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난 김에,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갈레아노의 책 중에서.

친애하는 에두아르도:
과거 산 로렌소 구장 자리에 세워진 까르푸 수퍼마켓에 얼마전 간 일이 있었다네. 어릴 적 나의 영웅이었고 네 시즌 연속 산로렌소의 득점왕이었던 호세 산필리뽀와 함께 갔었지. 우리는 냄비와 치즈, 줄줄이 소시지로 둘러싸인 곤돌라 사이를 걸어갔다네. 그런데 계산대로 가까이 가자 산필리뽀는 갑자기 팔을 열어젖히면서 나에게 말했지. "바로 이 곳에서 치른 보까와의 경기가 생각나는군". 그는 통조림과 소고기, 야채를 가득 실은 수레를 잡고 있는 뚱뚱이 아줌마 앞으로 가로지르며 이렇게 말했네. "역사상 가장 빠른 골이었지".
그는 마치 코너킥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정신을 집중하고, 나에게 얘기했다네. "그 당시 막 데뷔한 5번 친구에게 말했지.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골 에어리어 쪽으로 내게 힘껏 공을 차게나, 괜찮을테니까 흥분하지 말고 차란 말이야.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고, 깔데비야라는 그 친구는 너무 놀라 이렇게 생각했겠지. '만일 내가 그렇게 안 차면 어찌될까' 하고 말이야".
그리고 산필리뽀는 나에게 마요네스 통에 들어있던 밧데리를 가리켜 소리쳤지. "바로 여기로 공이 온거야!"
쇼핑 나온 사람들은 놀라서 당황하며 우리를 쳐다보았어. "공은 센터 뒤쪽에 떨어졌고 나는 앞으로 밀치고 뛰어들어갔는데 공이 나를 살짝 비껴 나서 저기쯤, 저기 보이지? 바로 저기 쌀이 있는 곳쯤에 굴러가고 있었지". 그는 나에게 진열대 밑을 가리키고는 푸른색 상의와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토끼처럼 잽싸게 달리기 시작했다네.
"나는 공을 힘차게 찼고, 그리고는, 뿜!" 그는 왼발 슛을 날렸지. 우리 모두는 30여년 전에 골문이 있었던 계산대 쪽을 보려고 몸을 돌렸고, 면도 종이와 라디오 밧데리가 있는 바로 그 곳, 저 위로 공이 골인되는 듯한 것을 느꼈다네. 산필리뽀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기뻐했지. 손님들과 계산대의 아가씨들도 손이 부르트도록 힘찬 박수를 보내주었다네. 나는 거의 눈물이 나올 뻔했지. '갓난아이' 산필리뽀는 1962년의 바로 그 골을 재연한 것이었다네.  (산필리뽀의 골)

1969년, 산또스 클럽이 바스꼬 다가마와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하고 있었다. 펠레는 사뿐사뿐하게 땅을 밟지도 않고서 상대편을 제치면서 번쩍 하는 사이에 필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느 새 공을 가지고 아크 부분까지 들어왔는데,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넘어지고 말았다. 주심은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펠레는 공을 차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10만여명의 관중들은 펠레의 이름을 연호하며 그가 찰 것을 요구했다.
펠레는 마라카낭에서 많은 골을 넣었었다. 1961년 플루미넨세 클럽과의 경기에서 7명의 선수와 골키퍼까지 드리블로 제치면서 성공시킨 것과 같은 화려하고 멋진 골들도 이곳에서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페널티킥은 달랐다. 사람들은 어떤 신성함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떠들고 법석거리는 관중들도 일제히 침묵을 지켰다. 마치 누구의 명령에 따르기라도 하는 듯, 관중들의 외침이 일시에 뚝 그쳤다.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고, 아무도 숨을 쉬지 않았다.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필드에도 마찬가지였다. 펠레와 골키퍼 안드라다는 단 둘이서, 서로를 응시하며 기다릴 뿐이었다. 펠레는 페널티킥의 하얀 지점에 있는 공 가까이 서 있었다. 안드라데는 열두 걸음 떨어진 저 앞 골포스트 사이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복한 채 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골키퍼는 공을 건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펠레는 공을 네트에 박아넣고 말았다. 그것이 그의 천번째 골이었다. 프로축구 역사상 어떤 선수도 천 골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그제야 관중들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고, 어두운 밤을 밝히며 미칠 정도로 기쁨에 겨운 어린아이들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펠레의 골)

책장을 넘기면서 몇 번이나 숨이 막힐 뻔했다. 격정과 감동의 순간들, 땀과 눈물. 숨겨진 비정함을 차갑게 비꼬면서도 동시에 그 열광의 순간을 포착해낸다. 우루과이 출신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펼쳐놓는 이야기에는 축구, 월드컵, 선수들, 인간애와 역사까지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urblue 2005-03-17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어요. 그런데 품절..으..어디가서 구한담.

