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의 동물기
엔도 슈사쿠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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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를 아냐고 물으신다면, “, 엔도 슈사쿠, 알죠. 좋은 작가죠. 침묵! 그 사람 침묵 썼잖아요, 침묵.” 이라고 말한 뒤 즉시 침묵할 수밖에. 그 이상 아는 게 없으니. 실은 그침묵도 읽은 바가 없고. “, 정말 좋은 작가지요. 얼른 다음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는데요.” 따위의 말을 덧붙인다면 성대하게 망했다고 봐야지. 2018년은 바야흐로 엔도가 타계한지 23년이 되는 해다.

 

들리는 말에(똑바로 안 들음), 스콜세지 감독(모름)의 손에 영화(안 봄)화되었으며 노벨상 후보에까지 오른 엔도의 대표작 침묵(안 읽음) 종교적 주제(관심 없음)에서 시작해 삶의 일반적 문제(골치 아픔)에까지 손길을 뻗는 질문을 묵직하게 던지는 대작이라고 하는데(도 관심 안 생김). 그 추천 말씀에 묻어 있는 거룩함과 심오함 덕분일까, syo에게 엔도라는 사람은 강요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읽기에는 조금 머어어얼리 배치된 작가로 오랫동안 인지되어 있었다. 아직 내 인생 8, 90년은 더 남았으니까(120살까지는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엔도라는 자의 장중한 책들이야 팔순잔치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나 읽기 시작하면 되겠지, 뭐 이런 식이었던 것인데. 그런데도 이 책이 갑자기 공중도덕을 개무시하고 내가 읽어야 할 책들의 긴 입장행렬 맨 앞자리에 새치기한 것은 순전히 표지 때문이겠다.

 

시바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충성스러운 자세로 앉아 주인을 올려다보고 있다. 입에는 여성의 속옷 하의로 보이는 하얀 색에 빨간 땡땡이(진부하다! 여자 팬티에 대한 일본 소년만화 수준의 진부한 클리셰!) 천 쪼가리를 물고 있다. 하얀 셔츠를 걸친 중년 남자는, 몽타주가 엔도 슈사쿠로 추정되는데, 화들짝 놀라 동공은 확장, 입은 개방, 상체는 정황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상태다. 시바견은 더없이 낭창한 표정이고, 그렇기에 말풍선이 허락된다면 이런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얼른 받아요. 얼른 받고 쓰다듬어 줘. 처음 아니잖아, 이런 거. 좋아하잖아, 이 물건.” 그렇다면 엔도의 말풍선은 이렇게 예측할 수 있겠다. “아니, 이 시바.....시바개가?”

 

표지에 그려진 장면은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으며 심지어 약간의 박진감마저 느껴지는 <속옷 도둑과 똥개> 에피소드의 한 컷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구도와 기조를 패러디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코믹한 한 판 활극이라 하겠는데,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 그 전에, 우선 저 시바견의 이름은 먹보. 그러나 시바라는 단어를 합법적으로, 도덕적 비난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이 드문 기회를 쉽게 포기할 수는 없기에, 여기서부터 먹보시바를 의도 없이(...) 혼용할까 한다. 불편해 하실 분들을 위해 미리 알려드리는 것이다. 이어지는 글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시바먹보는 입맛 따라 치환해서 읽으셔도 좋겠다는 사실을.


