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동물원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김경수 그림 / 물병자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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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동물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먼저 하고 싶다.

 

재미있어요. 즐거워요. 는 대부분 어린이들의 대답일 것이다. 물론 아이들도 불쌍해요. 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동물원을 좋아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여러가지 의견으로 나뉜다.

관심없음, 냄새남, 애들이 가자고 해서 감, 비쌈. 등등의 무관심적인 입장들과

불쌍함, 슬픔, 반대입장. 등등 동물원을 혐오하고 반대하는 사람들.

 

이 책의 저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털없는 원숭이"를 쓴 양반인데, 동물학자라고 하긴 뭐하고 동물원에서 포유류 관장을 지냈다고 한다. 이후 계속해서 집필활동과 방송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털없는 원숭이는 읽어보진 못했지만 그 책이 히트를 치고 있는 동안에 제대로 된 제목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인간이 그렇지 뭐..털만 없을 뿐이야. 라는 생각. 글쎄..내가 너무 비관적이며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은 뭐 그닥 대단하게 훌륭한 존재라는 생각은 아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도 좀 우습다고 생각한다고 할까..

물론 우수한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우수하다는 것과 훌륭하다는 것은 다르다)

 

인간이 훌륭하지 못하다는 것은 얼마전 안양천변에 걸린 플래카드를 보고도 확실히 느낀 것이다. "하천 보호를 위해 애완견을 데리고 나오지 맙시다"라는 어이없는 문구는 (시청에 따질 준비중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자연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의 노골적인 발현아닌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이기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게 다 이 책의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도시:라는 거대한 동물원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물원의 동물들이 불쌍한 이유는, 살아야 할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콘크리트로 된 우리속에서 기후도 환경도 맞지 않은 채로 갇혀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우리는 좁고, 삭막하고, 북극곰이 37도나 되는 땡볕 더위를 견뎌야 하는 것들처럼 어이없는 환경조건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사람은?

건물이 빼곡히 들어차 열섬현상이 일어나고 길을 걸어가며 다른 사람과 어깨를 부딪히고 먹고 살자고 아웅다웅 싸워야 하고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 되기도 하는 도시에서 콘크리스로 갇힌 건물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이 도시에 사는 것은 동물들이 동물원에 갇혀 있는 것과 다를바 없다.

 

이 전제로 저자는 동물원에 갇혀사는 동물들이 왜 그렇게 희한한 짓들을 하는가와 인간들의 희한한 짓들에 대해서 설명한다. 억눌린 본능들을 억압당하는 세상의 모든 동물들에게 보내는 편지라고나 할까.

 

책은 무지무지하게 재미있다.

띄엄띄엄 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만큼.

 

2006.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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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 - 인간 본성의 근원을 찾아서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김길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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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하늘은 무너졌는데 세상은 아무 상관없이 돌아가더라 싶었던 때가 있었다.

성인이 된 사람이 인간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어느 날, 아, 내가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가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얼마전에 TV인지, 영화인지 명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초등학교 때 자기가 없는데도 친구들이 모여서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상실감과 슬픔을 처음으로 느꼈다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었다. 인간세상속에서 한 인간의 존재가 그럴 뿐만 아니라, 대자연, 이 지구상에서도 인류라는 종족은 사실 없어도 그만인 존재라는 것이다. 

 얼마전 "대담"이라는 책을 펴냈던 최재천 교수는 그 책에서도 미국 유학시절 스승이었던 "에드워드 윌슨"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에드워드 윌슨의 이 책은 최재천 교수가 번역을 공동으로 맡았다. 에드워드 윌슨은 개미연구로 유명한 동물학자이다. 『인간 본성에 대하여』 와 『개미』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이 바로 이 "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 : 인간 본성의 근원을 찾아서"이다. 야생은 무엇이며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인간은 정말로 진화하였는가, 그래서 모든 인간 행동의 원인을 유전자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질문한다. 

 뱀.

인간뿐만 아니라, 유인원들도 뱀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그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상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어에 대한 공포는 어디서 기인하는가.

인간의 이타적인 행위는 이기적인 유전자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이타적인 행위는 다른 유인원에서도 보이는데, 이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이다. 

 계획적이며 사회적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개미들은 왜 인간만큼 진화하지 못하는가, 세상을 구성하는 50% 이상을 차지하는 무척추 동물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연은 인간이 없어도 충분히 돌아갈 수 있는 세상인데,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은 과연 무엇인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다큐멘터리에 끌리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는 되도록이면 동물의 왕국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그 미묘한 자연의 세계와 동물들의 습성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건 아마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이 이 세상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고 인간은 그저 잡식성의 동물일 뿐이며, 인간존재가 사라진다고 지구가 폭발하는 것은 아니라는 자괴감 (포장하여 말하면 겸허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리라. 인간을 알고 싶다보니 동물과의 차이점을 알고 싶게 되고 그러다 보니 사회생물학과 동물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과정중에 있는 것이다. 