딸기 2005-03-1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품절됐더군요. 이 책 정말 재밌는데. 저는 울며웃으며 봤어요.

날개 2005-03-18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번역이 엉망이란 얘기가 있던데, 어떻든가요? 사고싶은데 망설여져요..

딸기 2005-03-18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 물으신다면, 이 책은 무조건 추천입니다!

딸기 2005-03-19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 번역이라면... 별로 안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축구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라는 책은, 고유명사를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이 문제였는데, 이 책은 반대로 거의 대부분 스페인어 식으로 표기해놨습니다. 영국의 찰스왕세자를 무려 까를로스로 써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장력으로 보자면, '축구는 어떻게-' 쪽이 훨씬 낫고요, 갈레아노의 책은 번역 문장이 맘에 안 들었어요.
 

축구에 대한 책이라면, 축구에 대해 뭘 좀 아는 사람이 번역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또, 번역을 하는 사람이라면 책에 나와있는 고유명사들, 자기가 모를 땐 검색이라도 좀 해보는 편이 좋다고 본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

투린- 토리노 .이탈리아 지명은 이탈리아 식으로 읽어줘야 한다. 유벤투스의 홈은 토리노다.
오빌리크- 오빌리치. 베오그라드를 연고로 둔 축구팀 이름이다.
욤 키퍼- 욤 키푸르 .유대교 최대 명절인 속죄의 날
플로렌스- 피렌체. 이것도 이탈리아 식으로 읽어줘야 한다.
토튼엄 호츠퍼- 토튼햄 핫스퍼. 호츠퍼라는 팀 이름은 첨 들어본다. 얘네, 꽤 유명한 팀이다.
바르카- 바르샤. FC바르셀로나의 애칭은 '바르샤'다. 스페인어, c에 꼬리가 붙은 글자. 이걸 모르면서 축구에 대한 책을 번역했다니.
루이스 반 갈- 루이스 반 할. 네덜란드 출신의 유명한 감독이다. 번역자는 '반 갈은 바르카의 감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코프티부아르- 코트디부아르. 설마 이걸 몰라서 틀린 건 아니겠지. 오타;;라고 믿고 싶다.
라지오- 라치오. 이것도 모르면서 축구 책을 번역하냐고!
아세날- 아스날. 정말이지 할말을 잃게 만든다.
클린핸즈- 차라리 '깨끗한 손'이라고 쓸 일이지. '
마니풀리테'란 말은 고유명사처럼 굳어져 있다. 미국 사람이 '마니풀리테'를 영어로 옮겨서 클린 핸즈라고 쓴 모양인데, 그걸 그대로 '클린 핸즈'라고 적냐.
잔니 아그넬- 피아트社 주인인 Agnelli 가문을, 앞쪽엔 '아넬리'라고 쓰고 뒤에는 '아그넬'이라고 썼다. 정확한 표기는 '아녤리'다.


댓글(2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weetrain 2005-03-16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어 어이가 없군요.

딸기 2005-03-16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역자가 아주 무성의하게 번역한 것 같지는 않은데... 옮긴이 註도 꽤 많고요.
근데 저런 것들이 자꾸 거슬려서 말이지요. 한 두 개도 아니고...

깍두기 2005-03-16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걸 다 아는 딸기님이 존경스럽습니다^^

sweetrain 2005-03-16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딴건 몰라도 왜 토리노가 투린이냐고요. 다른 도시인줄 알았네요,.

sweetrain 2005-03-16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제 이벤트에 오셔요...

딸기 2005-03-16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유럽 클럽축구 광팬이었거든요. ^^

딸기 2005-03-16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비님, 영어로는 토리노를 Turin 이라고 쓰잖아요. 번역자가 그걸 영어식으로 읽은 모양이예요. 그래서 피렌체도 플로렌스가 되고...

