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첫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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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세계 - 미국 외교정책과 구질서의 위기,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
리처드 하스 지음, 김성훈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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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하스는 국제뉴스에서 꽤 자주 이름을 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포린어페어스'로 유명한 미국외교협회(CFR)의 회장이고, 미국 외교문제에 대해 유명 언론들에 적잖이 코멘트를 해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조지 H W 부시 시절에 백악관 특보와 국가안보회의(NSC) 중동-남아시아 담당 특보를 했다고 한다.


리처드 하스의 <혼돈의 세계>(김성훈 옮김. 매일경제신문사)를 읽었다. 부제가 '미국 외교정책과 구질서의 위기,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이라 달려 있다. 영어 제목은 A World in Disarray 이고 부제는 '미국 외교정책과 구질서의 위기'다. 한글판은 제목의 Disarray를 '혼돈'으로 옮겼고 부제에다가 '한반도의 운명'을 덧붙였다. 번역은 매끄럽다. 다만 번역자는 하스 스스로 "한국에서는 Disarray를 혼돈이라 해석한다고 어느 통역자에게 들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어서 '혼돈'이라고 번역했다는데, 이건 좀 이상하다. 하스는 chaos가 아닌 disarray라는 단어를 일부러 썼다고 서론에서 직접 밝혔고, 그가 책에서 줄곧 언급하는 H 부시 시절의 'New World Order'가 결국 현실이 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부제도 사실 좀 과하다.


날카로움이나 통찰력같은 것은 많이 엿보이지 않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이렇게 급변하고 있는 시점에, 지난해에 나온 이 책의 '북핵 위협'을 강조하는 서문을 읽자니 더더욱 그랬다. 냉전 시절의 사고방식에서 그다지 크게 벗어난 것도 아니고, 현실주의 노선의 기본틀에 머물고 있는데 그렇다 해서 로버트 카플란처럼 미처 알지 못했던 지구상 어딘가의 일들을 전해주는 것도 아니고. "냉전시절의 현실주의+21세기의 무질서 몇 가지=미국은 중국을 배제하지 말고 중국(그리고 러시아)와 협력해서 세계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듯. 


책을 읽으면서 브레진스키를 여러번 떠올렸다. 기본적으로 강대국 간 힘의 균형(하스는 대놓고 '세력균형'을 얘기한다)을 중시하되, 미국이 단일패권국가는 아니지만 이 혼란한 세계를 관리하는 역할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세계경찰 미국'의 역할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쪽에 서 있다는 점에서 니얼 퍼거슨 류와 비슷하기는 한데, 아들 부시 시절 막 나가는 미국을 예찬하는 쪽에 섰던 퍼거슨 식의 오만한 '미국 제국론'보다는 좀 점잔을 빼는 식이랄까. 


아버지 부시의 현실주의 외교노선을 칭찬하는 점도 브레진스키와 비슷하다. 브레진스키는 '보수적인 민주당 외교 원로'였지만 하스는 아버지 부시 시절 직접 외교에 관여했던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 싶다. 그런데 정치적 스펙트럼과 상관 없이 브레진스키의 책에서는 세계를 진짜 크게 보는 원로의 느낌이 나는 것과 달리, 하스의 책에서는 그런 안목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두 사람 다 유대계인데, 특히 하스는 이스라엘을 미국이 밀어주고 편들어주는 걸 너무 당연하게 '옳은 길'로 제시하고 있다.


중국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만들 때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딴지만 걸다가 결국 왕따가 돼 실기를 했고 "그 결과 미국은 이러한 시도에 대해 영향력을 잃었고 무기력해 보였으며 중국이 세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으려는 노력을 방해하려 한다는 인상만 많은 중국인들에게 주었다"고 진단한 부분, "그럼에도 전략적 맥락이 변화했고 중국의 국력이 절대적 상대적 측면에서 성장함에 따라 세력균형도 변화하고 있음을감안할 때 여전히 미중 관계가 놀라울 정도로 견고하다는 사실"(104쪽)을 언급한 것 등 몇몇 부분은 재미있었다. 


아버지 부시의 측근이었지만 하스 또한 아들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는 혹평을 한다. 물론 그의 혹평 밑에는 도덕적 측면이나 이라크인들의 고통 따위는 깔려있지 않지만 말이다. 그저 그는 기술적인 문제만 짚을 뿐이다. "첫째, (오바마의) 미국은 주둔군 지위협정 개정을 통해 제한된 규모의 미군이 주둔할 수 있도록 하지 않고 계획대로 병력 철수를 추진했다. 둘째, 비록 알말리키 총리가 2010년 선거에서 다수표를 획득하지도 못했고 국가 전체의 이익보다는 시아파의 이익을 챙기는 편협한 종파주의자였지만 그럼에도 미국은 그에게 정치적 지지를 보냈다. (중략) 2003년에 전쟁을 개시하기로 한 결정과 그 이후 있었던 이라크군의 해산, 그리고 과도하게 많은 지배 정당 소속 인사들을 축출시키기로 한 결정이 가장 중대한 정책적 오류였다"(188쪽)는 것이다. 어찌 됐든 미국의 정책적 오류에 대한 이런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생각은 '세력균형에 바탕을 둔 협력론'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같다. 그는 냉전 시대를 풍미한 조지 케넌의 '봉쇄' 개념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한다. 정작 케넌은 자신이 보고서를 만들었던 봉쇄 개념이 군사적 봉쇄와 대결로 향하자 회의를 품고 반대론자로 돌아섰다고 하지만. (사실 이 책보다는 몇 해 전 읽은 케넌의 책이 훨씬 재미있었다)


"나는 냉전시대 미국의 외교정책으로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억누르려고 했던 봉쇄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 소련도 그랬지만 중국이든 러시아든 이념이나 지정학적 욕망이나 동기로 인해 자신이 통제하거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역을 무한정 확대하고 싶어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행동이 매우 유감스럽지만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첫 수순이 아니었으며 마찬가지로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태도도 그랬다. 오히려 러시아와 중국은 각각 정치적이면서 안보와 연관된 이해관계가 있고, 비록 이러한 이해관계가 아주 크기는 하지만 전혀 충족시킬 수 없는 건 아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거나 방향성이 설정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와 중국에 대해 '통합'이라는 정책이 한층 더 설득력 있다." (231쪽) 


