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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미국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유강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이번 여름에 몇 권의 굵직한 책들을 읽었다. 두께나 분량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용의 무거움 측면에서 읽은 보람이 있다 싶어 뿌듯한 그런 책들이다. 그 중 가장 탁월했던 것은 파리드 자카리아의 ‘자유의 미래’였고 나머지는 밀턴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 브레진스키 ‘제국의 미래’, 문승숙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 그리고 이 책, 후쿠야마의 ‘기로에 선 미국’이었다. 모두 무게가 적잖은 것들인데, 읽고 나서 정리를 제때 제때 하지 않은 탓에 머리 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어 두통을 안겨줬던 책들이다.
후쿠야마는 설명할 필요 없이 ‘역사의 종언’의 그 사람이다. 세상엔 그 책을 욕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 말을 인용하고 비판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그 말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역사의 종언’을 (후쿠야마가 이미 역사가 끝났다고 말한지 15년이나 지나서) 몇 달 전에야 읽었는데, 왜들 그렇게 후쿠야마 욕을 하는지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됐었다. 15년전에 그 책을 읽었더라면 나도 그렇게 욕을 했으려나? ‘역사의 종언’은 헤겔 칸트 어쩌구 하는 철학적이고 학술적인 책이지, 곧이곧대로,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 역사의 종언이라는 말을 끌어다가 비판하면서 “역사가 뭐 끝났다 그래” 이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할 성질의 텍스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어쩌면 후쿠야마를 욕했던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역사의 한 패러다임이 진짜로 끝나는 줄 믿었던, “안 끝나!” 하면서 고집만 부렸던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후쿠야마의 책이 나오고 15년이 지나 읽은 내 눈에, 그 책의 표현들은 좀 예스럽지만 개념들은 오히려 현재진행형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솔직히 나는 그 책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고, 다 알아먹지는 못했지만 ‘똑똑한 학자의 똑똑하고 어려운 책’으로 기억에 남았다.
후쿠야마가 새 책을 내놨다고 해서 두말 않고 주문하려고 보니 번역자는 국제문제와 관련해 주로 ‘진보적인’ 책들을 솜씨 있게 번역해왔던 유강은씨다. 이 저자에 이 출판사에 이 번역자는 참 조화로우면서도 안 어울린다 싶었는데, 역시나 기대했던 대로 책은 훌륭했다. 책은 후쿠야마가 본 미국의 현실, 네오컨에 휘둘리다 ‘막 나가버린’ 미국을 담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의 주인공은 네오컨이다. 네오컨은 부시 행정부 들어서고 나서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그 뿌리는 오래됐다. 책은 네오컨이라는 집단이 어떻게 형성됐고 어떻게 해서 세력을 잡았는지, 그러다가 어떻게 막나가서 요모양 요꼴이 됐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나도 한때는 네오컨이 괜찮을 줄 알고 솔깃했는데 지금 보니 너희들 대체 왜그러니. 그렇게 하면 미국 망하고 세계도 망한다니까.” 요지는 이렇다.
후쿠야마는 책에서 네오컨의 뿌리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거명해가며 누구는 진짜 네오컨이지만 누구는 사상으로 봐서 어정쩡하다, 누구는 첨엔 아니었지만 나중엔 주위 사람들 말에 솔깃해져서 네오컨이 됐다 등등으로 좀 거칠게 설명한다. 문체는 다소 공격적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네오컨들은 선악을 판단기준으로 삼던 가치 중심의 옛 좌파들(이 점에서 네오컨은 브레진스키나 키신저같은 정통 보수파와는 태생부터 다르다)이다. 그런 면에서 레이건은 네오컨이었고, 부시는 나중에 네오컨이 된 부류에 속한다. 람보 식의 대결주의, 부시 식의 ‘악의 축’ 운운하는 복음주의 비슷한 공격 성향은 이렇게 해서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들의 관심사는 원래부터 ‘유리하냐 불리하냐’ 하는 전략전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선이냐 악이냐’ 하는 가치 판단의 문제였던 것이다.
부시와 그 떨거지들이 너무나, 너무나 ‘확신범’처럼 보였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라크전쟁 전에 네오컨이 아닌 아버지 부시 전대통령 쪽에서 레이건주의자들로 구성된 현 부시 행정부에 딴지를 걸었다는 분석과도 맥락이 맞아 떨어진다.
