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픔의 자서전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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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중 다수가 열린 책들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표지그림이 아주 맘에 든다. 오후 네 시가 그랬듯이, 배고픔의 자서전도 책의 내용을 잘 표현해주는 표지그림이다. 밑이 뚫린 식탁에서 주인공 여자가 계속해서 식사를 한다.

 

식욕은 인간의 피해갈 수 없는 욕구중의 하나이지만, 욕구가 과하면 욕심이 되고 그렇게 되면 죄악이 되기도 한다. 화장실에 꽂아놓고 수시로 읽고 있는 숫타니파타에는 식탐을 버리라는 말이 매우 자주 나온다. 또한 영화 SEVEN에서 욕심으로 인해 징벌받은자는 먹다 지쳐 죽음을 맞이한다. 먹는 것은 인간생활에 큰 즐거움이다. 어쩌면 가장 큰 즐거움일 수도 있다. 맛있는 음식을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가져가 그 맛을 느끼는 과정과 흔히 말하는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라는 말처럼.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배고픔이 그 근간이 된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뭔가를 먹고 싶다는 말이며, 굶주려 있다는 말도 된다. 고로 뭔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프다는 것. 아멜리 노통브는 이 자서전에서 스스로 고파했던 모든 것들의 근원을 찾아보려 한다.

 

이 책을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과 연이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어쩌다 출판사도 다른 한 작가의 책을 동시에 구입했는데 내용이 이어진다니 분리된 소설을 내가 연작 시리즈로 만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배고픔의 자서전은 알려진대로 소설이라기 보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라고 밝혔다는 말처럼 아멜리 노통브의 맨 처음 기억언저리부터 그녀가 기억해내는 모든 굶주림에 대하여 말한다.

 

혜택받은 가정환경, 일본과 중국, 미국과 방글라데시를 오가던 유년시절, 달콤한 것들에 대한 집착과 소아 알콜중독, 그리고 끊임없이 추구했던 스스로에 대한 안위와 쾌락. 사실이거나 아니거나 상관없이, 그 어린 소녀가 느꼈던 모든 쾌락에 대한 욕구는 우리 모두에게 본능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 많은 과정을 거쳐 그녀는 작가가 되었고 지금은 또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고픔"으로 살아가고 있다. 산다는 것은 뭔가가 고프기 때문에 끊임없이 추구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전에 삶에 대한 욕구가 높을 수록 식욕이 좋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뭔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욕구를 채워나갈 것이다. 때론 보통사람들과 매우 다른 욕구를 혼자만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구멍뚫린 식탁위에서 계속해서 먹어제끼거나 도시를 바꿔가며 글을 쓰거나 도박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모든 행위들이, 다 그 행위의 주체에게는 매우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옳거나, 그르거나 간에.

 

2006. 6. 22.

 

Ps.

프랑스에서 공부를 했던 한 친구의 말이 아멜리 노통브는 "아멜리 노똥"으로 읽는 것이 옳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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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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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너무 많은 책

간혹 - 책을 선물받기도 한다. 그 횟수는 아주 "간혹"이다.

그럭저럭 책을 많이 읽는 편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그렇지 않을 때도 분명히 있다) 굳이 나에게 어떤 책을 선물해야 할 지 모르겠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간혹가다가 선물받는 책들은 전혀 내 구미에 땡기지 않는 중고도서이거나 (이 경우는 상해에서 유학생활중에 많이 있었다. 독서에 굶주린 내게 책을 보내주는 경우), 정말로 오오오~~ 바로 이거야~!! 하게 되는 딱 구미에 맞는 아주 사려깊은 책 선물.

 이 책은 선물받은 책이다. 요즘의 20대 같지 않은 한 청년에게 받는 책인데, 그가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한 것은 이 책에 대한 의견을 같이 나누고 싶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그는 나에게 이 책을 건네면서 "너무 어이가 없어서요" 라고 말을 덧붙였다.