이런 맥락에서 그는 특히 남중국해 문제에서 '미국과 친한' 나라들을 안심시키고 편드는 게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중국을 도발하지 않도록 억누르는 것도 미국의 주된 역할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외교적 상호의존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다른 강대국들도 지역적 혹은 글로벌 수준의 질서 형성과 운영 과정, 즉 정통성이 무엇인지 규정짓고 현실에서 정통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지정학적 통합으로서 몇 년 전 중국에게 제시했던 '책임 있는 이해관계자(responsible shareholder)'와 유사하기도 하지만 이 표현은 많은 중국인들에게는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동참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미국과 중국이 협력하여 이 시대에 통용될 수 있는 정통성을 형성하는 규범과 제도 창출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목표는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232쪽)


유엔 체제가 실효성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온갖 다양한 이슈별 지역별 중소규모 다자대화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갈수록 그렇게 되리라는 분석, 외교정책 수단으로서 '제재'를 활용할 때 미국이 염두에 둬야할 것에 대한 지적은 재미있었다. 관계가 안 좋아졌다 해서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몽땅 묶어 통째로 대립으로 끌고가지는 말아라, "러시아 또는 중국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아서 제재를 해야 할 경우에도 양국 관계에 악영향을 주지 않아야 하고 다른 선택이 가능한 분야에서는 협력을 위해 가급적 좁은 범위에서 제재 조치를 취해야 한다"(233쪽)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바마 정부는 참 어정쩡했다. 전면 대립을 바라는 것이 아니면서도 결과적으로는 협력의 길을 막는 길을 택했으니. 트럼프는? 하스는 "일단 상황이 해소되면 어떤 제재라도 조절과 해제가 용이하도록 고안돼야 한다. 여기에 두 가지 요소를 추가하고자 한다. 첫째, 제재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과 무력 사용 사이에서 쉽게 택할 수 있는 '안전한' 제3의 선택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통해서 봤을 때 제재만으로는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거의 없다. 둘째, 우방국이나 동맹국이 이런 저런 이유로 미국이 원하는 조치를 거부한다고 해서 제재가 이들과의 주된 갈등 요소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234쪽)고 말한다. 새겨들을 말인데, 국제정치에서 이를 면밀히 구분할 수 있는지는 좀 의문이다. 


중동 전문가인 그는 이란이나 이스라엘 문제에선 고전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래도 눈길 끄는 게 있다면 이란을 현실로 인정하자는 것 정도. 이란을 압박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모든 수단(군사적 수단까지 포함해서!)을 동원하되, 이란을 무너뜨리거나 변화시키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란이 40여년 간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왔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이란을 개조하겠다는 시도는 비현실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란이 점점 온건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이런 변화만 기대할 수는 없다. 중국과 러시아를 다루는 방식과 유사하게 이란을 다루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과거에 아프간과도 일부 협력이 가능했던 사례처럼 선택적으로 협력하고 핵 분야에서 위험 방지 외교 활동을 하며 필요할 경우 제재를 동원하여 봉쇄하는 한편 이란 주변국에는 안보를 제공하고 이란이 중동지역 내 미국의 핵심 이익을 위협하는 경우에 군사조치 등 다양한 정책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 (290쪽)


이란을 압박해야 한다는 걸 기본전제로 깔고, 그는 "이스라엘 지지"를 중동 정책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로 제시한다. "군사, 경제, 정보 지원을 유지하거나 선택적으로 증가시키는 수준 이상"으로 이스라엘을 밀어줘서 모든 역내 문제를 이스라엘과 논의하자는 것. '이스라엘=미국 사냥개' 주장은 언제까지 되풀이될 것인지.


"중동 지역 내 국경선의 현상유지를 미국 핵심 이익으로 설정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가까운 시일 내에 중동 국가들이 자칭 국가라는 수많은 자치 지역으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의 경우에는 명목상으로는 중앙정부가 있지만 실제 통치하는 지역으로 볼 때는 그렇지 못하다. 국가라기보다는 자치주가 새로운 규범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새로운 추세를 어떠한 공식 제도로 규정짓고자 해서도 안 된다. 1차 세계대전 종식 후 오스만 제국을 분열시켰던 파리평화회의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분열되는 선례를 따르려는 국가가 없거나 있더라도 아주 적을 것이고, 설령 그렇게 할 의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국경선을 어떻게 그을지에 관한 합의를 도출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파리평화회의와 유사한 시도를 한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중동의 실상은 법적 현실이 아닌 실질적인 현실에 따르고 있을 것이다." (293쪽) 


전체적으로 저자의 톤은 모든 면에서 '현상 유지+관리'라고 보면 될 것같다. 테러리즘에 대해서도 "이제 테러리즘은 그동안 상당히 축적된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요소의 산물이자 소위 뉴노멀로 보아야 한다"면서 "테러리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기대 수준과 성공 가능성을 낮춰서 테러리즘이 우리 일상생활의 근간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방, 보호, 원상회복 등의 요소가 조화를 이룬 지속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접근법이 필요하다"(288쪽)고 말한다. 일면 용감하고도 현실적인 발언이다. 이미 세계는 그렇게 돼 가고 있다. 다만 그것이 미국이나 어느 나라 정부 덕이 아니라 '시민들의 힘'이라는 점. 이 책의 저자 눈 앞에는 '시민'같은 존재는 전혀 없으니.


뒷부분에서 그는 '주권국가의 힘'이 약해지면서 무질서가 심화되는 시대에, 베스트팔렌 체제 이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돼왔던 주권이라는 개념을 오히려 확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권국가는 다른 국가나 정부에 대한 권리뿐 아니라 의무도 가져야 한다는 식으로 정통성의 개념을 발전시키고 이런 인식이 널리 지지받아야 한다"(240쪽)며 여기에 '주권적 의무(sovereign obligation)'라는 이름을 붙였다. 잘 와닿지는 않는다. 개념의 모호성도 그렇고, 그 개념을 어떻게 주권국가들에게 '의무화'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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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불쾌한 진실
슐로모 산드 지음, 알이따르 옮김 / 훗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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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에서 나온 <유대인, 불쾌한 진실>을 읽었다. 저자인 슐로모 산드는 폴란드의 홀로코스트 생존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이디시(동유럽 유대인) 문화 속에서 자랐다. 지금은 텔아비브대학교 교수로 일하고 있는데 '유대 국가 이스라엘'을 맹렬히 비판하는 지식인으로 유명하다. <유대 민족의 발명>, <이스라엘 국가의 발명>같은 책을 통해 현대 이스라엘의 형성과정을 비판하는 좌파 지식인이다. 이스라엘 내에서는 미움을 많이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 불쾌한 진실>은 그가 2013년 쓴 'How I Stopped Being a Jew'를 번역한 것이다. 한국어판은 '알이따르'라는 공동번역집단에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슐로모 산드


산드의 이 책은 이스라엘 문제(혹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조금 알고서 읽는다면 더 재미있겠지만, 굳이 몰라도 큰 상관은 없다. 저자는 '유대인들'과 그들이 겪은 홀로코스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유일무이한 재난'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는지, 그것이 이스라엘이라는 현대 국가의 점령통치와 자국내 아랍계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됐는지를 짚는다.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며 설명하는 책은 아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자라면서, 자기네 문화가 왜곡되고 심지어 남을 겨냥한 무기가 되어가는 걸 보며 느끼는 감정들을 털어놓은 에세이다. 


