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난 김에,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갈레아노의 책 중에서.

친애하는 에두아르도:
과거 산 로렌소 구장 자리에 세워진 까르푸 수퍼마켓에 얼마전 간 일이 있었다네. 어릴 적 나의 영웅이었고 네 시즌 연속 산로렌소의 득점왕이었던 호세 산필리뽀와 함께 갔었지. 우리는 냄비와 치즈, 줄줄이 소시지로 둘러싸인 곤돌라 사이를 걸어갔다네. 그런데 계산대로 가까이 가자 산필리뽀는 갑자기 팔을 열어젖히면서 나에게 말했지. "바로 이 곳에서 치른 보까와의 경기가 생각나는군". 그는 통조림과 소고기, 야채를 가득 실은 수레를 잡고 있는 뚱뚱이 아줌마 앞으로 가로지르며 이렇게 말했네. "역사상 가장 빠른 골이었지".
그는 마치 코너킥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정신을 집중하고, 나에게 얘기했다네. "그 당시 막 데뷔한 5번 친구에게 말했지.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골 에어리어 쪽으로 내게 힘껏 공을 차게나, 괜찮을테니까 흥분하지 말고 차란 말이야.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고, 깔데비야라는 그 친구는 너무 놀라 이렇게 생각했겠지. '만일 내가 그렇게 안 차면 어찌될까' 하고 말이야".
그리고 산필리뽀는 나에게 마요네스 통에 들어있던 밧데리를 가리켜 소리쳤지. "바로 여기로 공이 온거야!"
쇼핑 나온 사람들은 놀라서 당황하며 우리를 쳐다보았어. "공은 센터 뒤쪽에 떨어졌고 나는 앞으로 밀치고 뛰어들어갔는데 공이 나를 살짝 비껴 나서 저기쯤, 저기 보이지? 바로 저기 쌀이 있는 곳쯤에 굴러가고 있었지". 그는 나에게 진열대 밑을 가리키고는 푸른색 상의와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토끼처럼 잽싸게 달리기 시작했다네.
"나는 공을 힘차게 찼고, 그리고는, 뿜!" 그는 왼발 슛을 날렸지. 우리 모두는 30여년 전에 골문이 있었던 계산대 쪽을 보려고 몸을 돌렸고, 면도 종이와 라디오 밧데리가 있는 바로 그 곳, 저 위로 공이 골인되는 듯한 것을 느꼈다네. 산필리뽀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기뻐했지. 손님들과 계산대의 아가씨들도 손이 부르트도록 힘찬 박수를 보내주었다네. 나는 거의 눈물이 나올 뻔했지. '갓난아이' 산필리뽀는 1962년의 바로 그 골을 재연한 것이었다네.  (산필리뽀의 골)

1969년, 산또스 클럽이 바스꼬 다가마와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하고 있었다. 펠레는 사뿐사뿐하게 땅을 밟지도 않고서 상대편을 제치면서 번쩍 하는 사이에 필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느 새 공을 가지고 아크 부분까지 들어왔는데,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넘어지고 말았다. 주심은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펠레는 공을 차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10만여명의 관중들은 펠레의 이름을 연호하며 그가 찰 것을 요구했다.
펠레는 마라카낭에서 많은 골을 넣었었다. 1961년 플루미넨세 클럽과의 경기에서 7명의 선수와 골키퍼까지 드리블로 제치면서 성공시킨 것과 같은 화려하고 멋진 골들도 이곳에서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페널티킥은 달랐다. 사람들은 어떤 신성함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떠들고 법석거리는 관중들도 일제히 침묵을 지켰다. 마치 누구의 명령에 따르기라도 하는 듯, 관중들의 외침이 일시에 뚝 그쳤다.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고, 아무도 숨을 쉬지 않았다.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필드에도 마찬가지였다. 펠레와 골키퍼 안드라다는 단 둘이서, 서로를 응시하며 기다릴 뿐이었다. 펠레는 페널티킥의 하얀 지점에 있는 공 가까이 서 있었다. 안드라데는 열두 걸음 떨어진 저 앞 골포스트 사이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복한 채 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골키퍼는 공을 건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펠레는 공을 네트에 박아넣고 말았다. 그것이 그의 천번째 골이었다. 프로축구 역사상 어떤 선수도 천 골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그제야 관중들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고, 어두운 밤을 밝히며 미칠 정도로 기쁨에 겨운 어린아이들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펠레의 골)

책장을 넘기면서 몇 번이나 숨이 막힐 뻔했다. 격정과 감동의 순간들, 땀과 눈물. 숨겨진 비정함을 차갑게 비꼬면서도 동시에 그 열광의 순간을 포착해낸다. 우루과이 출신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펼쳐놓는 이야기에는 축구, 월드컵, 선수들, 인간애와 역사까지 모든 것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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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3-17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어요. 그런데 품절..으..어디가서 구한담.

딸기 2005-03-1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품절됐더군요. 이 책 정말 재밌는데. 저는 울며웃으며 봤어요.

날개 2005-03-18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번역이 엉망이란 얘기가 있던데, 어떻든가요? 사고싶은데 망설여져요..

딸기 2005-03-18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 물으신다면, 이 책은 무조건 추천입니다!

딸기 2005-03-19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 번역이라면... 별로 안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축구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라는 책은, 고유명사를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이 문제였는데, 이 책은 반대로 거의 대부분 스페인어 식으로 표기해놨습니다. 영국의 찰스왕세자를 무려 까를로스로 써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장력으로 보자면, '축구는 어떻게-' 쪽이 훨씬 낫고요, 갈레아노의 책은 번역 문장이 맘에 안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