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좋은 어린이 책, <아지의 머나먼 여행>의 추천글입니다.

 

아지의 이야기를 번역하는 동안, 나는 아지와 함께 여행을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지가 차를 타고 들판과 높은 산을 지날 때면 내 몸과 마음도 덜컹거렸습니다. 배를 타려고 선착장으로 뛰어갈 때에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꼬옥 쥐기도 했지요. 간신히 오른 배 위에서 며칠 밤낮을 보내며 추위를 피하려고 아지가 소금기로 뻣뻣해진 담요를 덮을 때엔 내 마음도 서늘해져 그 차가운 담요를 함께 여미었습니다.

 

아지의 멀고 긴 여행은 그렇듯 아득한 산과 바다로, 국경으로, 난민촌으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사빈이 아지를 바라보며 자신이 걸어온 길을 떠올리듯, 나 또한 아지와 함께하는 날들 동안 아지처럼 먼 길을 걸어야 했던 분쟁 지역의 아이들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중에서도 레바논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마주한 아이들의 얼굴은 좀처럼 잊히지 않습니다. 수십 년 전의 어느 날 밤, 아지의 아버지처럼 가방을 쌀 틈도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난민촌 샤틸라 캠프. 임시 거주지인 캠프는 어느새 거대한 마을이 되었고, 고향을 탈출한 어른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희망을 잃고 고향 집 녹슨 열쇠만 만지작거릴 뿐이었습니다.

 

샤틸라 캠프에서 마침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문화 행사를 준비하고 평화 운동가들을 초대했습니다. 나를 비롯해 지구 멀리서 온 평화 운동가들은 어떤 팔레스타인 청년을 따라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진 거대한 난민촌을 둘러보았습니다. 좁은 골목에는 가게며 세탁소, 문방구, 식당 같은 평범하면서도 가난한 삶의 풍경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가끔 일행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아이들이 벽에 그려 놓은 벽화들이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쥔 손, 구급차와 경찰, 북적이는 사람들, 비행기와 헬리콥터... 얼핏 보면 아이들의 평범한 그림이었으나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주먹을 쥔 손에는 산산이 부서진 뼈가, 구급차 앞에는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뛰어노는 아이들 머리 위에는 무장 헬기가 아이들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이 도사리고 있어서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보였습니다. 아이들의 삶에 그득한 죽음과 죽임의 기억들, 공포와 두려움의 기억이 담긴 벽화 앞에 우리 일행이 멈춰 서서 걸음을 옮기지 못하자 난민촌을 안내해 주던 청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난민촌 아이들에게 저것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오늘 혹은 내일 다시 일어날지도 모를 현실입니다. 어디에선가 일어난 테러 소식은 그저 뉴스지만, 이곳에선 그런 날 밤이면 다시 구금과 체포가 일어나죠. 이 아이들 대부분은 한밤중에 군인들에게 잡혀가 본 경험이 있을 거예요. 테러를 도왔다며 아이들을 영장도 없이 잡아가는 일이 잦으니까요. 또 형이나 삼촌을 잃은 아이도 있어요.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자라나는 아이들 마음속에는 평화가 깃들 공간이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어요."


세상 어디서나 그렇듯 난민촌에서도 분쟁 지역에서도 아기가 태어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갑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콩을 심고, 꽃을 키우고, 염소와 양을 돌봅니다. 형과 친구들이 함께 뒤섞여 공을 차고 물고기를 잡으러 가기도 합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어느 날 군인들이 나타나 누군가를 잡아가고, 어느 날 폭격이 시작되어 누군가가 죽기도 한다는 것뿐입니다.


72퍼센트의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이 가족이나 친천의 죽음을 직접 보았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의 절반은 미사일이나 포 공격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다고 합니다. 90퍼센트의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이 자신들이 전쟁으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90퍼센트의 이라크 아이들이 전쟁을 사진처럼 또렷이 기억하고, 그 때문에 무서운 꿈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합니다. 84퍼센트의 이라크 아이들이 자신이 어른이 될 때까지 살 수 있을까 걱정을 합니다.


어른이 될 때까지 살 수 없을 거란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이들, 어른이 되면 누군가에게 복수하는 것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지도 모를 아이들, 물러설 곳도 나아갈 곳도 없는 막다른 삶을 사는 아이들, 장난감 총을 들고 복수를 꿈꾸며 자라는 아이들이 평화의 꿈을 꿀 수 있도록 우리도 누군가의 사빈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 아이들이 난민이 되기 전에 우리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전쟁 대신 평화의 여행을, 전쟁놀이 대신 평화의 놀이를 그 아이들과 나눈다면 아이들은 전쟁과 분쟁의 아픔을 매듭짓고 평화를 일구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지와 함께 한 이 여행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도 지구 저편 전쟁 중인 아지의 나라에 가닿았나요? 그랬다면 아직도 전쟁 속에 살아가는 세상의 수많은 아지들, 여전히 난민촌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또 다른 아지를 위해 기도해 주길 부탁합니다. 혹시 여러분 교실에도 멀고 낯선 나라에서 온 아지 같은 친구가 있나요? 그렇다면 루시처럼 먼저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는 친구가 되어 주길, 함께 줄넘기를 하고 함께 점심을 먹는 평화의 친구가 되어 주길 부탁하며... - 임영신(여행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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