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꿀템 토스터와 참외 껍질의 진로와 이데올로기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그냥 구운 식빵인데 왜 꿀맛이 나는가.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오늘도 식빵을 구웠다. 일단 굽고, 먹으면서 읽으면서 또 굽고. 그걸 먹으면서 읽으면서 또 굽고. 정신을 차려보니 식빵을 10장이나 먹었네? , 이런 식빵...... 그렇게 먹어도 식빵 꿀맛의 미스터리를 풀어내지 못하다니. 분하다. 내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식빵아.

 

쉬지 않고 참외를 하나 깎았다. 혼자 먹는 데 격식 따윈 필요 없지. 목 따고 엉덩이 따고 노란 겉옷만 벗긴 다음, 길게 세워 들고 통째 먹었다. 햄스터 아몬드 먹듯이. 코를 박고 먹었더니 자꾸만 씨가 코로 들이쳤다. 이런 씨, 이런 씨앗놈...... 참외를 둘러싼 미스터리를 꼽아 보자면, 저 달콤한 씨를 다 발라내고 민숭맨숭 과육만 먹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참 신비롭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참외 껍질의 정체성이야말로 우리가 지혜를 모아 해명해야 할 대목이다. 참외 껍질을 우리 엄마는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에 버리는데, 임선생(여친입니다)은 일반쓰레기 수거 봉투에 버린다. ”자기야, 엄마가 참외 껍질 음식물 쓰레기래.“ ”정신 차려, 남친 놈아. 벌금 때려 맞고 싶니?“ ”엄마, 임선생은 그거 일반쓰레기라던데?” “아들. 음식물 가지고 장난하는 거 아냐.” 이것은 고부갈등의 프리퀄일까? 불초 아들/남친은 니 편도 내 편도 들지 못하고 결국 껍질을 칼로 잘게 썬 다음 변기에 내려 보낸다.

 

낮잠 좀 자볼까 하여 침대에 누워서 스기타 아쓰시杉田敦권력을 읽었는데, 몇 쪽 읽고 계획대로 잠에 빠졌다. 잠들기 직전에 읽은 글들이 얕은 잠 속으로 침입해 자동으로 무한 반복 재생되는 기적이 임했다. 이건 잔 것도 아니고 안 잔 것도 아냐. , 이런 식빵. 식빵 십장.


 

스기타는 스티븐 루크스Steven Lukes의 말을 빌려 세 차원의 권력관을 제시한다. 1차원적 권력이 A에게 주어지면 A는 B에게 물도 안 주고 억지로 식빵 10장을 먹일 수 있다. B는 저기 보이는 저 참외가 먹고 싶은데도. B가 발견하기 전에 A가 참외를 치워버리고 도리가 없다는 듯이 식빵 10장을 먹이는 것이 2차원적 권력이다. B는, 참외를 먹을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참외가 없네, 싶다. 3차원적 권력의 현장에서도 역시 AB에게 식빵 10장을 먹인다. 무서운 것은, B로 하여금 식빵 10장을 물도 없이 컥컥 거리면서 먹는 것이야말로 오랜 꿈이었다고, 아무리 먹을 게 없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이 참외를 먹을 수 있느냐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3차원적 권력을 이르는 유서 깊은 용어가 있다. 그게 바로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라는 용어의 부정적인 용례에만 한정해 생각해 보건대, 이데올로기는 내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율하는 즉시 내게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아니게 된다. , 이데올로기에 포획된 상태에서는 이데올로기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고,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이데올로기는 증발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내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사실 말이 아니라 말처럼 생긴 방구다. ‘네 이데올로기만 가능하다. 그래서 이를테면 누구는 누구를 적폐라 부르고 또 누구는 누구를 종북이라 부른다. ‘진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진영 논리라는 말로 상대를 공격하지 못하는 법을 만들면 세상에서 진영 논리라는 말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진영의 축대를 쌓고 그 안에 엎드려 적의 식빵과 참외를 호시탐탐 노리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진영 논리라는 말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어느 진영의 이데올로기에 조종되는 바가 있음을 (진심으로는)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어나 보니 사회가 이미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도 이데올로기에 청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 이런 식빵, 오직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참외 껍질을 어느 쓰레기봉투에 담아 배출해야 될까.


헤겔은 "자유는 필연에 대한 인식"이라고 선언했다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들이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는 온갖 방식들을 두루 고려한 '후에야비로소 우리는 무엇을 할지 선택하는 일에서 진정한 자유를 행사하기 시작하리라는 뜻이다. (여기에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덧붙일 것이다그리하여 마침내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온 바로 그 힘들을 장악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버텔 올먼마르크스와 함께 학점을

 

시장은 신처럼 어디에나 존재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비시장적 삶으로부터는 격리되어 있을까만약 전자가 진실이라면후자는 그것을 가리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시장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라면논리적으로 비시장적 삶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기 싫으면 안 사면 그만이다.'라는 말이 담고 있는 소비 주체의 자율성은 바로 그 이데올로기 안에서만 완전하게 존재할 수 있다시장과 비시장적 삶경제 논리와 정치 논리를 엄격하게 구별하려는 시도가 어쩔 수 없이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대상이 되는 까닭이다과감하게 단순화하면성장 vs. 분배효율 vs. 공평비정규직 노동민영화대학 개혁 등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싸움은 시장(경제논리와 비시장 논리의 싸움이다.

류동민시간은 어떻게 돈이 되었는가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세계관을 갖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자각하는 동시에 그것이 '현실'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일이다최소한 다른 서사도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한나 아렌트가 묘사하는 '전체주의화도식에 완전히 갇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카마사 마사키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내 감각과 생각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믿으면 세상은 단순하고 쉽다. "클래식을 듣지 않는 사람은 교양이 없어." "아침형 인간이 생산적이지." "여자가 똑똑하면 밉상이야." "게임은 정신을 좀먹는 마약." 등등절대적 가치라는 환상에 빠진 사람은 타인의 우매함을 뜯어고치지 못해 안달이다그런 사람들이 구국의 열정으로 뭉쳐 어버이 연합이 되고인터넷을 잘해서 일베충이 된다세상 모두가 자신과 똑같이 생각해야 하고그러지 않는 인간은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마땅하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다그런 사람들이 예전에 어떤 큰 전쟁을 일으켰는데...... 무슨 전쟁이었는지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

이지원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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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2 0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2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8-06-02 0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나 아렌트의 책도 끌리게 만드는 syo님의 매력^^
아, 나도 식빵을 구울까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8-06-02 08:12   좋아요 1 | URL
식빵 십장.... 먹어도 먹은 것 같지도 않아요 ㅋㅋㅋ 근데 돼지는 되고! 🐷
 


가야할 때를 알아채는 것은 너무 힘들어

 

1

 

친구가 출근하고 비어 있는 방을 열고 들어가 토스터를 켰다. 식빵 네 쪽이 익는 동안 여행 에세이 몇 쪽을 읽었다. “대학교를 자퇴한 이후로 줄곧 여행과 밥벌이 사이를 오가며 1,000일 이상을 해외에서 떠돌았다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지은이는 지금도 늘 다 때려치우고 떠나고 싶다고. 게다가 이 호기로움이라니.


