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 본다》 읽어 본다

 

난다 출판사 《읽어 본다》시리즈 / 전 5권



1

 

일단 그들을 위한 변론으로 시작할까 한다.

 

이적료가 천억을 훌쩍 넘는, 아마도 포르투갈어나 스페인어를 구사할 것 같은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있다고 치자. 게임이 있는 날 아침, 푹 자다 깬 그는 상체를 일으키면서 어쩐지 몸이 깃털처럼 가벼운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폭발적인 에너지로 충만함을 느낀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 그가 어뭬리컨블뤡퍼슽흐를 만들 심산으로 달걀을 깼는데, 쌍란이다. 처음이군, 하며 하나를 더 깼는데, 대박, 이번에는 노른자가 세 개다. 그는 어쩐지 오늘 경기에서 다섯 골을 몰아치고야 말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에 소스라친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내리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누구세요? 택배요~ , 출근 전 택배라니, 오늘 무슨, 곗날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베네치아의 수많은 굴다리 중 어딘가에 은거하여 한 땀 한 땀 손으로 빚어낸 축구화를 일 년에 딱 두 개만 만들어 세상에 내 놓는다는 63년차 축구화 장인, F. 슈마허(81)씨의 눈부신 2018 S/S 시즌 신상이었다. , 5년 안에 올 지조차 불투명했던 이게 마침 오늘 오다니. 그는 이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경기장도 나쁘지 않았다. 그가 데뷔 경기를 가진 곳으로, 그날도 그는 21도움의 맹활약을 펼치며 세상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오늘, 내 인생 최고의 날을 만들어 보는 거야. 축구화 끈을 꽉 조이며 그는 다짐했다.

 

다섯 골을 몰아칠 물적 심적 운적 모든 준비가 끝났다. 온몸의 관절을 한 번 점검한 후, 그는 그라운드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단호한 눈썹의 주심이 그를 불러 세웠다. , 그 축구화 정말 예쁘군요. 슈마허인가요? , 이번시즌 신상이지요. 축하합니다. 당신은 그걸 가질 자격이 있지요. 감사합니다. 헌데,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참 아쉽습니다. ? , 당신은 오늘 경기에서 상대방 페널티 박스 바깥쪽 5m 지점을 중심으로 하여 가로 세로 2미터 영역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씀이세요. , 비록 말 같지도 않은 말씀이지만 당신이 따라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무슨 소리야, 당신은 내게 이럴 자격이 없어! ,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오늘은 자격이 있는 누구라도 당신에게 똑같은 지시를 할 겁니다.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오늘 아침 당신의 컨디션, 다섯 개의 노른자, 굿모닝택배, 슈마허 신상, 그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듯이요. 왓더훡. 당신이 내게 이러는 걸 세상 사람이 다 알게 하고 말겠어! 이런, 내가 당신에게 이러는 걸, 당신은 아직 몰랐단 말입니까?

 

그날 경기에서 그는 2x2미터의 작은 영역 안에 갇혀 동료들의 공격의 맥을 끊거나, 심한 경우 상대 수비에 힘을 실어주는 등, 팀이 4:1로 대패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들이 전체적으로 재미가 없는 것은 다 분량 문제다. “이 책들이 전체적으로 재미가 없는 것은 다 분량 문제다.”라는 단 한 마디의 말을 재미없게 하지 않기 위해, syo가 사용한 저 막대한 분량을 보시라구요. 물론, 작은 재미를 얻기 위해 어마어마한 분량의 신소리를 해대야 하는 건 syo의 재능이 부재한 탓이다. 그 말을 뒤집으면, 실제로 짧고도 재미있는 글을 쓰는 건 어느 정도 재능의 영역에 발을 걸쳐 있다는 뜻이고, 그런 재능, 그런 돈 되는 재능은 희소하다. 이 저자들은 다방면에서 훌륭하시지만, 최소 분량 최대 재미의 재능까지 갖추지는 못한 듯 보인다. 최소한 이 책들에서는 엿볼 수 없었다.

 

딱 정해진 것은 아닌 듯하지만 평균적으로 한 권당 한 쪽, 책 전체의 부피와 예상 가격을 고려했을 때 저자들은 그 좋은 책들을 열심히 읽고도 평균 한 바닥의 지면밖에 허락받지 못했다. A4 한바닥도 아니고, 무시 못 할 좌우 여백에 읽은 책 제목이 차지하는 면적까지 고려하면 그들의 플레이는 점점 더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 하물며 왼쪽 오른쪽 페이지를 각각 한 명씩 맡아 쓴 책들은 오죽하겠는가. 분량에 쫓겨 머리와 꼬리와 몸통의 반절마저 다 쳐내기 급급한 내용 요약과, 반드시 첨언하고 싶은 몇 마디 찬사가 자리를 잡고 나면, 그만큼 재미와 감동이 요동칠 공간이 협소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훌륭한 선수가 모든 조건을 갖추고 경기에 임해도, 게임 자체는 지는 수가 생긴다.

 



2

 

이 다섯 권의 책을 읽는 동안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강렬하게 머리통을 두들긴 생각은 아, 겸손해야겠다, 였다. 그리고 이제 모니터에다가 겸손해야겠다고 써놓고 보니, 겸손이라는 것 자체가 잘난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syo같은 먼지가 감히 겸손 님을 하겠다는 생각을 품은 것 자체로 벌써 겸손의 정반대편에 서 있는 셈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정정합니다. “깝치지 말아야겠다.”

 

가장 큰 소득은 아무래도 스스로의 미미함을 안 것이겠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을 평소에도 꼭 자랑거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사실 그 자체로 부인한 일은 별로 없으며 심지어 스스로 나는 책을 좀 많이 읽는 편인데,” 하며 말길을 놓는 일도 꽤 된다. 도대체 어디서 싹튼 호연지기로 그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첫째, syo는 무직(無職)인데, 독서에 있어서만큼은 무직은 곧 무적(無敵)이다. 둘째, 최소한의 노력으로 독파할 수 있는 쉽고 얇은 책을 주로 골라서, 읽은 책 카운트 올리는 데 집중한다. 셋째, 책 많이 읽는다고 자랑하는 데에 리뷰 쓰기란 투입 시간 대비 극히 저효율적인 행동이므로 그거 쓸 시간에 얇은 책 한 권 더 읽고 자랑질의 총알이나 만든다. 이렇게 운용 가능한 모든 졸렬한 전략전술을 총동원하여 최대치로 어디 한 번 뽐내 보자꾸나...... 이래저래 부끄러운 인생이다.


11독의 목적물로 이 양반들이 고른 책들은 잔꾀머신 syo의 낯짝에 큰 불 놓기에 충분할 만큼 분량과 함량을 고루 갖춘 작품들이었다. 그런 놈들을, syo처럼 무적(無職)도 아닌 시민으로서 당당하게 밥벌이 하는 도중에, 비 오는 날이면 비 온다고 1, 비 안 오는 날 안 온다고 또 1권 꼭꼭 읽어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읽는 족족 쓰는 출석률 100%의 매일리뷰라니, 이쯤 되면 놀라움을 넘어서 무서울 지경이다. 그렇게 빚어낸 이 독서괴물들의 365일 기록을 팔랑팔랑 읽고 있으면 곤장 맞는 기분이 된다. 감히 네깟 놈이 독서가를 자칭하고 다닌단 말이더냐! 여봐라, 당장 저 미미한 자를 형틀에 묶고 미미 몽둥이로 장 365대를 쳐라.....

 

 


3



 차라리 재미라도 없든가 / 남궁인

 

syo는 처음 남궁인이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싫었다. 의산데 글도 잘 쓴다고 하니까, 싫었다. 책이 잘 팔린다고 하니까, 또 싫었다. 의사라는 타이틀이 그에게 역량 이상의 판매고를 가져다 준 거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지 않을 것 같아서 더, 싫었다. 아니, 이 양반은, 직업도 훌륭해, 그 와중에 책도 많이 읽어, 그래서 글도 잘 써, 그래서 책도 잘 팔려, 심지어 잘 생겼어, 피아노도 잘 친다는구먼!(이건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입니다) , 이렇게까지 나의 열등감을 건드리는 인간은 이제껏 없었다! 싫어해야지. 이유도 근본도 없이 일단 싫어하자. 싫어하고 말테다..... 뭐 이런 졸렬하면서 진부한 메커니즘. 그래서 그의 산문집을 읽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인기가 많아서 도서관에 돌아오질 않아요.....) 추후에 읽게 될 날을 대비하여 미리 눈에 쌍심지를 구비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 권을 읽고 나니, 입장이 상당히 애매해져 버렸다. 아니, 잘 쓰는데, 분명히 syo같은 시정잡배보다야 잘 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또 아득바득 열폭할 만큼은 아닌 거라...... 그래, 어차피 내가 방구석에서 키보드 붙들고 혼자 좋아하건 싫어하건 남궁인 선생 앞날에 뭐 달라지는 게 있겠어. 그냥 이제부터 좋아하자. 좋아하기로 해. 그래서 좋아하기로 했다.