 - 그래 이 책은 너무 어이없는 현실, 이미 너무 익숙해진 그 어이없음에 대해서 밤새도록 수다를 떨게 하는 재주가 있는 책일 것 같다.

저자인 박상익씨는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고, 전문 번역인이기도 하고, 여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자이기도 하다. 지천명이 지난 나이의 이 양반께서 여태 참아왔던 울분을 책 한 권에 성토하셨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나라 출판계, 번역계, 인문교양계에 대한 애정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지적 인프라. 우리사회의 지적 인프라 구축이라.

과연 우리 사회에 인프라를 구축할 만한 지성의 건더기가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한국이 인문학의 위기를 맞이한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어느 날 모대학이 모 기업에 인수되면서 경제 경영학부 아이들이 즐거워지면서, 서울대학원의 인문학부가 미달이 되기 시작하면서, 아니 어쩌면, 도제제도의 지적권리 세습이 이루어지는 이상한 권력구도가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아니 어쩌면, 이 나라가 건국되면서부터. 시작된 오래된 문제일 지도 모른다. 

 번역의 오지 - 대한민국 

 저자는 일단 외국의 번역의 역사를 소개한다. 일본과 중국, 이슬람 문명과 서유럽의 번역 역사를 소개하면서 번역이 가져오는 사회의 지적 혜택에 감탄한다. 훌륭한 동서양의 고전들, 우리가 읽어야 한다고 하는 책들의 번역본이 한국어로 존재하는지 확인해보았는가?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보내는 동안 중국어의 한계에 부딪혀 한국어 번역본을 읽어보려고 했던 책들은 80%가 찾을 수 없었다. 한국엔 번역본이 없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논어, 제대로 된 장자. 그런 것들은 없었다. 최근엔 한길 그레이트 북스에서 중국의 고전들을 부지런히 번역 출간하고 있지만, 그 때는 일본서적을 중역한 이산출판사의 책들이 고작이었고 어떤 것들은 1960년대 출판된 책들이라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중국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고대소설인 서유기의 완역본(한국에서는 삼국지가 인기있지만 중국에서는 서유기의 인기를 따라갈 수 없다), 사기의 완역본도 찾을 수 없었다. 한국은 그만큼 돈 안되는 책은 번역하는 사람이 없는 나라였다. 

 저자는 이러한 한국의 슬픈 현실을 개탄하면서, 모국어가 처한 구슬픈 현실, 글쓰기에 젬병인 젊은이들을 한 번 꾸짖고(20대만 지나면 누구나 하고 싶어지는 일), 번역자이자 소설가인 안정효씨가 "매춘교수"라 명명한 학생들의 번역료를 집어삼키는 못되먹는 교수들의 비양심적인 번역발표 행태를 고발하고 지식인 답지 않은 지식인들의 행태와 이 나라에서의 번역으로 먹고 살기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먹고 사는 생계 문제로 싸이월드에서 타운이라는 기업체들의 홍보용 홈페이지를 두 개 운영하고 있다. 방명록에는 늘상 글들이 올라오고 공짜나 이벤트를 바라는 어린 학생들의 글이 올라오는데, 초등학생-중학생들의 글은 너무나 쉽게 파악이 되는 것이, 맞춤법을 제대로 쓰는 학생이 없다는 것이다. 띄어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저히집 강아지가 마니 아파요."라든가, "저히 강아지가 배변만 눠여"라는 문장도 있었다.

배변만 눠여 라는 문장은 20대 여자가 쓴 글이었다.

우리나라에 무지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고 싶다면 타운운영을 해보라고 권할 정도로, 인터넷 사용자들 중에 엄청난 인구가 문맹이 되어가고 있다. 초등학생들은 마침표나 쉼표를 적절한 곳에 찍을 줄 모르고 오문과 비문에 대해 별다른 관심도 없는 듯 하다. 