 

어떤 사람의 이루지 못한 꿈은 다른 사람의 꿈을 이루어준다고 한다삶과 여행을 일치시키고자 한 나의 꿈이 또다른 누군가의 꿈을 완성시켜 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7)

박 로드리고 세희나는 평생 여행하며 살고 싶다

 

아삭거리는 식빵을 씹으며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 무거워/무서워 이 자리에 목줄 매어 있는가를. 바싹 익은 부분이 맛있었다. 떠나기 위해 버리는 것과 버리기 위해 떠나는 것 사이에 발이 묶여 버리지도 가지도 못하고 나는 바스라지고 있는 것 같다. 바싹 익은 부분은 맛있지만 어쩔 수 없이 부스러기를 남긴다. 이곳에 남으면, 나는 부스러기 같다. 부스러기는 나 같다.



여행을 떠나 가장 서글퍼질 때는 저녁 무렵 공원 벤치에 앉아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다그때 거울로 내 얼굴을 비춰 보면 유형지를 떠도는 죄수나 갈 데 없는 노숙자처럼 지치고 비참해 보였다. (...) 그럼에도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다음 여행을 계획했다나는 대체 왜 그렇게 떠나고 싶어 했던 걸까?

한수희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2

 

방에 돌아와 차를 끓였다. 찻물이 다는 동안 종아리를 긁었는데 살펴보니 피가 난다. 같은 자리를 계속 긁었던지 이미 한 차례 앉은 딱지가 다시 떨어지고 있었다. 딸깍, 하고 포트 스위치가 내려갔다. 종아리를 오래 내려다보다가 한 번 만져주었다. 말을 걸었다. 미안해. 내가 그간 너무 신경을 못 썼지? 종아리가 대답했다. “종아리가 대답을 하겠냐?”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는 참 빨리, 그리고 예쁘게 우러난다. 한 모금 호로록 들이켜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제는 시원해서 참 달릴 만했는데 오늘은 어떠려나. 에어컨이 상쾌하게 날숨을 내뱉는다. 바나나 하나가 그 바람을 맞으며 거무튀튀해지는 중이다. 달리지 않으면, 나는 바나나 같다. 바나나는 나 같다.



삶은 목적 없이예측할 수 있는 규칙 없이그러나 경쾌하게 흘러간다우연과 기쁨은 사이가 좋다말과 침묵이 그렇듯이혹은 걷기와 절뚝거림처럼걷기살기말하기생각하기는 모두 하나다그러나 그 무엇도 직각이 아니고곧지도 않고고정된 것도 아니다그리고 그러는 편이 낫다우리가 춤추기 때문이다그렇다우리는 춤춘다이 최초의 괴리 때문에계속되는 어긋남 때문에 춤춘다.

로제 폴 드루아걷기철학자의 생각법

 

걷기'도 태도이고 '요리하기'도 태도인 것이다어떤 사람을 말해주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다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어떤 행동을 반복해서생각해서 하다보면 결국 하나의 태도삶에 임하는 태도가 되는 것이다땅을 밟는 것이길을 걸으며 들꽃을 꺾는 것이 좋은 사람은 많이 걸을 것이다많이 걷다 보면 걷는 것은 그가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태도요방법론이 된다자동차는 조금 덜 타고 조금 더 걷는 삶두 다리를 써서 생각하는 삶그가 말한 실수하기신뢰하기실패하기...... 모두 같은 맥락이다성자의 숭고함도인생 선배의 귀띔도바르게 사는 사람의 도덕률도 아니다작업을 하며 살아가는 한 작가의 '태도들'인 것이다실수에 열려 있고믿음을 잃지 않고실패에서 배우는.

박상미나의 사적인 도시


 

3

 

공간이 솔다보니 샤워를 하고 나면 잠깐 사이에 방에 습기가 찬다.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침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괜히 폼 잡아봤다. 눈 감고 속으로 반야심경도 왰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하는데 속세에서 부른다. “저기요.” 슬며시 눈을 떴더니 복도에서 복스럽게 생긴 시주님께서 반쯤은 웃고 반쯤은 무서워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말씀하시지요.” “제가 오늘 처음 들어와서요. 여기 복도에 있는 이 건조대, 주인 있는 건가요?” “(시주님, 주인이라니요. 색즉시공 공즉시색일진대 소유가 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전 잘 모르겠는데요. 어떤 건 주인이 있고 어떤 건 공용이지요.” “, 그렇구나. 그 작은 선풍기는 어디서 사셨어요?” “(허허, 바람이 있건 없건 흔들리는 것은 오직 시주님의 마음이거늘, 굳이 바람을 사려 하시는구려, 라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인터넷이요.” “,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성불하시기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syo는 불교학교 나왔습니다. 옴마니반메훔. 이러고 나니, 나는 궁예 같다. 궁예는 나 같다.

 


천진과 유머를 잃지 않으면 각자가 알맞은 형태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우리가 겪는 삶은 훼손을 통해 훼손될 수 없는 고유 영역이 내재함을 알려 주려 한다그러므로 천진과 유머를 잃어버릴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오늘도 햇빛이 알맞다알맞다는 '최소'의 적정함이 존재한다는 것그러므로 오늘은 심장을 유머러스하게 옮겨 보는 것인간이라는 생물이 사랑을 탄생시키는 최소의 방식.

이원최소의 발견

 

듣기 싫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는 '독특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이 말은 논리적이지 않다그것은 말하는 사람 입장이지내가 보기엔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나랑 다른 독특한 사람이다누가 차이를 규정하느냐의 문제이지사람은 누구나 개별적이고 독특하다자신을 자명하게 일반보편정상의 범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과 다른 타인을 '독특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희진정희진처럼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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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1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1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lavis 2018-06-0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진님이 그런 말씀을 들었다니..저도 왕왕 듣고 왕왕 시무륵했었는데 좋네요 저 🐎♥잉블을 아시다니♡더 좋습니다요♥저도 요즘 한국말 책 끊었다가 요요와서 쇼님을 기리던 중이랍니다ㅠㅠㅠㅠㅠㅠㅠ

syo 2018-06-01 18:08   좋아요 1 | URL
한국말 요요를 syo로 해결하려 하시다니 불행한 선택입니다..... 타지에 계시지만 부리 우리 말 버리지 마시고 좋은 독서 하시기를^-^

stella.K 2018-06-01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관심법에 대해 좀 아시겠군요!ㅎㅎㅎㅎ
전 중학교를 불교학교 나왔는데...

저도 왕년에 독특하다는 소리 솔찮니 들었는데
난 그게 듣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평범하지 않아서.
받아들이기 나름 아닌가요?ㅋ

syo 2018-06-01 18:10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관심법은 고1 때 필수과목으로 가르쳤지요. 저는 관심법 2등급입니다.

독특하단 소리 저도 좋아했습니다. 정확히 제가 들은 말은 ‘또라이‘였지만, 뭐 그게 그거 아닌가요 ㅎㅎㅎㅎ

stella.K 2018-06-02 16:51   좋아요 1 | URL
헉, 관심법이 필수과목이었어요?
더구나 2등급!
그럼 꽤 높은 등급 아닌가요?
전 몰랐슴다. 이게 등급제가 있는 줄.
언제고 관심법에 대해 페이퍼 좀 올려줘요.
솔직히 전 이름만 들었지 아는 건 없습니다.ㅠ

근데 독특하다는 것과 또라이가 같은 말인가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스요님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아니라고 박박 우기고 싶군요.
음...제가 좀 모범생꽈였거든요.
그러니 독특하단 말에 환장하는 거죠.
남과 같다는 건 재미없고 앞으로 그 말은 거의 모독에 가까운 말이 될 겁니다.
암, 그렇고 말구요.ㅋㅋ
 

  

이제 많이 읽었니, 적게 읽었니 하며 징징거리는 짓은 그만두자고 다짐했다.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것이지. 읽어지면 읽고, 안 읽어지면 안 읽고, 빡치면 치킨도 먹고, 스멀스멀 낭떠러지 쪽으로 기어가고, 그러다 망해지면 망하고...... 인생이란? 인간이란? 탕진과 전진의 차이는? 으아아아. 징징거리고 싶어.....