 

책 읽은 책에 대해 한줄 평을 남기며 syo가 가장 자주 쓰는 말이 있다. 요지는 알라딘에도 이만큼 쓰는 사람 수다하다정도 되는 말이다. 그동안 몰랐지만, 사실 당연하게도 그 말은 syo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다. 많은 이웃들이 같은 맥락의 평을 이런 책 저런 책에 달만큼, 알라딘이라는 판이 만만치가 않다. 그 결과 알라디너들에게 다른 알라디너책 읽은 책을 평가하는 일차적인 잣대로 기능하는 것 같다. 물론 그 잣대는 알라디너들 각자가 맺은 이웃의 수와, 그 이웃의 내공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겠다. 이 책은 syo가 가진 일차적 잣대에 걸쳤거나 넘어도 아슬아슬 턱걸이로 넘은 수준이다. 잘 된 글과 아닌 글 사이의 격차가 너무 심하다. 바쁜 와중이라 구색만 맞추고 넘어갈 수밖에 도리가 없었는지, 짧은 글들 가운데는 이 책을 읽지 않은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써도 이보다는 더 길고 그럴싸하게 쓸 수 있겠다 싶은 글도 몇 있었다. 읽고 쓴다고 써도, 아니 얘 이거 지금 읽고 쓴 거 맞아?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독후감 밖에 못 쓰는 인간 syo, 반면에 또 안 읽고 썼는데도 읽은 건지 안 읽은 건지 애매한 느낌이 들게 하는 얍삽이 또한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으하하하하.....

 


 

읽은 척하면 됩니다 / 김유리, 김슬기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각자의 책을 읽는다 / 장으뜸, 강윤정

 

독서에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 부부 독서가, 부부 저자라는 구도는 대체로 생각하기만 해도 배가 다 부른 훈훈한 상상을 동반한다. 이렇게 쓰고 나니까, 달리 더 할 말이 없다. 아이 참, 큰일이다. 바로 앞 문단이라도 복붙할까..... 복붙한 걸로 칠까.


작가님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셨을텐데 제가 멸망시켰네요.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 / 장석주, 박연준


일단 장석주의 등판 자체가 반칙 같다. 이 기획에 참여한 8명의 저자가 모두 독서에는 제각각 가락이 있는 사람들이겠지만, 그래도 이 분야는 장석주에겐 전공이다. 일단 경력부터가 좀 다르잖아. 장석주 한 명이 낸 책이 나머지 일곱 명이 낸 책 수를 합친 것의 5배쯤 될 텐데. 심지어 장석주가 시인이라구요? ‘서평가아니었나요? 하는 사람조차 있다(있을 것이다..... 솔직히 미확인입니다. 죄송합니다.) 8명의 저자들이 매일 한 권씩 읽고 기록을 남기는 프로젝트를 제안 받았을 때, 아마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장석주뿐이었을 것이다. 하루 한 권이라고? 한 끼 한 권이 아니구요?

 

게다가 장석주 혼자가 아니라, 박연준까지 출동했다면? 이건 리그(이 시리즈의 저자 집단 8명을 말합니다)에서 제일 잘 던지는 투수와, 리그에서 제일 잘 치는 타자가 한 팀에 있는 것이고, 나머지 저자들에겐 거의 민폐에 가깝다(두산 베어스는 반성하세요. 그렇게 막무가내로 잘하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이 책이 제일 기대만발이었다.

 

역시 기대대로 제일 좋았다. 하지만 책 자체 엄청 좋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일단, 역시 서평에서라면 장석주는 잘한다. 너무 잘한다. 너무 잘해서 마치 기계 같다. 그러다보니 독자의 심장을 노리고 쓴 것으로 보이는 대목조차 가슴을 치지 않는다. 아름다운데 울림이 적다.

 

너무 많이 알아서 독자를 주눅 들게 한다. 가뜩이나 좁은 지면을 다른 데서 읽은 책 이름을 나열하는데 사용한다. 분량 덕에 많이 줄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 소설가, 문장가, 철학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습관은 이 책에서도 여전히 드러난다. 이름만 늘어놓고 보아도 아름다운 존재들임에는 분명하나, 장석주가 그 이름들을 주욱 읊으면서 느꼈을 그 고양된 감정을, 독자들은 그대로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실제로 이 책의 매력은 거의 박연준의 글에서 나온다. 이 시인의 글이 이 책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박연준이 없었다면,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오로지 정보만을 얻고 있구나, 어차피 오래 기억하지도 못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책을 일찍 내려놓았을 것이다.

 

잠깐, 어쩌면 이것이 그들의 빅 픽쳐가 아닐까? syo가 박연준의 따뜻한 글에서 큰 매력을 느낀 것처럼, 어느 누군가는 장석주의 서늘한 글에 감동할 것이다. 결국 비슷한 글을 엮어 누군가에겐 사랑받고 또 누군가에겐 사랑받지 못하는 책이 아니라, 모든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책을 만들려고 일부러?! 그렇다면 대단하시군요. 이 완벽한 포지셔닝이라니.....

 

꿈보다 해몽일지도. 워낙 두 사람 다 좋아하다보니 그만.

 

 


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 / 요조

 

처음 책을 휘리릭 넘기며 탐색전을 펼쳤을 때는, 요고 요고 요조 요고 응? 요고 봐라 요고 요조 요고 응? 이런 마음이었다. 가뜩이나 분량도 적은데, 읽은 책 사진을 직접 찍어서 꽝꽝 박아 놓았어? , 요 얍삽이 좀 보게, 요고 요고 응? 이랬던 것이었다(나여, 자네는 어쩌다 이렇게 삐뚤어지고 말았는가.) 그런 이유로 이 책을 가장 마지막에 읽은 것이다. 어차피 네 권쯤 읽으면 기력 떨어져서 마지막 책은 꼼꼼히 안 볼 것 같은 예감에. 부당하고 불공정한 대접.

 

그랬는데, 처음 며칠 치를 읽다가 소름이 돋았다. 잠깐, 이거..... 나잖아? 난데? , 내가 썼나? 하면서 책 표지를 다시 펼쳐 저자 이름을 확인하고 돌아오기까지 했다(당연히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분명히 독후감은 독후감인데, (글자크기 3.0포인트) 후감(글자크기 254포인트) 인지라 읽으면 읽을수록 그 사람이 읽은 책보다는 그 사람 자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그런 독후감이었던 것이다. 한 장 한 장 넘어가면서 내가 다 불안해졌다. 명백히 책37인데, 이런 걸 책 읽은 책이라고 펴내도 되는 거야? 그리고 84페이지에서 만난 서평 쓰는 법에 대한 글 첫머리에서 드디어 빵 터지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역시 거짓말입니다. 새빨갛지는 않지만.)


얼마 전 어떤 책에 대한 내 리뷰가 까였다’. 책의 줄거리가 그 속에 충분히 들어가 있지 않아 독자들이 책에 대한 정보를 알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엄청난 부끄러움 속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다이 책에 따르면 독후감과 서평은 엄밀히 같은 말이 아니라고 한다리뷰-독후감-서평 다 같은 말로 쓰곤 했던 나는 초반부터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고독서라는 것의 완성은 비로소 서평에서 이루어진다는 책의 분명한 주제는나에게 양치질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운동이라고 해야 할까아무튼 해야 하는 거 아는데도 너무나 하기 싫은 모든 것그 세계에 서평 쓰기도 있는 것이었다. (84)


이 한 문단에 syo의 모든 것이 있었다. 책 이야기 쓰는 공간에서, 책 이야기 쓰는 척, 써 놓고 보면 다 책 이야기는 간데없고 내 이야기인 syo의 글들. 그것조차 쓰기 싫어서 안 쓰고 또 안 쓰는 나날들. 10권을 읽으면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는 9권의 책들이 모종의 장소에 모여, 언젠가 우리의 단단하고 날카로운 모서리로 syo 저 자식의 명치를 세게 때리자며 혁명 거사를 도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다른 이웃들의 그야말로 리뷰 같고 더 나아가 좋은 리뷰 같은 리뷰들을 만날 때마다 자꾸 작아지는 자존감......