 한 존재에 대해서 알아가는 방법은 여러가지일텐데, 인간이라는 존재들은 스스로으 존재에 대해서 연구하기 위해 다른 존재들과 비교하는 연구방법을 선택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스스로를 동물로 규정짓고 그 테두리 안에서 다른 동물들과 비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인간이 없다면 자연의 생태계는 오히려 혀 파괴되지 않고 멀쩡히 잘 돌아갈 것이다.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빙하기가 다시 온다거나 하는 일 외에, 인간이 없는 편이 오히려 지구의 생육번창을 더 도울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존재한다.

그것도 자연과 야생을 지배하지 못해 안달을 내면서 끊임없이 파괴와 약탈을 일삼으며 멀쩡히 그 대를 이어가고 있다. 인구를 늘리고 쓰레기를 생산하면서. 

 이 책 한 권으로 인간 본성의 근원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생각은 할 수 있다. 인간은 자멸할 수밖에 없는가, 자별하는 것이 善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자멸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개미와 닮은 이 노학자는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상처받기 쉬운 모든 생물들을 존중한다.

매우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말이다. 

 2006.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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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어떻게 아이를 키웠을까 - 육아의 지혜, 동서고금 일만 년의 문화사
데보라 잭슨 지음, 오숙은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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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 부은게다.

이 엄청난 책을 덥썩 집어들다니.

이 책은 장장 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마치 사전과도 같은 두께의 어마어마한 책이다.

육아서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 두께에 압도당해 육아서가 아닌 백과사전 내지는, 읽어야 하는 필독 문화전문서적 같기도 하다.

이 책은, 육아서라기 보다는 육아의 문화를 문화사로 정리한 책이다.

데보라 잭슨이라는 서구의 육아전문 작가가 전세계, 동서고금의 육아법들을 총망라해서 풀어놓았고, 그 중에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떤 것인지, 독자에게 묻는다.

 

책은 출산준비물 / 아이의 탄생 / 산후조리 / 모유수유 / 아기의 잠 / 아기의 성장 등으로 출산준비부터 아이의 양육까지의 이야기들을 여러 부족과 각 나라의 사례들을 종합해 이야기했고, 뒷편엔 옛날 옛적 우리 아기들을 키운 내력은 이라는 한국의 창 코너가 추가되어 정대련씨의 글로 한국의 옛날 아기 육아법에 대해서 한 장이 할애되어 있다.

 

데보라 잭슨은 서양사람이지만, 책 전편에 걸쳐서 동양, 혹은 원시적인 육아법을 동경하고 있는 듯 하다. 서양의 육아법이라는 것은 아이의 방을 따로 만들고, 침대와 모빌을 달아놓고 아이가 새벽에 울면 엄마가 방문을 열고 뛰어가서 달래주다가 아이를 내려놓고 다시 돌아오는, 시대가 지날 수록 점점 부모들에게 맞춰져서 부모에게 편한 식으로 발전 했다. 그러나 결국 그건 부모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아이를 낳기 한 달 전, 스위스의 거래처 직원이 한국에 출장을 왔다가 집에 들렀었는데, 우리 부부에게 아기의 방은 어디에 있냐고 물어서 우리 내외가 순간 당황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아이의 방은 아직 준비를 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아이를 낳으면 당연히 엄마와 한 방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그는 아이는 당연히 독립된 방을 하나 가지고 엄마 아빠와 다른 곳에서 자야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한국에서는 엄마와 아이가 한 방에서 자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라고 대답을 해줬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으면 따로 재우고 그렇게 되면 독립심을 키워줄 수 있으며, 아이가 울 때마다 바로 바로 안아주면 손을 타게 되기 때문에 버릇이 나빠진다고 한다. 병원에서 나눠주는 육아수첩에도 '운다고 매번 안아서 어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적혀있을 정도로 한국의 육아법은 서구를 많이 닮아가고 있다. 베이비 위스퍼라는 책은 특히나 "엄마가 살고 봐야할 일"이라는 것이 중점이 되어 아이의 밤중수유를 규칙적으로 하되 융통성을 발휘하라는 것이 그 주내용이기도 하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 지 모르겠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도 어머님들 (시어머니와 친정엄마 모두) 애는 조금 울려도 된다. 너무 얼러주면 손타서 안된다. 라는 의견과, 남편의 "아이가 원하는 게 얼마나 다양하길래 그걸 못 들어주느냐"하는 대립되는 의견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이 책은, 원시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아이를 끼고 사는 원시부족들은 아이가 크게 울지 않으며, 서양의 백인 아기들이 악을 쓰고 울어대는 꼴을 동양엄마들은 경악하며 볼 수밖에 없다는 사례와 함께, 출생 이후 엄마와 아이의 유대관계가 얼마나 친밀하냐에 따라 아이가 어떤 아이로 자라는가가 결정된다는 무서운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

