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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aw Ramallah (Paperback, Reprint)
Murid Barghuthi / Anchor Books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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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읽은 얼마 안 되는 책들 중, 마음의 울림이 가장 컸던 책이다. 읽으면서 가슴이 시큰했고, 오며가며 책장 넘기다가 갑자기 서글퍼져 눈물이 핑 돌 때도 많았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뿌리내릴 곳 없는 자의 슬픔. 저자인 무리드 바르구티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다. 이것으로 많은 부분이 설명이 되려나.

그의 고향은 라말라,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중심도시로서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소재하고 있는 곳이다. 바르구티라는 성(姓)은 아주 흔해서, 팔레스타인에서는 ‘열 명 중 하나는 바르구티’라고 한다. 실제로 PA 지도부에도 바르구티라는 성을 가진 이들이 여럿 있어서, 외신에서는 심심찮게 그 이름을 볼 수 있다.
무리드 바르구티는 라말라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인생은 자기 고향에서 보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 고향을 다시 밟기도 힘들었다. 이집트 카이로에 유학을 갔던 그는 그곳에서 67년의 전쟁을 맞는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 대부분을 앗아간 ‘점령(the Occupation)’으로 귀결됐던, 이른바 ‘3차 중동전쟁’이다. 그의 고향은, 라말라는, 요르단강 서안은,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점령’됐고 국경은 막혔다. 이제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렇게 그는 난민이 되었다.
1980년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이스라엘하고 손을 잡아버린다. 중동아랍권의 맹주라는 이집트가 ‘아랍국가들 중 (요르단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해버린 것이다. 이집트는 더 이상 팔레스타인의 편이 아니다. 이집트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팔레스타인 망명단체들과 운동가들은 추방당한다. 카이로에서 대학을 나와 이집트 여성과 결혼해 시인으로 살고 있던 무리드 바르구티 역시 추방 대상이 됐다.
이렇게 그는 이중의 난민이 됐다. 역시 문인이자 대학교수였던 이집트인 아내와 돌배기 어린 아들을 카이로에 남겨둔 채, 그는 이집트에서 쫓겨나 세상을 떠돈다. 이 책은 그렇게 뿌리 뽑힌 채 살아가야 했던 한 지식인의 자기 기록이다. 떠돌아다니는 사람, 세상 어디에도 ‘나만의 풀뿌리 하나’ 심을 곳 없는 사람.

"떠돌이는 언제나 주거지 등록을 갱신해야 하는 사람이다. 주거지등록 신청서의 빈 칸을 채우고 인지(印紙)를 사 붙인다. 떠돌이는 끊임없이 ‘증거’를 제출해야 하는 사람, 언제나 ‘어디 출신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혹은 ‘당신네 나라는 여름에 더운가요?’와 같은 질문을 받을 수도 있겠다.
떠돌이는 자기가 머무는 나라의 자세한 사정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건 그들의 ‘내부적인 정책’일 뿐이라는 걸 곧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 ‘내부적인 정책’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 나라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떠돌이에게는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나라 사람들에게 두려운 일은, 모두 떠돌이에게도 두려운 일이다. 시위가 일어나기라도 하면, 비록 떠돌이는 그날 조용히 방안에 있었다 할지라도, 언제나 그는 ‘시위에 끼어드는 요소’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떠돌이는 존재하는 장소와의 관계가 어긋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 곳에 다가가려 하지만 동시에 그 장소를 밀어낸다. 떠돌이는 일관된 내러티브 속에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람, 순간만을 사는 사람이다. 기억조차 그의 명령에 저항한다. 그는 자기 안의 숨겨진, 고요한 곳에 머문다.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조심하고, 그것을 캐내려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떠돌이는 전화벨 소리를 반가워하면서도 두려워한다. 친절한 이들은 그에게 “여기가 네 두 번째 집이라고, 친척들이랑 같이 사는 거라고 생각해”라고 말한다. 낯선 티를 내면 무시당하거나 동정을 받는다. 동정을 받는 것이 멸시당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그 월요일 정오에 나는 추방당했다."


displacement. 난민은 영어로 refugee 라 하고, 국경을 넘지 않고 한 나라 안에서 집을 잃거나 해서 떠도는 유민(流民)들은 (internally) displaced person 즉 ‘IDP’라 부른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67’이라는 공포의 숫자로 남은 그 전쟁으로 바르구티는 displaced 되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두번째 집’에서도 displaced 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사실상 너나없이 모두 이렇게 정처를 잃었다. 아버지는 요르단에, 어머니는 팔레스타인에, 큰 아들은 돈 벌러 사우디아라비아에, 작은 아들은 공부하러 카이로에, 딸들은 시집가서 아랍에미리트에, 삼촌은 불법이주노동자로 프랑스에. 이런 일이 허다하다.
뿌리 뽑힌 바르구티는 곳곳의 아파트들과 호텔을 전전한다. 떠돌이에게는, 호텔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꽃병의 물을 갈아줄 의무가 없다. 그래서 그는 화분 하나, 꽃병 하나를 보면서도 슬픔을 느낀다. 그의 글은 너무 슬프다. 여러 나라로 흩어진 가족의 전화를 늘 기다리지만, 혹시나 그 전화가 이스라엘군의 총에 맞은 어느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일까 늘 두렵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나날들.