 

역시 세상은 넓고, syo와 비슷한 약점이 있는 사람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어지는 글들을 읽는 눈이 어찌 따뜻하고 촉촉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 그래. 안다, 알아. 내 다 안다...... 우리는 각 잡고 쓰지 않으면 늘 이런 글이 나오는 것이지. 이 무슨 슬픈 운명이냐, 이러면서 혼자서 동질감을 형성하고 자빠졌더니, 금세 책이 끝났다. 이 책을 통해 얻은 것? 그것은 요조를 향한 나의 사랑이지. 독자에게 사랑을 심어주는 책은 위대하다.....고 하고 싶긴 한데, 솔직히 뭐 그 정도는 아닙니다.

 

 

4

 

결국 꾸역꾸역 다섯 권을 읽으며, 다른 책 다섯 권을 읽은 것에 비해 얼마나 더 괜찮은 인간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 페이지에 오래 머무르면서 활자를 한 자씩 곱씹은 데도 있었지만, 지겨움이 폭풍처럼 몰아쳐 책을 집어 던진 때도 있었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같은 작가의 글인데도 기꺼웠다가 고까웠다가 했다. 다섯 권이 도서관에 나란히 꽂혀 있는 풍경이 어떤 기이한 욕심을 자극하지 않았다면, 이런 식의 독서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치킨을 너무도 숭배하는 syo, 나는 매 끼니 닭을 처 먹여도 감사히 잘 먹을 놈일 거라 이제껏 굳게 믿어왔지만 어쩌면 아닐 수도, 다섯 끼 연속으로 먹는다면 후라이드-양념-매운양념-간장-눈꽃치즈의 5개 버라이어티 구성으로 내놓은들 간장쯤에서 질리고 눈꽃치즈에서 쳐다보기조차 싫어질 수도 있겠다는, 그런 자기 인식을 얻을 수 있었다.

 

 

+


정확히 체크한 것은 아니라서 누락되었거나 틀릴 수도 있는데, 다섯 권의 책, 여덟 명의 저자들이 모두 읽은 책이 몇 권 있었다. 대충 기억나는 것은 이렇다.

 


쇼코의 미소 // 82년생 김지영 // 너무 시끄러운 고독 // 안녕 주정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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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7-31 2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책에서 “쓰지 않고는 못배길 죽어도 못배길 사연이 있는가? 그렇다면 펜을 들라” 라는 문구가 생각듭니다. ^^

syo 2018-08-01 08:51   좋아요 0 | URL
허허.....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만 그런 말씀 한 마디로 퉁치시기에는 북다님 글들이 제게 주는 상대적 박탈감이 너무 심합니다 ㅋㅋㅋㅋ

2018-08-01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1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리즘메이커 2018-08-01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우...! ㅋㅋㅋsyo님의 글은 항상 유쾌한 드립으로 가득해서 넘나좋구요 !!

syo 2018-08-01 08:53   좋아요 0 | URL
프메님!
20대 때는 일찍 자야 키가 크는 법인데 3시까지 안 주무시면 나중에 syo처럼 땅바닥에 붙어 지내게 됩니다.....

2018-08-01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1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1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8-01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이게 뭡니까?
맨 첨엔 이 시리즈 까는 줄 알았더니 결국 칭찬일색이고,
그럼으로써 스요님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인가를 은근슬쩍 보여주는
이 전법은 누구한테 배우신 겁니까?
이 더운 날 읽느라 고생 꽤나 했는데
그래도 스요님 특유의 유머가 없었다면 읽다 포기했을 겁니다.
담엔 날씨를 고려하셔서 엑기스로만 웃겨주시면 안 될까요?ㅠ

어뭬리컨블뤡퍼슽흐는 드셨습니까?ㅋㅋㅋ
참고로 전 이 시리즈 책 표지가 맘에 안 들어 일찌감치 읽을 생각을
안하고 있었습니다.ㅋ

syo 2018-08-01 10:54   좋아요 0 | URL
아니 전법에다가 칭찬 일색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다섯 권 다 엄청 까논 건데 저게ㅋㅋㅋㅋㅋㅋ
제가 볼 때는,
저자분들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이외에 칭찬할만한 데가 많지 않은 책들이에요.
기획 자체가 좀 빡센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요즘은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필력이 바닥나서 그런지 자꾸 말이 길어지나봅니다 ㅎㅎㅎ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ㅋㅋ

페크pek0501 2018-08-0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기가 많아서 도서관에 돌아오질 않아요.....)라는 글에서 웃음이 빵 터졌어요.
어깨에 힘을 빼고 편안히 쓰는 글이 어떤 건지 syo 님의 글에서 보게 됩니다. 유쾌하고 재밌게 읽었습니다.
그렇다고 뼈대가 없지도 않은 글이올시다. 한 수 배워 갑니다.

syo 2018-08-01 16:03   좋아요 0 | URL
제 글은 전형적인 아무 말입니다 ㅎㅎ. 어떻게 여기서 뭔가를 배워가실 수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게 가능하다면 그건 제 글보다 페크님의 읽으시는 능력 덕이겠습니다^^

독서괭 2018-08-02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너무너무 재밌어요~~ syo님의 독”후감”이 제 스타일인데 그럼 요조씨 책도 제 취향이려나요. 줄거리 얘기 거의 없이도 그 책을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거, 대단한 능력이라구요!^^

syo 2018-08-02 13:19   좋아요 0 | URL
저도 1년쯤 되는 독서괭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어느 정도 독서괭님의 스타일을 짐작하는데, 막상 읽어 보시면, 어 별론데? 하실 것 같아요 ㅎㅎㅎㅎ

블랙겟타 2019-05-21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안녕하세요!
지금 이 글에 댓글을 남기는 이유는...
지금 시점인 19년 5월 21일에 이 글에 등장했던 책이 올 계획인데 마침! syo님의 글을 발견했기 때문이겠죠? ㅎㅎㅎ
그런데 제가 산 책은 이 글에서 가장 평이 짧아서.. 괜히.. 구매했...? ㅋㅋㅋㅋ 라고 잠시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syo님 글에 언급된 것 만으로도 위안을 삼으며 책을 기다리고 있네요 ㅎㅎㅎㅎ
작년의 이 글에도 보듯 여전히 많이 읽으시고 계시고 재미있게 쓰고 계셨군요!
매번 syo님의 모든 글을 챙겨보지는 못했지만 앞으로는 이렇게나 정성스런 글 잘 챙겨볼께요. ( ›◡‹ )

syo 2019-05-21 13:29   좋아요 0 | URL
제가 이런 글을 썼군요. 참 저다운 글이네요. 말이 길어 ㅋㅋㅋㅋㅋㅋㅋ
‘책 읽은 책‘에 손을 댄다는 것은 독서계획이나 독서의지에 어떤 변화가 있다는 뜻이니, 어쨌든 블랙겟타님의 독서생활이 풍성해질 일만 남았군요.
정성껏 쓴 퀄리티는 아니지만, 앞으로도 뭘 쓰긴 써야 블랙겟타님이 챙겨보실 건덕지라도 있을 텐데요.
저는 요즘 열심히 읽지도 못하고 열심히 쓰지도 못하고 있어서 부끄럽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동물기
엔도 슈사쿠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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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를 아냐고 물으신다면, “, 엔도 슈사쿠, 알죠. 좋은 작가죠. 침묵! 그 사람 침묵 썼잖아요, 침묵.” 이라고 말한 뒤 즉시 침묵할 수밖에. 그 이상 아는 게 없으니. 실은 그침묵도 읽은 바가 없고. “, 정말 좋은 작가지요. 얼른 다음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는데요.” 따위의 말을 덧붙인다면 성대하게 망했다고 봐야지. 2018년은 바야흐로 엔도가 타계한지 23년이 되는 해다.

 

들리는 말에(똑바로 안 들음), 스콜세지 감독(모름)의 손에 영화(안 봄)화되었으며 노벨상 후보에까지 오른 엔도의 대표작 침묵(안 읽음) 종교적 주제(관심 없음)에서 시작해 삶의 일반적 문제(골치 아픔)에까지 손길을 뻗는 질문을 묵직하게 던지는 대작이라고 하는데(도 관심 안 생김). 그 추천 말씀에 묻어 있는 거룩함과 심오함 덕분일까, syo에게 엔도라는 사람은 강요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읽기에는 조금 머어어얼리 배치된 작가로 오랫동안 인지되어 있었다. 아직 내 인생 8, 90년은 더 남았으니까(120살까지는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엔도라는 자의 장중한 책들이야 팔순잔치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나 읽기 시작하면 되겠지, 뭐 이런 식이었던 것인데. 그런데도 이 책이 갑자기 공중도덕을 개무시하고 내가 읽어야 할 책들의 긴 입장행렬 맨 앞자리에 새치기한 것은 순전히 표지 때문이겠다.