 

일례로 인큐베이터에서 몇 달동안 엄마와 떨어져 살았던 조산아들의 경우 학대받는 아동이 될 확률이 높으며 (부모와의 친밀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서양에서만 발생하는 영아돌연사증후군의 경우 부모의 숨소리를 들으며 숨소리를 배워가는 동양영아들의 경우 쉽게 발병하지 않는 일로서 아무 이유없이 혼자 자던 아이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저자는 마치 동양/원시사회의 육아법을 흠모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물론 피곤하고 구속받는다는 느낌이 가득할 것이다.

아이를 한 손으로 안고 한 손으로 일을 해내는데에 익숙해지면서 스스로 참담한 생각이 들기도 할 지도 모른다. 제발 6시간 만이라도 깨지 않고 자봤으면 하고 애원하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애를 키우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나와 내 새끼의 일생중에 또 다시 오지 않을 신체적 접촉의 시기라는 생각이다. 아이는 자라면서 엄마가 안아주면 숨막힌다고 싫어하게 될 것이며 게다가 아들래미인지라 나중엔 서로 어색하고 머쓱해하며 손 잡는 일도 없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내 품에 안고, 젖을 먹으며 재울 수 있는 것은 지금 뿐이라는 것.

 

그렇다면 원시사회로 돌아가 아이와 살을 맞대고 사는 것을 실컷 즐겨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바로 이 책에서 말한대로.

 

책을 읽고 나니, 가슴을 풀어헤치고 하루종일 젖을 물리고 살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굴에서 불을 피우며 우가우가 소리를 낼 지언정.

 

여태 읽은 모든 육아서중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강력추천.

비록 두껍지만. 읽을 수 있다. 엄마라면. ^-^

 

2006.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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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전집 12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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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의 책은 동문선에서 문예신서를 통해, 그리고 롤랑 바르트 전집을 통해 접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의 이 책 텍스트의 즐거움은 "텍스트의 즐거움"과 "강의", 그리고 스티븐 히스와의 "대담"등이 엮여있으며, 각 인터뷰에서 발췌하여 엮은 롤랑 바르트의 주요어 20개에 대한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텍스트의 즐거움은 내 육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상념을 쫓아가는 바로 그 순간이다. 왜냐하면 내 육체와 나는 동일한 상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라는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에 대한 주관, 그리고 텍스트의 즐거움 - 곧 텍스트를 즐기기에 대한 긴 화두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나타나 있다.

읽혀지는 것과 읽혀지지 않는 것의 리듬텍스트는 그 자체로써 유희하며 독자는 그 텍스트를 가지고 유희하며 그것을 재생산할 실천을 추구하는데서 두번째로 유희를 하는, 그가 텍스트를 바라보는 방법에 대하여 몇가지의 이야기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쨌거나 롤랑 바르트이건 그레마스이건 데리다이건, 미셀 푸코나 레비 스트로스나 그들의 기호학은 마치 다 말장난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다. 롤랑 바르트가 지식인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역사의 찌꺼기라고 하는 것처럼 그저 그들의 피나는 연구는 언어에 관심을 가진 인류의 한 역사의 부스러기 쯤 된다는 것. 그렇다면 그 부스러기와 찌꺼기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줄 긋고 있는 나는 역사의 쓰레기를 쫒아다니는 바퀴벌레정도 될려는지. 

 인류의 역사는 모두 권력의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진짜라면, 권력에 대항하여 싸우기, 그리고 그 권력이 가장 깊게 깃든 곳이 언어와 언어체(랑그)라는 그의 주장, 다시 말해, 반동적인 것도 진보적인 것도 아닌 다만 파시스트적인,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말하게끔 강요하는 그 권력에 대한 도전들의 찌꺼기, 그리고 그 도전들의 찌꺼기를 추종하는 지식인 흠모 집단. 뭐 그런 것들로 구성된 게 역사와 인류가 아닌지. 

 학부때, 문학선생이 그런 말을 했었다.