 

어쨌든 양질의 독서가 이뤄지진 않는 듯. 벼랑 끝 전술이 필요한 시점이다.

 

 

201805 : 36

1. 당신을 만난 다음 페이지

: 적당히 살갑고 적당히 가까운, 읽기에 평범한, 그러나 이렇게 쓰기는 쉽지 않을 충실한 독후감들.

2.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 누가 뭐래도 제일 쉬운 책이긴 한데, 사실 추천하기는 좀 꺼려진다. 똥 싸다 말고 일어선 느낌이 세다. 한 덩어리 쌌다고 만족하고 바지를 추켜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3. 최소의 발견

: 아름답고 과하다. 과하게 아름답고 아름답게 과하다. 시와 대한 이야기가 시보다 많아지면 독자는 혼란에 빠진다. 그 와중에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것은 알기 쉽고 무슨 말인지는 알기 어렵다. 아무나 읽을 수 있는 책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나 읽으라고 쓴 책이 아님은 알겠다. 나도 이 책을 읽어낼 줄 아는,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4.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 애들 보는 책은 과연 강신준 선생님이 1. '자본가' '노동자' '베짱이' '개미'로 바꾸어 쓰는 저 잔망 좀 보소...... 애교쟁이 강 선생님.



5.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 이 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르크스에 덤벼들었다가 내 멋대로 읽어버려 몽땅 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쫓아버릴 수 있다. 마르크스를 개인에게. 물론 쉽고 알찬 것도 장점이다.

6. 도쿄의 밤은 빨리 찾아 온다

: 담백하고 눈치 보지 않는 글이지만 그저 그랬다. 이런 심심한 맛을 즐기기에 아직은 애기입맛. 소문난 애기입맛.

7. 정희진처럼 읽기

: 독후감을 쓰는 사람이라면 한번은 꼭 정희진 선생님의 책을 읽어야 한다. 정희진처럼 읽기/쓰기 위해서든 정희진처럼 읽지/쓰지 않기 위해서든.

8. 위험한 자본주의

: 자본주의의 똥냄새를 지적하는 책 가운데 눈에 띄게 다정한 책.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밑줄을 그어댔다. 마르크스는 곁들일 뿐이라서 마르크스주의 카테고리로 묶기는 애매하다. 그래서 더 좋은 것 같다.



9. 책 먹는 법

: 책을 왜 읽어야 하냐는 진부한 질문을 살면서 무수히 받아왔는데, 사실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눈꽃빙수 속의 얼음알갱이만큼 많고 다양하기 때문에 똑같은 대답을 두 번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내 대답을 듣고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눈꽃빙수 속의 눈꽃처럼, 없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직접 찾아. 먹어 가며 찾아. 눈꽃 빙수 속의 얼음알갱이인지 아니면 눈꽃인지, 직접 먹어 보고 확인 해.

 

10. 10년 동안의 빈 의자

: 시인이 만든 독창적 상징과 싸우는 일은 즐거움이 없진 않으나 고단하다. 양쪽을 비교하여 남는 장사가 되지 않으면 시는 종종 보람 없는 암호풀이로 변질되기도 한다. 은유와 상징에 주파수가 있다. 아주 가끔씩만 맞아 들어간다. 그 가끔을 찾아서 시집을 많이 읽는다. 영 밑지는 장사 같다.

 

11. 그저 좋은 사람

: 그녀는 마술사다. syo가 사랑하는 제임스 설터의 경우, 한 페이지만 뒤져도 탄성을 자아내는 문장이 두 자릿수로 발견된다. 으아, 와우, 우오와, 이렇게 쪽마다 감동받다 보니 페이지가 안 넘어간다. 반면 역시 syo가 사랑하는 줌파 라히리의 경우, 한 작품을 다 읽어도 밑줄을 그을 만한 문장은 고작 몇 개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다 읽고 나면 작품 전체로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설터의 문장은 무슨 약을 빨아도 syo는 끝내 못 쓴다는 강한 확신이 있다. 반면 라히리의 문장은 잘하면 얼마 지나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부른다. 그러나 그 쉬운 문장들로 만들어진 작품 전체를 놓고 생각해 보면, 역시 syo는 일곱 번쯤 죽었다 깨나도 이렇게 좋은 단편은 만들 수가 없다는 진단이 내려지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12. 독서의 기쁨

: 책 사랑하는 이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면, 아마 이 책 속에 든 이야기들을 하거나 듣거나 할 테지. 소소하고 다정한 독서였다.



13. 파리 일기

: syo는 왜 정수복 선생님의 책과는 이다지도 궁합이 맞지 않는 것일까. 분명히 좋은 말, 나쁘지 않은 글인데도 어느 한 구석도 마음을 울리는 데가 없다. 책만 놓도 보면, 이 책을 좋아할 사람들이 꽤 있으리라는 것이 충분히 짐작되는데도 정작 나에게는, 이 책뿐 아니라 정수복 선생님의 다른 책들도, 정말 그저 활자일 뿐이다...... 이유를 모르겠다.

 

14. 마르크스와 함께 A학점을

: 마르크스주의를 다룬 책 가운데, 2위와 압도적인 차이로 단연 제일 시니컬하고 웃긴 책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본 다른 분이, 이 책은 내가 읽은 책들 가운데 육백오십이만 삼천칠백아홉 번째로 웃긴 책일 뿐인 걸? 하셔도 서운해 하지 않으리. 이렇게까지 순위가 떨어지다니 안타깝긴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뭐 그렇지. 그러나 쉿, 이건 비밀인데, 사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책이라기보다는 미국과 자본주의 비판서에 가깝습니다.

 

15. 코딩책과 함께 보는 코딩 개념 사전

: 진짜 프로그래밍 1도 모르는 사람이 제대로 공부 들어가기 전에 한 번 꼼꼼히 읽고 들어가기에 참 좋은 책. 코딩에 기초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정도만 되어도 이 책은 급격히 쓸모가 없어진다.

 

16. 마르크스, 자본주의의 비밀을 밝히다

: 평타다. 무특색이 특색인 책이다. 실제로 특색이 없기야 하겠는가만은, 수많은 다른 입문서들과 함께 배치하면 분명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위치에 안착할 책이다.

 


17. 나의 친애하는 적

: , 욕심이 사라진다. syo는 영원히 여기 이 작은 서재에서 책을 읽고 그저 몇 사람 읽고 낄낄거릴 수 있는 글을 쓰다가 늦봄 꽃먼지처럼 조용히 사라지면 되겠다.

 

18. 김상욱의 양자 공부

: 양자역학을 이보다 더 쉽게 설명해주는 책은 없으리라는 이야기를 듣는 책이 출간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서 읽었다. 그러나 책을 덮으며 syo는 깨달았다. 알고 보니 그건 너무도 슬픈 소식이었다는 사실을.....

