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노첸티가 그려낸 우리 시대의 빨간 모자

- 서천석(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부모들은 혼란스럽다. 세상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얼마나 자세히 말해 줘야 할까? 뉴스를 통해 끔찍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아이를 집 밖으로 내보내는 것조차 무섭다. 하지만 아이를 언제까지나 품 안의 자식으로 키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자세히 말을 해주면 공연히 불안만 자극해서 아이를 위축시킬까 염려된다. 잘 자라는 아이를 공연히 힘들게만 할 것 같다.

 

옛이야기인 '빨간 모자'를 이야기책으로 정리한 샤를 페로와 그림 형제도 이미 수백 년 전 같은 고민을 했다. 페로의 이야기에서는 늑대가 빨간 모자의 소녀를 잡아먹는 것으로 끝이 난다. 페로는 이 끔찍한 결말로도 부족했는지 뒤에 따로 경고를 단다. '비록 상대가 친절하더라도, 아니 친절할수록 모르는 사람을 믿으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림 형제는 페로의 이야기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나 보다. 앞부분은 페로의 이야기와 비슷하지만 늑대가 빨간 모자의 소녀를 잡아먹은 다음에 다시 사냥꾼을 등장시킨다. 사냥꾼은 늑대의 뱃속에서 빨간 모자의 소녀와 할머니를 꺼내 주고 소녀는 늑대의 배에 돌멩이를 집어넣는 방식으로 복수를 한다. 그림 형제가 보기에 아이들을 겁에 질리게 하고, 세상을 믿지 못하게 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그저 조심하라는 메시지만 주면 그만이다. 아이들의 불안을 키우기보다 자신들에게도 작지만 힘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는 것이 그림 형제의 방식이다.

 

대부분의 부모들도 페로와 그림 형제의 방식 중 하나를 취하며 아이들을 교육한다. 함부로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큰일 난다고 경고를 하다가, 그렇게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안심을 시키기도 한다. 부모라면 아이를 세상의 악으로부터뿐 아니라 부정적인 생각으로부터도 떼어 놓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들에게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매혹적인 그림책은 분명 더 충격적이다.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 이야기에서 사냥꾼은 그림 형제의 이야기에서와는 달리 소녀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다. 사냥꾼이 곧 늑대이다. 소녀를 보호해 주는 사람이 소녀를 해치는 사람이다. 동네 불량배들로부터 나를 구해 주고, 할머니 집까지 태워 준 그 선의의 사냥꾼이 바로 가면을 쓴 늑대이다.

 

 

이쯤 되면 부모들은 궁금하다. 이 그림책은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어떤 사람도 믿지 말라고, 세상은 너무나 위험하다고, 상상과 이야기는 잠시 위안을 줄지 몰라도 현실은 그보다 더 비극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 그림책을 펼치는 중산층 부모들은 이 이야기를 아이에게 읽어 줘도 될 것인지 혼란스럽다. 하지만 이 그림책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고, 이 시대의 많은 아이들에게 꼭 필요하고 들려줘야 할 이야기다. 아이들의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처음 만나는 늑대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 가해자인 경우가 전체의 절반이다. 그들 중 80%는 가족이나 친척이고 나머지는 이웃이나 교육기관에서 아이를 만나는 사람이다. 사냥꾼이 늑대인 것은 예외라기보다는 보편이다. 그렇게 숨길 수 없는 현실이라면 문제를 드러내고 아이와 함께 방법을 찾는 편이 현명하다. (중략)

 

글 : 서천석 - 서울대학교와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서울신경정신과 원장으로 아이들 마음에 대해 연구하면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을 치유해 주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아이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MBC 라디오 [여성시대 양희은, 강석우입니다]의 ‘우리 아이 문제 없어요’ 코너에서 아이들의 심리 문제를 상담하고 있습니다. 그림책에도 관심이 많아 <한겨레>신문에 ‘서천석이 사랑한 그림책’이라는 서평을 쓰고 있으며, <하루 10분, 내 아이를 생각하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트위터:@suhcs

 

*본 글은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의 권별부록인 그림책 깊이읽기 '빨간모자와 성폭력'에서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자료 제공 : 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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