 

시바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충성스러운 자세로 앉아 주인을 올려다보고 있다. 입에는 여성의 속옷 하의로 보이는 하얀 색에 빨간 땡땡이(진부하다! 여자 팬티에 대한 일본 소년만화 수준의 진부한 클리셰!) 천 쪼가리를 물고 있다. 하얀 셔츠를 걸친 중년 남자는, 몽타주가 엔도 슈사쿠로 추정되는데, 화들짝 놀라 동공은 확장, 입은 개방, 상체는 정황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상태다. 시바견은 더없이 낭창한 표정이고, 그렇기에 말풍선이 허락된다면 이런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얼른 받아요. 얼른 받고 쓰다듬어 줘. 처음 아니잖아, 이런 거. 좋아하잖아, 이 물건.” 그렇다면 엔도의 말풍선은 이렇게 예측할 수 있겠다. “아니, 이 시바.....시바개가?”

 

표지에 그려진 장면은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으며 심지어 약간의 박진감마저 느껴지는 <속옷 도둑과 똥개> 에피소드의 한 컷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구도와 기조를 패러디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코믹한 한 판 활극이라 하겠는데,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 그 전에, 우선 저 시바견의 이름은 먹보. 그러나 시바라는 단어를 합법적으로, 도덕적 비난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이 드문 기회를 쉽게 포기할 수는 없기에, 여기서부터 먹보시바를 의도 없이(...) 혼용할까 한다. 불편해 하실 분들을 위해 미리 알려드리는 것이다. 이어지는 글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시바먹보는 입맛 따라 치환해서 읽으셔도 좋겠다는 사실을.


이 시바는 수컷이다. 하필 먹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단순히 이름 그대로 잘 먹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먹보, 엄청 시바네? , 먹보.” 이 시바는 갈색 털에 귀가 꼿꼿하고 입 아래 검은 반점이 있어서 사람으로 치면 코밑수염을 기른 품위 없는 아저씨처럼 생겼다(38)고 엔도는 묘사한다. 지하철 같은 데서 마주쳤는데 나를 힐끗 쳐다보고 있으면 , 기분 나쁘게 왜 자꾸 쳐다보는 거야. , 먹보.’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 같은 생김새라고 하겠다. 실제로 이 시바는 산책을 데리고 나가면 지나가는 아가씨의 치마 속으로 느닷없이 머리를 들이미는, 얼굴도 상스럽고 성격도 상스러운, 딱 일본 남성적인 무뚝뚝한 색골(39)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먹보와 함께 산책을 나간 엔도. 이 시바는 생긴 것 말고도 고질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배변이었다. 답지 않게 또 엄청 눌 자리를 가리는지라, 주인을 끌고 숲을 종횡무진 하다 보면 엔도는 가시나무에 긁히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얼굴을 얻어맞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시바, 숲을 아무리 뱅뱅 돌아도 안착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더니, 갑자기 새로 지은 것처럼 보이는 깔끔한 양옥집 대문 앞에서 힘을 주는 게 아닌가. 저지할 틈도 없이 이미 두 세 덩어리가 사출되었고, 당황한 엔도, 목줄을 힘껏 끌어당겨 보았으나 이런 먹보, 이 먹보가 요지부동이네? 마침 그때 기다렸다는 듯 현관문이 열리고 안경을 쓴 엘리트 풍의 남자가 나타나 시바가 세상에 낳아놓은 세 개의 따끈따끈 덩어리를 발견한다.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

 

으악당신이거대체.” 삽시간에 화내는 표정으로 바뀌더니 말했다.

당신, ...... 의식적으로 개로 하여금 여기에다 배변하게 한 건가요?”

당치도 않소의식적이라니이 녀석말릴 틈도 주지 않고 해버렸지 뭐요.”

서털구털한 내 답변에 상대는 따지듯 물었다.

숲이 있지 않습니까거기서 왜시키지 않았죠?”

그게...... 거기에선...... 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에다 누게 했다는 건가요당신에게는 시민 의식과 도덕심이 없습니까?”

이렇게 다그치는 말을 잔뜩 퍼부었다이쪽은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저 사죄할 수밖에막힘없이 술술 회전하는 상대의 혀에 맞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청소해주세요당연하잖아요?”

청소할게요그럼 되겠죠?”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고나도 무심코 불끈해 몹시 난폭하게 작은 삽으로 부드러운 먹보의 똥을 떠서 비닐종이에 넣었다그사이 그는 감시하듯 꼼짝 않고 내 동작을 지켜보다가 작업이 끝나자 한마디 내뱉었다. “이런 사람이 있으니까 일본의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않는 거야!” 그러고는 문을 쾅 닫고 모습을 감췄다. “바보 자식뭐가 민주주의야라는 말이 엉겁결에 입 밖으로 나올 뻔했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다. (41-42)

 

엔도는 빡쳐서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그 집의 주인을 아냐고 묻는다. 아내는 그 집 문패에 마루다 리코라고 쓰여 있었음을 알려주고, 엔도는 그 마루다란 작자가 근래 어려워 보이는 평론으로 잡지에 등장하여 기염을 토하는 평론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시간에 걸쳐 잡지를 뒤져, 외국어로 쓰인 책이 즐비한 책장을 등지고 매우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찍혀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나를 모욕한 그 남자였다(43)고 확인한다. 아니, 그렇다면 업계 사람이라는 건데, 나를 몰라봐? 이 엔도 슈사쿠를? 그때부터 엔도는 마루다 리코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요즘 그의 평론이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인데 아 먹보, 빡친다. 근방에서 강연회랄지 부인 독서 동아리랄지 그런 것들을 이끌고 있다는데 꽤 호평인 듯하다. 이런 개 먹보, 빡친다.

 

그리고 때는 6월 중순, 마을에 치한이 출몰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돈다. 속옷을 도둑맞은 여성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정의감에 불타는 엔도는 대취한 후, 호기롭게 주변의 풍기순찰을 나간다. 시바를 데리고. 공원에서 농탕질을 하고 있는 아베크족을 발견하고 말로 좋게 타이르려 했으나 아 먹보, 저것들이 아예 듣지를 않네. 빡친 엔도, 슬쩍 먹보의 목줄을 푼다. 가라! 시바! 먹보는 자신의 외모와 성품에 걸맞게 나도 같이 한판 걸지게 놀아보자고 풀밭에서 뒹구는 남녀 사이에 뛰어든다. 혼비백산 도망치는 남녀. 엔도는 더없이 의기양양하다. 가자, 시바! 그런데 아차! 그 사이 먹보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아무리 시바 시바 불러도 이 시바,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 시바다. 이튿날, 근처의 S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네 먹보가 지금 우리 집 메리양에게 상스러운 얼굴로 상스러운 짓을 하고 있으니 얼른 와서 데리고 가라고. 엔도가 허둥지둥 달려갔는데, 멀리서 오는 엔도를 보고 시바, 재차 도주. 그날 여기저기서 엔도의 집으로 항의전화가 빗발치고, 이윽고 밤이 되자 먹보는 못된 곳에서 하룻밤 지새운 탓에 맥이 다 빠져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남자의 얼굴(51)을 하고 집에 들어온다. 손바닥으로 뺨따귀를 몇 대 후린 다음 쇠목줄에 먹보를 묶어놓는 엔도. 이렇게 모든 사건이 일단락 되나보다 했다.

 

다음 날, 아내가 마당의 한 구석에서 진흙투성이가 된 꽃팬티 두 장을 발견한다. 아내는 요즘 동네에 출몰한다는 치한의 짓일 거라 생각하지만, 엔도는 치한이 훔친 속옷을 이렇게 쉽게 포기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생각에 잠긴 엔도, 문득 고개를 돌렸는데, 마당 저쪽에서 멍청하고 품위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먹보와 눈이 마주쳤고, 그 순간, 엔도는 범인이 누군지 직감하고야 말았다. , 빼박 저 시바네. 난처하다. 저 속옷을 돌려줘야 하긴 하겠는데, 일일이 한 집 한 집 다니며 속옷 주인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러나 엔도는 역시 노벨상급 소설가. 문득 죄와 벌의 한 장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명문이 떠오른다. “범죄자는 반드시 범죄를 저지른 장소에 돌아온다.” 엔도는 꽃팬티 두 장을 신문지에 싸들고 먹보와 함께 산책을 나간다. 여유 있게 숲에서 똥을 누인 다음, 신문지를 열어 팬티를 먹보의 코앞에 가져다 댄다. 이 시바,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는 것 같더니, 이내 무엇인가 기억해 낸 것처럼 펄쩍 뛰면서 맹렬한 힘으로 목줄을 끌어 엔도를 어딘가로 데려간다. 역시 도선생. 세계문학의 큰 별.