문학은 沒有用의 것이라고. 소용이 없는 것이 문학이다. 文學은, 글에 관한 것들이다. 곧 모든 지식의 바탕이다라고 한다면, 그 선생의 이론과 롤랑 바르트는 어느 한 선에서 닿아있다. 

 아이를 낳은지 백일도 되지 않았고 매일 매일 미역을 불리고 미역국을 끓이고 아이의 기저귀 값이 비싸다는 것을 고민하고 있는 내가 도데체 왜 이런 책을 읽고 있는가에 대해서 적당히 둘러댈 그 어떤 변명도 찾지 못했다. 굳이 왜? 라고 묻는다면, 그냥? 이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는 이유.

사람은 가끔 그렇게 엉뚱하고 비실용적인 짓들을 한다.

어쩌면 언어와 언어체에 대해서 지지부지하게 평생을 매달린 롤랑바르트를 비롯한 일단의 지식인들 역시, 나만큼 엉뚱하고 비실용적인 짓을 ─ 평생토록 하셨을 뿐 어닐까. 

 세상 어딘가에, 비슷한 이유로 나같이 비실용적이며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할 나같은 바퀴벌레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2006. 5. 11.

 

PS. 기호학 서적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한 문장을 여러번 읽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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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7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지음, 이상빈 옮김 / 강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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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기호학 공부를 좀 해보겠다고 "깝쭉"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때는 정말 그야말로 "깝쭉"거리기만 했던 시절이라, 민예총이나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하던 기호학이나 문화비평에 관한 강의를 한 두 개 정도 들으면서 - 요즘은 그런 강좌가 많지 않은 듯 하다 - 피해갈 수 없는 도서 충동구매로 발동을 걸던 것이었는데, 기호학에 대한 기본 개론서를 세 권 정도 읽고, 롤랑 바르트를 시작하려고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와 "텍스트의 즐거움"을 사놓고, 이도흠교수의 책을 한 권 준비하고.. 뭐 그러고 있었다. 

 그러나 기호학이라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학문이긴 하지만 언어학적 접근으로 시작하여 일단 언어학에 대한 기본적인 개인적 사념을 정리하지 않으면 중도에 포기하기 쉬워지는 학문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책을 읽다가도 중간에 막혀버리는, 그런 점이 있었다. 물론 책을 그냥 읽어대면 그만이겠지만, 그 떄는 어쩌면 좀 더 의무적으로 공부하는 의미로 책을 대하려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호학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적인 수단이 일종의 기호이며, 그 기호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감히 내가 정의내리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문화비평과 매우 근접한 학문이라는 것은 기억한다. 

 어느 날 갑자기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 머리가 빠개지도록 난해한 글을 읽고 싶은 것이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말장난임에 분명한 문장때문에 머리속에서 마구 도표를 그려가면서 정리를 하느라 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그런 글들. 

 이 책은 기호학자이며, 언어학자이고, 또한 언어의 유희를 즐겼던 학자 - 저 표지의 멋진 인상을 가진 - 롤랑 바르트의 낙서장이다.

물론 옮긴 이의 말에는 이 책은 자전적 에세이 겸 평전과도 같으며, 그의 후기사고를 총체적으로 통합 혹은 연장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내가 보기엔, 그의 짧은 단상들을 도처에 메모해 놓은 것을 모아서 책으로 만든, 그의 메모장, 낙서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책의 질이 떨어진다고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을 표현하는 글은, 꼭 정자세를 하고 써내려간 정갈한 원고만이 그 사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호는 아니다. 어쩌면 롤랑 바르트는 자기 자신을 가장 진솔하고 가장 잘 표현된 것이 짧게 적어놓은 메모글들임을 세상에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게다.

책의 시작은 그의 추억이 담겨있는 사진 몇 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적는다. 그리고 책은 내내 짧은 제목과 그에 대한 그의 단상으로 이어지는데, 그 모든 단상엔 당연히 그의 흔적이 남아있으므로 롤랑의 사상과 학문등이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다. 언어의 유희, 기호학의 표현 - 그 진수를 정확히 간파한 현명한 학자의 고상한 유머라고 할까. 

 이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아주 진솔한 생각들을 담고 있으므로, 이 책을 기점으로 그의 정갈한 글들에 진입할 수 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인 것처럼 이 책을 종착점으로 삼는 사람도 있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멋모르고 먼저 읽어버린 것을. 

 메모. 일기. 낙서.

그 모든 것들이 기호가 되어 표현하고 있는 우리 자신은 어떤 모습일지.

롤랑 바르트의 롤랑 바르트는 매력적인 평전임에 틀림없다.

 

2006.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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