 이러한 한국어의 현실과 책을 읽지 않는 문화가 출판업계를 굶주리게 만들고 결국 엉성한 번역물들을 불러모으기도 한다. 팔리지 않는 책은 만들기가 곤란해지고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번역물이나 명작 / 고전들이 줄어드는 것이다. 혹은 정말 정말 연로하여 이 양반이 번역을 하실 수나 있었는가 하는 분들의 번역물이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다. 예전에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책 중에 번역이 너무 황당무계하여 최대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책을 다 읽고 난 후 "이따위 번역을 하려면 차라리 쓰레기나 치워라"는 독후감을 인터넷에 게재한 적이 있다. (인터넷에 독후감을 써 온 것은 199년 10월부터였다) 그 후 모든 번역서를 한 번씩 의심하게 되는 버릇이 생겼으며, 그게 외국어 공부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이유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고, 원서를 사들이고 읽어보려 노력하게 되었으며, 한 번 번역이 꽈당이다라고 느꼈던 출판사는 꼭 기억했다가 그 출판사의 번역물은 기피하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 다행히도 그 이후로 짜증나게 오역투성이인 인문서적들은 많이 만나지 않아서 그럭저럭 한국어 책을 잘 읽고 있지만, 때로 인문사회과학이 아닌 분야의 서적들 중 역시나 "나는 번역물입니다"라고 행간에 써 있는 책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번역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한 두번씩 어설프게나마, 혹은 우연찮게 번역에 가담하게 되는데, 나도 그런 일을 몇 번 해봤고 또 지금도 늘상 반복되는 것이 번역과 통역이다. 그저 외국어를 두 개 정도 할 줄 안다는 것 때문인데, 번역이라는 것은 어학적 능력만 가지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의뢰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 초에 홍콩에서 제작된 중국영화의 메이킹 필름 몇 건과 관련 보도 기사를 번역할 일이 있었는데 의뢰자는 홍콩과 대륙과 대만의 언어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상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번역 의뢰는 언제나 번갯불에 콩! 이다. A4 두 장밖에 안되니까 내일까지 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중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다 보면 그 양은 두 배 - 세 배로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한국어 - 중국어 번역시에 왜 결과물의 양이 이 것뿐이냐는 항의, 중국어 - 한국어 번역시 원고료 때문에 글을 늘여붙인 것은 아니냐는 어처구니 없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잘 아는 후배가 부탁했던 일이라 사실 무료로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왜냐하면, 번역이라는 작업은 그 노동량에 비해 댓가가 터무니 없이 적기 때문에 차라리 봉사하는 마음이나 공부하는 마음으로 작업을 해주는 편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비디오 테잎을 받아들고 틀어보니 이건 표준어, 광동어, 영어가 짬뽕이 되어 버린 테잎이었고 가격은 그저 일괄적으로 통일해 장당 1만원 - 1만 5천원 선에서 해결을 보았다. 1994년 -1997년까지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남편은 98년도에만 해도 중국어 번역이 장당 7만원이었다면서 너희 세대 불쌍한 세대라고 놀려댔다.

임신 말기에 얼마 되지도 않는 분량을 가지고 골머리를 썩힐려니 (번역은 양이 아무리 적어도 일단 머리부터 아프고 시작한다) 지겨워져서 취업준비중이던 후배에게 나머지분은 넘겨버렸다.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로 돈 좀 벌어보겠다고 맡았다가 도저히 글자가 벌레처럼 눈앞에서 스물거려서 더 이상 진행을 시키지 못하고 남에게 넘겨버리는 일.

그에 비해 댓가는 ─ "차라리 내가 꽁짜로 해줄께"라고 말하고 싶은 정도. 

 이런 문제가 발생하다보니 전문적 번역인력들을 부족하고 대학원생들이 지도교수 밑에서 품앗이로 한 번역물을 출판사 편집자가 짜집기 하여 만들어내는 출판물들이 종종 생긴다는 것이다. 사전편찬은 커녕, 한국의 고서 번역이나 꿈꿀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이 만들어져 있느냐는 것이다. 

 책사랑 

 이 책의 저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이라는 작업을 - 그것도 매우 난해한 인문학 서적들만을 골라서 - 하는 이유는 뭐겠는가. 당연히 애정이고 열정이다.