 

19. 차별감정의 철학

: 진짜 제대로 된 독자라면 지금 읽는 책 속에 정말 더는 못 봐주겠다 싶은 이야기가 섞여 있더라도 전체적인 시점에서 조망하여 뭐라도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들었다. 역시 syo는 훌륭한 독자도 훌륭한 인간도 못 된다. 자기 권위에 도취되는 데도, 선각자들의 지혜를 끌어다 붙여 맘대로 사용하는 데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백만 년 만에 별 두개 때려본다.

 

20.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 세일즈 포인트가 5배는 높은 이 책이,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보다 나은 점을 단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납득은 했을 텐데. 좋은 책이긴 하지만.



21. 과학자를 울린 과학책

: 과학 대중화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10명의 과학자들을 불러 모아, 과학책 1, 비과학책 1권씩 읽고 리뷰를 쓰게 시켰다. 무난하고 모자람이 없는 리뷰집이다. 그래서 느꼈다. 이 과학자들이 비과학책에 대해 이만한 리뷰를 쓸 수 있다면, 비과학자인 우리도 과학책을 읽고 이들이 쓰는 수준의 리뷰는 써낼 수 있어야 하겠다고. 과학자들이랑 다투자는 게 아니라, 결국은 과학 공부라는 말이다.

 

22. 읽기의 말들

: 잠시 등한시했다고 우리 유유 많이 서운했구나. 이렇게 빨간 얼굴로. 오랜만에 찾아와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감동몽둥이로 실컷 두들겨 팰 것 까진 없었잖아. 사랑해.

 

23. 현대 철학 아는 척 하기

: 언제나 그렇지만 이런 책은 쓸모와 무쓸모의 경계선을 아슬아슬 타넘는다. 입문서나 개론서도 사실 이렇게 십수 명을 한 번에 다루는 책보다는 한 명을 깊이 파는 쪽을 고르는 게 남는 장사다.

 

24. 단단한 삶

: 굉장히 참신한 척 하지만 굉장히 낡았다. 단순한 자기계발서에 가깝고 단 한 줄도 새롭지 않았다.



25. 공부의 말들

: 제목은 이래도 실은 읽기의 말들 part. 2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그 책만 못하다. 하늘이시여, 공부의 말들을 내시고는 왜 또 읽기의 말들을 내셨나이까.

 

26.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운 건 싫어

: 하나도 어렵지 않은 심리학책이다. 3에서 고1쯤 보면 참 많은 도움이 되겠다. 지금은 그저 소소히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다.

 

27.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

: 일상적이고 별 것 아닌 듯한 사물이나 사태를 기발한 관점으로 조명하여 남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독창적인 의미를 길어 올리는 신기한 재주를 가진 이들이 많다. 그 재주가 낳은 책들도 역시 많다. 그 책들은 독자가 제 무릎을 탁 치며 감탄하게 만들지만, 독자에게 그 재주를 알려주진 않는다. 그렇게 날름 배울 수 있는 재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책들은 참신하지만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덮으면 대부분 잊을 것이다.

 

28.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지혜는 지식처럼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지혜로운 자가 지식의 배를 가르고 헤집어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지혜를 끄집어내는 모양을 보면서 체득하는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의 거침없는 칼질은 항상 나를 감동시킨다.

 


29. 한나 아렌트의 생각

: 깔끔하다. 한나 아렌트 입문서로 몹시 훌륭하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사상에 비추어 우리 정치 현실을 풀어낸 데가 챕터마다 짤막짤막 배치된 것도 매력이다. 한나 아렌트에 대한 이해가 짧아서 이 책에 저자 자신의 해석이 얼마나 개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핵심만 쉽게 꽂아 놓은 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왜곡할 여유는 거의 없지 않나 싶다. 첫 책은 이걸로 시작한다고 하면 말릴 이유를 찾기 어렵겠다.

30. 나의 사적인 도시

: 나는 뉴욕에 살아 본 적은 물론 없고 그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나는 뉴욕에서(뉴요커로) 살고 싶어." 라는 말을 한다면, 그리고 그저 '나는 잘 나가고 싶어.' 혹은 '트렌드의 최전방에서 폼 나게 살고 싶어' 라는 식의 부박한 욕망의 우회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뉴욕'이라는 장소와 '뉴욕에서의 삶'이 가져다주는 매력에 참을 수 없을만큼 끌려서 그 말을 한 것이라면, 아마 이 사람처럼 뉴욕을 살아내야 할 것 같다. 적잖은 책을 뒤지며 타지에서의 삶을 여럿 훔쳐보았는데, 그 중 단연코 이 삶이 가장 멋스럽다.

 

31. 어쨌든 미술은 재밌다

: 이야, 이걸론 정말 아무것도 안 되겠구나....

 

32.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 큼직큼직한 철학자들의 생각들과 '걷기'의 유사성을 들추어내 그들의 사상을 '걷는 것'으로 풀어내는 데 집요하달 만큼 집중한다. 본질은 철학 입문서인데, 거개의 입문서들이 가지는 지루함과 몰개성을 '걷기'라는 독창적 돋보기를 가져다 대어서 태워버린다. 가볍지만 아름답고 좋은 책이다.

 


33.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 알라딘에서 입문서 빠돌이로 이름 난 syo가 판단하건대, 한나 아렌트 입문서들은 대개 꽤 괜찮은 것 같다. 한나 아렌트가 마르크스나 프로이트보다 쉽기 때문일까? 그런지 아닌지 사실 잘 모릅니다. 이 책 역시 처음 읽기에 모자람이 없는 좋은 입문서 같다.

 

34.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 분명 그냥 앉은 자리에서 휙휙 가벼운 필치로 써냈을 것이다. 요시다 슈이치 정도 되는 베테랑에게, 이 책 속의 이야기들은 너무 얇고 가볍다. 그런데도 아쉬움보다는 만족감이 더 큰 이유를 찾자면, 아마 이런 경량의 이야기에 잘 맞물린 요시다의 간결하면서도 청랑한 문체 때문이겠지.

 

35. 한나 아렌트의 말

: 이렇게 어렵게 말해야 했어요? 뒷쪽 이야기는 진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단 말예요......

 

36.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 어차피 syo는 철학자가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으니까, syo가 철학으로 빚을 수 있는 최대치의 업적은 이 책 속에 든 글들과 비슷한 것들을 써내는 것이겠다. 이 사람은 확실히 자기가 읽은 철학을 꼭꼭 씹어 삼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머싰쪙.

 

 

 

D-58 인데, 이게 뭐야.

눈 감으면 고향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 망했어요. 불효자는 우옵니다.

징징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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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31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31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5-31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징징징징. 징징징 제가 받겠습니다. 받기만 하고 드리진 않을게요.
저는 syo 님이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하나만 보면서 갑니까. 이렇게 곁눈질도 좀(많이) 하면서 가야 꾸준히 걸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치지 않고 말이지요.