93년 이츠하크 라빈과 야세르 아라파트는 빌 클린턴 중재로 오슬로 평화협정에 서명한다. 책에는 여러 가지 층위가 있고, 이 책의 제목과 관련된 두 번째 층위는 거기에서 시작한다. 오랜 방황 끝에 간신히 이집트의 집으로 돌아갔더니 어느새 아들은 고등학생이 되어있다. 그리고 96년 어느 날 드디어 그는 고향 라말라에 갈 기회를 얻었다. 이스라엘이 국경을 ‘개방’해준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국경이라고는 하지만 그 국경의 통제권은 이스라엘이 갖고 있다. 이-팔 공동 통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이 모든 권한을 갖는, 그런 협상, 그런 개방.

라말라.
책은 그렇게 수십 년 만에 단 며칠 동안 라말라를 방문한 그가 느끼는 것들, 그가 돌아본 것들을 담고 있다. 라말라로 가는 다리를 건너는 그 순간이 그에게는 천년의 시간이자 인생의 모든 것을 되새기게 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돌아간 라말라는 또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시간이 멈춰져버린,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이스라엘에 빼앗겨 버린 도시에서 그는 절망과 희망,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맛본다. 이 세상 모든 곳이 ‘발전’하고 있을 동안 라말라는 ‘헤브루 국가 주변의 언덕배기 시골’이 되어버렸다. 점령은 사람들에게서 상상력과 배움과 모든 기회를 앗아갔다. 바르구티는 미래에 대한 꿈을 이제부터 다시 꾸어야 하는 사람들, ‘고향의 이방인’이 되어버린 그들과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책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비애와 고통을 담고 있지만 그렇다고 ‘정치 얘기’에 치중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은 최소한도로 제한되어 있고,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조차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자기 마음에 흐르는 생각들, 자신에게 강요된 느낌들을 보여주고 눈에 비친 것들을 전해줄 뿐이다.
바르구티는 나기브 마흐푸즈 문학상을 받은 시인이다. 아랍어로 된 그의 글은 읽지 못했지만, 영어로 된 이 책의 문장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정제된 슬픔, 담담한 희망을 잘 전해주는 문체. 영역을 한 아흐다프 수에이프 역시 이집트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라고 한다. 영문판은 2000년 출간됐고, 권두의 추천사는 바르구티처럼 팔레스타인 출신의 지식인으로 카이로에서 공부했던 에드워드 사이드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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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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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하나를 끼고 몇 년 씩 뒹구는 것은 내게는 드물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칼비노의 이 책,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대해서는 하도 오래전부터 집착 수준의 애정을 갖고 있던 터여서, 이제야 이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여길 지인들도 있겠다.
너무도 오래 전, 조너선 스펜스의 <칸의 제국>을 읽을 때에 ‘마르코 폴로와 쿠빌라이 칸의 대화’로 인용돼 있는 것을 옮겨 적어 놨었다. 그 때만 해도 이 책이 제대로 번역이 되어있지 않을 때였던지라, 인터넷에서 용케도 번역물이 돌아다니는 것을 찾아내 프린트를 해서 뒤적거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묶여 국내에 제대로 출간된 것은 2007년이다. 참 늦게도 나왔다. 너무도 기다렸는데. 회사에서 이 책이 말 그대로 ‘버려져 굴러다니는’ 것을 후배 녀석이 집어 들었고, 나는 눈빛 번득이며 그것을 다시 가로채어 내 것으로 만들었다. 이 책은 나와 운명으로 얽혀있으니까!
너무 아까워서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고 하면 말이 될까? 나는 이 책을 다 읽어버리는 것이 아까웠다. 제대로 된 책을 다시 손에 잡은 것은 출간된 그 해 6월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날 때였다. 나는 그 여행에 이 책이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타슈켄트의 기차역, 사마르칸드, 부하라, 히바. 역사 속에서 끄집어낸 듯한 그 몽환의 도시들, 사막의 오아시스들에서 나는 칼비노의 책을 읽었다.