이 시바는 수컷이다. 하필 먹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단순히 이름 그대로 잘 먹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먹보, 엄청 시바네? , 먹보.” 이 시바는 갈색 털에 귀가 꼿꼿하고 입 아래 검은 반점이 있어서 사람으로 치면 코밑수염을 기른 품위 없는 아저씨처럼 생겼다(38)고 엔도는 묘사한다. 지하철 같은 데서 마주쳤는데 나를 힐끗 쳐다보고 있으면 , 기분 나쁘게 왜 자꾸 쳐다보는 거야. , 먹보.’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 같은 생김새라고 하겠다. 실제로 이 시바는 산책을 데리고 나가면 지나가는 아가씨의 치마 속으로 느닷없이 머리를 들이미는, 얼굴도 상스럽고 성격도 상스러운, 딱 일본 남성적인 무뚝뚝한 색골(39)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먹보와 함께 산책을 나간 엔도. 이 시바는 생긴 것 말고도 고질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배변이었다. 답지 않게 또 엄청 눌 자리를 가리는지라, 주인을 끌고 숲을 종횡무진 하다 보면 엔도는 가시나무에 긁히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얼굴을 얻어맞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시바, 숲을 아무리 뱅뱅 돌아도 안착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더니, 갑자기 새로 지은 것처럼 보이는 깔끔한 양옥집 대문 앞에서 힘을 주는 게 아닌가. 저지할 틈도 없이 이미 두 세 덩어리가 사출되었고, 당황한 엔도, 목줄을 힘껏 끌어당겨 보았으나 이런 먹보, 이 먹보가 요지부동이네? 마침 그때 기다렸다는 듯 현관문이 열리고 안경을 쓴 엘리트 풍의 남자가 나타나 시바가 세상에 낳아놓은 세 개의 따끈따끈 덩어리를 발견한다.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

 

으악당신이거대체.” 삽시간에 화내는 표정으로 바뀌더니 말했다.

당신, ...... 의식적으로 개로 하여금 여기에다 배변하게 한 건가요?”

당치도 않소의식적이라니이 녀석말릴 틈도 주지 않고 해버렸지 뭐요.”

서털구털한 내 답변에 상대는 따지듯 물었다.

숲이 있지 않습니까거기서 왜시키지 않았죠?”

그게...... 거기에선...... 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에다 누게 했다는 건가요당신에게는 시민 의식과 도덕심이 없습니까?”

이렇게 다그치는 말을 잔뜩 퍼부었다이쪽은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저 사죄할 수밖에막힘없이 술술 회전하는 상대의 혀에 맞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청소해주세요당연하잖아요?”

청소할게요그럼 되겠죠?”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고나도 무심코 불끈해 몹시 난폭하게 작은 삽으로 부드러운 먹보의 똥을 떠서 비닐종이에 넣었다그사이 그는 감시하듯 꼼짝 않고 내 동작을 지켜보다가 작업이 끝나자 한마디 내뱉었다. “이런 사람이 있으니까 일본의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않는 거야!” 그러고는 문을 쾅 닫고 모습을 감췄다. “바보 자식뭐가 민주주의야라는 말이 엉겁결에 입 밖으로 나올 뻔했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다. (41-42)

 

엔도는 빡쳐서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그 집의 주인을 아냐고 묻는다. 아내는 그 집 문패에 마루다 리코라고 쓰여 있었음을 알려주고, 엔도는 그 마루다란 작자가 근래 어려워 보이는 평론으로 잡지에 등장하여 기염을 토하는 평론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시간에 걸쳐 잡지를 뒤져, 외국어로 쓰인 책이 즐비한 책장을 등지고 매우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찍혀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나를 모욕한 그 남자였다(43)고 확인한다. 아니, 그렇다면 업계 사람이라는 건데, 나를 몰라봐? 이 엔도 슈사쿠를? 그때부터 엔도는 마루다 리코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요즘 그의 평론이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인데 아 먹보, 빡친다. 근방에서 강연회랄지 부인 독서 동아리랄지 그런 것들을 이끌고 있다는데 꽤 호평인 듯하다. 이런 개 먹보, 빡친다.

 

