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학원선생님이 책을 추천해줬다면서 대형마트에 움츠리고 있는 작은 도서코너에서 책을 고르고 있다. 여기 말고, 더 많은 책이 있고, 더 다양한 세계가 있는, 서점으로 가자고 나는 권한다.  

아이는. 

어른들이 귀찮아 할 것이니 여기서 대충 고르겠다고 한다.

아이의 요구는,  

언제나 어른들이 귀찮아하는 것들이었다. 

운동화를 빠는 일, 실내화를 빠는 일, 소풍도시락, 학부모 동의서, 부모교육 참가신청서, 자동이체가 되지 않는 학원교재비 타내기. 

아이는, 물질적으로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이에게 소중한 물건은 그 중 단 하나도 없다. 모두 다, 자기를 귀찮아 하는 어른들이 떠다 밀어준 것이라는 걸, 아이의 마음이 오히려 더 잘 알고 있었다. 크레파스, 메이커 가방, 계절별로 색깔별로 구비된 메이커 신발, 브랜드 교복.  

어른들은 노란 물을 들인 아이에게, 네가 도대체 무엇이 모자라서 "그런 아이들"과 어울리느냐고 다그쳤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자라지 않지만, 그 무언가가 모자라긴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아이는 차라리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리거나, 주유소에서 기숙을 하는 또래 아이들처럼 그렇게 물질적으로도 궁핍하여 몸과 마음의 궁핍함을 일치시키고 싶다. 물질은 끝없이 풍요롭고, 정신은 위태롭게 곤궁하다. 아이는 그 어디에서도 합일을 찾을 수 없다.  

아이의 요구는 늘 어른들의 귀찮아 하는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아이보다 먼저, 아이의 일을 나서주던 어른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키우던 소라게는 아이가 미쳐버리고 싶었을 때, 그 심정을 대변하듯  그렇게 죽어버렸다.   

아이는 생각한다. 어두운 방안에서 혼자 소라게에게 뻥튀기를 뜯어주던 그 때, 아무도 너에게 말을 걸지 않고 아무도 너를 찾지 않을 때, 유일하게 네가 살려낼 수 있거나 죽일 수도 있었던 그 작고  꼬물꼬물한 생명들. 아이는 차라리 빨리 어미가 되고 싶다. 너는 그정도는 알고 있다. 어미는 너를 귀찮아했지만, 너의 아이는 너를 귀찮아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이에게 #1.  

2009. 1. 5.  

