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독서신문 편집장 하지혜 님께서 알라딘으로 보내주신 12월의 좋은 어린이 책, <고은 동시집 차령이 뽀뽀>의 추천글입니다.
나는 시(읽기)를 좋아하지만 때때로 시 속에 든 어색하고, 어둡고, 습한 단어들에 부딪쳐 먼 길을 돌아나가기 일쑤였다. 화가 나서 내던졌다 어느 순간 다시 주워들어 처음 이해하기 어려웠던 단어들에 익숙해지고 그래서 전체를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때론 끝내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가슴 깊이 품고 있기도 했다. 그리하여 언젠가 다시 만나면 그땐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내 책꽂이 한두 칸은 늘 시집들로 채워져 있다.
고은 시인의 시는 많은 부분 내가 만난 어떤 시인의 그것보다 어렵고 난해하게 다가왔다. 물론 한눈에 척 들어오는 시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런데 이번에 시인이 어린 딸의 모습을 담아낸 동시집 <차령이 뽀뽀>를 보고 나니 가장 먼저 내가 아는 그 시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두 아이를 키우며 느끼던 것과 비슷한 감정들을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차령이 뽀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이가 생각나는 대로 말한 것들이 그대로 시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독자들도 동시들을 읽다 고개 끄덕이며 맞아 맞아, 하지 않을까.
<차령이 뽀뽀>에 실린 서른세 편의 동시를 읽으며 이건 아마도 시인의 언어가 아니라 딸에 대한 사랑이 감추지 못하는 감기처럼 나타난 마음의 언어가 아닐까 생각했다. 많은 엄마들이 내 아이가 세상에 내뱉은 첫 말을 잊지 못하고 영원히 기억하듯이 말이다. 나 또한 아이를 키우던 어느 하루가 영원히 잊지 못할 하루로 남은 일이 있다. 나는 그저 그날 벌어진 상황을 적어만 두었을 뿐인데, 글을 통해 그날이 정지된 하루가 된 것이다.
동시 속에 나타난 차령이 모습은 곧 시인의 가슴속 풍경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에게 차령이는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 방학, 친구들과 즐겁게 뛰어놀다가도 교실 뒤 사육장의 토끼가 생각 나고, 아카시 이파리도 없는 겨울에 무얼 먹을까 걱정하는 아이(「토끼 생각」)다. 눈 위에 난 새 발자국을 보고 외로울까 싶어 자기 발자국을 내주고(「새 발자국」), 힘들지도 않은지 나를 업고 씽씽 달리는 자전거에게 “힘들면 쉬었다 가자”고 말하는 아이다(「자전거」). 그런가 하면 고속도로나 국도가 조심조심 올라가는 산길이나 해 저물어 돌아가는 들길이 아니어서 슬프다고 말하거나(「길」) 새가 되어 멀리 날아간 꿈을 꾸고 나서는‘새들도 꿈속에서 사람처럼 걸어가지 않으면 아주 미안할 것 같다고 느낀다(「꿈」). 참 시인의 딸다운 애틋한 마음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 시대 최고의 거장, 고은 시인의 딸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이 그려진 <차령이 뽀뽀>는 단순한 동시집이 아니다. 차령이로 대표되는 어린이를 향한 따뜻한 시선과 사랑이 담긴 동시집이다. 그 속엔 가족이 있고, 학교가 있고, 사랑이 있다. 그래서 어린이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보면서 사랑과 감동을 나눌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힘 센 수탉>, <솔이의 추석 이야기> 등을 만든 그림작가의 따뜻한 그림은 노시인의 마음을 잘 담아냈다. 요즘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그림체가 이 동시집이 오래 전 지어진 동시들이라는 걸 잊게 만든다. 더욱 의미가 있는 건 대한민국 문학상 번역대상을 수상한 안선재(Brother Anthony) 교수와 시인의 반려자 이상화 교수가 같은 시를 영문으로 교차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딸바보 아빠의 마음이 담긴 시가 멀리 다른 나라에까지 전해져 그곳에서 역시 공감을 끌어내리라 의심치 않는다. - 하지혜(아침독서신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