좋아하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할 수 없는 일, 좋아한다기 보다는 사명감으로 이 무지몽매한 군중들에게 다른 세상의 아름다운 작품하나 남겨주겠다는 사명감이 번역인을 살아남게 할 것이다.

책의 마지막엔 책을 사랑하는 저자의 애정관을 보여주는 이야기와 번역인으로 살아가고 싶은 청년들에게 권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다른 것보다도 책을 꾸준히 사서 모으는 것이 지적 생활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아 - 물론 매우 매우 맘에 드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런 도서 구매로 지적 생활을 너무 오래 영유해 온 나로서는 감히 어디서 강렬하게 이런 주장을 하려면 책과 관련된 것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책에 대해서는 우리나라가 정말 정말 후진국임에 틀림없다.

잉크도 마르지 않은 1시간이면 다 읽어버릴만한 책들이 아주 잘 팔려나가고, 읽어야 할 고전들의 번역본은 있지도 않으며, 도서관에서는 출판사와 저자에게 책을 구걸하고 사서들은 책을 나르는 노가다에 불과하며, 찾으려는 자료는 통합검색이 되지 않아 스스로 자비를 들여 사대야 하는 우리나라의 책/출판/독서 체계는 문화경제적 후진국인 중국과 그닥 다르지 않다.

중국이 후진국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출판의 엉망진창을 보여주는 사실은 한 번 지나간 책은 주문 할 곳도 없고 구할 곳도 없다는 것이다. 도서관에도 없는 경우가 많다. 서점에 가면 정리가 안 되어 있어서 책을 찾기도 어렵다. 워낙 넓은 나라에 엄청나게 많은 출판사들 덕이기도 하겠지만, 정리할 생각들도 안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인 것이다. 학술사라는 학문을 연구하던 한 교수님은 10년에 거쳐 이룬 학업을 책으로 냈더니 10위안(한화 1500원정도)이었고 지금은 오래되서 세일이라 반값도 못 받는다고 담배를 물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래도 중국은 국가에서 외래어를 지정하는 기관도 있고 사전편찬도 잘 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문화적 / 지적 수준은 그에도 못 미치는 지도 모른다. 

 할 말이 마구 생각나서 책을 읽으면서 내내 흥분하게 만들던 박상익의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이 책은 번역에 코털만큼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좋은 책이다. 피와 땀으로 썼다는 것만큼 책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은 없다. 게다가 인생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들어준다면 금상첨화 아닌가. 반역이 되더라도 아직도 번역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불쌍한 중생들을 다시 불지를만한 책이다.

 
2006.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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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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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들어 좋아하게 된 노통브의 또 다른 소설.

그녀의 기발한 상상력과 쉽게 넘어가는 페이지들이 사랑스러운데,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은 인터넷상에 돌던 한 문구때문에 책을 선택했다.

 

  나는, 비의 이미지대로,

  소중하지만 위험천만하고,

  무해한데도 치명적일 수 있고,

  조용하면서도 요동치고,

  혐오스러우면서도 기쁨을 주고,

  부드러우면서도 부식을 일으키고,

  하찮으면서도 귀하고,

  깨끗하지만 강렬하고,

  기만적이면서도 끈기있고,

  음악적이면서도 불협화음 같은 존재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것저거다 뛰어넘어,

  다른 무엇보다도 강인한 존재라고 느꼈다.

 

  이토록 아름다운세살 //  아멜리노똥브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은 신생아에서 세살에 이르기까지의 기억이다. 그 나이에 무슨 기억이 있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있는 사람들도 있다. 세살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천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내가 24개월정도부터 기억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말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인 듯 하다. 

작가의 기억인지 상상력인지 모르겠지만, 이 글은 마치 양철북의 주인공이 기괴한 요소를 빼고 깜찍한 탈을 뒤집어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기는 스스로를 신이라고 지칭한다.

