대로’라는 말이 얼마나 무의미한가. 나 역시 함부로 ‘절대로’라는 말을 남용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처럼 이 소설 전반에는 삶의 태도를 바꿔놓을만한 문장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면 성스러운 무지는?”
“프란체스코 형제, 그것도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새로이 학교를 열었답니다. 어떤 형제는 볼로냐로 가고 어떤 형제는 파리로 가서 벼룩에게 신발을 신길 수 있을 정도의 학문을 쌓고 있지요. 그들은 두꺼운 책들을 사 모으고 교단에 올라가서는 오랜 시간을 강의하죠. 그들은 예수가 심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과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갖은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이야기가 너무나 장황해서 그들이 하는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지곤 하죠. 박식한 사람이 입을 열고 지껄이기 시작하는 날은 예수게써 부활했던 마지막 날이 되는 것이죠.”(599쪽)
프란체스코의 형제들은 이후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수도원에서 처음에 내세웠던 성스러운 가난, 성스러운 사랑, 성스러운 무지는 모두 죽었다. 모두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었는데 특히 인상깊은 부분은 성스러운 무지였다. 믿음과 이론은 전혀 다른 것이다. 믿음은 순수하게 믿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때론 이론으로 믿음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종교는 결코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과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갖가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말처럼, 지금의 종교는 때로 종교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애쓴다. 창조과학을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려고 한다. 그런 것들은 모두 무의미한 짓이다. 과학을 부정하고 억지로 성경 내용을 새로운 가설로 끼워맞추려 노력하기보다는 순수하게 믿으려는 노력을 우선시 해야 할 것이 당연하다. 종교는 과학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다. 따라서 억지로 설명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 시대에 더욱 성스러운 무지가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성스러운 가난과 성스러운 사랑 역시 필요하다. 이 책이 소설로 계속 한국에 번역되고 세계에 널리 퍼지는 것 역시 그러한 필요성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훌륭한 소설인 동시에 훌륭한 신앙서이기도 하다. 위대한 성인의 기록이기도 하며 믿음에 대해 진실되게 가르쳐주는 책이기도 한 것이다.
“그분은 이곳에서 뼈를 묻으셔야 합니다. 그가 우리 마을의 죄를 씻고 하느님께서 축복을 내리시게 할 것입니다.”(618쪽)
이후 프란체스코에게 성흔이 나타나고 피를 흘리고 죽어갈 때 사람들은 그를 애도하기 보다는 그의 육체를 탐낸다. 이 부분에서 섬뜩하기까지 했다. 아니,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의 살점과 뼈를 얻어낼 생각만 하다니. 이런 이기적인 사람들이 다 있을까. 그러면서도 오직 성인만을 원망하며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사에서는 정말 욕지기가 치밀 정도로 분노가 치솟기도 했다. 어쩌면 인간은 이렇게 악랄하고 탐욕스러울 수 있는지 경악스러웠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성인이 물건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절망을 느끼게 했다.
주님, 당신은 거룩하십니다. 당신은 신 중의 신이시며 당신만이 기적을 보이십니다.
당신은 누구보다 강하시며, 누구보다 위대하시며, 누구보다 높으십니다.
당신은 선입니다. 모든 선입니다. 제일 드높은 선입니다.
당신은 사랑입니다. 지혜와 겸손입니다. 그리고 가장 쓴 인내입니다.
당신은 아름다움이며, 확신이며, 평화며, 기쁨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의 정의요, 우리의 모든 보물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보호자이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방어해주십니다.
당신은 우리 영혼의 거룩한 위안입니다.(622쪽)
프란체스코의 기도문이다. 당신만이 기적을 보인다는 말에도 역시 공감이 갔다. 글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찬사의 글이다. 가슴이 뛸 정도로 멋졌다. 프란체스코는 이 책을 읽고 찾아본 백과사전에서 보면 ‘신의 음유시인’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만큼 ‘태양의 찬가’등을 비롯한 뛰어난 시를 남겼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이 책 곳곳에서 프란체스코의 대사들은 빛이 났고 그가 남긴 글과 기도문은 하나같이 명문이었다.