조선인 2005-03-16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어? 어? 제가 아는 그 딸기님 맞죠?

mannerist 2005-03-16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 건 다 봐주겠는데 바르카... -_-;;;;;;;; 순간 책상 속에서 일자도라이바를 찾았습니다. 쿨럭;;;;; 저건 정말 용서가 안되는군요

딸기 2005-03-16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조선인님 ^^ 가끔씩 딸기가 변신을 하고 그럽니다.
매너님, 열받죠! 한두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바르카, 바르카... 엄청 짜증나더군요.

mannerist 2005-03-16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냥 맘같에선 호나우도, 과르디올라, 젠덴, 피구(음. 좀 거슬리긴 하지만 바르샤가 피구한테 한 게 있으니-_-), 히바우도, 클루이베르트(삽질만 하긴 했으나 바르샤는 바르샤)거기에 요즘 잘 나가는 호나우딩요까지 불러와서 번역자 불러놓고 그 황금발들로 다구리-_-를 했으면 좋겠다는. 음... 이거. 아프겠죠? -_-ㅋ

2005-03-16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5-03-17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하다, 심해. 정말 딸기에게 딱 걸렸군. (추천은 저랍니다. 호호)근데 저 책 이번주에 나온거 같던데...빠르기도 하셔라. 안그래도 딸기님 생각했는데. 근데...'한때 광팬'? 이젠 접으셨남요? ^^;

딸기 2005-03-17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이거 리뷰해야 한다니깐요.
한때 광팬이었고 지금도 마음은 광팬인데...
울나라 케이블방송들이 제 수준을 못 따라와주고 있거든요.

숨은아이 2005-03-17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긴이와 편집자가 축구팬이 아닌 모양이에요. 축구팬이 아니더라도 투린이나 플로렌스는 고쳐야 하는데. (제가 딴 건 모르고 그 두 개만 알기 땜시. ㅎㅎ)

딸기 2005-03-17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저도 잘 모르는 다른 오류들도 많이 있겠지요.
제 눈에 띈 것만 저정도였으니깐요. 이노무 눈탱이는 왜 저런것만 본담.

딸기 2005-03-17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없는 책은 아니예요. 오류가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보시면 돼요.
사실 고유명사 표기엔 문제가 많지만 번역 문장은 매끄러운 편이거든요.

릴케 현상 2005-03-19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로 그건 편집자 책임일 것 같네요

딸기 2005-03-19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출판사 시스템을 잘 몰라서...

릴케 현상 2005-03-19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긴 바람직한 시스템이 아니라면 사장 책임이라고 해 두죠^^

딸기 2005-03-19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사장 책임!
말 되네요. ^^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말야... 

실은 내일 오전까지 넘겨야 하는 리뷰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직업적인 리뷰어냐...하면 그건 아니다.
나처럼 책을 천천히 슬렁슬렁 읽는 사람은 전문 리뷰어 같은 건 절대로 할 수 없다. 
그런데 리뷰를 담당하는 분께서 오늘 내게 책 한권을 들고오더니
이건 반드시 네가 리뷰를 써줘야 하는 책이라 말하는 것이다.
듣고 보니... 내 전공분야 -_-;;를 다룬 책이 맞긴 맞다.
그럼 대체 내가 왜 북 리뷰를 해야 한단 말인가?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우리 부서에서 요즘 나만 일이 없다. 그래서 놀고 있다. 
둘째, 내가 놀고 있다는 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오늘의 교훈: 내가 노는 것을 남에게 알리지 말라)

그리하여 내 손에 들어온 책은 이거다.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뻥까지 마라. 축구가 무슨 세상을 지배하니.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도,
축구가 세상을 지배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축구는 이 넓은 세상의 축소판, 즉 반영일 뿐이다. 

어찌됐든 오늘 안에 다 읽긴 읽어야 하는데...
사실 읽는데에 큰 노력이 들어가는 책은 아니다. 오늘 하루 욜라 읽었더니
80페이지 정도 남았다. 오우~
이럴 때 기세를 몰아 읽어치워야 하는데 이렇게 놀고 있으니.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panda78 2005-03-16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교훈이 사무칩니다. ^ㅁ^ 하하하. 힘내서 마저 다 읽으셔요, 딸기님! 화이팅!

하이드 2005-03-16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굉장히 중요하죠. '내가 노는것을 남에게 알리지 말라'

딸기 2005-03-16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튼 다 읽었어요!

마냐 2005-03-17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방금 윗글에 댓글달았는데....궁금증이 곧바로 해소되는군....기대됨, 기대됨~ 오호..룰랄라~

nemuko 2005-03-17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딸기님 전공과 관련된 책이라고 하시더니.... 음, 축구도 전공이 가능한건 가요?^^

딸기 2005-03-17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가 대학에서 체육학 전공했거든요 꺌꺌

바람구두 2005-03-1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어때요? 투투 개구리 같지 않아요....)