그리고 때는 6월 중순, 마을에 치한이 출몰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돈다. 속옷을 도둑맞은 여성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정의감에 불타는 엔도는 대취한 후, 호기롭게 주변의 풍기순찰을 나간다. 시바를 데리고. 공원에서 농탕질을 하고 있는 아베크족을 발견하고 말로 좋게 타이르려 했으나 아 먹보, 저것들이 아예 듣지를 않네. 빡친 엔도, 슬쩍 먹보의 목줄을 푼다. 가라! 시바! 먹보는 자신의 외모와 성품에 걸맞게 나도 같이 한판 걸지게 놀아보자고 풀밭에서 뒹구는 남녀 사이에 뛰어든다. 혼비백산 도망치는 남녀. 엔도는 더없이 의기양양하다. 가자, 시바! 그런데 아차! 그 사이 먹보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아무리 시바 시바 불러도 이 시바,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 시바다. 이튿날, 근처의 S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네 먹보가 지금 우리 집 메리양에게 상스러운 얼굴로 상스러운 짓을 하고 있으니 얼른 와서 데리고 가라고. 엔도가 허둥지둥 달려갔는데, 멀리서 오는 엔도를 보고 시바, 재차 도주. 그날 여기저기서 엔도의 집으로 항의전화가 빗발치고, 이윽고 밤이 되자 먹보는 못된 곳에서 하룻밤 지새운 탓에 맥이 다 빠져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남자의 얼굴(51)을 하고 집에 들어온다. 손바닥으로 뺨따귀를 몇 대 후린 다음 쇠목줄에 먹보를 묶어놓는 엔도. 이렇게 모든 사건이 일단락 되나보다 했다.

 

다음 날, 아내가 마당의 한 구석에서 진흙투성이가 된 꽃팬티 두 장을 발견한다. 아내는 요즘 동네에 출몰한다는 치한의 짓일 거라 생각하지만, 엔도는 치한이 훔친 속옷을 이렇게 쉽게 포기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생각에 잠긴 엔도, 문득 고개를 돌렸는데, 마당 저쪽에서 멍청하고 품위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먹보와 눈이 마주쳤고, 그 순간, 엔도는 범인이 누군지 직감하고야 말았다. , 빼박 저 시바네. 난처하다. 저 속옷을 돌려줘야 하긴 하겠는데, 일일이 한 집 한 집 다니며 속옷 주인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러나 엔도는 역시 노벨상급 소설가. 문득 죄와 벌의 한 장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명문이 떠오른다. “범죄자는 반드시 범죄를 저지른 장소에 돌아온다.” 엔도는 꽃팬티 두 장을 신문지에 싸들고 먹보와 함께 산책을 나간다. 여유 있게 숲에서 똥을 누인 다음, 신문지를 열어 팬티를 먹보의 코앞에 가져다 댄다. 이 시바,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는 것 같더니, 이내 무엇인가 기억해 낸 것처럼 펄쩍 뛰면서 맹렬한 힘으로 목줄을 끌어 엔도를 어딘가로 데려간다. 역시 도선생. 세계문학의 큰 별.

 

그런데 먹보가 엔도를 데려간 곳은 바로 재수 없는 평론가 마루다 리코의 집이 아닌가! 슬쩍 안쪽 마당을 보니, 널려 있는 빨래 가운데 손에 든 꽃팬티와 유사한 속옷 몇 장이 보인다! 이후는 엔도의 진술을 옮기기로 한다.

 

 그 팬티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먹보의 범죄는 바로 이 정원에서 이루어졌음을 확신했다아마 팬티는 어쩌다가 땅으로 떨어졌을 테고먹보는 기쁨에 겨워 그걸 물고 쏜살같이 우리 집으로 달려왔으리라주위를 둘러봤다근처에 사람의 그림자가 없음을 확인한 뒤 바지 주머니에서 아까 신문지로 싼 팬티를 살며시 꺼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주고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성서의 한 구절을 들릴 듯 말 듯 되뇌며 신문지속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꽃무니 팬티를 빼내 철책 너머 정원으로 던졌다그러나 슬프게도 팬티는 너무 가벼운 나머지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그만 철책에 걸리고 말았다그걸 다시 집어 들고 안쪽에 돌멩이를 넣은 다음 홱 내던졌다. “뭘 하는 겁니까?”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집 안에서 울려 퍼졌다그와 동시에 이층 프랑스창이 열리고 마루다 리코가 문자 그대로 여우처럼 생긴 인색하고 약아빠진 얼굴을 내밀었다. “뭘 정원에 던진 거죠?”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달아나려는 나를 붙들었다마루다 리코도 외쳤다.