*당신이 알아야 한다. 당신은 왜 외면하고 살았는가. 모든 것은 당신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언니 나요.”
“어, 그려. 밥은 먹었는가?”
“우리야 시간밥 아니요. 언니네는 자셨소?”
“응 나는 인제 혼자서 뭘 먹어볼까 하고 궁리중이네. 오랜만에 라면이나 하나 끓여먹을까 생각도 하고, 그 어떤 날은 라면 냄새가 그리 싫더만 오늘은 창문으로 왠 라면냄새가 이렇게 맛나게 올라오나 싶어서 나도 라면이나 하나 먹어볼까 그러고 있소. 몸은 편코?”
“휴.”
“왠 한숨이여. 뭔 일 있는감?”
“지영이가요.”
“지영이네 또 쌈박질 했다 하는가? 아범이 또 나갔는가?”
“아뇨. 둘이 번갈아가매 보따리 싸더니 이번엔 지영이년이 쌌구만요.”
“어메. 그년이 어디로 갔는가?”
“여기 있시유.”
“어메. 놀라뻔졌네. 보따리 쌌담서 글루 갔당가?”
“싸가지고 지 어매한테 가 있는 거 잡아왔지라.”
“어메.. 쬐깐한 년이 사람 여러 번 놀래키네.”
“야. 내가 지금 막 심장이 막 콩당콩당해가지고, 아이고.. 옆구리도 막 땡기는 것 같고, 환장하겠구만요.”
“어마, 동상, 뭔 일이당가, 뭔 일이 있었당가?”
“아니 뭐 글쎄 별 일이 아닌가분데, 지영이년이 한 달전부터 집을 나가겠다고 했다네요. 애들이 말은 안 했는데 벌써 몇 번 시도했다가 뭐 어린 애다 보니 어데 멀리는 못 가고 나갈라 하다가 들어오고 나갈라 하다가 들어가고 그랬는가봐요. 어멈은 머리 싸매고 누워있고 아범이 흠씬 두들겨 팼다는데 되게 맞고 보따리 쌌는가봐요. 집에다가 편지를 써놨대요. 지 어멈한테 간다고. 그래서 거기, 그.. 시영이 에미가 편지 보고 나한테 전화를 넣었어요. 어젯 밤에. 그랴 부랴 부랴 지영이 에미한테 전화 넣어가지고, 애가 그리로 간 갑다. 갔으면 잘 붙들어 놓고 있어라. 해가지고 붙들어 놓고 있는 줄 알았더니 이 건 또 뭐 지영이 에미는 누가 같이 있다고 애를 못 데리고 있는다고, 해가지고 어제 밤에 김서방 운전해서 가가지고 데리고 왔네요.”
“허. 거 참. 지영이 에미는 누가 있댜?”
“뭐 밤에 전화 하고, 어머니 잠깐 만요. 뭐 이러는 거 보면 뭐 누구겠어요. 누구는. 그 짝도 살아야지.”
“.. 잠은 잤는가?”
“잠이야 뭐 나중에 자도 되고, 심장이 벌렁거려서 잠이 왔겠어요.”
“지영이년은 뭐 하고 있는가?”
“아침 먹고 자요.”
“지는 속이 좋은갑네. 헹”
“뭐, 그러면 다행이구요. 아니면 할 수 없구요.”
“동생 좋다 말았네. 하하하”
“그러게요. 헤헤.. 인제 자윤갑다 했더니 이게 또 와가지고 나를 엮어번지네..”
“흠.. 어째. 데리고 있을랑가?”
“아 그럼 어쩐대유. 저래가지고 분당으로 다시 가겠어요? 그렇다고 어디 지 어멈도 형편이 안된다 하고, 시영이 에미는 싸 눕고, 지 애비는 분이 나서 펄펄 뛰고 애를 잡을라하고.. 의붓 어멈 들어오면 의붓 아범 된다더니 그 짝인지.. 지영이는 저러고 새초롬 해가지고 애가 영 달라졌네요. 말도 안하고.”
“시영이 에미가 구박한 건 아니고?”
“구박 받을 만 했으면 구박이야 좀 했겠죠. 그래도 그렇게 밑도 없는 애는 아녀요. 항상 보면 지영이가 삐뚜룸하다고 고민하고 맨날 울고 뭐 그랬죠. 아 그래 갸는 뭔 죄란다요? 아범보고 지가 시집왔지, 애 키우러 들어왔대요? 그건 아니잖유”
“그래도 새어머니 자리가 원래가 그런 것이네. 그 옛날에 누가 그러더만, 자기는 새 어머니랑 인쟈, 새로 친해질라고 새어머니가 동물원 구경을 시켜줬는데, 아 그 오줌이 마려워 죽겠는데 오줌 마렵다는 소리를 못 했다는거여.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 많은 데서 그냥 싸버렸다고. 열 살 넘은 가시나가. 그래 그 자리가 그렇게 서로가 불편한거여. 나도, 지금 이 처지니까 내 그 심정은 알겠지만, 사실 새엄마라는 자리는 잘 해줘도 섭섭하고 잘 못 해주면 더 섭섭한 것이여. 서로 섭섭햐. 섭섭한 거 섭섭타고 말도 몬하고, 그러다 보면 세월가고 그러다가 그냥 눅어지면 그만이지만서도, 아직 지영이는 어리고, 거기 누겨, 시영이 에미도 어리고, 서로 어려서 애들끼리 서로 물고 뜯고 했을 수도 있는 것이네.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지. 지영이가 또 이쁜 짓을 하고 지냈다면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 참 골치 아픈 일이여.”