어조는 담담하고 서술은 느슨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번득이는 문제의식은 치열하고 감정은 격렬하다. 굳이 말하자면 이 책에서 그가 말을 거는 독자들은 유대인 혹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다. 


나는 20세기 후반을 거쳐 21세기에 이르는 동안 서구 문화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유대인성의 정의 방식에 때로 뭔가 불편함을 느껴 왔다. 어떤 면에서는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자라는 인상이 점점 강해졌다. 시오니스트 제창자들은 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비판과 반유대주의를 동일시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고 외쳐대고 있다. (중략)

우리 자신을 기만하지 말자. 대학살로 막을 내렸던 끔찍한 유대 혐오의 위협은 오늘날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대인과 세속화된 그들의 후손에서 갑자기 다시 살아나지도 않았다. 오늘날 그 어떤 정치인도 공개적으로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을 할 수 없다. 아마도 중부 유럽이나 새로 형성된 이슬람 민족주의의 범위 안에 있는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21쪽)


오늘날 남아 있는 극소수의 반유대주의와 강력한 주류였던 과거의 유대 혐오를 동일시하는 것은, 20세기 중반까지 서구의 기독교적 현대 문명에서 표출되었던 유대 혐오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신비로운 특성이 있는 ‘혈족’으로 유대인을 바라보는 인식은 여전히 팽배해 있다. (22쪽)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못된 짓을 할 때는 많다. 아이들을 향해 미사일을 쏘는 식의 '학살'도 포함해서. 세계에서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다. 박사모가 태극기와 이스라엘 깃발을 함께 들고 설쳐대는 이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국에서조차, 이스라엘이 유대교를 믿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기독교도들이 상당수인 것으로 보이는 한국에서조차 가자(팔레스타인) 침공이 일어나면 반이스라엘 시이가 벌어지는 마당에. 세계 곳곳에서 이스라엘의 악행에 맞서 보이콧 운동이 벌어진지 오래됐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이 꺼내드는 카드는 '반유대주의'다. 서구인들의 죄의식을 공략하는 이 프레임은 이젠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는 먹혀들어가는 카드이기도 하다. 



슐로모 산드의 책은 과거의 희생을 오늘날 자기네가 저지르는 죄악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반유대주의'를 만병통치약처럼 들먹이면서 스스로를 옹호하지 말라고.


오늘날의 ‘포스트 쇼아 고임post-Shoah goyim(홀로코스트 이후의 비유대인)’에게서 우리는 한데 섞인 공포와 죄의식, 그리고 무지를 발견하며, 때로는 ‘신유대인들’의 희생자 노릇, 자아도취, 허세, 게다가 터무니없기까지 한 무지를 마주하곤 한다. 종족, 즉 불변의 혈족-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의 정체성과, 먼 땅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 또 거의 50년간의 점령 정권에 복속되어 권리를 박탈당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의 비유대인 시민들을 대하는 이스라엘의 정책들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이다. (23쪽)



책의 상당부분은 '유대인 되기-유대인 만들기'를 비판하는 데에 할애돼 있다. 그가 보기에 유대교는 배타적이다. 유대교 교리에는 배타적인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사실 유일신앙은 그 자체로 배타적이고, 같은 아브라함 종교들인 기독교나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다만 기독교는 근대 이후에 그런 배타성을 많이 덜어냈고, 이슬람은 근대 이전 제국시절에 오히려 관용적이다가 20세기 후반 이후 오히려 폐쇄성이 커졌다. 유대교가 남들 보기에 배타적으로 보이는 것도, '애당초 배타적인 교리여서'가 아니가 기독교-이슬람에 둘러싸여 자기네들 종교를 지키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측면이 많다고 산드는 지적한다. 문제는 유대교에 대한 배타적인 해석이, 지금 현재 팔레스타인을 몰아붙이고 억압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1세기 후반과 2세기 초반, 이교도에 대항하여 일어난 세 번의 항쟁이 패배한 후 유다 왕국은 랍비 유대교와 바울 기독교라는 두 개의 주요 흐름으로 쪼개졌다. 이후, 이들의 격차는 점점 커져만 갔다. 덜 강력한 랍비 유대교는 미쉬나와 탈무드를 세상에 가져왔다. 상대적으로 더 강력하고 효율적인 바울의 기독교는 신약을 낳았다. 기독교는 쉽게 숭리했고 패배한 경쟁자를 길고 고통스러운 역사적 상황에 놓이게 했다. 

구약 일부가 증명하듯이 유대교의 교리는 그 기원부터 배타적인 원칙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통념과는 달리 자기 폐쇄성이 교리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 종교의 분파적 기반이 재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기독교와 이후 이슬람이 보낸 위협 때문이었다. 유대교의 자급자족적인 자기 폐쇄성은 무엇보다도 존재에 대한 영구적인 위협에 맞서 살아남기 위한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63쪽)


하가다로 알려진 이 모음집은 오랫동안 유대 문화생활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다. 첫 판본이 만들어진 때는 9세기로 알려져 있지만 유대의 하느님을 믿지 않고 감히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모든 민족을 전멸시켜 달라는 노골적인 요구가 정확히 언제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약하고 박해받은 자들이 자신들의 모든 행동과 말을 합리화할 필요 없이 복수를 부르짖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파리나 런던, 뉴욕의 그 ‘세속적 유대’ 지식인들이 열정과 자기만족을 가지고 하가다를 읽으면서도 고임(비유대인)에 대한 그 분노의 구절을 지우지 않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곤란한 질문들은 더 많다. 이 불행한 문장이 중동의 하늘을 지배하는 이스라엘 조종사들이나 점령된 서안 지구의 무력한 아랍 마을들을 순찰하는 무장 군인들에 의해 읽히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131쪽)


유대인의 발명, 이스라엘의 발명에 대한 부분은 대단히 새로운 것들은 아니어서 그냥 쓱쓱 넘겼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것은 '이디시'와 '히브리'라는 유대인들의 두 정체성에 대한 것이었다. 동유럽 이디시 유대인들의 전통주의적이고 의식(儀式)적인 문화에 정교가 미친 영향은 처음 들은 것이라 눈길이 간다. 더불어,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19세기 이후 왜 유대계 중에 두드러진 사회주의자나 혁명가가 많았는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한줄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며 해석은 매우 여러가지이겠지만.