“이 도시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길들의 계단 수가 얼마나 많은지, 주랑의 아치들이 어떤 모양인지, 지붕은 어떤 양철 판으로 덮여 있는지 폐하께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말씀드리는 게 아무것도 말씀드리지 않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도시는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도시 공간의 크기와 과거 사건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과거는 마치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거리 모퉁이에, 창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든 단편들에 담겨 있습니다.”



마르코 폴로가 황제에게 보여주는 도시들은 어디에도 없으면서 어디에든 있는 곳들이다. 어쩌면 그것들은 고향, 자아, 혹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각 도시마다 정확하게 말로 표현되는 기본적인 정보들에 뒤이어,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거나 손등 혹은 옆면을 보이기도 하고 곧게 혹은 사선으로, 격렬하게 혹은 천천히 움직여 소려 없는 설명을 덧붙였다.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대화 형태가 자리 잡았다. 손가락마다 반지를 낀 칸의 하얀 손이 베네치아 상인의 민첩하고 활기 찬 손에 품위 있게 대답을 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자라나면서 손의 움직임은 안정되기 시작했고 손을 바꾸거나 움직임을 되풀이할 때 그 각각은 영혼의 움직임과 모두 일치했다. 사물에 관한 어휘가 상품의 새로운 견본에 따라 새로워지는 반면, 소리 없이 몸짓으로 이루어진 설명 목록은 제한되고 고정되어 가는 경향이 있었다. 거기에 의지하는 기쁨도 두 사람 모두에게서 차츰 줄어들었다. 그들 대화의 대부분은 소리 없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직 자네가 말하지 않은 도시가 하나 남아 있네.”
마르코 폴로가 고개를 숙였다.
“베네치아.”
칸이 말했다.
마르코가 미소를 지었다.
“제가 폐하께 말씀드린 게 베네치아가 아니라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황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난 자네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걸 본 적이 없네.”
“도시들을 묘사할 때마다 저는 베네치아의 무엇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다른 도시들에 대해 자네에게 물어볼 때는 그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것이지. 그러니 베네치아에 대해 물어볼 때는 베네치아 이야기를 해야 해.”
“다른 도시들이 지닌 특징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잠재하는 최초의 도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제게 그 도시는 베네치아입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 베네치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도시에 대해 자네가 기억하는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묘사해야 했을 걸세.”
호수의 수면 위에 잔물결이 일었다. 송나라 때 지은 오래된 구릿빛 왕궁의 그림자가 물에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산산이 부서지며 반짝였다.
“기억 속의 이미지들은 한번 말로 고정되고 나면 지워지고 맙니다. 저는 어쩌면, 베네치아에 대해 말을 함으로써 영원히 그 도시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다른 도시들을 말하면서 이미 조금씩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저 이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는 상상을 하는 데 그쳤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담뱃대에서 천천히 위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연기는 한줄기 바람을 따라 흩어져버리기도 하고 공중에 그대로 걸려 있기도 했다. 대답은 그 연기 속에 있었다. 연기를 실어 가는 바람을 맞으며 마르코는 드넓은 바다와 산맥에 자욱하게 낀 안개를 생각했다. 안개가 걷히면서 공기가 메마르고 투명해지고 그와 함께 멀리 있는 도시들이 그 자태를 드러내곤 했다. 그의 시선이 가 닿고 싶은 곳은 그런 변덕스러운 안개와 구름의 막 그 너머에 있었다. 사물들의 형태는 멀리 있을 때 더 잘 구별되었다.
혹은 연기가 입에서 나가자마자 자욱하게 모이면서 천천히 멈춰버렸고 다른 광경을 만들어냈다. 그 광경은 대도시의 지붕 위에 고여 있는 증기들, 흩어지지 않는 불투명한 연기, 아스팔트 거리 위로 무거운 유독가스를 내뿜는 굴뚝같은 것이었다. 금방 사라지고 마는 기억 속의 안개나 건조하고 투명한 공기가 아니라 도시의 상처에 딱지를 앉게 하는, 불타버린 삶에서 타고 남은 찌꺼기,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생명체에 의해 부풀어 오른 스펀지, 움직이고 있다는 환영 속에 빠진 화석화된 존재들을 가로막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뒤범벅 같은 것이다. 당신이 여행의 끝에서 만나게 될 것들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쿠빌라이가 말했다.
“어쩌면 우리의 대화는 쿠빌라이 칸과 마르코 폴로라는 별명을 가진 두 거지들이 하는 대화인지도 모르네. 두 사람은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녹슨 잡동사니, 천 조각, 폐지들을 모아 쌓지. 싸구려 포도주 몇 모금에 취한 두 사람이 동방의 보석들로 주위가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폴로가 말했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쓰레기로 뒤덮인 황량한 땅과 칸 왕궁의 공중 정원만 남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나누어놓는 것은 우리의 눈꺼풀이지만 어떤 게 안이고 어떤 게 밖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쿠빌라이가 마르코에게 물었다.
“서양으로 돌아가면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고향 사람들에게 해줄 건가?"
“이야기하고 또 할 겁니다.”
마르코가 말했다.
“하지만 제 말을 듣는 사람은 자기가 기대했던 말만을 간직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폐하께서 귀 기울이시는 세계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고 제가 돌아가는 날 저희 집 거리를 오갈 짐꾼이나 곤돌라 뱃사공들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습니다. 또 제가 만약 제노바 해적들에게 잡혀 모험 소설을 쓰는 작가와 같은 감방에서 생활하게 되었을 경우, 말년에 작가에게 들려줄 수 있는 묘사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목소리가 아닙니다. 귀입니다.”
“가끔 내가 화려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현재에 포로가 되어 있을 때, 그럴 때면 자네의 목소리가 까마득하게 들려오곤 하지. 그 현재에서는 모든 형태의 인간 사회가 그 순환의 마지막 지점에 도달해 있는데, 앞으로 어떤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네. 그래서 나는 자네의 목소리를 통해 도시들이 살아가는. 그리고 어쩌면 죽은 뒤에도 다시 살아나게 될 보이지 않는 이유를 듣게 된다네.”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불행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제노비아, 죽은 사람들이 나타나 자신들을 알아봐 달라고 애원하는 아델마, 서로 떼어질 수도 서로를 바라볼 수도 없는 앞면과 뒷면의 평면 만으로 이루어진 도시 모리아나,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스스로의 과거를 파괴하는 클라리체, 산 사람들의 쾌락을 위해 근심걱정을 지하의 쌍둥이 복사판에 묻어버린 에우사피아, 완벽함을 쌓아가는 일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스스로의 텅 빈 항아리를 다시 채우는데 골몰하는 베르셰바, 풍요를 느끼기 위해 매일매일 쓰레기를 쌓는 레오니아, 멸균의 도시를 꿈꿨으나 결국은 오래된 책들과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괴물들에 점령당해버린 테오도라, 정직과 부정직이 뒤섞여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드는 베레니케.