자, 고고씽!!

syo 2018-05-31 11:0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 가자! 망하러! ㅎㅎㅎ

chaeg 2018-05-31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좋은 책 많이 보고 가요^^; 화이팅~

chaeg 2018-05-31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이면 좋은 소식이 있겠죠~? 기대합니다!

syo 2018-05-31 16:24   좋아요 0 | URL
있을까요 ㅎㅎㅎㅎ 어쨌거나 감사합니다^^

stella.K 2018-05-31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하십쇼. 쇼님!

syo 2018-05-31 16:2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 호되다 ㅎㅎ

단발머리 2018-05-3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는 괜찮아요, 징징거려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징징거려도 36권, 장합니다. syo님~~~~
쫌만 더 힘내세요, 뺘샤!!!

syo 2018-05-31 16:26   좋아요 0 | URL
빠샤 뭔가 파워풀하다 ㅎㅎ 빠샤!!

짜라투스트라 2018-05-3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재미있어요

syo 2018-05-31 16:27   좋아요 0 | URL
짜라님 오랜만입니다 ㅎㅎ

2018-06-01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8-06-01 18:12   좋아요 1 | URL
이제껏 받았던 수많은 응원댓글 가운데 그야말로 가장 격려가 됩니다. 엄청나다.....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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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 몇 마디만 나누고 돌아올 거니까, 이미 정해진 결론만 통보하면 그걸로 끝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며 현승이 등을 토닥여 주었지만 미래의 큰 눈동자는 금방 정돈되지 않았다. 미래가 물었다. “얼마나 걸릴까?” “왕복 세 시간 잡고, 세 시간 반 정도면 되지 않을까?” 미래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지금부터의 세 시간 반은 삼 년 육 개월 같은 긴 기다림이 되겠지. 난 그 속에서 끝없이 조바심내고, 불안해하고, 의심할 거고,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할 테고, 분침이 예정된 시각을 한 칸만 앞질러도 바닥없이 허물어지고 말겠지. “왜 이렇게 불안해 해.” 현승은 품에 안긴 미래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이런 문제에서, 정해진 결론 같은 건 없어. 몇 마디뿐일 거라고 네가 자신했던 말은 곧 수십, 수백 마디의 길고 뜨거운 말로 끝없이 이어질 거고, 그 말들이 곧 너희의 추억을 헤집어 놓을 거고, 이루지 못한 많은 약속들을 떠올리게 할 거고, 아마 그 사람은 울겠지. 그렇게 되면 정해 놓은 결론 같은 거, 그거 그 눈물에 녹아 정말 먼지처럼 사라질 거잖아. 나한테 오지 않을 거잖아. 미래의 눈이 그렇게 많은 말을 내비치는 동안, 미래의 입은 딱 한 마디만을 보탰다. “, , 여기로 다시 올 거지?” 현승은 고개만 끄덕였다. 미래는 현승의 턱이 자신의 정수리 근처를 두 번 스치는 것을 느꼈다. 한숨 같아 못내 불안하지만 그래도 따뜻해서 끝까지 믿고 싶은, 현승의 날숨이 느껴졌다. 그리고 세 시간 반이 시작되었다.

 

 


2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가 서려 서늘해진 차창에 머리를 대고, 현승은 유진에게 할 말을 이리저리 배치하고 있었다.

 

네가 시간을 좀 갖자고 말했을 때, 난 분명히 이야기 했어. 네가 원한다면 그러겠지만, 돌아오면 내 옆에 네 자리, 없을 수 있다고.’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었다. 이건 꼭 이야기하고 시작해야겠어.

 

어차피 어떻게든 한 번 어긋난 인연이면, 다시 이어 붙이는 건 어렵다고 생각해. 억지로 봉합하려 해 봤자 금 간 자리는 사라지지 않는 거잖아.’ 이 말은 저쪽에서 먼저 헤어지자고 할 때도 쓸 수 있겠다. 빠뜨리지 말아야지.

 

난 별로 좋은 사람 아니었나 봐. 이제 겨우 한 달 지났는데, 네가 정말 많이 희미해졌어. 그러니까 우리 이렇게 헤어지는 게, 너한테도 잘 된 일이라는 거지, 내 말은.’ , 사실은 사실이니까.

 

이미 난 다른 사람이 생겼어. 지금도 그 사람하고 있다가 여기 온 거고, 너랑 이야기 끝나면 바로 그 사람한테 갈 거야. 그러니까 이제, 우리한테는 어떤 가능성도 없는 거야.’ 이 말은 하지 말까? 너무 나쁜 놈 같아 보이는데. , 모르지. 저쪽에서도 비슷한 말을 할지도 모르는 건데. 일단 넣어 둬.

 

말은 풍성했지만 대체로 식상했다. 현승은 말의 앞으로 말을, 말의 뒤로 말을 옮겨 붙여가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참 식상한 사랑이었던 거지. 별 거 없는 16개월이었던 거지. 이렇게 끝내는 게, 맞는 거지. 차체가 흔들릴 때마다 창에 기댄 머리도 함께 떨렸다. 그 진동에 기대어, 현승은 쉼 없이 무언가를 털어내고 있었다. 애정의 잔해, 미련, 좋았던 추억, 좋았을지도 모를 두 사람의 미래, 그리고 죄책감. 죄책감.

 


 

3

 

죄책감은 지금 어딘가에서 조용히 현승을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여자의 이름에 들러붙은 감정이었다. 유진으로부터 한 달만 시간을 가져보자고 통보받은 바로 그날, 바로 그 순간까지도 현승은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시끄럽게 분노했다. 분노로 부끄러움을 덮어 보려 큰 소리를 쳤다.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가 헤어졌다고 생각할 거라고 윽박질렀다. 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전철에 올라탔다. 전철의 뒤꽁무니가 희미해져 가는 플랫폼에서 현승은 주먹을 쥔 채 오래 서 있었다.

 

그날 밤 현승은 미래를 불러냈다. 미래를 알게 된 지는 채 1년도 지나지 않았고, 같은 인터넷 동호회 회원이었던 그들은 그날 전까지는 실제로 만난 적이 단 한번밖에 없는 희미한 관계일 뿐이었다. 그런 미래를 불러 술을 마신 것에 의도가 있었음을 현승은 인정했다. 일주일에 열 번쯤 술을 마시는 사내놈들이 현승의 주변에 득시글거렸으므로 그저 술을 같이 마실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었다면 현승은 그 조용하고 아늑한 술집으로 굳이 미래를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테이블 위에 향초가 있고,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에 알록달록한 비즈 커튼이 둘러져 있는 술집이었다. 아른거리는 촛불이 두 사람의 몸과 마음에 분위기 있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를 표정에 두르고 현승은 실연당한 슬픈 남자 연기를 시도했다. 일부러 슬프게 웃었고, 가끔 먼 곳을 응시하는 것처럼 초점 없는 시선을 촛불에 던져 넣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진짜 눈물이 났을 때, 미래는 놀랐고 현승은 더 크게 놀랐다. 아니, 슬픈 척 하는 건데 왜 진짜 슬프고 지랄이지, 우는 척만 하면 되는데 왜 진짜 울고 지랄이지. 울음은 참으려 애를 쓸수록 자꾸만 덩치가 커졌다. 훌쩍거리다 이내 꺽꺽 큰 울음이 몰아쳤고 현승은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펑펑 울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다 망하는 건데. 에이 씨. 현승은 울다 마셨고, 마시다 울었다. 미래는 그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며 조용히 제 술잔만 비웠다.