익히 짐작할 수 있듯, 선악의 판단이 끝났다며 역사의 종말까지 선언했던 후쿠야마가 네오컨들에게서 돌아선 데에서는 이라크 전쟁과 그 뒤의 상황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널리 알려진 대로, 새뮤얼 헌팅턴이나 크리스토퍼 히첸스가 이라크전에 쌍수 들어 환영한 것과 달리 후쿠야마는 처음부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었다).
네오컨들은 이라크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선한 정권, 미국적이고 민주적인 정권을 세워 세상을 안전하고 아름답게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요즘 막나가버린 짜가 네오컨들은 길을 잘못 들어섰다.
“1990년대에 이루어진 미국 군사기술의 성공은 군사 개입이 언제나 걸프 전쟁이나 코소보 전쟁처럼 깔끔하고 값싸게 진행될 수 있다는 환상을 낳았다. 이라크 전쟁은 이런 형태의 가볍고 기동력이 있는 전쟁의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재래식 군사력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장기적인 반란에 맞서 싸우는 데에는 특별한 이점이 전혀 없는 것이다. 통합정밀직격탄과 TV 유도형 대전차 미사일은 반란자와 비전투원을 구별하지 못하며 병사들에게 아랍어를 가르치지도 못한다.”(58쪽)
그래서 럼즈펠드 류가 이끄는 이라크 전쟁은 실패했다. 더불어 네오컨의 ‘체제 변경’(레짐 체인지) 전략도 실패했다. 백악관을 자기네편으로 끌어들인 네오컨이 너무 오만해져서 상황을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다.
“(네오컨의 대부인) 스트라우스식으로 이해된 정치 체제는 공식적인 제도나 권력 구조만을 의지하지 않는다. 정치 체제는 그것의 토대가 되는 사회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50쪽). “스트라우스도 고대의 정치철학자들도, 민주주의가 기본적인 정치 체제여서 일단 독재를 제거하면 사회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로 되돌아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51쪽).
그런데 네오컨들은 무식하게도, 후세인을 없애면 이라크가 ‘민주화’ 될 줄 알았다. 왜 그랬을까? 세상 사람들 다 ‘불가능하다’ ‘쉽지 않을 것이다’ 했는데 왜 백악관의 그 자들은 착각의 늪에 빠졌던 것일까? 후쿠야마의 시각에 따르면, 네오컨들은 과거부터 ‘소수파’였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과 정말 비슷하다.
“냉전 기간 신보수주의자들은 멸시받는 소수 집단의 지위에 익숙해졌다. 그들은 인습적인 지식에 도전하면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해결책을 추구하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공산주의의 갑작스런 붕괴는 이런 생각들의 정당성을 많은 부분 입증했으며, 1989년 이후에 이런 생각은 분명한 주류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감 속에 ‘우리 대 그들’이라는 유대감을 강화했다. 2001년 권력의 자리에 돌아온 국방부와 부통령실의 전쟁 주창자들은 자신들과 견해를 같이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불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끼리끼리 소수파로 뭉쳐 세상에 맞섰던 선(善)의 수호자(누구 맘대로;;)들은 자신들만이 옳다며 배타주의를 더욱 고수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들이 세계 최강 미국의 권력을 손에 쥐고 남의 나라에 폭탄을 퍼부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손에 망치만 든 사람에게는 모든 문제가 못처럼 보인다는 말처럼” 그들은 단단한 힘만을 생각하다가 부드러운 힘은 아예 잊어버렸다.
“어느 누구도 원칙적으로 부드러운 힘의 사용에 반대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88쪽)
남의 나라 아수라장 만들어 수만명 죽음으로 내몬 자들에 대한 평가 치고는, 후쿠야마의 평은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분석은 잘하는데 나쁜 놈이 나쁜 이유는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고 좋은 일을 제대로 잘 못해서라고 하는 꼴이다.
뒷부분 ‘그래서 미국은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 쪽은 대략 민주당 주장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어찌 됐든 책은 재미있었고, 미국 네오컨들에 대해 알려주는 점이 많았고, 구구절절 설득력 있는 이야기들(각론 측면에서)과 못돼먹은 생각(전체적으로)이 잘도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