그렇게 오래도록 끌어왔는데도, 칼비노와의 여행을 끝내고 나니 허전하고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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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 2009-09-09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니~ 저는 이 책... 너무 어려워요. ㅠㅠㅠ
지금 반쯤 읽는데 무슨 소린지 이해하기가.......

딸기야놀러가자 2009-09-09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울 게 머가 있어? 걍 스스슥 읽고 지나가면 되지....
 
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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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읽은 <도도의 노래>를 통해 절멸돼가는 동물들의 비명, ‘슬픈 멸종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내 동족이 죽어간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은 쉬운 듯하면서 어렵다. 감정 이입이 되지 않는다. 맬서스식 위기론이 통용될 정도로 인구가 많아 지구가 터질 지경인데 인간의 멸종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희귀종 개구리, 외딴 섬의 희귀 새를 생각하면서 역지사지의 심정이 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앨런 와이즈먼은 역지사지가 아닌 역(逆) 발상으로, ‘인간 멸종 이후’의 세상을 그린다. 책은 ‘세상 모든 인간이 어떤 사정으로든 지구상에서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전망하고 있다. 인간을 지구상에서 몰아낸 것이 ‘어떤 사정’이 될지는 중요하지 않다. 혜성의 충돌도 좋고, 전 인류의 동시다발 휴거가 일어났다 해도 좋다. 아무튼 지구에서 인간이 사라지면 우리가 말하는 ‘자연’은 인간들이 남긴 흔적들을 어떻게 지울 것인가.

저자는 한국의 비무장 지대를 포함해 아프리카 마사이족의 땅, 또 다른 DMZ인 키프로스, 터키 카파도키아의 지하도시, 거대한 파이프들이 미로처럼 얽힌 미국 텍사스의 석유화학지대, 뉴욕의 맨해튼, 용케도 살아남은 동유럽의 원시림 등을 돌며 인류가 남긴 흔적들이 지워지는 모습을 예측해보고 상상해본다.

책은 인간이 남긴 흔적들을 지구에 가해진 상처로 보는 시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탄소발자국’이 될텐데, 인간이 남긴 것이 어디 탄소의 흔적 하나뿐이랴. 화석연료에서 뽑아낸 그 많은 석유화학제품, 지구의 순환 사이클에서 소화가 이뤄지지 못한 채 수채 구멍에 걸린 머리카락들처럼 걸려있는 플라스틱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다 인류가 지구에 던져준 부담이자 짐인 것을.