 

그런데 먹보가 엔도를 데려간 곳은 바로 재수 없는 평론가 마루다 리코의 집이 아닌가! 슬쩍 안쪽 마당을 보니, 널려 있는 빨래 가운데 손에 든 꽃팬티와 유사한 속옷 몇 장이 보인다! 이후는 엔도의 진술을 옮기기로 한다.

 

 그 팬티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먹보의 범죄는 바로 이 정원에서 이루어졌음을 확신했다아마 팬티는 어쩌다가 땅으로 떨어졌을 테고먹보는 기쁨에 겨워 그걸 물고 쏜살같이 우리 집으로 달려왔으리라주위를 둘러봤다근처에 사람의 그림자가 없음을 확인한 뒤 바지 주머니에서 아까 신문지로 싼 팬티를 살며시 꺼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주고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성서의 한 구절을 들릴 듯 말 듯 되뇌며 신문지속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꽃무니 팬티를 빼내 철책 너머 정원으로 던졌다그러나 슬프게도 팬티는 너무 가벼운 나머지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그만 철책에 걸리고 말았다그걸 다시 집어 들고 안쪽에 돌멩이를 넣은 다음 홱 내던졌다. “뭘 하는 겁니까?”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집 안에서 울려 퍼졌다그와 동시에 이층 프랑스창이 열리고 마루다 리코가 문자 그대로 여우처럼 생긴 인색하고 약아빠진 얼굴을 내밀었다. “뭘 정원에 던진 거죠?”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달아나려는 나를 붙들었다마루다 리코도 외쳤다.

자네기다리게뭘 하고 있었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정원에 뭔가를 냅다 던졌잖아뭐지그거?”

화염병은 아니야그러니 안심해.”

 나는 정색하며 말했다.

화염병그런 물건 따위를 내가 맞을 리 없어나는 좌익 학생 편이라고.”

여보!” 하고 부르는 마루다 부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속옷을 던졌어요여자 속옷이요.”

뭐라고?”

어제 도둑맞았잖아요요츠의 속옷을그걸 지금 이 사람이 던졌어요.”

자네...... 자네가 치한이군.”

무례하네무슨 말을 하는 거야아니야이 개가 했다고.”

이 개가그러면 자내의 개는 치견인가?”

치견일본어를 소중히 해치견이란 단어는 사전에 없다고이래서 평론가는 안 된다니까우리 집 개가 어쩌다 추태를 부리는 바람에 돌려주러 온 것뿐이야.”

 창문에서 마루다 리코의 얼굴이 사라졌다나를 잡으러 서둘러 현관으로 뛰어 내려오는 모양이었다먹보로 말할 것 같으면 예의 품위 없는 코밑수염을 기른 얼굴로 이상하다는 듯 가만히 쳐다봤다어디까지 바보인 걸까이 개는나는 먹보를 잡아끌며 부리나케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이날부터 소설가인 나와 평론가인 마루다 리코 사이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반목과 싸움이 이어지지만그건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56~59)

 

여기까지가 그나마 이 책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고, 이어지는 글은 늘상 그렇듯 그저 syo의 뻘소리입니다. 이쯤에서 그냥 창 닫기 하고 가셔도 되겠습니다. 가시고 싶으시면 가세요. 가셔도 된다구요. 가차 없이 냉혹하게 x를 누르세요. 피도 눈물도 없이 alt+F4를 누르시라구요. 어차피 syo의 글 같은 거..... 으흑, 먹보.....

 

 

가진 것 없는 자들이 가진 것 많은 자들보다 더 많이 가진 게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아마 이사의 경험일 것이다. 열세 살이었는데, 이미 내 나이보다 이제껏 거쳐 온 집들의 문패 숫자가 더 많을 만큼, 우리 집은 꾸준히 가난했다. 몇 번째 집인지 모를 우리의 새로운 셋집은, 한국 전쟁 직후 사회 속에 혼란이 많고 혼란 속에 기회가 많던 시절을 놓치지 않고 움켜잡은 어느 중견기업 회장님이 말년에 살고자 지었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세 가구에 세를 놓은 정원 딸린 거대한 저택이었다. 1층을 쪼개어 크고 작은 집으로 나누었고, 그 중 작은 쪽이 우리 가족의 차지였다. 웃프게도, 집은 작은데 1층을 분할하기 전 사용했던 거대하고 현란한 현관문은 우리 집에 달려 있었다. 과장을 좀 보태면, 그 현관을 열고 집으로 들어설 때마다 마치 숭례문을 열었더니 문 안쪽이 옷장이라 얼떨결에 웃옷을 벗어 걸고 나프탈렌 냄새나 맡으며 으스스 돌아서는, 그런 춥고 황당한 기분이 되곤 했다. 출입문에 자동굴욕기가 장착되어 있는 그런 희한한 집에 우리 가족이 깃든 이유는 순전히 세가 쌌기 때문이고, 복식조로 배드민턴을 쳐도 될 만한 잔디정원을 갖춘 그 집이 그렇게 세가 싼 이유는, 거기에 세입자가 책임지고 돌봐야 할 개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늙은 개가.

 

이삿짐을 옮기는 날, 짐차는 벌써 새 집으로 도착했는데 이사도우미 아저씨들은 대문 밖에서 심각한 얼굴로 소리 낮춰 이야기만 나누고 있었다. 난 그게 IMF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명 이상의 아저씨가 모여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그게 다 IMF 탓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대문 안쪽에서 퀑- 하고 목구멍으로 대포 쏘는 소리가 나더니, 대문에서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아저씨가 소스라치면서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방금 발포한 바로 그 대포가 어슬렁어슬렁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철제 대문 틈 사이로 보였다. 그르르르장전르르르릉, ! 이사가 잠시 지연되었다.

 

네 발을 땅에 다 대고 있어도 자기보다 눈높이가 높은 그 생물을 가리키며 동생이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나 저 말 무서워.” 이미 사전답사를 와서 그 거대생명체와 안면을 터놓은 엄마가 대답했다. “말이 아니라, 마루래. 마루.” 동생은 대체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이냐는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동생은 미운 다섯 살이었다. 그러니까 그 말 같지도, 그렇다고 개 같지도 않은 개의 이름은 마루였다.

 

마루는 유럽의 어느 왕조였나 영주 가문이었나 하는데서 사냥개로 즐겨 길렀다는 혈통의 덩치 큰 개였다. 우리가 만났을 때 이미 열 살이었던 그 아이는, 그 나이께의 개들이, 혹은 그 정도 분량의 삶을 소모한 생명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조용하고 덜 움직이며 늘 께느른한 표정으로 먼 데나 바라보며 소일하곤 했다. 그런 것 치고는 또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사람이 나타나면 제 딴에는 반갑다고 말을 걸며 다정하게 다가오는 것인데, 정작 인사를 받는 사람들은 그 짖는 소리를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만 떡이 없다면 아쉬운 대로 팔 한쪽도 받습니다.”로 해석하곤 했다. 그 덕에 우리 집에 놀러온 친구들은 대문이 열리면, 대문에서 현관까지 족히 20m는 되는 거리를 걸으면서 인생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 그 진귀한 상황을 빈번히 체험할 수 있는 특급 서비스를 누리기도 했다. 한겨울이 와도 내 친구들은 구슬땀을 잘만 흘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마루를 좋아했다. 우리는 중2가 되었는데, 2는 세상 모든 것이 다 슬프고 부질없고 귀찮고 짜증나지만, 미쳐 환장하는 것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섹스와, 섹스와, 섹스와, 그리고 섹스였다. 그러나 중2에게 섹스란 흔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대신 섹스는 아니지만 섹스와 비슷하거나, 섹스를 연상시키는 것들에 열광했다. 그러나 초록은 동색이라지. 내 친구들은 역시 내 친구들이라, 섹스를 둘러싼 것들을 좋아는 하였으나 좋아하는 방법은 아직 유아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네다섯 먹은 꼬마들이 !” 소리만 들어도 세상 자지러지듯이, 우리 역시 !” 혹은 !” 소리만 들어도 신나하는, 그런 식으로 섹스를 소비할 뿐이었다. 어른스럽지 못해서 참 다행이었지. 여하튼 그런 우리에게 마루는 정말 놀라운 흥밋거리였다. 그것은 이 영감이 남자란 것들은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그 짓 생각이라는 속담과 진실 사이의 어디쯤 존재하는 저 말의 실감나는 구현자였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집 마당에는 마루 말고도 분지(푸들), 새짝이(요크셔테리어), 진아(치와와), 순아(???)와 같은 아이들이 함께 살았는데, 공교롭게도 그 아이들은 전부 암컷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집 마당이 마루에게는 천국이었을까? 천만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는 건 마찬가진데, 거기 사는 팔 굽은 인간들이 서로 음식을 먹여주는 곳이 천국이고, 지 혼자 먹겠다고 낑낑거리지만 팔이 굽어 굶주릴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사는 곳이 지옥이라는. 어린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팔을 굽혀봤다. 잠깐이지만, 눈앞에 있는 것을 입으로 가져갈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을 조금은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마루를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그런 고통을 상상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눈에 선연히 보이니까. 푸들, 요크셔테리어, 치와와에 해당하는 소형 견종과의 랑데부를 성사시키기에, 그는 너무도 거대했다. 앞다리로 그 작은 아이들을 감싸 쥐고는 허리를 미친 듯이 흔드는데, 닿질 않는다. 닿질 않는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그의 정열을 우리는 함께 모여 열심히 응원했다. 마루야, 힘내! 그리고 미친 듯이 웃었다. 그의 숨소리는 거칠어지다 못해 금방이라도 단말마가 나올 것처럼 비참해지고, 눈에는 핏발이 서는데, 닿질 않는다. 아래에 있는 아이들은 그야말로 담담하다. 그저, ? 이게 웬 그늘이지? 하는 표정일 뿐. 간간히 하품도 한다. 그러나 마루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바쁘고 고되다. 저러니 마루가 살이 안 찌지. 우리와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동생이 말했다. 동생은 미운 일곱 살이었다.