저자는 동유럽에 면면히 이어져내려오던 유대인들의 언어와 문화가 현대 이스라엘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지워지고 새로운 유대 정체성이 탄생하는 과정을 비판할뿐 아니라, 애잔한 감성을 가지고 바라본다.


1960년대까지, 시오니스트이든 아니든 대부분의 유대교 역사가들은 인구 통계적 증가에 대한 한 가설을 받아들였다.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동부, 그리고 코카서스의 스텝 지역에 있었던 중세 유대 카자르 왕국의 존재가 아마도 현대 유대 역사에서 가장 큰 인구 통계적 증가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의 다른 유대 공동체들과 달리, 동부 유럽의 유대 인구는 비유대인 이웃들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과 문화를 보존해 왔다. 프랑스, 이탈리아, 서부 독일, 이베리아 반도, 북아프리카 그리고 비옥한 초숭달 지대를 아우르는 북부 지방에서 유대인들은 개종한 토착민들이건 이주자들이건 상관없이 주변 이웃들과 일상생활 방식을 공유했다.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수 세기 동안 분리된 구역이나 별개의 지역에서 다수 집단 혹은 최소한 큰 소수 집단을 형성하며 무리지어 있었다. (75쪽)


유연하고 비교적 상징적인 종교 관행을 받아들인 서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소규모 유대 공동체와는 달리, 동유럽의 이디시어 사용자들은 자신들을 비유대인 이웃들이나 환경과 확실히 구분시키는 엄격한 예배 방식을 고수했다. 많은 면에서 이러한 형태의 종교 근본주의는 가장 엄격한 기독교 정교회의 풍조와 닮아 있다. 

하지만 현대화와 세속화가 시작되면서, 이 완고한 명령의 세계는 유대 가족들의 세속화된 상당수 후손에게 명백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지나치게 폐쇄적인 종교 전통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대인의 많은 아들딸이 무신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차르의 손아귀에서 범슬라브 민족주의는 무엇보다도 억압을 조작하는 도구로 쓰였다. 그래서 범슬라브주의 내부와 그에 대항하는 쪽 모두에서 여러 언어와 종교로 말미암은 지역적이며 분열된 민족 요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종족 중심적인 민족주의 경향을 지닌 현대의 불관용을 극대화한 것은 이디시 인구의 존재였다. 

1880년대 차르에 의한 포그롬의 시작, 그리고 무엇보다도 러시아 제국 내 유대인 정착지의 견딜 수 없는 생활 조건은 유대 공동체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이주민들이 비엔나, 베를린, 런던, 뉴욕,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1880년대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최소한 3백만 명이 터전을 잃고 길 위로 내몰렸다.

19세기 말 근대화 과정이 시작되면서 이디시인들은 형태를 갖추며 통합되어 가고 있었다. 포그롬과 추방은 이들이 대면했던 첫 번째 타격이었다. 두 번째 타격은 볼셰비키 혁명에서 나타났으며, 그 혁명은 유대라는 특정 문화의 다양한 표현들을 행정적인 수단을 통해 억압하려 했다. 세 번째이며 윤리적인 타격은 나치가 일으켰으며, 이들은 유럽에 남은 유대인 중 다수를 물리적으로 절멸시켰다. 그리고 시오니스트가 이디시 언어와 문화적 관습을 쓸어버리면서 네 번째 타격이 가해졌다. (75-79쪽) 


풍부했던 이디시 문화는 이제 사라졌다. 이 동유럽 유대인의 언어를 수업으로 듣는 학생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이 언어로 소통하거나 창작을 하지는 않는다. 

또 사라진 것은 현재 폴란드 지역인 러시아 제국에 있었던, 거대한 유대 사회 민주주의당인 분트의 섬세한 꿈이다. 시오니즘과 달라 분트는 생생한 민중 문화에 기반을 두었고 그래서 유사 민족적 계급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종교의 탈을 쓸 필요가 없었다.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 이디시어의 여러 방언으로 말했던 사람들의 숫자는 천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21세기 초에 이들은 겨우 수십만 명으로 줄었고, 주로 엄격한 정통파인 ‘신을 두려워하는 자들 God fearers’ 즉 하레딤 사이에 남아 있다. 이디시 민중 문화는 지워지고 완전히 사라져서 소생할 희망이 없었다.

이디시 식민주의자들은 멸시받는 자신들의 모어를 재빨리 버렸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첫 번째는 전 세계의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언어였다. 그래서 초기 시오니스트들은 러시아 제국의 유대인 정착지의 비참한 마을들뿐 아니라 자신들의 부모와 조상이 가졌던 민중 문화와도 결별한 신유대인들을 만들기로 했다. 

새로운 언어의 주요 어휘는 성서에서 가지고 왔다. 하지만 그 형식은 아람어와 아시리아어였으며(즉, 히브리적이라기보다는 미쉬나에서 가져온) 구문은 대부분 이디시어와 슬라브적인 언어로, 결코 성서의 언어와 비슷하지 않았다. 이 언어는 오늘날 ‘히브리어’로 잘못 불리고 있으나 진보적인 언어학자들의 주장을 따라 ‘이스라엘어’로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적합할 것이다. (86-88쪽)


이스라엘 국가가 만들어진 기반을 마련한 것은 여러 동유럽 국가들에서 온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 개인들은 유대교에 맞선 세속주의자들이었지만,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의 식민화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이 땅에 대한 합법적인 소유권을 제시하는 성서에 호소했다. 그 후 시오니즘은 다양한 유대 공동체들의 과거를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혼합 집단들의 밀도 있고 다양한 프레스코가 아닌 고향 땅에서 쫓겨나 떠돌아다니면서 2천 년 동안 그 땅에 돌아올 염원을 했다고 하는 어떤 한 인종의 직선적인 역사로서 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오니스트 사업은 그런 모순에 대한 부끄러움도 없이 바빌론에서의 추방의 과거와 함께 완전히 무너져 버렸던 문화를 창조해내고자 했다. 한 예를 들자면, 문화적 엘리트들과 좋은 가문 출신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배 시기의’ 이름을 히브리어 이름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크게 퍼져 갔다. 신세대 부모들은 열광적으로 성서를 넘기면서 소위 촌스러운 모세, 야코브, 다비드, 슐로모와 같은 이름들과는 다른, 드물고 강인한 이름을 찾고자 애썼다. 누가 봐도 이상하고 고리타분한 탈무드 랍비의 이름들도 제외되었다. 