심리학에서 아기들은 누워서 울기만 해도 모든 일이 해결되며, 때로는 울지 않아도 삶에 필요한 모든일이 해결되기 때문에 스스로를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믿게 된다고 한다. 이는 후에 나르시시즘으로 발달하기도 하며 아이는 성장을 하면서 어머니와 인격이 분리된다는 것을 인지한 후로 그 모든 것이 어머니로부터 해결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머니가 바로 그 전지전능한 존재의 실체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어미의 권위가 형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애초에 어미와는 인격이 분리되어 있는채 태어나고 (영아들은 어머니와 자기 자신이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을 인지하는 시점에 낯가림이 시작되고 그 때쯤 인격이 형성된다고 한다) 스스로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만 2세때즈음까지 믿고 있다. 나르시시즘에 제대로 빠져있는 아기인 것이다. 

 아기는 세살이 되기 전에 죽음을 맛보고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서 느끼고 상징을 몸으로 체득하며 (정원은 일본을 상징하는 메타포다) 삶이 죽음으로 향해가며 점점 잃게 될 것이 많아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네가 사랑하는 것은 잃어버리게 된다' 라는 것과 "네 인생 전체가 죽음의 박자에 맞춰 움직일 것"을 깨닫고 감정 하나 하나를 다 네 왕조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세 살 ─ 생각해보면 정말 어이없는 나이일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말을 제대로 하게 되기 까지, 아기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독립된 種 - 아기 일 뿐이다. 내가 키우고 있는 내 자식도 솔직히 사람이라기 보다는 동물과 사람의 중간단계에 있는 특별한 種 - 아기 - 로 여겨지니 말이다. 

 그런 아기들이 얼마나 발칙한 상상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보는 재미, 생각보다 대단하다.

유머러스한 노통브의 깜찍한 소설 -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이 정말 아름다운가 느껴보는 것은 독자의 몫일게다. 

 2006.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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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물학 논쟁
프란츠 부케티츠 지음, 김영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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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의 번역자가 궁금해하는 독자이다.

"이 어이없고 황당한 시대에 한번쯤은 뛰던 발길을 멈추고 인간이라는 이름의 <동물>이 하는 행위와 그 생긴 모습을 진지하게 알아보고 싶어하는 분들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기를 바란다"는 말처럼, 인간이라는 동물에 대한 궁금증이 자꾸 용솟음 쳐서 역으로 동물에 대한 책들을 읽어대고 있다. 

 "미실"로 유명한 작가 김별아의 또 다른 소설이 있다. <영영 이별 영이별> - 정순왕후의 사랑을 편지체로 곱게 적은 이 소설은 윤석화가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 그 유명세를 더 치르기도 했는데, 그 소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찌 사람으로 그럴까. 싶다가도, 사람이니 그러겠죠" 라는 말.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행위들은 동물이 아닌 사람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그 정순왕후의 읊조림처럼,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쓸데없이 잔혹한 헛짓거리들을 한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올해 들어 가장 길었다.

산욕기를 다 치뤘다고 생각했는데 산후치매라는 것이 뒤늦게 나타났다.

아주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개인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는 늘 24시간 쉬지 않고 머릿속이 꽉 차 있던 증상이 사라지고 중간중간 윙~하는 이명과 함께 머릿속이 하얗고 멍하게 정지하는 느낌을 받았다. 책이 읽혀지지 않았고 문장 하나를 읽고 이해하는데에도 시간이 걸리는 현상까지 나타났으며 자꾸 책장 뒤를 넘기면서 책을 읽는게 힘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동시다발적으로 책을 읽는 옛습관이 다시 나타나 (아마 한 권에 집중을 하지 못해서 그랬을테지만) 다른 책을 펴놓았는데 그게 또 바흐친의 "말의 미학"인지라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글자만 보다 덮고 덮고 했다. 사회생물학 - 즉 유전자인지 문화인지, 인간의 진화를 구성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책을 펴놓고 나는 인간의 동물적인 생리현상 한 가운데에 있었다는 거다. 