 

3이 되었다. 4월이었고, 고등학교 들어가면 정석 푸느라 생일 챙길 시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마지막으로 성대한 생일파티를 계획했다. 유난히 쾌청한 날이었다. 파티에 와 준 9명의 친구들은 누구는 만화를 보고, 누구는 컴퓨터를 하고, 누구는 배드민턴을 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으슥하게 해가 넘어갈 때쯤, 우리는 모두 정원 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음료수 한 잔씩 놓고 선행학습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몇 반에 누구는 지금 고2 정석을 풀고 있다더라. 내가 듣기로 걔는 유제와 예제만 풀고 넘어간다던데 그러면 다 헛 거다, 정석은 자고로 연습문제지. 요즘은 개념원리가 좋다던데, 그거 살까? 친구여, 사마외도로 빠지지 말게나, 오로지 정도만이 자네를 1등급으로 인도할 걸세. 뭐 이런 구슬픈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때, 친구 하나가 고개를 들어 정원 한쪽을 보더니 말했다. “, 저거 봐봐라.” 모두 고개를 들어 그쪽을 보았다. 다른 친구가 말했다. 또 시작이네.

 

또 시작이었다. 닿지 않는 몸부림. 부질없는 헐떡임. 뜻밖의 체중감량.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웃었다. 하하하. 그런데 어쩐지 그날따라 석연찮았다. 해가 정원 한쪽 귀퉁이 높게 솟은 호두나무 우듬지 뒤쪽으로 무거운 몸을 낮추고 있었다. 마루는 분지 위에서 한참 헛심을 쓰더니 이내 포기하고 새짝이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참 끈질기다.” 친구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웃었다. 하하. 그러나 그 웃음은 직전의 웃음보다 더 짧게 끝났다. 바람이 낮게 불어 정원의 잔디를 스쳤다. 우스스 풀이 눕는 소리가 음악처럼 곱게 들렸는데, 그 사이에 소음처럼 거대한 개의 헐떡임이 끼어들었다. 바람이 아무리 호흡을 가다듬어도, 개의 입에서 나오는 바람과는 조율이 되지 않았다. 음악이 자꾸 무너져 내렸다. “, 진짜.” 친구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웃었다. . 그러나 그건 웃음이라하기도 민망한, 일종의 탄식에 가까운 소리였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마시지 않았으며,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웃기지만 슬프기도 했고, 징그럽지만 불쌍하기도 해서, 욕지기가 나오지만 위로를 덧붙이고도 싶은 그런 이상하고 복잡한 풍경이었다. 우리는 이제 궁금했다. 왜 우리는 이 이상하고 복잡한 장면을 그토록 오래 봐오면서 이제껏 웃음 말고 다른 마음을 길어 올리지 못했을까. 지금은 그 답을 쉽게 찾는다. 그때까지 우리가, 우리는 우리고 저건 마루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이고 저것은 개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 답을 정확히는 몰랐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던 것 같다. 그날부터 마루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던 날까지, 우리는 누구도 마루를 비웃지 않았으니까.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그날 그 풍경을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어쩌면 한참 많이) 웃기지만 슬프고, 징그럽지만 불쌍하여, 욕지기가 나오지만 위로를 덧붙이고 싶은, 그런 이상하고 복잡한 인간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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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7-3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엔도의 책 하면 <침묵> 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제법 많은 책을 냈나봅니다.
사실 저도 <침묵>은 못 읽어봤습니다.
최근 영화로 나왔다고 해서 관심이 가긴 합니나만
그걸 또 스콜세지 감독이 만들었는 줄은 몰랐습니다.
스 감독은 그 독특함 때문에 저도 나름 좋아하는 감독이긴 합니다만
<침묵>을 만들만큼 거룩한 것 같진 않거든요.
영화를 한번 봐야겠슴다.

근데 시험은 잘 보셨습니까?
보셨을 것 같은데...ㅋ

syo 2018-07-30 11:27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바로 어제부로 시험이 끝이 났지욯ㅎㅎㅎㅎㅎㅎ요호!!

이제 신나게 읽을 일만 남았습니다만ㅎ

카알벨루치 2018-07-30 12:33   좋아요 0 | URL
축하합니당당당~syo님! 좋은결과 있기를

syo 2018-07-30 22:14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님 감사합니다 ㅎㅎㅎ
묵은 짐 내려놓은 기분이네요.

붕붕툐툐 2018-07-30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저도 침묵밖에 떠오르는게~ 그래서 보자마자 바로 읽고 싶은 책으로 찜했습니다. 전 침묵 읽고 진짜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syo 2018-07-30 11:33   좋아요 0 | URL
저는 침묵을 읽지 않았지만, 아마 많이많이많이 다른 느낌이실거예요 ㅎㅎㅎㅎㅎ

몰리 2018-07-30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재밌습니다.
장편 확장 부탁드립니다! 마루의 삶.

syo 2018-07-30 13:21   좋아요 0 | URL
심장사상충으로 마무리된 그의 기이한 삶...

붉은돼지 2018-07-30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뭐 침묵에 대해서는 침묵입니다만
그 왜 가토 기요마사하고 고니시 유키나가 하고 등장하는 숙적 이라는작품도 있잖아요
뭐 역시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언제 한번 읽어봐야지 생각은 하고 있는데
이게 품절이라서 ㅋ

syo 2018-07-30 13:23   좋아요 0 | URL
숙적 그것도 어쩐지 불교와 기독교의 한판 승부 같은 느낌이네요.
이번에도 한번 읽어봐야지 하지만 언제 읽을지는 미정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요....

2018-07-30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30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07-30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무슨 시험 있었는지 모르지만,
애쓰셨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좋은 결과 진심으로 매우 많이 기원합니다. ^^

syo 2018-07-30 22:0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북다님 ㅎㅎㅎ
이제 다시 북다님에 뒤지지 않는 알라딘 빨강이로 열심히 활동할까 하구요. 그게 되겠습니까만은 ㅎㅎㅎ

모운 2018-07-31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나는 읽었는데 시오님이 안 읽은 책을 알게 되면 짜릿한 기분이 듭니다.🤪 영화도 책도 흥미롭게 보고 읽은 작품입니다.

syo 2018-07-31 15:28   좋아요 0 | URL
그게 뭐라고요. 짜릿할 것까지야 있을까요. 하여간 추천하신대로 침묵은 조만간에 읽어볼 작정입니다.
 

 

아마추어적으로 슬퍼하기

 

내상은 거의 치료되었다. 안부를 묻는 친구에게, 이제는 슬프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다만 소진되었을 뿐. 사흘 만에 슬프지 않게 된 것은 사랑이나 슬픔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만 슬퍼하는 데도 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슬픔의 체력.

 

세상은 우리를 쉬지 않고 슬프게 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커다란 슬픔이 있는가하면, 내게 포착되지 않은 다른 크고 작은 슬픔들 역시 어딘가에서 내 눈길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세상은 슬픔의 거대한 채석장이다. 슬픔의 매장량이 수십 억 인간을 든든히 먹일 만하다.