유대 전통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가나안식 이름들이나 유대인들이 입 밖에 내 본 적도 없던 이름들이 특히 주목을 받았다. 다비드 그린은 다비드 벤 구리온에게 그 자리를 물려 주었고, 시몬 페르스키는 시몬 페레스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츠하크 라빈은 원래 루비트조프였고 에후드 바락은 브록이었으며, 아리엘 샤이너만은 샤론이 되었다. 그리고 베냐민 네타냐후의 아버지는 원래 밀레코프스키였고, 샤울 모파즈는 젊은 시절 샤람 모파자카르였다. (100-101쪽)


원래 색깔을 버린 동유럽계 유대인들의 '현대 이스라엘-유대인 만들기'는 내부의 위계와도 관련 있었다. 이 문제는 이스라엘이 세계 여기저기서 유대인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해 멋대로 지은 정착촌의 유대인들은 대개 건국 이후 한참 지나 입국한 가난한 유대인들이며, 중동에 뿌리 내리고 수천 년 살아온 미즈라히들은 2등 국민 취급을 받으며,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온 '흑인 유대인'들은 이주노동자 처지로 살아간다.


이런 히브리적 정체성은 그 국가가 창조되기도 전에 만들어졌으며, 이스라엘 안의 노동 계급을 형성했던 이주자 대중과는 문화적으로 상당히 차별화되었음을 드러내는 표식이었다. ‘히브리성 Hevrewity’은 주로 문화적, 정치적, 군사적 엘리트들의 관행 상의 성격이었다. 

그들은 이 작업을 위한 두 가지 고삐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하나는 교육 제도였고 다른 하나는 군사 기관이었다(그리고 정도는 덜하지만 언론도 있었다). 모든 학교에서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이스라엘인으로서 말할 것과 히브리어로 읽을 것을 가르쳤고, 영웅적이고 세속적인 이야기로 성서를 가르쳤다. 역사에서 중요했던 것은 고대에는 상상 속의 히브리 주권 국가였고, 현대에는 현실의 이스라엘 주권 국가였다. 의무 교육과 함께 군 복무는 강렬한 용광로였으며, 새로운 정체성과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했다. 엘리트와 이주자 대중들은 이 위계적인 기관들을 통해서 가장 강력하게 접촉했다. (102-103쪽)


유대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에서 홀로코스트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이것이 이스라엘 건국 초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이 유대인 희생자들을 원치 않았고 박대했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다. 


아이히만의 재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는 1970년까지도 대학살을 학교 교과 과정에 등장시키지 않았다. 전 세계 유대 기관들이 그 주제를 극도로 꺼렸으며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이 시기에는 생존자들을 인터뷰해서 그들의 고통에 대한 증언을 듣거나 영상으로 남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많은 이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해 수치스러워했던 것이다. (119쪽)


1960년대 이래 서서히 절대적인 공포에 대한 인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냉전은 새로운 분위기를 요구했고, 독일은 막대한 양의 돈을 이스라엘에게 지불하며 생존자들에게 보상한 후 서구의 정치 문화와 NATO의 군사 기관에 무난하게 통합됐다. 이스라엘 역시 같은 기간에 대서양 동맹, 그리고 중동에서 미국의 완전하고 충실한 파트너가 되었다. 

1967년 전쟁 또한 이런 전환점이 만들어지는 데 공헌했다. 소위 이스라엘 방위군의 번개 같은 승리 덕분에, 이스라엘 엘리트를 괴롭혀 오던 ‘수치심’이 사라졌다. 이스라엘은 강자가 되었던 것이다. 어제는 약하다는 이유로 숨겨졌던 유대인 희생자들이 이제는 유대 순교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역사적 학살에서 가장 돋보이는 자리를, 역사 속에서 다른 범죄의 희생자들과 결코 같은 위치에 놓일 수 없게 된 유대인 희생자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들은 희생자들의 기억이 서구의 기억 속에 새겨져야 한다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으며, 고통에 대한 특별하고도 독점적이며 전적인 민족적 소유권을 요구했다. 단지 경제적 자본뿐 아니라 명성에 관한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과거를 극대화하는 홀로코스트 산업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 시작되는 때가 바로 이 시점이다. 그래서 다른 모든 희생자는 사라지게 되었고 그 대학살은 오직 유대인만의 문제가 되었다. 이제는 다른 민족의 학살과 비교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모든 과거와 현재의 범죄들은 2차 세계 대전 중의 유대인 대학살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어야 했다. (120-121쪽)


시오니스트의 수사법은 점점 더 처형자가 아닌 희생자의, 나치가 아닌 유대인의 영원한 특수성을 고집해 오고 있다. 다시 말해, 히틀러와 같은 학살자들은 어디에나 있지만, 유대인과 같은 희생자들은 결코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었다. 가말 압델 나세르는 ‘신히틀러’라고 불린 첫 번째 사람이었고, 팔레스타인의 야세르 아라파트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그 뒤를 이었다. 가장 최근에는 이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에게 이 역할이 돌아갔다. 