우리의 죄과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놀랍게도, 우리 종족의 절멸 이후를 상상하는 과정은 신기할 뿐 아니라 즐겁기까지 하다. 맨해튼이 사라지고 텍사스 석유공장들이 터져나가는 장면, 우리 시대의 자랑거리들이 무너져 내려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장대한 폐허로 남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묘한 쾌감을 전해준다. 그리스계와 터키계로 나뉘어 아귀다툼을 하던 사람들이 사라진 이후의 북키프로스에서 폐허가 된 시가지에 풀잎이 돋고 나무가 자라는 모습, 분단의 땅 한반도의 허리에 새로운 생태계가 탄생한 모습(그 땅 밑의 지뢰들까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은 상상이 아닌 현실로 일어나고 있다. 언제 다시 ‘개발’이라는 이름의 상처내기가 시작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자연은 치유력을 갖고 있다니, 글로벌 환경파괴의 시대에 우리 자신의 멸종을 상상하며 조금은 즐거워해도 되지 않을까.

저자가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들을 통해 유추해낸 바에 따르면 인류가 사라진 뒤 단 이틀 만에 뉴욕의 지하철역은 물바다가 되고, 일주일 뒤에는 원자로들이 고장 난다. 3년 후엔 건물들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20년 뒤에는 파나마운하가 막혀 남북 아메리카가 합쳐진다. 100년 후 코끼리들이 스무 배로 늘어나고 300년 뒤엔 세계 곳곳의 댐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납이 토양에서 씻겨 내려가려면 3만5000년이 걸리고,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미생물이 진화하기까지는 수십~수백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지구가 인간의 흔적을 모두 지우기엔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린다. 50억년 뒤 태양이 적색거성이 되어 지구를 삼키고 난 뒤에도 인류가 남긴 방송 전파들은 우주를 떠돌아다닐 것이다. 상처를 내기는 쉬워도 치료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비록 영원히 우주공간을 떠돌 전파들을 내보내는 것까지 막진 못한다 하더라도(외계생명체들에게 공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까지 막을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지구의 생채기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많기만 하다.

신문 북 리뷰들에 대대적으로 소개됐던 책인데, 기대만큼이나 재미있었다. 너무 전문적이어서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쉽게 써내려간 것은 대단한 작가적 소질이다. 역 발상을 통해 인류가 저지른 파괴의 심각성을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어떤 책보다도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데에 효과적이었다. 세상을 발로 뛰며 전해준 소식들은 생생하고 알찼다. 저널리즘 교수인 저자는 ‘속보성’보다는 심층적인 정보와 ‘해석’이 점점 중요해져가는 시대에 글로벌 저널리즘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줬다.

국내에 출간돼 있는 <가비오따쓰>를 통해 와이즈먼을 이미 접한 바 있지만, 이 책은 정말 훌륭하다. 무엇보다 재미가 있었다. 환경 문제에 대한 책들은 꽤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지식’이다. 특히 기후변화라는 큰 테마에 밀려 상대적으로 요즘엔 관심권에서 멀어져가는 듯했던 플라스틱 문제를 비롯해, 각질제거제의 스크럽 알갱이들이 대부분 플라스틱이라는 놀라운 사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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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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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속이 후련하다. 나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을 믿을 수 없고, 이 책에서 도킨스가 한 말들에 대해 무지막지하게 공감한다. 속이 다 시원하네, 정말...

아직도 가톨릭의 그늘;;이 남아있는지라, 신은 없다, 종교라는 것은 환상이다 라고 내놓고 얘기하기가 어쩐지 좀 힘들었다. 주변엔 모두 종교 있는 사람들 뿐인 것도 그렇고... 또 일을 하면서 국제문제를 바라볼 때에도, 종교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다는 생각에 되도록 피하곤 했다. 시아 순니, 혹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싸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이면에 숨겨진 정치·경제·사회적 진실을 가릴 염려가 있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종교가 아닌 다른 ‘싸움의 원인’을 찾아보도록 하자... 는 것이 내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킨스의 말대로 종교는 사람들에게 ‘꼬리표’를 붙이는 가장 쉬운 기준인 것을 어찌하리. 종교는 세상 모든 죄악의 근원이다. 신 따위는 없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에선, 도킨스가 이 책에서 얘기하는 것 같은 진화론을 조목조목 따져보는 ‘과학적 논쟁’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종교적 보수파는 말 안 통하는 꼴통들이고, 온건파는 양심적인 체하는 멍청이들일 뿐이다.