 

그리고 현승의 잠을 깨운 것은 미래의 입술이었다. 현승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미래의 방 천장이었다. 좁은 미래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은 현승이었고, 미래는 침대 아래에 앉아 상체만 현승의 상체 위로 포개고 있었다. 현승은 생각했다. 미래에게 기대다시피 하여 걸어 온 골목길의 풍경이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미래가 라면을 끓여줬던 것 같다. “아니, ......그게.” 침대에 누운 채 현승이 머리를 긁적였다. “잘 잤어요?” 미래가 현승의 눈앞에 가까이 와 있었다. “, , 잘 자긴 했는데, 이게......” 미래가 웃었다. “라면 먹은 거 기억나요?” “.” “내가 현승 씨한테 라면 먹고 가라고 했었어요. 그게 필요한 것 같아서. 그래서 나 부른 것 같아서. 근데, 현승 씨 정말 우리 집에 오자마자 식탁 앞에 앉더라고요.” “.....” “거기 앉아서, 라면 해준다더니 뭐하고 있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라구요.” “, ......” “그래서 라면을 끓였어요. 라면 먹고 가랬더니, 정말 라면을 먹더라구요.” “?” “현승 씨, 그 영화 안 봤어요?” “? 무슨 영화요?” “......아뇨. 현승 씨가 라면을 되게 맛있게 먹었어요.” “, . 맛있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기억은 잘 안 나지만.” “, 맛있었나 봐요.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내가 끓인 라면 제일 맛있게 먹은 사람이에요, 현승 씨가.” “......” “그래서 좋았어요. 라면을 맛있게 먹어서요.” “......” “현승 씨도, 내가 좋았으면 좋겠어요.”

 

 

 

4

 

그리고 며칠이었다. 미래의 바람대로 현승 역시 미래를 좋아하게 된 것은. 유진이 던져놓고 간 짧은 시간 안에, 현승은 미래에게 사랑을 말했다. 미래는 울었다. “, 한 달 안에 현승 씨가 그 말을 해 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너무 무서웠어.” 현승이 말했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 유진이보다 널 더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어. 오래 만난 사람이고,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정말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 하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넌 그만큼 좋은 사람이고, 이미 결정된 일은 결정된 일이니까.” 믿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기에 미래는 믿었다. 그렇지만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제보다 오늘 더 행복한 만큼 오늘보다 내일 더 불안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불안이 함께 눈을 뜬다. 그리고 현승이 와서 그 하루를 행복으로 바꾸어 놓고 간다. 오늘도 무사하고 행복했어. 하루를 마무리하는 주문처럼 되뇌며 잠을 청한다. 잠들기 전이 가장 행복했다. 행복과 불안 사이의 시공간에 쏘아 놓은 살처럼 빠르게 달력은 넘어갔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현승이 유진을 만나러 갔다. 한 달을 채울 땐 그렇게 미친 듯 달리던 시간이 멈춰선 것처럼 느리게 가는 좁은 방 안에서, 미래는 주문을 외고 있었다. 오늘도 무사하고 행복했어. 오늘도 무사하고 행복했어. 제발. 한 달보다 더 긴 세 시간 반을 그저 무사하고 행복하기만을 바라면서 미래는 기다렸다.

 

 

 

5

 

둘이 자주 가던 공원, 자주 시간을 보내던 작은 벤치에 앉아 유진은 현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승이 오는 방향을 미리 알고 바라보고 있었다. 현승은 언제나 약속 시간에 5분을 늦는 남자였고 유진은 그런 현승을 10분 기다리는 여자였다. 현승이 나타나기 전 10분 동안, 버스 안의 현승처럼 유진 역시 말을 고르고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 법한 낯간지러운 대사가 몇몇 떠올랐지만 유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떤 말도 잘 할 자신이 없었다. 기쁨이 제가 먼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차피 어떤 말보다 표정으로, 몸짓으로 더 많은 말을 하게 될 테지. 유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승은 한 달 만에 보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한 달 동안 더 많이 사랑하게 된 사람이었다. 처음 현승과 단둘이 만났던 그날보다, 유진은 더 많이 떨고 더 많이 설레고 있었다.

 

작은 화단을 꺾어 돌자 현승의 눈에 벤치에 앉은 유진이 보였다. 유진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유진이 벌떡 일어나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미소를 마주한 순간, 현승은 준비해 온 첫 번째 말을 버렸다. 저게 내가 사랑하던 미소였어. 한 번 보겠다고 별의 별 애교를 다 부리던 그 미소였어. 저 미소를 앞에 놓고, 이제 네 자리가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현승은 쭈뼛쭈뼛 다가가 벤치에 유진의 옆에 앉았다. 유진이 현승의 손을 꼭 잡았다. “오빠, 잘 지냈어?” “, , 그렇지.” “뭐야, 잘 지냈어? 왜 잘 지냈어. 난 오빠 보고 싶어서 엄청 힘들었는데.” 현승은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잘 지냈냐면 말이지...... “오빠, 사실 나, 오빠한테 엄청 당당하게 한 달이라 그래놓고, 사실 일주일 만에 두 손 들었었다? 단축번호만 누르면 바로 오빠 목소리 들을 수 있는 거잖아. 하루에도 몇 번씩 1에 손가락을 올렸다 내렸다...... 진짜 겨우 겨우 한 달 참아낸 거야. 자존심 지키겠다고.” “그랬어?” “, 근데 지금 오빠 보니까, 왜 그랬나 싶어. 그냥 내가 잘못했다고, 지금 너무 보고 싶다고 말하면 됐던 건데. 보니까 이렇게 좋은데. 자존심, 그게 뭐라고.” 부끄러워 살짝 붉힌 뺨으로 또 한 번 미소가 앉았다. 그리고 현승은 두 번째 말을 버렸다. 과연 우리가 어긋난 인연이었던 걸까? 우리 사이에 금이 갔다고, 그냥 그렇다고 내가 오해했을 뿐일지도 몰라. 싫어서 안 본 것도 아니고, 그동안 이렇게 내가 그리웠다잖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웃으며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건 아닐까? 수많은 이야기가 쉼 없이 오갔다. 유진과 현승은 떨어져 지낸 한 달 같은 건 애초에 없었던 사람들처럼, 어제 만나 속삭이던 사랑의 다음 이야기를 오늘 이어나가는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는데, 유진이 흘끗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이것 봐, 우리 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네.”

 