2005-03-17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5-03-1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은 그렇게 안 해도 투투같은데... 귀엽긴 하네요 호호
****님, 연락드릴께요 ^^

딸기 2005-03-17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데 ++++님.
문득 생각해보니...
아직 저라는 인간한테 익숙치 않으신 분한테,
단순무식멍청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나중에 알면 화내실까봐...
저 체육학 전공 아닙니다. 죄송.

nemuko 2005-03-1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안그래도 긴가 민가 하고 있었네요~~~~ 설마하니 화내기야 하겠어요^^
 
한글떼기 제1과정 - 드릴 프로그램 기탄 '떼기' 시리즈 한글떼기 1
기탄출판 편집부 엮음 / 기탄교육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딸은 이제 만 세돌이 지났다. 우리 나이로 네 살인데, 1월생이라 학교에 일찍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유치원은 다섯살반을 다니고 있다. 
그동안 직장생활을 핑계로 '불량엄마' 노선을 고수해왔던 나였지만, 요즘 아이 교육 문제에 나름대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남들은 조기교육 시킨다는데 사실 우리 아이는 '만기교육'이다. 지난해 1년 동안 일본에서 살았던 탓에, 한국에 살았으면 자연스럽게 접했을 한글도 전혀 접하질 못했고 우리말 하는 또래 친구들도 없었기 때문에 어휘도 다른 애들보다 좀 딸린다.
지난달에 유치원 등록할 때, 한글-알파벳-숫자 따위의 인지 수준을 묻는 항목이 있었다. 내 딸에 대해선 전부 '모름-모름-모름-모름'으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웃길래 내가 "이렇게 하나도 모르는 애들이 많이 있느냐"고 했더니 "없는 건 아니예요" 이러는거다. 즉, 거의 없단 얘기다.
어차피 한글은 깨우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지만... 유치원 다섯살반에 들어가있는데 나이도 어려, 수준도 떨어져... ㅠ.ㅠ

그래서!
한글을 가르치기로 했다.
과연 아이가 나의 교육열-_-;;을 따라와 줄지는 심히 의심스럽지만.
일단 교보문고에 가서 책 구경을 좀 했다. 난 사실 애들 조기교육이나 영재교육이니 하는 분야에 대해선 상식 이하의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인지라, 뭔가 '가르치는 책'을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이다시피 했다. 아무튼 유아들 한글 교재가 많이 나와 있었다. 솔직히 저런 것들이 필요할까, 책 고르러 간 주제에 맘속으로 의심 & 비아냥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아무튼 몇권을 구경하고 골라낸 것이 이 책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알라딘에 주문을 했다. 
책을 고른 기준은 단순하다. 엄마가 보기에 예쁠 것. 어떤 책들은 현란하다 못해, 색깔들이 내 눈을 공격해오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이 책은 비교적 색깔이 온순해서 맘에 들었다. 말이 '교재'일 뿐, 실제로는  그림 그리고 줄 그으면서 노는 책이다. 이걸 보여주면서 아이를 한글과 친해지게 만들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아그야, 너도 이제부터 공부해야 한다. 좋은 시절 다 간 줄 알어라."

엄마는 이렇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오늘 저녁 한글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의 순서는 선 따라 긋기. 그런데 요것이, 점선 위에다 그리라고 해도 자꾸만 딴데다 긋는 거다.
하다가 어쩐지 신경질이 나서(일부러 내 말을 안 듣는 것 같아서) 아주아주 조금 야단을 쳤는데
바로 주눅이 들면서 "엄마가 해줘" 그런다. 순간 각성 & 후회하고, 물어봤다.
"딸아, 여기 옆에다 긋는게 좋으니?"
"응."
"왜? 여기 위에다가 하면 왜 싫어?"
"길다래서 싫어"
논리적으로 설명은 안 되지만, 아무튼 자기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그래도 이 책은 너무 맘에 들었나보다. ㄱㄴㄷ 들어가면 가르치는 엄마도 머리 아파질 것 같아서 오늘은 참으려고 했는데 아이가 계속 공부하자고 ^^;; 떼를 써서 억지로 떼어놨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울보 2005-03-16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한 딸이네요.
글자는 금방 배우것 같은데요..