책은 도킨스가 ‘눈먼 시계공’에서 진화의 시뮬레이션을 그려 보이며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설명했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데, 표현은 좀더 격렬하고 공격적이다. 도킨스는 특히 서방세계에서 ‘무신론자임을 선언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중요한 일인지를 얘기하면서, 신의 존재를 ‘논증’했다던 신학자(주로 기독교 측)들의 얼토당토않은 논리 같지도 않은 논리를 파헤친다. 그리고 자연선택과 점진적 진화가 어떻게 이 아름답고 경이적인 세상을 만들어냈는지 강조한다(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자세히 하지 않기 때문에 ‘눈먼 시계공’을 참조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 듯).
그리고 “신 따위는 없다”는 선언과 함께, ‘종교가 불필요한 이유’들을 펼쳐놓는다. 사실 신의 존재를 논하기 이전에, 사람들은 종교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이 괴로워서, 아이들을 착하게 키우기 위해, 이 찬란한 문화유산들을 위해 종교가 존재한다? 도킨스는 구약성서의 황당하고 잔혹하고 엽기적인 내용들을 예로 들면서 인간의 도덕, 최소한 현대사회의 보편적 도덕 감정은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8장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는 종교에 대한 그의 적대적인 태도가 ‘비과학적인 것들에 대한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종교를 욕하는 행위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도킨스가 이런 책을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욕을 먹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을 넘어서 무신론자임을 공개적으로 떳떳이 밝혀야 하고, 더불어 종교라는 것을 세상에서 없애버리기 위해 싸워야 한다! 왜냐? 종교는 진리를 향한 탐구정신에 재를 뿌릴 뿐 아니라, 분쟁과 살인과 여성·아동학대의 축으로서 죄악의 온상이기 때문이다. 절대공감!

그렇다면, 이 세상에 종교가 끊임없이 존재해온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종교가 그렇게 나쁜 것이라면 왜 그것이 생겨나서 지금껏 힘을 발휘하고 있는가. 도킨스는 이 부분 또한 진화심리학적 측면에서 설명하려고 시도하는데, 이 부분은 구체적이지는 않다. 다만 논리의 ‘실마리’를 제공할 뿐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어린이들이 위험한 상황을 피해갈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포의 기제들을 만들어내 왔고, 이런 기제에 대한 순응적인 태도는 어린이들이 무사히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효과적이었다. 나방이 왜 전등으로 뛰어들어 자살하는지를 묻는 것은 우문이다. 그것은 달빛, 별빛을 보고 날아가도록 진화한 나방 세상에 갑자기 인간들이 만들어낸 인공 불빛이 등장함으로써 생겨난 ‘부작용’에 불과하다. 도킨스는 종교 역시 인간의 진화적 필요성에서 생겨난 어떤 현상의 부작용일 것으로 추정한다. 또 인간이 현상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물리학적 입장보다는 목적 중심으로 보는 ‘지향적 입장’이 훨씬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점도 거론된다. 호랑이가 덤벼들 때 호랑이의 운동을 물리적으로 분석하다간 잡아먹힌다. 그저 “저놈이 날 잡아먹을테니 도망가자”라고 해석하는 편이 살아남기엔 훨씬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이런 진화심리학적 기제들은 인간에게 이른바 ‘종교적 심성’을 갖도록 하는 바탕이 됐다는 것.

또 하나, 밈 이론을 확장해가는 견지에서 그는 종교라는 밈이 일단 생겨난 뒤로는 그 자체로 생존력을 강화해가는 기제를 펼쳐나갔던 것으로 본다. ‘이단’으로 표현되는 다른 종교에 대한 성서의 극도로 배타적인 태도는 이에 대한 반증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그 배타적인 태도는, 팔레스타인을 향한 유대인의 태도(이 책에는 ‘타마린의 실험’이라는 유대 어린이 대상 설문조사 결과로 잘 설명돼 있다)나 탈레반 등 이슬람 극단주의,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처럼 대량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게 만드는 지경으로까지 이어진다. 당신의 온건한 종교가 근본주의자들의 토양을 만들고, 무고한 사람들에게 꼬리표를 달아 죽일 수 있다. 아니, 지금도 죽이고 있다. 그러니 종교를 버려라. 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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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리엔트 특급 살인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03-21 16:16 
            * 오리엔트 특급 살인 ‘아주 간단한 설명은 강도에 의한 우발적 살인이다.’
 
 
마립간 2008-03-2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저의 페이퍼에 태그합니다.

딸기야놀러가자 2008-03-21 17:24   좋아요 0 | URL
넵~

라주미힌 2008-03-21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저도 시원했어요. 막힌 변기 뚫린 것 마냥.
 