“모르겠네요. 지금으로 봐서는 애가 얼굴이 퀭한 것이 영 딴 사람만 같으요. 저번에 내가 집 나간다고 지랄헌다 해서 애 아범 없을 적에 낮에 한 번 갔자네요. 그랬더니 요 것이 눈을 새파랗게 뜨고 대들더라니까요. 할머니가 여기 살아보세요. 응.? 뭐 이딴 소리 지껄여 가매. “
“그것이 그러더란 말이여?”
“어디 생전 그랬어요. 저것이? 안 그랬어요. 그런 애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제 엄마가 너무 오냐 오냐 받아주니까, 애가 완전히 미쳐가지고 날뛰는 게 아닌가 싶더라니까유. 어멈은 옆에 앉아서 한숨만 쉬고 암 말도 못하고 있고, 기지배는 키는 껑충한 게 벌떡 벌떡 거리고 고개 빳빳하게 세우더니 지 방에 들어가서 문 턱 걸어잠그고”
“허이구…”
“그러더니 에미는 나중에 나한테 전화해서 한단 소리가 지영이년이 학교에서 자살할꺼라고 애들한테 그러고 다녔다고, 지는 걱정이 너무 많이 된다고 그러더라구요.”
“에미가 졌구만.”
“그런갑죠?”
“거 지영이년이 에미보다 쎄구만. 에미가 애를 못 다루는구만. 아직 어려서 그런가. 그것이 그러니까 그 나이가 있는 것이여. 세 살 배기 애 어멈은 세 살짜리 다루는 것도 힘들어. 안그런가? 그런데, 다 큰 것을 다룰려니 어디 쉽겠느냐고. 지영이가 조금만 더 어렸어도, 뭔 초등학생이나 됬어도 괜찮았을 것인데, 인제 한 참 피 끓기 시작하는데 그게 감당이 되겠냐고. 감당이 안 됬구만. 아무래도 자네 몫인갑네.”
“그런가 보네요.”
“아들 자식 서이 키우느라 그 난리를 치더만, 이제는 손주년까지 떡 붙어가지고 안 떨어지게 생겼구마. 참으로 자식 키우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농사일인데, 자네는 다 끝났다 셈 치고 한 숨 돌리고 휴가 좀 받아가지고 있으면 또 자식이 생기고 또 자식이 생기고 하는구만”
“그르게요.”
“나야, 자식을 제대로 품어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길러보지도 못해서 뭐라 하겠는가마는, 아들 서이 잘 키운 자네쯤 되야 그래도 멋 모르고 날뛰는 년 잡아놓지 않겠소? 그리 생각해야지 어쩌겄나. 그 에미가 깜냥이 안되고, 아범은 팽개친 지 오래되서 정신도 없을 거이고, 애는 커가고, 자네밖에 없구만. 길이 거기 뿐이네.”
“그래서 잡아만 진다면 다행이구요.”
“노랑대가리 물도 들였는가?”
“야.”
“허 참.. 고..쌍판대기 반반해가 인물값 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더니 슬슬 기미를 보이는구마. 이 참에 동생이 고생 쫌 하쇼. 저기 경이네처럼 애 개차반 되는 거 순식간이오. 정신 단단히 붙들어 매고 참으쑈. 다 큰 기집애랑 매일 매일 씨름하다보면 밥도 꿀떡꿀떡 넘어가고 오히려 정신머리 단단해 질 거이니, 그리 생각하소.”
“야. 그렇게 생각해요.”
“애 아범은 뭐라는가?”
“뭘 뭐래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 저 자식은 아범 자식이 아니라 연분이 내 자식인가보네요.”
“김서방은 뭐라는가?”
“김서방도 암말 안해요. 아들만 키워놔서 워낙에 이뻐라 했자네요.”
“그라지. 암. 그랬지.”
“김서방이 데리고 있자고 하네요. 자기야 이쁜 거만 보면 되니까 그러는가분데 저는 언니 솔직히 자신이 쪼끔 없구만요.”
“.. 자네도 늙는구만.”
“헤. 뭐 장사 있대유?”
“남한산성 호랭이 아줌마가 어디로 가부렀는가? 하하하”
“인쟈 다 이빨 뽑아 번질라고 했더니만 다시 틀니라도 해 넣어야되게 생겼구만요.”
“틀니 해 넣으쇼. 힘들면 내 치과의사라도 함 붙여줄텡께.”
“고맙소. 내 그 말 듣고 힘을 내 보리다.”
“내가 함 가서 지영이 고기 함 사 먹이면서 관찰 좀 해야 쓰겄구만.”
“언제 오실라요?”
“자네가 부르게. 애도 진정이 좀 되야 쓰지 않겠는가.”
“그렇죠?”
“암만, 그것도 강짜 부리고 보따리 썼어도 지금 좀 황망할 것이네. 고생하게 자네가.”
“그래요. 그럼 이만 전화 끊소. 여게 비 오는갑네. 옥상에 좀 가봐야쓰것소.”
“어이 그러시게. 나 먼저 끊소.”
“예. 예”