 자식을 낳고 기르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 유전자가 무엇이 끌려 이 남자를 만났고 이 남자와 아이를 만들었으며, 어미가 된 유전자는 무엇에 만족하고 무엇에 불만족하는가에 대해서 스스로를 관찰하고 있다. (생각보다 매우 재미있다. 해보시길 ㅎㅎ)

 저자는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모두 옳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초로 한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과 책의 내용은 앞의 긴 서설들을 든든한 지원군으로 삼아 후반 에필로그 :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에서 모두 펼쳐내놓고 있다. 기존의 다른 사회생물학 관련 책들을 많이 읽어본 사람이라면 에필로그만을 봐도 프란츠 부케티츠라는 학자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생물학이 논쟁이 된다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인간의 진화와 역사의 발전이 유전자의 이유때문이라던 주장때문에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생겨날 수 있었고 (못되게 이용해먹는 인간들 덕이겠지만) 절대 인간을 생물학으로 풀어서 해결할 수 없다고 하면 그 역시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라 사회생물학이라는 분야는 늘 논쟁에 휩싸인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살아가면서 만들어지는 문화와, 윤리는 무엇으로 규정할 것이며, 도덕과 규율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발생하느냐는 것들도 해당된다. 

 저자는 "사회생물학 전체를 유전결정론으로 낙인찍지 않고, 인간 발달에 작용하는 어떤 하나의 요인군을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는 것으로 보게 하는 신호탄일 수도 있다"고 한다. 또한 분열되어 있는 세계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유전자 기계가 아니며, <이기적 유전자>는 하나의 메타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현명한 결론은 바로 다음과 같다.

".....자기 의식을 고양한다는 것은 일종의 윤리적 의무에 속한다. 단, 우리가 살아남기를 원한다는 전제하에서 그러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될 이유는 진화의 그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들 앞에 존재했던 수많은 다른 종들처럼 그들 역시 얼마든지 멸종해 버릴 수 있겠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 해도 진화의 역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화 과정을 스스로 조정 통제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비범하며 인간에게만 고유하게 주어져 있다. 결단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2006.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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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킨트
배수아 지음 / 이가서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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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가 좋은 이유는, 그녀만의 것이 매우 확실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외국서적을 번역한 듯한 문체와 아리송한 등장인물과 말도 안되는 판타지.

그 속에 가득한 자유에 대한 갈망, 뻔뻔함, 도도함.

그런 것들이 이루지 못한 자를 더 초라하게 만들기는 커녕, 자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탄 거야. 너도 나와 공범이야. 라고 씨익 웃고 있는 조우커의 미소를 보내주기 때문일 것이다.

 

배수아의 소설중에 가장 압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이었다.

그리고 당나귀들, 독학자, 에세이스트의 책상. 그녀의 소설들을 몽롱하면서도 명확하게 건조하면서도 질펀한 느낌이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바케트 빵,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도마. 기름때조차 식어버린 듯한 부엌의 느낌이 바로 독학자 였다면, 동물원 킨트는 축축한 안개가 가득한 동물원의 비관람시간. 코끼리 사나이가 숨어서 식은 빵을 먹고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가 흐른다.

 

하마라는 "그녀"와 보도, 그리고 나 동물원 킨트 .

모두가 단절되어 있고 고립되어 있는 외국인들의 이야기.

정리되지 않은 하천을 걷는 것 같던 소설은 마지막에 고독의 미학을 이야기해준다.

 

"이제는 가을이 깊어져서 스웨터를 입지 않으면 까페 테라스에 나와 앉아 있지 못해. 이제 부다페스트 거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마음을 소리도 없이 무너지게 하지. ............

이제 모든 축제의 시절은 지나가고 여행자들은 사라지고 우리가 견뎌내야 할 끝없는 혹독함은 아직 몰려오기 전이야...." 라는 문구에서,

우리 모두 외국인, 우리 모두 이방인이라는 동물원 킨트의 이야기가 저며온다.

 

배수아의 다른 작품들보다는 그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도 배수아의 매력은 완성도보다 그 느낌에 있다.

단지, 배수아의 팬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2006.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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