 

그럼에도 슬픔의 체력은 몸의 체력과는 달라서, 많이 슬퍼할수록 많이 슬퍼할 수 있게 되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 원리를 알기가 참 어렵다. 이런 슬픔을 겪고 나면 저런 슬픔에 무디어지는가 하면, 저런 슬픔을 겪고 나면 이런 슬픔에 예민해지기도 한다. 한 슬픔과 오래 뒤엉켜 울었던 기억이 다음 슬픔을 일찍 되돌려 보내는가 하면, 오래 물러나지 않는 슬픔의 가면 뒤에서 지난 슬픔의 얼굴을 발견하기도 한다.

 

생각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것들은, 내가 지켜줄 수 없는 것들은, 사랑하되 그 안에 들어가지는 않기로 하자고. 내 힘으로 죽음을 막을 수 없는 정치인이나, 실점을 막을 수 없는 LG트윈스 같은 것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또 사랑하되, 그것과 하나가 되지는 말자고.

 

나는 프로슬픔선수가 되고 싶지 않다. 내가 제아무리 슬픔을 잘 다루게 된들, 그 플레이를 보고 환호할 팬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슬픔을 전시하지 않아도, 세상은 이미 넉넉히 슬프다.

 

 

 

+

 

A : , 혹시 내한테 냄새 같은 거 안 나나?

B : 냄새? 무슨 냄새?

A : 글쎄, 뭐라도. 더우이까네 땀 냄새 날 수도 있고, 맨날 처박혀 있으이까 아저씨 냄새 같은 거 날 수도 있고.

B : (몇 번 킁킁거리더니) 잘 모르겠는데?

A : 진짜가?

B : (다시 한두 번 킁킁거리더니) 안 나는 것 같다.

A : 진짜제? 혹시 내 민망할까 봐 나는데 구라치는 거 아이제?

B : 뭐할라꼬. 안 난다니까.

A : , 나중에라도 내한테서 냄새 나면 바로 캐줘야 된데이.

B : 알았다.

A : 망설이지 말고. 이런 거 바로바로 캐주는 게 진짜 친구 아이가. 그런 건 한 개도 기분 나쁠 일도 아이고. 오히려 어데 가가 쪽 팔고 댕기지 말라는 진심 어린 배려라고 봐야지 안 되겠나.

B : , 그래, 알았다꼬.

A : 그래, 알았다카니깐 말인데, 니 몸에서 냄새 나는 것 같다.

 

 


애도의 시련과 심각한 우울 상태를 비교한 프로이트는 애도가 각별한 존재를 잃어버림으로써 발생하는 우울이라면심각한 우울 상태는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의 자아에 대한 애도임을 보여주었다애도하는 자가 누군가를 잃은 것이라면우울한 자는-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었거나 혹은 그럴 가능성을 보여줬던 존재를 잃음으로써-자기 자신을 잃은 것이다. "누군가를 애도할 때는 세상이 초라하고 공허하게 느껴지지만우울증에 빠지면 자기 자신이 초라하고 공허하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이때 애도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고인의 부재를 보상할 만큼 흥미로운 대상들을 찾음으로써 우울을 극복하고 세상 속에 다시 편입될 수 있다하지만 우울증 환자는 사랑할 만한 자아결코 나타나지 않거나 영원히 사라져버린 자아에 대한 애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그 자아를 천천히든 급작스럽게든 제거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않은 채 자아가 밉상으로 시들어가게 내버려둔다.

프레데리크 시프테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티는 내 나름의 이론을 터득했다내 앞에 주어진 시간을 수천 개의 레고 조각으로 만들어진 아주 기다란 막대라 생각하고그 조각들을 열 개 정도씩 뭉뚱그려 하나의 커다란 조각으로 만든다그러면 레고 조각의 숫자는 단박에 몇 백 개로 줄어든다다시 그렇게 뭉뚱그려진 커다란 조각 열 개를 모아 또 하나의 더 커다란 조각으로 만들면레고 조각의 숫자는 몇심 개로 줄어든다이제 새로운 레고 조각그러니까 시간의 새로운 단위는 원래 시간 단위의 100배쯤으로 농축된밀도 있는 것으로 변해버린다물론 밀도가 높은 시간을 견디기란그렇지 않은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힘들고 지겨웠다그렇지만 하나의 레고 조각을 통과하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길고 큰 조각이었건 간에 다 지나가버렸다는 기억만 훈장처럼 가슴에 남을 터였다.

류동민기억의 몽타주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문태준

 

 검푸른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들어섰다

 감나무를 바싹 껴안아 매미 한 마리가 운다

 울음소리가 괄괄하다

 아침나절부터 저녁까지 매미가 나무에게 울다 간다

 우리의 마음 어디에서 울음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듯

 매미가 나무의 어느 슬픔에 내려앉아 우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무도 기대어 울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는 이렇게 한번 크게 울고 또 한 해 입을 다물고 산다

문태준가재미 

 

손님 책이 그렇게 다양하고 충실하게 갖춰져 있진 않네요.

직원 저희 가게는 만 권이 넘는 책을 보유하고 있는데요.

손님 그래요그런데 제가 쓴 책은 안 갖다 놓으셨잖아요!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젠 캠벨 외그런 책은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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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6 0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26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와는 다른 마음으로 영원히 기다리며

 

요 몇 번을 연이어 어딘지 구슬픈 이야기만 쓴 것 같아 억지로 쥐어짜서라도 이번엔 유쾌한 글 한 번 만들어 보자는 마음이었는데, 말도 안 되는 일격을 맞고 넋이 나가 어제는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이라도 이 모든 게 장난이었다며 낙낙히 웃는 얼굴로 그가 나타난다면, 장난 할 게 따로 있지, 따위의 닦달 한 마디 없이, 정치인으로서의 자질 운운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조금의 마모도 없이, 계속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도덕성은 자질로서는 필수적일지 모르나 무기로서는 최악이다. 도덕성의 칼날을 받아내야 할 자들은 애당초 도덕성이 없기 때문에 도덕성이 없다는 공격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성의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얕게 베여도 치명상을 입는다. 누구보다도 먼저 스스로 크게 수치스럽다.

 

지난 주말, 친구와 밥을 먹으며 장난처럼 말했다. 일베 놈들 분명히 노회찬도 노무현처럼 부엉이 바위로 달려가라는 댓글을 달고 있을 거라고. 말이 가볍게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개새끼들, 을 추임새처럼 붙이며 우리는 얕게 웃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믿어야만 하는구나, 체념할 때쯤, 흩어졌던 말들이 무겁게 돌아와 내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부끄러웠다. 죄책감에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내가 한 말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추호도 그런 기대를 한 적이 없었더라도, 밥 먹는 자리에서 마치 반찬처럼 타인의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이 악한 일이 아닐 수 있을까. 바닥에 뒹구는 심장을 줍는데 만 하루가 들었다. 나는 나쁜 인간이었다.

 

나와 정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종종 내가 가장 좋아할 것 같은 정치인으로 그를 지목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남들이 아는 만큼만 알았고, 그가 대통령이 되거나 그가 속한 당이 여당이 되는 일을 이번 생애는 보기 힘들 것이라고 남들이 생각하듯이,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그에게 가지고 있는 애착의 크기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그저 가끔 뉴스나 방송을 통해 그의 말을 읽고 들으며 내 나름대로 살았다. 그는 그저 멀리서 들려오는 말이고 소식이며, 얼굴 마주할 일이 없는 정의고, 이루어질 일 없는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언제나 그랬듯, 잃고 나서야, 앓고 나서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아픔의 크기를 통해 쓰라리게 깨닫는다.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할 참 나쁜 습관이다.

 

내 다음 세대쯤 진보 정당이 다수당이 되고, 진보 정당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면, 그 안에 그의 공로가 과반일 것이라는 정도의 막연한 기대만 품고 있었다. 늘 검박했고, 유쾌했고, 날카로웠고, 정의로웠다. 나는 그의 적들조차 그것을 인정했으리라고 믿는다. 그의 적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저 사람이 그랬다면 안 그랬을 놈은 단 한 명도 없겠군,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으리라 믿는다.

 

빈소를 다녀올까, 그래도 될까, 늦은 밤까지 친구와 한참을 고민했다.

 

 


비옥한 땅에서건 척박한 땅에서건 사람들이 살고꿈꾸고고뇌하는 가운데 조금 특별한 일을 실천하려 했던 기억이 한 땅을 다른 땅과 다르게 하고내 몸을 나도 모르게 움직이게 한다땅이 그 기억을 간직하지 못한다면이 나라 사람이 이 땅에서 반만년을 살았다 한들한 사람이 이 땅에서 백년을 산다 한들단 한순간도 살지 않은 것이나 같다.

황현산밤이 선생이다


 선

 구태의연한 사람의 선의는 악의와 다름이 없을 때가 더러 있고애써 구태의연하지 않으려는 선의는 위선과 닮아 보일 때가 더러 있다가장 자연스러운 선의만이 오해 없이 누군가에게 가닿지만 쉽게 피부로 느껴지질 않아서오래오래 살아가며 전달할 수밖에 없다.