자네기다리게뭘 하고 있었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정원에 뭔가를 냅다 던졌잖아뭐지그거?”

화염병은 아니야그러니 안심해.”

 나는 정색하며 말했다.

화염병그런 물건 따위를 내가 맞을 리 없어나는 좌익 학생 편이라고.”

여보!” 하고 부르는 마루다 부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속옷을 던졌어요여자 속옷이요.”

뭐라고?”

어제 도둑맞았잖아요요츠의 속옷을그걸 지금 이 사람이 던졌어요.”

자네...... 자네가 치한이군.”

무례하네무슨 말을 하는 거야아니야이 개가 했다고.”

이 개가그러면 자내의 개는 치견인가?”

치견일본어를 소중히 해치견이란 단어는 사전에 없다고이래서 평론가는 안 된다니까우리 집 개가 어쩌다 추태를 부리는 바람에 돌려주러 온 것뿐이야.”

 창문에서 마루다 리코의 얼굴이 사라졌다나를 잡으러 서둘러 현관으로 뛰어 내려오는 모양이었다먹보로 말할 것 같으면 예의 품위 없는 코밑수염을 기른 얼굴로 이상하다는 듯 가만히 쳐다봤다어디까지 바보인 걸까이 개는나는 먹보를 잡아끌며 부리나케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이날부터 소설가인 나와 평론가인 마루다 리코 사이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반목과 싸움이 이어지지만그건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56~59)

 

여기까지가 그나마 이 책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고, 이어지는 글은 늘상 그렇듯 그저 syo의 뻘소리입니다. 이쯤에서 그냥 창 닫기 하고 가셔도 되겠습니다. 가시고 싶으시면 가세요. 가셔도 된다구요. 가차 없이 냉혹하게 x를 누르세요. 피도 눈물도 없이 alt+F4를 누르시라구요. 어차피 syo의 글 같은 거..... 으흑, 먹보.....

 

 

가진 것 없는 자들이 가진 것 많은 자들보다 더 많이 가진 게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아마 이사의 경험일 것이다. 열세 살이었는데, 이미 내 나이보다 이제껏 거쳐 온 집들의 문패 숫자가 더 많을 만큼, 우리 집은 꾸준히 가난했다. 몇 번째 집인지 모를 우리의 새로운 셋집은, 한국 전쟁 직후 사회 속에 혼란이 많고 혼란 속에 기회가 많던 시절을 놓치지 않고 움켜잡은 어느 중견기업 회장님이 말년에 살고자 지었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세 가구에 세를 놓은 정원 딸린 거대한 저택이었다. 1층을 쪼개어 크고 작은 집으로 나누었고, 그 중 작은 쪽이 우리 가족의 차지였다. 웃프게도, 집은 작은데 1층을 분할하기 전 사용했던 거대하고 현란한 현관문은 우리 집에 달려 있었다. 과장을 좀 보태면, 그 현관을 열고 집으로 들어설 때마다 마치 숭례문을 열었더니 문 안쪽이 옷장이라 얼떨결에 웃옷을 벗어 걸고 나프탈렌 냄새나 맡으며 으스스 돌아서는, 그런 춥고 황당한 기분이 되곤 했다. 출입문에 자동굴욕기가 장착되어 있는 그런 희한한 집에 우리 가족이 깃든 이유는 순전히 세가 쌌기 때문이고, 복식조로 배드민턴을 쳐도 될 만한 잔디정원을 갖춘 그 집이 그렇게 세가 싼 이유는, 거기에 세입자가 책임지고 돌봐야 할 개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늙은 개가.

 

이삿짐을 옮기는 날, 짐차는 벌써 새 집으로 도착했는데 이사도우미 아저씨들은 대문 밖에서 심각한 얼굴로 소리 낮춰 이야기만 나누고 있었다. 난 그게 IMF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명 이상의 아저씨가 모여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그게 다 IMF 탓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대문 안쪽에서 퀑- 하고 목구멍으로 대포 쏘는 소리가 나더니, 대문에서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아저씨가 소스라치면서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방금 발포한 바로 그 대포가 어슬렁어슬렁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철제 대문 틈 사이로 보였다. 그르르르장전르르르릉, ! 이사가 잠시 지연되었다.