이스라엘에서는 1970년대 쇼아 ‘2세대’라는 공직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지금은 ‘3세대’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이렇게 다른 자본과 마찬가지로 과거 고통에 대한 상징적인 자본도 증여될 수 있는 것이다. ‘선택된 민족’의 옛 종교적 정체성은 점차 ‘선택된 희생자’일 뿐 아니라 ‘독점적인 희생자’라는 현대의, 그리고 매우 효과적인 세속적 문화에 자리를 내주었다. (123쪽) 


가장 역설적인 것은, 그래서 이 '유일무이한 희생'을 강조하고 자기네 상징이자 상표로 동원하느라 이스라엘이 세상의 모든 차별과 학살을 폄하한다는 것. 자기네가 팔레스타인 아랍계에 가하는 차별은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우기고, 세상 어떤 다른 재앙에도 '홀로코스트'같은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인종차별 철폐회의가 열렸을 때 아랍국들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을 문제삼으려 하자 '인종문제 아니다'라고 발광하던(미국이 이스라엘 편들어줌) 기억이 난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입조차 떼지 못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아버지에게 어떻게 그 사람을 알아보았는지 물었다. “눈 때문이지."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 눈은 파란색이었는데요?" “모양이냐 색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표정을 말하는 거다." “무슨 표정이요?" “무상하면서도 슬픈 표정, 두려움과 깊은 불안의 표식이지." 아버지의 설명이었다. “그런 식으로 폴란드에서 독일 군인들이 유대인을 찾아내기도 했단다. 하지만 걱정 말거라,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더는 그렇지 않단다." (59쪽)


내 주변의 유대 이스라엘인들은 마치 그녀가 완전히 투명인간인 것처럽 그녀를 못 본 척했다. 이것은 탑승 시의 일반적인 광경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항상 다른 승객들과 분리되어 특별 심문과 검색을 받는다. 그녀의 표정은 아버지가 유대인의 눈에서 보는 그 표정의 내용과 정확히 들어맞지 않았지만, 거기에도 역시 슬픔이, 공격을 당한 경험이, 그리고 깊은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나를 향해 미소지었고, 그 표정은 곧 체념으로 바뀌었다. (150쪽) 


책 앞머리에서 슐로모 산드는 자기 아버지와 유럽에서 겪은 일화를 소개한다. 외양으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을 '유대인'으로 콕 집은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말이 맞다는 걸 알게 됐을 때의 놀라움. 홀로코스트를 겪은 이들의 설움과 슬픔이 표정에 묻어난다는 건 누가 뭐래도 마음 아프다. 현대 이스라엘의 악행과 상관없이 홀로코스트는 인류의 원죄 격이다. 저자도 그걸 부인하지 않는다. 



뒷부분에서 산드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저자는 팔레스타인인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스라엘 국민의 20% 이상이 아랍계 이스라엘 국적자다)에게서 그와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두려움과 슬픔의 표정을 본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국가에서 ‘유대인’이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여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스라엘에서 유대인이라는 건 무엇보다도 유대인이 아닌, 특히 아랍인인 사랍들에게는 거부된 특권을 누리는 혜택받은 시민들이라는 뜻이다. (163쪽)


종교적인 신앙인이 아닌 단지 휴머니스트이고 민주주의자고 자유주의자인, 최소한의 정직함을 가진 개인들이 자신을 계속해서 유대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자신을 이스라엘 국가 내의 유대인으로 규정하는 것이 자기 주변에 참을 수 없는 불의를 만들어 내는 특권을 가진 카스트에 귀속되는 바로 그런 행동인 것은 아닐까? (165쪽)


그의 자각은 이제 '유대인이기를 거부한다'는 선언으로 나아간다. 그 나라 국민임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에 귀화하지 않는 이상, 이스라엘에서 그는 신분증명서에 '유대인'이라고 찍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럼에도 그는 선언한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에 대해 집착했던 것이 박해자와 그 지지자들이 만들어 낸 허구적 종족에 동화되었던 결과라는 사실을, 그리고 세상에는 내가 선민과 그 신봉자들로 구성된 배타적인 당파의 한 일원으로 보였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유대인이기를 그만두고 나 자신을 더는 유대인으로 간주하지 않으려고 한다. (184쪽)


공화주의적인 정치적 가능성을 구체화하고 공고화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부족적 신비주의를 버리고, 타자를 존중하고 동등하게 반기는 것을 배워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의 정체성 정책을 바꾸려는 생각 이전에, 우리는 저주받은 점령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해야 한다. 점령은 끝도 없이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하고 있다. 마치 너무 큰 제물을 삼킨 신화 속의 뱀이 그걸 뱉기보다는 숨이 막혀 죽는 쪽을 택하는 것과 같다. (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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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 - 그저 살다보니 해직된 MBC기자, 어쩌다 보니 스피커 장인이 된 쿠르베 이야기
박성제 지음 / 푸른숲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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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네 얼굴이 빨개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어. 넌 달빛을 받아 반짝이던 연못의 수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지. 그런 네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물에 비치는 달빛 같은 사람이라야 너의 애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준비에브, 애인 있어?" 넌 깔깔대고 웃으며 고개만 내저었지. 네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한 계절은 꽃을 피우고, 한 계절은 열매를 맺고, 다시 어떤 계절은 사랑을 가져다주었지. 인생은 그렇게 쉬웠어.


생 텍쥐페리의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린왕자>나 <야간비행>보다, 나는 이 구절이 실린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라는 책을 더 좋아했다. 특히나 저 문구의 마지막 문장, 인생은 그렇게 쉬웠어.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을 연상케 하는 청춘의 한 때. 먼 훗날 우리 삶을 돌아보면서 '인생은 그렇게 쉬웠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적어도 삶의 어느 한 때에 나는 인생이 그렇게 쉽다 생각했다고, 웃으며 돌아볼 수 있을까.


그런데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삶은 쉬이 흘러가지 않는다. 넘기 어려운 고비나 간난고초가 아니더라도 인생에는 늘 우연이, 때론 수상쩍은 사건이 끼어든다. 6년 전의 어느 날을 떠올려 본다. 여름휴가 전날이었다. 일은 많았고, 뭐라도 좀 해놓고 휴가를 떠나야 했기에 늦도록 회사에 남아 있었다. 그날 밤 회사 문을 나서다가 사람들이 지나가는 걸 보았다.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그 사람들의 무리 속에 내가 아는 얼굴이 있었던 것만 말해두자. 아무튼 나는 그날 밤, 대학을 졸업하고 줄곧 일해왔던 직장을 그만두기로 마음 먹었다. 이렇게 우연은 끼어든다. 우연인 듯 우연 아닌 우연 같은 사건이. 어쩌면 그래서 삶은 재미있고, 때로는 힘겹고, 앞날은 예측불허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MBC 노조위원장을 지냈다는 이유로 해고된 박성제 기자의 책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를 읽었다. 이런 종류의 에세이에 나는 익숙지 않다. 하지만 일요일 오후 가을날의 햇살을 받으며 순식간에 책장을 넘기고 또 넘겼다. 책은 재미있고 우습고 아프고 슬펐다. 아마도 책의 앞쪽 3분의 1을 읽으면서는 좀 울기도 했던 듯 싶다. 책은 "그저 살다 보니 해직된 MBC 기자, 어쩌다 보니 스피커 장인이 된" 사람의 이야기다. 띠지의 표현을 빌면 "20년째 다니던 직장에서 졸지에 쫓겨난 중년 아저씨의 우여곡절 인생 2막 개척기"다.