30! 그때서야 현승은 누군가가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잊어버린, 혹은 그런 적이 없었다고 믿고 싶은, 바로 그 한 달이라는 시간을 누구와 함께 보냈는지 떠올랐다. 그 사람에게 무슨 약속을 주고 이 자리에 나왔는지가 겨우 떠올랐다. 그리고 그제야, 현승은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달았다.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을 하찮게 여겼고, 쉽게 생각해선 안 될 것을 쉽게 생각했음을 알았다. 그 오만과 방황의 대가로, 이제 현승은 전부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이에게는 커다란 잘못을 했기에 돌아갈 수 없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님을 확실히 깨달았으므로 다른 이에게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망쳤어. 내가, 모든 것을 망쳤어. 현승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유진의 눈에 불안이 감돌기 시작했다. 유진이 힘주어 말했다. “오빠, 우리, 오늘 같이 있자. 나 많이 생각했었어. 오빠가 같이 있자고 할 때마다 너무 매몰차게 거절했었지. 나도 그런 맘이 아닌 건 아니었는데, 너무 쉬운 여자로 보일까 봐 그랬던 것 같아. 또 그놈의 자존심이었지 뭐. 이제 그런 거 안 하려구. 오빠가 같이 있자 할 때, 나도 같이 있고 싶으면 그냥 같이 있을래. 앞으로 그럴래.” 유진의 표정에 어린 그 감정의 정체를 현승은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몇 시간 전에 보고 나온 미래의 표정이었다. 지난 한달 내내 미래가 언뜻언뜻 비추었던 감정의 조각이었다. 지금이 바로, 세 번째 말을 할 때라고, 내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그 동안 네가 얼마나 희미해졌는지, 그래서 우리가 지금 헤어지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를 말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현승은 생각했다. 그러나 벌어진 현승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온통 울음뿐이었다. 미안함, 자책, 고마움, 한없이 거지같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너무도 명백히 남아 있는 사랑,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 이 순간을 영원히 지속하고 싶은 마음, 그런 감정들이 현승의 안에서 짓뭉개져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그렇게 두 사람은 벤치에서 한참을 울었다. 현승은 짐승처럼 크게 울었고, 유진은 아이처럼 작게 울었다. 작은 울음이 먼저 여유를 찾았다. 말했다. “, 사실 불안했어. 오빠가 그랬잖아. 한 달 지나면 나 안 받아줄 수도 있다고. 그때, 오빠가 말은 그렇게 해도 그런 사람이 아닐 거라고 믿었으니까 꾹 참고 돌아섰지만, 내내 불안했어. 한 달 동안 내가 오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만 계속 재확인하면서, 점점 더 많이 좋아지면서, 자꾸 불안했어. 그래서 좀 필사적이었던 것 같아. 오늘 만나서 오빠가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내가 듣기 싫은 말, 들어선 안 될 말이 나온다면, 어떻게든 그 말을 틀어막겠다고. 오빠가 말하기 전에, 내 마음 다 말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거 다 해서 덮어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왔어. 그랬는데.....” 조금씩 잦아드는 울음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린 채, 현승은 생각했다. 지금이 네 번째 말을, 네 번째 말이라도 해야 할 때라고. 말 해. 말 해. 다른 사람 생겼다고, 빨리 말 해. 제발, 너도 인간이라면, 제발 그 말이라도 해. “그랬는데, 정말 그렇게 됐네. 정말. 이렇게 됐네. 오빠. 정말, 내 자리가 없어졌어?” 말 해. “다른 사람 생겼어?” 말하라고. “이제, 나 사랑하지 않게 됐어?” 제발...... 현승은 다시 무너져 내렸다. 울음이 그쳐가던 벤치는 다시 축축히 젖었고, 현승은 울부짖느라 끝내 말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참말도, 이젠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짓말도.

 

 

 

6

 

돌아오는 버스에서 현승은 물기 없는 표정으로 밤의 서울을 내다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울었는지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누구를 불안하게 했는지, 누구로부터 멀어지고 누구에게 가까워지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눈은 부었고 목은 쉬었다. 잃어버린 사랑보다, 이래저래 잃어버린 물들 때문에 목이 타고 몸에 힘이 없었다. 소진된 인간은 감정에 소비할 여력이 없으므로 몸뚱이가 그를 지배했다. 버스 맨 뒷자리에서 현승은 휘청거리며 밤을 되짚어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몸이 기억하는 곳에서 내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정류장에 내린 다음 누구의 집으로 향할지, 현승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고, 현승은 내렸다. 그리고 현승의 눈앞에, 정류장의 작은 의자에 미래가 작게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눈을 맞추었다. 둘의 눈이 닮아 있었다.

 

현승이 미래의 옆에 앉았다. “왜 나왔어, 더운데. 집에 있지.” 도로 쪽으로 시선을 두고 현승이 말했다. 같은 곳을 보며 미래가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현승 씨가 올까봐 나온 건지, 안 올까봐 나온 건지.” “그랬어?” “. 그랬어. 그래서 많이 생각했어. 현승 씨가 나한테 올지 안 올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현승 씨를 기다린다면, 나는 어디까지 마중을 나가도 되는 걸까 하고. 우리 집이야 확실히 내가 당신을 기다려도 되는 곳이겠지만, 우리 처음 그날 같이 걸었던 골목은 어떨까. 그날 그 술집은? 내가 거기까지 가서 현승 씨를 기다려도 되는 걸까? 당신 사는 곳까지는 안 될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 그래서 좀 마음이 아프기도 했어.” “그랬구나.” “. 그랬어. 그렇지만 용기를 냈어. 여기 이 정류장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만약 현승 씨가 오늘 돌아온다면 여기서 내릴 거고, 내려서 우리 집으로 올지 당신 집으로 갈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여기서 내릴 거니까.” “내가 안 왔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러니까. 내가 어쩌려고 이랬을까.” 미래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현승 씨. 혹시 내가..... 내가 주제넘게 너무 큰 용기를 낸 걸까?” 현승은 고개를 돌려 미래를 보았다. 미래는 계속 도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승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미래는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미래의 눈이 무거워졌다. 현승은 미래의 눈에 무겁게 차오르는 물을 보았다. 그 물이 다시 현승의 마음을 헤집고, 더는 남아 있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물들을 찾아내 퍼 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밤 속에 오래 앉아 있었다. 많은 버스가 그들 앞에 멈춰 문을 열어보였지만, 끝내 그들을 태우지 못하고 조용히 정류장을 떠났다.

 


 

 "보고 싶어."

 이번에는 진지하게 말했다수화기 너머에서 유리코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갈게."

 그렇게 말했다대답이 없다언제나 그랬다헤어진 뒤에는 전화를 해도보고 싶다고 말해도유리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싱고를 받아들여 주었다기뻐하지도 않고 불평하지도 않고.

싱고는 택시를 타고 유리코의 아파트로 갔다.

 평소 같으면 직접 아파트를 찾아갔을 테지만이날 밤에는 한참 앞에서 차에서 내렸다찾아가면 유리코가 받아줄 거란 자신은 있었지만지금까지처럼 무신경함을 가장하고 받아들여 달라고 할 자신이 없었다.

산책길의 작은 광장에 들어가 낙서투성이인 공중전화로 유리코에게 전화를 했다유리코는 바로 받았다.

 "아무래도 너를 좋아해."

 짦은 침묵 뒤에 그 말만 했다마음 한편으로 유리코가 기뻐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난 말이지이제 싱고를좋아하지 않아."

 들려온 것은 그런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지금까지 연락을 하면 만나 주었잖아좋아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만나 준 거야.

 금방이라도 그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러나 애써 삼키고 "......알아"라고만 했다. "우리이미 헤어졌다는 거."

 유리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태연히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산책길의 작은 광장에 벤치가 있었다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깨를 떨며 앉아 있었다. (5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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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9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9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5-2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이 책을 읽으면 이 리뷰를 이해할 수 있는거지요? 리뷰의 행간 말입니다.

syo 2018-05-29 10:52   좋아요 0 | URL
사실 리뷰도 아니고 행간 없어요 ㅎㅎㅎ 그냥 요런 식의 짧은 이야기들이 몇 개 들어있는 책이에요.

마지막에 인용해놓은 구절을 보고 생각나서 끼적여본 건데 혼란을 야기하고 말았군요.....
 