2005-03-17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5-03-17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 제 딸은요. 죽어라고 말을 안 듣습니다. 아주 죽겠어요. 얼굴도 그저그렇습니다. 머리마저 안 좋으면... 어쩌죠?
**님, 어제 첫날부터 혼자 신경질 냈다 말았다 했다니깐. ㅋㅋ

nemuko 2005-03-17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이 아이 붙들고 공부 시키는 모습 생각하니 왜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큰 애도 28개월이라 슬슬 한글을 가르쳐 볼까 생각 중인데 제가 워낙 게을러서 맨날 생각만 하고 있네요. 저 책 괜찮단 말씀이죠^^ 숫자나 알파벳은 어디서 배웠는지 몰라도 제법 아는 척을 하는데, 한글은 그게 글자란 것도 아직 모르는 모양이라 약간 걱정도 될라고 하네요....

딸기 2005-03-17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무코님, 우리 애는요, 숫자고 알파벳이고 아무것도 몰라요 ㅋㅋ

반딧불,, 2005-03-17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일곱살짜리 요걸로 한글 뗐다구요.
넘 빨라요.빨라^^
아..방치의 일인자 엄마라서요. 다섯살 4월생 노랑이는 아직 ㄱ 밖에 모릅니다.
하나도 안가르칩니다. 에구 엄마가 게을러서지요. 당근!!

딸기 2005-03-17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예 질러버렸어요.
마냐님네 준영이랑 서영이가 한글나라로 한글 다 배웠다길래

한글나라 & 영어나라 신청했또요...

우리 애가 놀랄 것 같습니다. 저노무 엄마의 대가리는 어케 돼있길래
모 아니면 도, 방치 아니면 스파르타냐... 이럴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원체 좀 생각이 없거든요
근데 이젠... 돈도 없어졌어요 ㅠ.ㅠ

뼈빠지게 돈 벌어 아이 교육에 퍼붓는 이 놀라운 모정...

서연사랑 2005-03-17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글나라 괜찮았어요. 한솔교육에서 선생님 오시는 거 맞죠?
일단 교재가 가지고 놀기에도 좋고 - 요즈음은 스티커가 더 많이 들어 있어서 엄마가 복습해 주기도 좋게 되 있던데요? 저희 딸 교재는 스티커가 여분으로 많이 들어있지 않아서 별도로 구입하기까지 했답니다 - 선생님들도 잘 하시는 것 같구요. 그래서 지금은 계속 이어서 국어나라, 읽기나라까지 하고 수학나라도 하고........
그덕인지 한글은 빨리 깨우친 것 같은데,그러다보니 저도 돈 없어요. ㅠ.ㅠ

딸기 2005-03-18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게 한솔교육인지 뭣인지도 몰랐어요.
근데 첨엔 교재비가 넘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그거 사면 책 되게 많이 준다면서요
그리고 애가 재밌어한다고 해서 걍 신청해버렸어요.
한글나라는 괜찮은데, '영어나라'가 걱정이예요.
우리 애는요... ㅠ.ㅠ
일본에서 1년간 살다 왔자나요?
걔는, 파인애플을 '파인아푸루'라 그러고요
산타할아버지 보고는 '산타상'이라 그래요.
그런 애한테 영어를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 두둥~

nemuko 2005-03-18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인아푸루, 산타상..... 그렇군요...
저도 일본 가서 몇년만 살다 왔음 좋겠다 했었는데 그럴 수도 있군요....^^
근데, 갑자기 한글나라 말씀 하시니 귀 얇은 저는 또 '그렇군...'하고 있단 말입니다....

딸기 2005-03-19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하하
초극세사...ㅋㅋ

비로그인 2005-03-22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글나라는 여기저기서 호평을 받는군요...

으라차차 2006-03-18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저희 딸도 03년 1월생인디... 저도 울아이 "만기교육"좀 시켜볼라고 책을 알아보던 차에 딸기님 글 읽고 동감하믄서 많이 웃었습니다.
울딸도 말을 참 안듣습니다. 요거이 집에서는 호랑이고 나가서는 얌전한 토깽이입니다. 그려서 제가 별명을 "종이호랑이"라고 하지여.
딸기님은 5살반에 아이를 맡기셨나봐요. 저도 어린이집 보내고 싶은데 4살을 보낼지 5살을 보낼지 고민중이에요.
서로 좋은 정보나 자료 있으면 이야기해요. 서재친구... ㅋㅋㅋ
 

깍두기님이 올린 Masaki Shinozaki의 그림들을 보다가, 마음에 들어서 좀더 찾아봤다.
(http://cipango.typepad.com/cipango/2004/05/_masaki_shinoza.html 에서 퍼왔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울보 2005-03-16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요,,,,,,

물만두 2005-03-16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책속에 책 2005-05-02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너무 이뻐요..동화틱하게 환상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