"만약 내가 헐크였다면 그 순간 인사위원회장은 풍비박산 났을 것이고, 내가 늑대인간이었다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갈가리 찢긴 시체가 됐을 것이며, 내가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발사할 수 있었다면 모두들 시커먼 숯덩이로 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침착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어차피 해고는 정해진 것. 차분하게 대처하자. 그게 이기는 거다. 억울함과 분노를 꾹꾹 눌러 삼키면서, 천천히, 경고하듯, 최대한 냉정해 보이도록, 나는 말했다."


한국의 밥 우드워드를 꿈꾸며 특종을 줄줄이 했던 잘 나가는 기자의 취재 스토리라면 애당초 나 같은 아둔하고 꿈도 의지도 없는 사람이 책장을 펼칠 일도 없었을 터다. 어쩌다 보니 해고됐고, 직장 잃고 마냥 놀 수만은 없으니 '인격수양' 삼아 목공을 배우기 시작했고, 식탁과 와인장 따위를 만들다가 어릴적부터 좋아했던 스피커 만들기에 도전했고, 하다 보니 디자인에 소질이 있어서 스피커 회사를 차려 나름 '사장님'이 된 아저씨. 그는 '어쩌다 보니'라 말하지만 우린 안다. 인생의 '어쩌다 보니'에 100%의 우연은 없다는 것을. 


사실 나는 기자로서 그의 모습을 잘 모른다. 어떤 분야에서 주로 취재했고 어떤 스타일의 리포트를 했으며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졌는지 모른다. 방송 뉴스조차 제대로 안 보는 나같은 게으름뱅이는 보도를 하는 그의 모습을 TV에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 가운데 그가 '어쩌다 보니'의 주인공이 된 것은 그가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소한 그는 '부작위'의 혐의로부터는 벗어나 있다. 


나는 그가 한 커뮤니티 웹사이트에 올려 놓은 목공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영상 속 그는 '사포질'을 하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 관련 동호회 사이트에 올린 동영상이었지만 배경음악 하나, 대사 한 마디 없이 그는 정말 사포질만 했다. 만약 그가 차인표 같은 배우였다면 '분노의 사포질'이 됐을 것이고 김동성 같은 선수였다면 '분노의 질주'가 됐겠지만 안타깝게도 동영상 속 그는 얼굴도 몸매도 '분노의 OOO'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앞치마를 걸친 곰처럼 그저 사포질만 하고 있었다. 그가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 오늘날의 그가 된 건 그렇게 사포질 하듯 살아왔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다시 생 텍쥐페리의 책으로 돌아가 본다. "캄캄한 어둠 속을 비행하며 우리는 밤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불빛, 어둠을 뚫고 새어나오는 불빛들. 몇몇은 외로운 집에서 나오는 빛이리라. 탁자에 팔꿈치를 괸 채 등잔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농부는 자기의 소망을 누군가 알아채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자기의 소망이 빛을 품고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등잔이 자기 집의 초라한 식탁만을 밝혀 준다고 생각하지만 절망하듯 비틀거리며 타오르는 그 불빛의 소리를 누군가는 먼 곳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책 한 권으로 타인의 인생을 훔쳐보는 것은 재미있지만 어떤 사람의 삶도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책에는 익살이 넘쳐난다.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튄' 아빠 같이 태평하다. 그러나 책은 소설이 아니다. 유신 시절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뒤 평생 언론민주화 투쟁을 해온 성유보 선생이 며칠 전 돌아가셨지만, 우리 앞에는 우리 시대의 해직 기자(언론인)들이 남아 있다. "그 때, 인생은 그렇게 쉬웠어"라고 언젠가는 이 중년 아저씨도 말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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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6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야놀러가자 2015-12-07 21:40   좋아요 0 | URL
앗 순오기님 이 댓글을 이제야 봤어요. 감사합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따뜻한 위로네요. :)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 - 세 딸을 폭격으로 잃은 팔레스타인 의사 이야기
이젤딘 아부엘아이시 지음, 이한중 옮김 / 낮은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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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아이들과 단란하게 살아가던 집에 포탄이 떨어진다. 목숨과도 같던 사랑스런 딸들은 ‘조각난 몸뚱이’가 되어 방 안에 흩어졌다. 목이 달아난 딸들의 몸, 잘린 손발을 발견한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이 아버지는 그 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자식들을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낸’ 자들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그렇다”고 말하는 아버지가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난민촌 의사로, 이스라엘군 공습에 세 딸을 잃은 이젤딘 아부엘아이시(58·사진)가 그 사람이다. 삶을 파괴당한 뒤 오히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팔 평화공존 운동에 나선 아부엘아이시는 “전쟁에서 승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저서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서울을 찾은 그를 20일 만났다.

악수를 하려고 내민 그의 손을 붙들고 나는 "당신 책을 보면서 울었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 책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이니 그걸 읽고 우는 걸 바라지는 않는다"면서 웃었다. 그는 “남북한이 갈라져 긴장상태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이-팔 분쟁은 머나먼 남의 나라 일이 아닐 것”이라며 ‘비극이고 전쟁이었던’ 인생에서 희망을 찾아온 자신의 인생을 얘기했다.

아부엘아이시는 이스라엘에 점령당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자랐다. 인구 170만명,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가자는 그 자체가 거대한 난민촌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가자는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이 곳의 역사는 유구하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델릴라가 삼손의 머리칼을 잘라낸 곳이 오늘날의 가자지구”라고 소개했다. 그의 집안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전후해 터잡고 살던 곳에서 가자지구로 옮겨갔고, 그 후로 60년 이상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영구적인 난민’이 됐다.