부의 기원 - 최첨단 경제학과 과학이론이 밝혀낸 부의 원천과 진화
에릭 바인하커 지음, 안현실.정성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경제학은 과학인가. 과학이라면, 어째서 실물 경제를 설명하는데 그렇게 무용한가.

원래 경제학은 생물학과 발걸음을 같이 했다. 맬서스 인구론을 생각해보라. ‘적자생존’을 경제에서의 흥망에 적용하면서 근대 경제학이 시작됐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경제학의 패러다임은 물리학을 닮은 쪽으로 바뀌었다. 경제를 수요-공급의 함수곡선과 ‘균형’ 개념으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물리학적 균형에 경도된 경제학에 진화라는 패러다임을 적용, 다시 되돌리자는 것. 저자가 제안하는 ‘생물학적 경제학’의 패러다임은 물론 적자생존 생물학과는 다른 ‘복잡계 경제학’이다.

여러 행위자들의 미시적인 움직임이 거시적인 패턴을 만들어내면서 행위자와 시스템이 공진화(共進化)하는 그런 체제를 복잡적응계(CAS)라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복잡계 경제학이란 말을 했더니, 누구는 “복잡계가 뭔데”라고 묻는다. 나도 잘 모른다. 쉽게 말하면, ‘복잡한 체계’가 복잡계다. 이렇게 복잡한데 어떻게 그럭저럭 잘 움직여나갈까 싶은 그런 것이 복잡계다. 서울시내에 1300만명이 사는데, 맨날 교통체증 붐빈다고 하면서 그래도 어떻게 교통시스템은 잘 굴러가네. 우리 몸은 참 누가 만들었는지 병균 들어오면 알아서 저항하고, 힘에서 밀리면 좀 아프다가 또 낫고, 추울 때 더울 때 생각하고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조절하고 참 신기하네. 이런게 복잡계다. 완벽한 설계자 없이도 어떻게든 돌아가는, 가끔씩 탈을 일으키지만 그런대로 돌아가는 그런 복잡한 시스템을 말한다.

경제는 복잡하다! 그런데 지난 세기의 경제학은, 경제의 바탕인 세상이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천재적인 분석가에다가 완벽한 정보를 갖고 빈틈없이 판단한다, 시장은 이렇게 퍼펙트한 사람들이 퍼펙트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공간이기 때문에 간간이 요동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수요공급의 황금률에 따라가게 된다는 걸 전제로 깔고 있었다. 그래서 증시의 변동도, 물건들 가격도 결국은 제대로 예측해낼 수가 없었고 심지어 설명조차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완벽을 가정(假定)해놓은’ 과거의 경제학에서 벗어나 경제는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경제의 행위자들(사람들)이 움직일 때에는 정보의 오류·부족이나 시간 차이 같은 것들이 있어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자고 말한다.
이렇게만 해놓으면, 대체 복잡계 경제학이 생물학의 어떤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책의 타이틀인 ‘부의 기원’과는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인지 감이 안 오기 쉽다. 이 점에서 ‘진화’라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생물학에서의 진화는 대략 이러저러하게 생명체들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변화돼 왔다는 의미. 저자는 진화라는 것이 생물학에서 말하는 이런 메커니즘을 넘어서, 세상이 굴러가는 근본적인 메커니즘이라고 말한다. 인류사회는 진화해왔다! 경제는 진화한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진화는 보편적 알고리즘이다. 시장의 행위자들은 진화하고, 행위자들의 작은 진화가 모여 시장 자체가 진화한다. 시장이 진화하면 국가적 사회적 제도적 장치들도 진화하고, 그래서 다시 시장과 행위자에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경제의 진화를 물리적 기술, 사회적 기술, 사업계획이라는 세 가지의 공진화로 설명한다. 경제의 진화는 하나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세가지 공간에서 일어나는 공진화의 결과라는 것. 물리적 기술은 말 그대로 테크놀로지, 전통경제학이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기술의 발전을 말한다. 사회적 기술은 공적인 제도는 물론이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태도 같은 것들(사회적 자본)이 다 들어간다. 사업계획은 비즈니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다시 ‘부의 기원’으로 돌아가 보자. 전통경제학자들은 시장과 행위자의 존재를 가정하는데, 시장은 어떻게 해서 생겼으며 부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전통경제학자들의 가정과 달리, 태초에 시장은 없었다! 저자는 몇몇 학자들이 시도한 ‘슈거스케이프(설탕 나라)’라는 간단한 시뮬레이션 실험을 소개하는데, 이 부분이 아주 재미있다. 가상 공간에 설탕 산(山)이 있고 설탕을 열량 공급원으로 필요로 하는 행위자들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이 실험은, 자원이 있고 그 자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경제활동이 생겨난다, 시장과 거래가 생겨나고 금융과 계층간 격차가 생겨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눈길을 끄는 것은, 작은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 큰 차이를 불러온다는(경제는 경로의존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복잡계와 진화의 알고리즘은 경제에서도 통용된다. 한번 경로를 잘못 들이면 격차는 벌어지게 돼 있다.