“형제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그러자 농부들은 모두 제정신을 잃고 거룩한 아기 예수를 만져보려고 다투듯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푸른 광채가 갑자기 사라지며 구유엔 다시금 어둠이 덮쳐왔다. 그와 함께 프란체스코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기를 안고 사라져버렸다.(640쪽)
프란체스코가 죽어가면서 크리스마스에 예수의 탄생을 다시 재현하는 부분은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프란체스코가 기뻐하는 감정이 텍스트 너머 나에게까지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에 프란체스코가 홀연히 사라지는 모습까지도 놀라우면서 인상적이었다.
“하느님의 작은 사자여, 그렇게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래요. 인간의 오만은 한도 끝도 없지요. 그렇지만 인간의 심장은 하느님이 만드신 거랍니다. 어쩌면 그분은 인간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실지도 모릅니다. 당신에게 대항해주기를 스스로 원하셨던 거예요!”(662쪽)
프란체스코가 앞서 말한 우화에 대해서 레오형제에게 묻고, 레오 형제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프란체스코가 한 말이 바로 저것이다. 인간의 심장은 오만하게 하느님에게 계속 울어댄다고 말한다. 즉, 인간의 오만은 정말로 끝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참으로 오만하다. 바벨탑을 만들고 신에 도전할 정도로 오만하다. 신을 믿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 정도로 오만하다. 그러나 그 오만한 심장조차 하느님이 만든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었다. 하느님은 인간이 그렇게 하기를 원한 것이다. 당신에게 대항해 주기를 스스로 원했다니. 새로운 생각이었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심장을 인간의 자유의지로 대치하면 맞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은 스스로 하느님을 믿을지 안 믿을지 선택하라는 하느님의 뜻이었다. 원래부터 믿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믿는 자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생각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사유를 하게 된 원인이었다.
“레오 형제, 나는 지금 기뻐요. 내가 세상에서 태어나던 날부터 나의 몸 안엔 하느님을 증오하는 자가 있었지요. 그런데 이젠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자가 사라졌으니 말이죠.”
“프란체스코 신부님, 그자가 누굽니까?”
“육체랍니다.”(671쪽)
이 부분도 정말 인상적으로 읽었다. 프란체스코는 살아가면서 계속 육체와의 싸움을 벌였다. 육체가 가진 기본적인 욕망들을 무시하며 육체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쾌락을 배제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산 것이다. 식욕, 수면욕, 성욕 등을 멀리하려고 애쓴 그의 고행은 때로는 공감이 가면서도 때로는 너무 끔찍해서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에게 육체란 벗어던지고 싶은 굴레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위와 같은 대화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사고 방식이지만 그가 육체를 버리면서까지 하느님에게 다가가려고 했던 노력과 신앙심만큼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직자입니다. 언제나 겸손해야 하며 순백해야 하며 여러분과 화평하게 지내야 합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쉽게 화를 내왔습니다. 부디 나를 용서해주십시오!”(688쪽)
프란체스코가 화를 내는 부분은 이 책 전체에서 찾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며 항상 자기 반성을 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프란체스코보다 지금 이 땅에 수많은 성직자들이 이 구절을 읽고 자신을 되돌아봐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겸손하지 않고 쉽게 화를 내는 성직자들이 세상에 많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처음에 그것은 차라리 고통이었습니다. 나는 원래 문둥이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나를 문둥이들 틈에 집어던지시고 그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옷을 벗겨서 상처를 씻어주라고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시에 따르니 세상이 바뀐 것을 깨달았습니다.”(694쪽)
이 책은 전반적으로 앞서 읽었던 『울림』(시작)에 나온 분들이 떠오르는 장면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울림』에서도 프란체스코 성자의 언급이 있었다. 특히 문둥이를 먼저 껴안고 씻어주는 장면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럼으로 인해 사람이 바뀌는 점 역시 유사했고 또한 감동적이었다. 누가 문둥이에게 입을 맞출 수 있을까. 더군다나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던 사람인데.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그것은 결코 무언가 때문이 아니고 자기자신 때문도 아닌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삶이었다. 그의 고행들이 때로는 눈살이 찌푸려지고 답답할 때도 많았지만, 책을 다 덮고 나서는 그런 고행을 스스로 알아서 해나간 프란체스코의 진솔함이 느껴졌다.