김소연한 글자 사전


왜 어떤 일들은 구름이 모양을 바꾸는 것처럼 서서히 일어나지 않고 단 한순간에 완전히 빛깔을 바꾸어버리는 것일까따뜻한 기운을 품은 은은한 복숭앗빛 하늘이 왜 저토록 사나운 핏빛으로 변해버렸을까좀전까지 잘 어울리던 한 쌍의 커플이 왜 이리 급작스럽게마주치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끔찍한 악연으로 방향을 바꾸는 걸까왜 그런 일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갑자기 일어나는 걸까왜 어떤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고 내뱉은 한마디가 다른 어떤 사람을 다시 벗어나지 못할 수렁으로 몰고 가는 걸까.

최정화내가 그렇게 늙어 보입니까


 그는 자유롭고 안정된 대지의 시민이다그것은 그가 사슬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그 사슬은 그에게 현세의 모든 공간을 자유롭게 부여하기엔 충분히 길지만어떤 무언가가 그를 대지의 경계선 너머로 낚아채 갈 수 없을 만큼만 길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유롭고 안정된 천상의 시민이가도 하다왜냐하면 그는 또한 비슷하게 측량된 천상의 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지상으로 가려고 하면 천상의 올가미가 그에게 제동을 걸고또 하늘로 가려고 하면 땅의 올가미가 그를 붙잡는다.

프란츠 카프카죄와 고통희망 그리고 진정한 길에 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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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7-24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syo 2018-07-24 22:34   좋아요 1 | URL
아직도 고인이라는 게 잘 실감이 안납니다... 모레 썰전에 스윽 그가 나올 것 같아요..

stella.K 2018-07-25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요님과 같습니다.
우리가 섣불리 정치인들을 믿거나 옹호할 수 없기에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고인만큼은 믿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하던차에
이런 일을 겪게되서 참 뭐라 할 말이 없더군요.
그래도 저는 설마 부엉이 바위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정치인들이 감방 가는 건 그런가 보다 하는데
이렇게 죽는 걸 보면 이 나라 정치가 어느 정돈지 가늠하기가 어렵겠다 싶습니다.
요즘 정치에 뜻을 두는 젊은이들이 나오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생각하셨다면 한 번 다녀오시지 않구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syo 2018-07-24 22:36   좋아요 0 | URL
정치고 뭐고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걸 보니, 정치인으로서보다 자연인으로서의 노회찬을 더 사랑하였나 봅니다.

어제만큼 슬프진 않지만 여전히 무기력한 오늘이네요.
 


잃어버린 못 가진 것들에 대하여

 

1


세밀하게 뜯어보면, 삶이란 두 가지 일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무엇인가를 지키는 데 성공하는 일, 그리고 실패하는 일. 마찬가지로, 조금만 선명하게 응시하면, 인생의 변곡점이란 그저 지금부터 지켜나갈 것들을 고르고, 재어보고, 때에 따라 바꾸어 쥐는 사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아픔(상실이나, 상실에 뒤따르는 후회나, 후회에 뒤따르는 자괴감 같은 것들)을 통과한 사람들은 간혹 기념품 같은 지혜를 얻는다. 내가 탐내고 가져오고 싶어 목을 매던 그 대상이, 실은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이면이거나, 그것을 약간 치장했을 뿐이거나, 심지어는 그것의 변색, 또는 변질일 따름이었다는 지혜를. 그때 내가 골라야 했던 선택지는, 쟁취가 아니라 지키는 것이었다는 처연한 진실을. 그때 좀 더 오래 내 안을 들여다보았어야 했는데, 하고.

 

 

2


단맛이 나지 않는 커피는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좋아한 일이 있었다. 시원한 커피로 단 한 사람의 목을 채워주고 싶은 욕심, 그 욕심이 부적절하거나 부당해 보이지 않도록 하려고 부러 열두 잔의 아이스커피를 만든 일도 있었다. 그 사람의 손에 종이컵을 쥐어주는 나의 손길과 눈길에 특별함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 사람이 알아봐주었을까, 알아봐주었다면 그 뒤에 숨어 있는 마음도, 찐득했을 그 욕심의 냄새도 그 사람이 맡았을까, 맡았다면 나는 힘을 내어 한 발을 더 내딛어야 할까, 내딛어도 될까, 된다면, 정말 그게 된다면, 그래서 그 발걸음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 끝에서 결국 나는 저 사람을 얻을 수 있을까, 얻을 수 있다면 지킬 수도 있을까, 지킬 수 있어서 지킨다면, 지키면서 내가 행복할까, 행복할 수 있을까.

 

커피 한 잔을 건네는 호감 속에서도, 심지어 그 독점배타적인 호감을 숨기기 위해 열두 개로 쪼갠 다음 그저 한 조각 호의로 위장하는 가운데서도, 나는 내내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이 있었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일이 곧 가져야 할 것을 가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많이 늦었고 많이 아팠다. 세상은 내게 그런 신호를 준 적이 종종 있었다. 어떤 때는 그 신호를 받지 못했고, 또 어떤 때는 정확히 수신하였으나 구겨서 내다버렸다. 욕심의 먹이로 주었다.

 


3


더 가지기 위한 핑계로 그저 지키고 싶었을 뿐이라고, 지켜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지키는 것은 그저 지키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공격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 정확히 꿰고 있기 때문에, 내게 부족해 보이는 것은 실제로 부족한 것이라 이해한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 정확히 꿰기도 어렵고,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곧바로 내게 부족한 것은 아닐 수도 있으며, 어떤 부족함은 채우고 채워도 끝내 부족함으로, 더 거대한 부족함으로 남기도 한다.

 

지키기 위해 더 가지려 한 사람들이 더 가지기 위해 지키지 못한 이야기가 세상엔 많다. 내가 가진 것이 있음을 알았을 때 멈추어 내 손을 오래 바라보고 싶다. 세밀하게 뜯어보고, 선명하게 응시하고, 내가 통과한 아픔들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싶다. 지켜야 하는 것들을 지켜야 하는 그 자리에서 지키고 싶다.

 

 


당신을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것이게 기적이다책을 읽고 나니 지금 다른 곳에서 잠들어 있을 사람의 구부정한 등이보고 싶다잠든 등을 사랑하는 것내 취미다.

장석주 박연준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


되돌아보면 그토록 더웠던 여름과 추웠던 겨울이열중쉬어 자세로 훈화를 듣던 학교운동장이장작을 훔치기 위해 원정대를 결성한 그 어느 날들이 모두 꿈만 같다다만 그것을 '검정 고무신'처럼 추억하고 싶지는 않다무엇이든 추억하면 미화하게 된다내가 외면한 괴물들은 내 다음 세대의 가슴속에서 다시 자라날 것이다그래서 나는 있는 그대로 '기억'하기로 한다내 아이들이 성산동과 망원동에서 학교에 다니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성서초등학교나 성산초등학교에 배정받아 아버지와 할머니의 후배가 된다면 참 멋진 일이겠다아이가 아카시아 활짝 핀 성미산길을 따라 등교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다만 어느 길을 걷든 대한민국보다는 자기 자신을그리고 자신을 닮은 친구들을 더 사랑하는 한 존재로서내딛는 걸음만큼 조금씩 커나가면 좋겠다.

김민섭아무튼망원동


의젓해지려고 애쓰는 이 순간에도 삶도 글도 여전히 어렵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하루를 구성하는 것도하루를 통과하는 것도 어렵다다만 고요한 시간에 나와 대화해 보면 나는 여전히 나무를 닮은 방식으로 성장하고 싶어 한다벽을 통과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순간이 자주 있었으나그 경험으로 나는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리라그리고 나무에 찾아오는 바람처럼 글이라는 움직임이 굳는 성질인 나를 아주 굳지는 않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원최소의 발견


인생의 좌표라는그 단어부터 너무나 거대해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는 세상의 말에 더이상 무심할 수 없는 나이에 닿아 가면서결국 버티어내는 것만이 유일하게 선택 가능하되 가장 어려운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이기는 것도좀더 많이 거머쥐는 것도 아닌 세상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버티어내는 것.

허지웅버티는 삶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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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eg 2018-07-2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 한 잔을 건네는 호감 속에서도, 심지어 그 독점배타적인 호감을 숨기기 위해 열두 개로 쪼갠 다음 그저 한 조각 호의로 위장하는 가운데서도, 나는 내내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chaeg 2018-07-2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심스러운 마음을 어찌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요^^

syo 2018-07-23 18:04   좋아요 0 | URL
음.... 정말 저랬거든요^-^
허허허. 옛날 기억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