복잡계와 진화라는 개념을 통해 저자는 경제의 패턴들을 설명해나간다. 어떤 사회 혹은 기업의 문화(사회적 자본)가 서로 다른 사회 혹은 기업들 간에 성공과 실패의 차이를 불러온다는 것, 경제의 행위자들은 연역적 추론 대신 과거 경험을 통한 귀납적 판단을 따르기 때문에 시장에는 요동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완벽한 균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슈가스케이프라는 단순한 모형이 주는 시사점은, 가난과 불평등의 인과관계가 간단치 않다는 점이다. 가난과 불평등은 아주 복잡한 요소들이 혼합된 결과다. “가난은 착취 때문에 생겨난다”는 좌파적 진단이나 “가난은 게으름에서 비롯된다”는 우파적 진단 모두 극도로 1차원적이고 단순한, 현실에 맞지 않거나 혹은 일부분만 맞을 뿐이다. 가난과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서는 복잡계에서 경제가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시장의 효율성을 믿지만, 동시에 정치의 중요성도 간과하지 않는다. 시장은 효율적이다. 그러나 공진화의 세 가지 공간, 즉 물리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은 시장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좁은 의미의 시장을 벗어나 사회·제도·문화에서 나온다. 그래서 저자는 과거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 때문에 논자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제3세계(딱 집어 아프리카)의 빈곤 원인 같은 것이 분명 ‘문화적 요인’에도 있음을 명시한다.

원인을 복합적으로, 자신있고 당당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좌우의 색안경을 벗어던져야 그런 자신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이 아니라 좌우를 벗어나야 자유롭게 날 수 있다. 원인이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해법이 나온다. 이 지점에서 복잡계 경제학은 전통경제학과 완전히 갈 길을 달리 한다.

“복잡계 경제학은 우리가 우리의 경제적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깨버렸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한가지 방편을 넘겨주었다. 경제적 진화를 예측하거나 지휘할 수는 없겠지만, 진화를 잘 하느냐 잘 못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제도와 사회를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514쪽)

저자가 초반부에서 설명했듯, 복잡계 경제학의 탄생에는 산타페 연구소가 큰 영향을 미쳤다. 책에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지만 산타페 연구소는 복잡계 이론의 메카에 해당되는 곳이다. 칼텍(CalTech)에서 오만한 장난꾸러기 리처드 파인만의 앙숙이었던 머레이 겔만의 제자들이 이 메카의 사도들이다. 어떤 책에서인가, 환원주의의 아버지 격인 겔만의 후예들이 복잡계 학문을 연 것은 역설적이라고 쓴 구절을 읽은 바 있다.

이 책에서는 산타페 연구소 존 홀런드의 복잡계 이론이 계속 강조된다. 더불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모델도 경제적 행위자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에 유용한 틀로 자주 등장한다. 저자가 말하듯 복잡계 경제학의 탄생은 1970년대 일리야 프리고진 이래 비선형 열역학과 복잡한 세상을 바라보는 ‘겸손한 학문’들의 등장, 물리학자와 경제학자들 간의 ‘통섭’의 결과물인 셈이다.

책의 전반부가 복잡계 이론의 기본 개념에 대한 설명과 그것을 경제학에 적용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다면, 후반부는 이렇게 만들어진 복잡계 경제학의 면면들, 복잡계 이론의 프레임을 통해서 본 실물경제와 시사점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복잡계 경제학은 아직 세상에 나온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저자의 설명은 아주 구체적이고 촘촘하다.

엔트로피 문제에서 기업 조직을 혁신적으로 만드는 방법, 주주자본주의와 스톡옵션의 문제점까지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으면서도, 저자는 스스로 설정해놓은 복잡계 경제학의 주요 개념들과 분석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700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인데 내용이 모두 일관되고 흐름이 명확해서 끝까지 느슨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 책에 등장하는 홀런드의 이론이나 생물학 개념들을 미리 접하지 않은 독자들에겐 좀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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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2-14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리뷰대회 입상하셨어요~ 축하해요^^

멜기세덱 2007-12-14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나, 축하드려요^^;;

딸기야놀러가자 2007-12-15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세상에, 그런 일이??? 확인해볼께요. 감사~~~
근데 나 그런거 나간 적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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