“대체 어떤 것이 사랑일까요? 그것은 단순한 동정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절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동정심은 두 사람이 있어야 발휘되죠.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어야 동정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게 아닙니까. 친절에도 두 사람이 있어야 하죠.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이렇게 두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두 사람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너와 나라는 말은 필요가 없죠.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속으로 던져버리는 것입니다.”(705~706쪽)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것. 단순하면서도 또한 글로 읽으면서 역시 뒤통수를 내리치는 듯한 충격을 주는 문장이었다. 당연하지만, 당연하게 생각되지 않는 것이었다. 너와 나라는 말이 필요없는 것.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 또한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속으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나올리 없고, 동정심 같은 것이 발휘될 여지도 없다. 이 책에는 이렇게 보석같은 문장들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특히 위의 문장은 사랑에 관해서 가장 적절한 정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란체스코가 평생을 통해 추구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하느님 속으로 던져버리는 행위였다. 인간의 규칙과 규범을 넘어서서 하느님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그토록 먹는 것을 절제하고 스스로 고행을 자처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고통스럽고 끔찍했지만 하느님의 눈으로는 보기 좋았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나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프란체스코는 나중에 육신조차도 걸리적 거려 했을 것이다. 사랑에는 오직 한 사람뿐. 완전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 이 책의 내용을 태반을 잊어버리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속에 오래오래 남을 것만 같다.
프란체스코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먼저 감히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것이다. 역시 성자라는 말 그대로 그는 인간을 초월한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그거 겪은 기적들 역시 보통 사람이 체험하기 힘든 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텍스트로 읽는 재미가 있었으며 많은 것을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요즘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렇게 극도로 청빈한 삶을 산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줄 것 같았다. 나 역시도 너무 물질만능주의에 경도된 것이 아닌가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그가 스스로 고난을 자처하며 모든 욕심을 버리는 부분에서도 많은 감명을 느꼈다. 성인의 행적은 그 삶만으로도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다. 글자로 읽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장면 하나하나가 그대로 머릿속에 떠올랐고, 때론 눈시울 적시게 만들만큼 처절한 장면도 많았다. 분량에 상관없이 읽으면서 계속 프란체스코의 행동들을 보며 안타까움과 경탄을 함께 느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누군가 성경말고 딱 한 권의 책을 더 읽어야 한다고 묻는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그만큼 이 책에는 믿음에 대해서 삶으로 유언을 남긴 한 성자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때론 지나친 미사여구나 감수성 어린 문장들이 글에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고 오히려 감동을 떨어트리기도 하지만, 프란체스코가 말한 것들과 행동한 것들에서 오는 진실된 감동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 책은 앞으로도 계속 번역되고 읽혀서 후세 사람들도 꼭 읽어봐야할 필독서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만큼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야 할 책이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위대한 성인의 삶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일독을 할 만하다.
위대한 성인을 글로 만날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이었고,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또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지 조언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두꺼운 분량임에도 흥미롭게 읽어나갔고 남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프란체스코. 이제 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다섯 글자를 말하는 순간 그의 전생애가 다시금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그 삶이 너무도 경이롭고 진실되어서 경탄 밖에 나오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책을 읽게 되면 그 삶이 조금은 덜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그때의 나는 성인의 삶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