육첩방은 남의 나라

 

12784보를 걸었다. 길 위로 새하얀 나비 한 마리 팔랑팔랑 낮게 날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래도 한 살이, 저래도 한 살이라고 생각했다. 답안지를 채우는 데 필요치 않은 책 300쪽을 읽었다. 이것들이 답이 되는 문제를 언젠가는 만날지도 모른다며 위로하고 독려했다. 1.7리터의 물을 끓이고, 740밀리리터의 커피와 350밀리리터의 홍차를 마셨다. 보이차와 레몬밤도 우렸다. 입 안이 자꾸만 텁텁해진다. 한 차례 수음을 했다. 조금 비참해졌다. 하루가 가도록 팔굽혀펴기 100개를 해내지 못했다. 더욱 비참해졌다. 두 끼만 먹고 나머지 한 끼를 상상했다. 상상은 칼로리가 없지만 칼로리가 없어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 휴지가 동나고 치약이 다 떨어졌다. 책꽂이에는 사례집과 판례집과 문제집이 있고 고집과 맷집과 네가 사는 집은 없다. 아무도 찾지 않았고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나만 만난다. 만 보를 걸으면 땀이 난다. 여름인가 봐, 내가 말했다. 봄 된지 얼마 됐다고,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내가 손을 뻗어 내 이마를 만져주었다. 다정하게 땀을 훔쳐 주었다. 나는 내가 고마웠다.

 

어쨌거나 이래도 여름, 저래도 여름이 올 것이다. 저녁에도 에어컨이 가동된다. 3분만 지나도 으슬으슬 추워지는 좁은 방이다. 에어컨이 멈추면 3분 안에 다시 꿉꿉한 훈기가 도는, 역시 좁은 방이다. 고시원은 남의 나라 같다. 남의 나라에, 봄이 물러난 만큼 밤이 길어진다.

  

 

고독하다는 것은 어떤 기분인가그건 배고픔 같은 기분이다주위 사람들은 모두 잔칫상에 앉아 있는데 자기만 굶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창피하고경계심이 들고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기분이 밖으로도 드러나고독한 사람은 점점 더 고립되고 점점 더 소외된다그것은 감정적인 측면에서 상처를 입히며신체라는 폐쇄된 공간 내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발생하는 물리적 결과마저 낳는다그것은 앞으로 나아간다무슨 말이냐 하면고독은 얼음처럼 차갑고 유리처럼 맑으며 사람을 집어삼킨다는 뜻이다.

올리비아 랭외로운 도시

 

마음속에서 자기파괴가 시작될 때그것은 그 크기가 단지 모래알 정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그것은 두통이요가벼운 소화불량이요오염된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하지만 당신은 8시 20분 기차를 놓치고 신용기한 연장정책에 관한 회의에 늦게 도착한다점심을 함께하기로 한 옛 친구는 갑자기 당신의 인내심을 바닥내고 이에 당신은 유쾌해지기 위한 노력으로 석 잔의 칵테일을 들이켠다하지만 그때쯤이면 이미 하루는 그 형태를그 의미와 감각을 잃어버린다어떤 목적과 아름다움을 되살리고자 당신은 너무 많은 칵테일을 마시고 너무 많은 얘기를 하고 다른 누군가의 아내를 유혹하면서 결국은 바보스럽고 외설스러운 어떤 일로 치닫게 되며 아침이 되면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이와 같은 심연에 빠지게 된 경로를 되돌아보려 할 때 당신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모래알뿐이다.

존 치버존 치버의 일기 


이 이중의 움직임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그런데 이 움직임은 대단히 특이하다스스로를 거역하고자기 자신에 맞서서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는 움직임이다아니항상 스스로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자신을 연장하고 지탱하고 영속시키는 움직임이다우리는 줄곧 불균형을 향해 자신을 던지고 다시 균형을 잡는다불안정한 가운데 안정적이다우리는 불균형을 키우고 기획하고는 거기에 정착한다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동한다이처럼 걷는 방식이 우리의 특징이다.

로제 폴 드루아걷기철학자의 생각법


삶이 까탈을 부릴 적마다 책이 도와준다때 묻은 자리를 지르잡아 주고곤두선 마음의 끝자락을 눅게 해 준다살아가는 일이 상처받는 일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생긴 생채기를 아물려 주기도 한다하지만 아무리 책을 섭렵하고 거기 담긴 지혜자의 지침을 따른다 해도 해결되지 않는 삶의 완강함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날이 있다하기야 책이 인생의 신열을 단방에 떨어뜨리는 딸기향 해열제로 쓰일 수 있다면 그만큼 삶을 모욕하기도 힘을 것이다책으로 삶이 바뀐다면 삶은 물론 책까지 욕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박총읽기의 말들





필립 로스의 부고를 접했다읽으며 보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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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18-05-23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례집과 문제집과 고집과 맷집...

syo 2018-05-23 20:25   좋아요 0 | URL
적고 나니 부끄럽군요. 이 라임 실화냐.....

2018-05-23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3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3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3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8-05-23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례집 문제집 열심히 보고 계실 것 같아서 부러운데요. 가서 공부 해야겠어요.^^

syo 2018-05-23 21:2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정말 이제 코앞이시겠네요. 화이팅입니다^^

몰리 2018-05-24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읽은 책이지만
크나우스가드의 <나의 투쟁>을 읽는 거 같습니다.
그가 왜 그 제목으로 그런 (안 읽은 책이지만요) 책을 썼을지
syo님 포스트로 알게 된 것 같습니다. ㅎㅎㅎㅎㅎ

syo 2018-05-24 08:10   좋아요 0 | URL
읽은 책이지만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읽는 것 같습니다.
그가 왜 그런 제목으로 책을 썼을지 몰리님 댓글로 알게 된 것 같습니다(읽은 책인데도 불구하구요....) ㅠㅠㅠㅠ 어흑

단발머리 2018-05-24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례집, 판례집, 문제집...
syo님이 맘껏 책 읽는 시간이 어서 왔으면..

필립 로스님 책을.. 난 울컥해서 읽을 수 있을까요. 너무 슬퍼요...
근데... <울분>이 빠졌어요.
안 읽어서 빼신거예요?

syo 2018-05-24 08:12   좋아요 0 | URL
사실 읽어서 뺀 건데..... 근데 또 전락은 넣어놨네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저 많은 걸 아직 안 읽었다니, 씁쓸한 와중에 또 좀 즐겁고 그러네요.ㅎㅎ

stella.K 2018-05-24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로스가 별세했습니까?
작년까지만 해도 건재했던 것 같은데...

참, 윤동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의 시중
한 문장을 떼어다가 이렇게 읽고 보니 참 쓸쓸합니다.ㅠ

올해는 5월인데도 더웠다, 썰렁했다를 반복합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홧팅하시길!

그런데 판례집, 사례집 좀 재밌나요?
저도 기회되면 읽어보게.ㅋ

syo 2018-05-24 16:29   좋아요 0 | URL
응원 감사합니다^-^
판례집 사례집은 직접 한 번 읽어보시죠. 의외의 재미와 적성을 발견하실지도?? ㅎㅎㅎㅎㅎㅎ

stella.K 2018-05-24 17:51   좋아요 0 | URL
추천 좀 해 줘요!!

syo 2018-05-24 19:5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판례집이랑 사례집을 추천하게 되다니. 뭐니뭐니해도 이런 건 안 읽는 게 가장 추천할 만한 일입니다. 그 시간에 다른 좋은 책들 많이 읽으세요 ㅎ 그게 요즘 제 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