 

네 발을 땅에 다 대고 있어도 자기보다 눈높이가 높은 그 생물을 가리키며 동생이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나 저 말 무서워.” 이미 사전답사를 와서 그 거대생명체와 안면을 터놓은 엄마가 대답했다. “말이 아니라, 마루래. 마루.” 동생은 대체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이냐는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동생은 미운 다섯 살이었다. 그러니까 그 말 같지도, 그렇다고 개 같지도 않은 개의 이름은 마루였다.

 

마루는 유럽의 어느 왕조였나 영주 가문이었나 하는데서 사냥개로 즐겨 길렀다는 혈통의 덩치 큰 개였다. 우리가 만났을 때 이미 열 살이었던 그 아이는, 그 나이께의 개들이, 혹은 그 정도 분량의 삶을 소모한 생명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조용하고 덜 움직이며 늘 께느른한 표정으로 먼 데나 바라보며 소일하곤 했다. 그런 것 치고는 또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사람이 나타나면 제 딴에는 반갑다고 말을 걸며 다정하게 다가오는 것인데, 정작 인사를 받는 사람들은 그 짖는 소리를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만 떡이 없다면 아쉬운 대로 팔 한쪽도 받습니다.”로 해석하곤 했다. 그 덕에 우리 집에 놀러온 친구들은 대문이 열리면, 대문에서 현관까지 족히 20m는 되는 거리를 걸으면서 인생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 그 진귀한 상황을 빈번히 체험할 수 있는 특급 서비스를 누리기도 했다. 한겨울이 와도 내 친구들은 구슬땀을 잘만 흘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마루를 좋아했다. 우리는 중2가 되었는데, 2는 세상 모든 것이 다 슬프고 부질없고 귀찮고 짜증나지만, 미쳐 환장하는 것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섹스와, 섹스와, 섹스와, 그리고 섹스였다. 그러나 중2에게 섹스란 흔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대신 섹스는 아니지만 섹스와 비슷하거나, 섹스를 연상시키는 것들에 열광했다. 그러나 초록은 동색이라지. 내 친구들은 역시 내 친구들이라, 섹스를 둘러싼 것들을 좋아는 하였으나 좋아하는 방법은 아직 유아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네다섯 먹은 꼬마들이 !” 소리만 들어도 세상 자지러지듯이, 우리 역시 !” 혹은 !” 소리만 들어도 신나하는, 그런 식으로 섹스를 소비할 뿐이었다. 어른스럽지 못해서 참 다행이었지. 여하튼 그런 우리에게 마루는 정말 놀라운 흥밋거리였다. 그것은 이 영감이 남자란 것들은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그 짓 생각이라는 속담과 진실 사이의 어디쯤 존재하는 저 말의 실감나는 구현자였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집 마당에는 마루 말고도 분지(푸들), 새짝이(요크셔테리어), 진아(치와와), 순아(???)와 같은 아이들이 함께 살았는데, 공교롭게도 그 아이들은 전부 암컷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집 마당이 마루에게는 천국이었을까? 천만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는 건 마찬가진데, 거기 사는 팔 굽은 인간들이 서로 음식을 먹여주는 곳이 천국이고, 지 혼자 먹겠다고 낑낑거리지만 팔이 굽어 굶주릴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사는 곳이 지옥이라는. 어린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팔을 굽혀봤다. 잠깐이지만, 눈앞에 있는 것을 입으로 가져갈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을 조금은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마루를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그런 고통을 상상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눈에 선연히 보이니까. 푸들, 요크셔테리어, 치와와에 해당하는 소형 견종과의 랑데부를 성사시키기에, 그는 너무도 거대했다. 앞다리로 그 작은 아이들을 감싸 쥐고는 허리를 미친 듯이 흔드는데, 닿질 않는다. 닿질 않는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그의 정열을 우리는 함께 모여 열심히 응원했다. 마루야, 힘내! 그리고 미친 듯이 웃었다. 그의 숨소리는 거칠어지다 못해 금방이라도 단말마가 나올 것처럼 비참해지고, 눈에는 핏발이 서는데, 닿질 않는다. 아래에 있는 아이들은 그야말로 담담하다. 그저, ? 이게 웬 그늘이지? 하는 표정일 뿐. 간간히 하품도 한다. 그러나 마루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바쁘고 고되다. 저러니 마루가 살이 안 찌지. 우리와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동생이 말했다. 동생은 미운 일곱 살이었다.