날렵하게 일어나는 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면 늘 습관적으로 머리를 한 번 만지고 옷 매무새를 다듬는다. 동생은 상의의 가슴팍을 한 번 쓸어내리고 양손으로 옷의 밑단을 쭉쭉 잡아당긴다. 현관을 나서면서 거울을 한 번 보고 머리를 한 번 만져본다. 동생은 늘 그러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아침 일어나 밥을 앉혀놓고 조용하게 분단장을 한다. 칠순을 바라보는 김서방도 제 마누라의 맨 얼굴을 보는 일이 많지 않다. 동생은 늘 남편보다 늦게 자고 남편보다 일찍 일어났다. 남편이 당뇨에 걸려 10년동안 설탕없이 반찬을 해대고 시간에 맞춰 밥을 하고 그 밥을 또 나르기도 하는 세월 동안 동생의 입술은 항상 적당히 붉었다. 어깨는 늘어지고 궁둥이는 납작해지고 다리는 옹그라지기 시작했지만 동생의 얼굴엔 적당한 분가루가 붙어 있었으며 눈썹은 선명했다. 지금도 동생은 옥상에 올라가 행여 이웃들과 얼굴을 마주칠 일이 있을까 싶어 머리라도 한 번 만져보고 현관문을 나서는 것이다. 동생의 집의 옥상엔 무화과며 토마토, 오이와 머루들이 자란다. 한 여름엔 주로 고추를 심고 가끔 깨도 심어 참기름을 짜서 언니에게도 보내준다. 배추를 심어 김치를 담그고는 배추가 알량해서 맛이 없어져부렀다고 하고 달랑무를 심어 겨울에 동치미를 담궈 여기 저기 자식들 먹으라고 손주들 먹으라고 넘겨주느라 바쁘다. 동생의 집 위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생은 말려놓은 씨래기를 다시 광에 집어 넣고 빨래를 걷으러 나온 건넛집 여자와 인사를 한다. 동생은 그 동네에서 20년을 살았다. 조그만 방 한 칸에서 시작해 붉은 다라이에 밥을 지어 나르며 남편이 집 짓는 것을 보필했다. 그리고 동생의 남편은 서른이 훨씬 넘어 방 두 칸 자리 집을 지었고, 마흔이 되어 방 세 칸 짜리 집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오십이 다 되어서는 3층짜리 상가건물을 지어주었다. 그 때부터 동생은 건물주가 되었고, 월세를 걷으러 다녔다. 동생은 평생 꿈꾸던 노년을 보내게 됬다며 좋아했다.

 

-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