자발리야 난민촌에서 보낸 그의 어린 시절은 전후의 힘겨운 삶을 살아낸 한국의 옛 세대들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는 “구호기구에서 준 ‘멜빵바지’를 처음 보고 어떻게 입고벗나 고민한 적도 있다”며 “유엔이 주는 우유배급표를 모아 우유를 받아 팔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지우개를 잃어버릴까 실에 꿰어 목에 걸고 다니며 글을 배운 그의 꿈은 “교육을 잘 받아 난민촌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집 잃고 땅 잃은 부모도 9남매의 장남인 그의 교육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부모의 바람대로 공부를 잘 해 이집트에 유학한 뒤 의사가 됐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생활은 여전히 대가족 중심이고, 그도 여덟 남매를 뒀다. 하지만 성공적인 듯했던 그의 삶에 2008년부터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내 나디아가 급성백혈병에 걸린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이자 불임치료 전문가인 그는 가자지구와 이스라엘의 병원을 오가며 일하고 있었다. 아픈 아내를 이스라엘의 병원으로 옮기고, 숨진 아내의 주검을 다시 집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그는 ‘검문소의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운명을 맡겨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금 절감했다. “없어도 그만인 그림자 같은, 최소한의 존엄도 없는 존재로 취급당하는 모멸감”을 겪으며 아내를 떠나보냈다.

2009년 1월 16일,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군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고 있었다. 아내가 숨진 지 몇달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이스라엘 친구가 많은 팔레스타인 의사였기에, 이스라엘 방송에 매일 전화로 가자지구의 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의 참상을 자국민들에게 감추려 했지만 진보적인 유대인 저널리스트 슐로미 엘다르는 아부엘아이시의 목소리를 TV에 내보내며 전쟁 소식들을 전했다. 공습으로 아부엘아이시의 세 딸이 숨진 직후에도 전화는 연결됐다. 고통에 절규하는 그의 목소리가 이스라엘에서 전파를 탔고, 유튜브를 통해 세계에 퍼져나갔다. 그의 호소는 가자 침공의 참상을 알리는 상징이 됐다.

4년이 지났지만 딸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처지를 한탄하며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고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지만 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보복과 응징 대신 공존을 믿지만 왜 딸들은 죽고 나는 살아남았는지 궁금할 때가 종종 있다.” 

책에는 '그 날'의 풍경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이 글 앞머리에 올린, 산산조각난 딸들의 몸과 그 방의 풍경이. 그걸 눈으로 보고도 어떻게 "그들을 증오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처음엔 '증오하지 않는다'라는 그의 책 제목을 보고 화가 났다. 왜 증오하지 않는가? 그런 짓을 당하면서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당신이 힘 없는 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아마도 나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누군가에 대한) 증오'를 같은 것으로 혼동했나보다. 아부엘아이시를 만났을 때,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에 얼마나 있나요, 하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었으니 다른 이들도 다 (증오를 극복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부엘아이시의 책에 당시의 감정에 대한 설명이 한 구절 나와 있다. 딸들이 희생된 뒤 자신 앞에는 '어둠(증오)의 길과 빛(용서와 공존)의 길' 둘 중 하나로의 선택이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를 증오가 아닌 평화의 전달자로 일으켜세운 것은 역설적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부상을 입은 채 살아남은 다른 자식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의사들이 도와줬다. 팔레스타인 테러로 딸을 잃은 이스라엘 아버지를 만나 마음을 나눈 경험도 있었다. 실상 이스라엘에도, 아부엘아이시처럼 '화해하고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럿 있다. 그들이 다수라고 할 수는 없어도, 아예 없지는 않다. 팔레스타인이 약하다보니 용서와 화해를 강요받는 것 아닌가, 하는 내 속좁은 의문은 거둬두기로 했다.

물론 딸들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에게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교류해온 경험이 있었다. 어릴 때 돈을 벌려고 유대인 농가에서 일했던 경험, 훗날 의사가 되어 찾아갔더니 그 농가 주인이 아들처럼 따뜻하게 맞아주더라는 경험, 불임치료 연구를 하고 석사,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이스라엘 의사들과의 만남 등등 다른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비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나눈 경험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를 유독 그만의 경험이라 할 수는 없다. 유대인(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유사 이래로 그 곳에서 공존해왔고, 지금도 실상 경제적으로 서로 얽매여 있는 처지다. 정치인들이나 군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교류는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이스라엘을 향해  “안전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라고 호소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아들딸을 보며 미래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잘 생각하라”고 말한다. 보복의 악순환으로는 아무것도 풀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코소보, 남아프리카공화국, 북아일랜드 분쟁이 모두 풀렸다”며 “중동 분쟁이라고 해법이 없을 리는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의사다. 환자가 낫지 않으면 잠시 치료를 멈추고 환자의 상태를 다시 살피고, 치료 과정에 문제가 없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게 의사의 일이며,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2010년 ‘생명의 딸들(Daughters for Life)’이라는 재단을 만들었다. 숨져간 세 딸, 베싼, 마야르, 아야를 기리며 팔레스타인 여성 교육과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하는 재단이다.

분쟁의 와중에도 두 나라 사이엔 풀뿌리 연대운동이 조금씩 퍼지고 있다. 평화캠프나 여름학교, 평화의 전화, 교육·의료 프로그램이 활발히 이뤄진다. 아랍계와 유대계가 함께 하는 농구 리그도 있다. 아부엘아이시는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 중 하나는 여성에게 주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 지위향상은 팔레스타인 안에서도 민감한 주제이지만 그는 여성들이 교육을 받고 제 목소리를 내는 것이 평화를 앞당기는 길이라 믿는다. 그는 “여성들을 가르치고 평화에 앞장서도록 하는 것이 내 딸들을 다시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팔 공존이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노력으로, 그 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고 싶을 뿐이다. 벨기에 정부는 2010년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아부엘아이시는 2009년 여름 아이들과 캐나다로 이주, 토론토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영구 이주는 아니며 가자지구로 조만간 돌아갈 예정이다. 아이들은 가자로 돌아가고 싶어하는지 물었다. 살아남은 아이들에게도 엄청난 트라우마가 남아있을 터이니 말이다. "아이들 뜻은 아직 모르겠지만, 존중해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가자로 돌아가는 시기를, 아이들이 원하는 시기에 맞추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자로 돌아가는 것은 그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분쟁이 벌어지는 바로 그 사회(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풀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자가 그에게는 "대가족이 남아있는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그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한신대학교,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등을 방문해 의료관계자와 독자들을 만난다. 1시간 반 정도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나는 "팔레스타인에 꼭 가보고 싶은데 아직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8월에 가자지구로 돌아가 잠시 체류할 예정이니 혹시 올 수 있다면 꼭 방문해달라"고 했다. 그럴 기회가 과연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내가 겪은 일은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분쟁과 증오와 불의의 하나일 뿐”이라며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분쟁의 현실을 이해함으로써 해줘야 할 역할들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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