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6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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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결코, 램지 부인이 될 수 없지만 나 자신일 수는 있겠지요.

[등대로], 버지니아 울프, 민음사

 

 

 

밀착되어 있던 것들이 떨어져 나간 이 자아는 더없이 자유롭게 기이한 모험을 떠날 수 있었다. 삶이 잠시 침잠할 때, 경험의 영역으 무한히 넓어 보였다. 그리고 누구나 이처럼 무한한 원천을 늘 느끼는 법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나 릴리, 오거스터스 카마이클, 모두들 제각기 자신의 환영,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겉모습들이 유치할 따름이라고 느끼기 마련이다. 그 환영의 밑바닥은 온통 어둡고, 사방으로 퍼져 있으며, 포착할 수 없이 깊다. 그러나 이따금 표면으로 솟구치는 것이 남들에게 보이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녀의 지평은 끝이 없어 보였다.  (103쪽)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는 것은 에세이를 읽는 것에 비해 무척 힘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소설을 찾아 읽는 일을 반복하는 것은 그녀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힘이 나로 하여금 어떤 빛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책장을 거슬러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지라도 그 과정을 생략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빛을 제대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등대로]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지금껏 읽은 다른 소설들에 비하면 가독성이 좋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그녀의 소설에 적응한 덕일 수도 있고, 실제 이 작품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작품이라는 것이 반증하듯 독자에게 더 친절하게 다가간 작품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들이 느끼기엔 폭군에 독재자이고 심장에 칼을 꽂고 싶을 만큼 싫고 두려운 존재인 램지 씨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갖고 있다. 내 아버지도 그러했다. 이기적이었고 독재적이었다. 램지 씨 보다야 덜 했겠지만 램지 씨의 모습을 통해 내가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반면, 나의 어머니는 램지 부인 같지는 않았다. 주변을 찾아봐도 램지 부인 같은 어머니를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들에겐 여신과 같은 어머니이고, 까다로운 램지 씨에게도 자신을 언제든지 얼마든지 인정해주는 자애로운 아내이며, 주변의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너그러우면서도 '미모의 횃불'이 활활 타오르는 아름다운 이웃이다. 그런 사람이 존재한단 말인가! 난 결코, 램지 부인처럼 살 수도 없거니와 주변에서 그녀와 비슷이라도 한 사람을 본 바가 없다.

 

어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램지 부인을 보며 '로비 보이'가 떠올랐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고객이 청하기 전에 준비해 두는 것, 램지 부인이 딱 그러했다. 남들이 요청하기 전에 친절을, 공감을, 인연을 준비하는 사람. 하지만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 그녀는 얼마만큼 안 것일까? 3부에서 릴리의 의식을 중심으로 램지 부인을 평가하게 되면서 램지 부인에 대한 어쩌면 냉정한 평가를 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릴리가 그러했듯이 나 역시도 램지 부인을 다소 가엾게 여기게 되었다. 릴리는 오만한 태도로 남에게 적선하듯 베풀었던 친절에 불쾌함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후에까지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존재감이 있는 램지 부인에게 놀라움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함께 느낀다.  어쩌면 램지 부인에게 질투를 느낀 채로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에 대한 분노도 잠시 결국은 그녀도 램지 부인을 애타게 부르지 않는가!

 

그 외침이 그녀도 램지 부인에게 의지하겠다거나 그런 삶을 따라가겠다거나로 보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결코 램지 부인이 될 수 없듯 릴리도 그러할 것이다. 램지 부인처럼 살지 않았기에 일종의 고통이 있었던 릴리에겐 십년 후 이 날의 의식이 큰 의미를 갖는다. 그 날, 램지 씨와 제임스와 캠이 등대로 떠나고 집에 남아 옛날을 떠올리며 그 흐름들을 꾹꾹 눌러가며 이랬다가 저랬다가 온갖 번민에 시달린 후에, 그녀는 말한다. 이제 그것을 보았어. ​나는 그녀가 본 것이 등대라고 생각했다. 십 년 저 비가 올 것이라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등대를 보러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었던 램지부인의 마음처럼, 아마 릴리도 궁극엔 등대를 찾아가지 않을까 싶어진 것이다. 이것은 고작 이 책을 한 번 읽은 독자의 직후의 생각일 뿐이다. 오늘 밤에라도 이 생각은 바뀔 수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므로.

 

버지니아 울프는 섬세하다. 그리고 집요하다. 짧지 않은 소설을 오로지 인물들의 의식만을 따라 서술하는 이야기 방식이 읽는 것도 힘이 든데 써내려갔다는 점에서 대단하다. 인물들의 의식은 단순히 한 방향만을 향해가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아주 짧은 순간에도 서로 상반된 생각을 머릿 속에서 주고받는다. 모든 인물들이 그러하다.오히려 램지 씨나 제임스와 같은 남자들이 단순하다. 이 점에 대해선 남자 독자들의 불만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여자 독자인 나로서는 그녀가 그려내는 여성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에 큰 불만이 없다. 서로 다른 인물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어느 지점에서는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나는 내 삶으로 무엇을 이룬 것일까? 램지 부인은 식탁 상석에 자리를 잡고 식탁 위에서 흰 원을 이루는 접시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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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3-28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읽는 힘이란 무엇일까,
마음을 읽듯이 이웃과 동무를 읽겠지,
하고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그렇게혜윰 2014-03-28 18:45   좋아요 0 | URL
들여다 보는 마음 같아요. 긴 호흡으로.

착한시경 2014-03-2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봄,,,버지니아 울프에 델러웨이 부인을 읽은 기억이 나네요,, 등대로는 구입해 놓고 아직 읽기 전인데 읽어보고 싶어요~ 즐거운 오후되세요~

그렇게혜윰 2014-03-28 18:45   좋아요 0 | URL
전 반대예요 ㅋㅋ 댈러웨이 부인 사놓고 안 읽었는데, 전 그럼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것으로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