 

3이 되었다. 4월이었고, 고등학교 들어가면 정석 푸느라 생일 챙길 시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마지막으로 성대한 생일파티를 계획했다. 유난히 쾌청한 날이었다. 파티에 와 준 9명의 친구들은 누구는 만화를 보고, 누구는 컴퓨터를 하고, 누구는 배드민턴을 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으슥하게 해가 넘어갈 때쯤, 우리는 모두 정원 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음료수 한 잔씩 놓고 선행학습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몇 반에 누구는 지금 고2 정석을 풀고 있다더라. 내가 듣기로 걔는 유제와 예제만 풀고 넘어간다던데 그러면 다 헛 거다, 정석은 자고로 연습문제지. 요즘은 개념원리가 좋다던데, 그거 살까? 친구여, 사마외도로 빠지지 말게나, 오로지 정도만이 자네를 1등급으로 인도할 걸세. 뭐 이런 구슬픈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때, 친구 하나가 고개를 들어 정원 한쪽을 보더니 말했다. “, 저거 봐봐라.” 모두 고개를 들어 그쪽을 보았다. 다른 친구가 말했다. 또 시작이네.

 

또 시작이었다. 닿지 않는 몸부림. 부질없는 헐떡임. 뜻밖의 체중감량.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웃었다. 하하하. 그런데 어쩐지 그날따라 석연찮았다. 해가 정원 한쪽 귀퉁이 높게 솟은 호두나무 우듬지 뒤쪽으로 무거운 몸을 낮추고 있었다. 마루는 분지 위에서 한참 헛심을 쓰더니 이내 포기하고 새짝이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참 끈질기다.” 친구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웃었다. 하하. 그러나 그 웃음은 직전의 웃음보다 더 짧게 끝났다. 바람이 낮게 불어 정원의 잔디를 스쳤다. 우스스 풀이 눕는 소리가 음악처럼 곱게 들렸는데, 그 사이에 소음처럼 거대한 개의 헐떡임이 끼어들었다. 바람이 아무리 호흡을 가다듬어도, 개의 입에서 나오는 바람과는 조율이 되지 않았다. 음악이 자꾸 무너져 내렸다. “, 진짜.” 친구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웃었다. . 그러나 그건 웃음이라하기도 민망한, 일종의 탄식에 가까운 소리였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마시지 않았으며,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웃기지만 슬프기도 했고, 징그럽지만 불쌍하기도 해서, 욕지기가 나오지만 위로를 덧붙이고도 싶은 그런 이상하고 복잡한 풍경이었다. 우리는 이제 궁금했다. 왜 우리는 이 이상하고 복잡한 장면을 그토록 오래 봐오면서 이제껏 웃음 말고 다른 마음을 길어 올리지 못했을까. 지금은 그 답을 쉽게 찾는다. 그때까지 우리가, 우리는 우리고 저건 마루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이고 저것은 개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 답을 정확히는 몰랐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던 것 같다. 그날부터 마루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던 날까지, 우리는 누구도 마루를 비웃지 않았으니까.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그날 그 풍경을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어쩌면 한참 많이) 웃기지만 슬프고, 징그럽지만 불쌍하여, 욕지기가 나오지만 위로를 덧붙이고 싶은, 그런 이상하고 복잡한 인간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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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7-3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엔도의 책 하면 <침묵> 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제법 많은 책을 냈나봅니다.
사실 저도 <침묵>은 못 읽어봤습니다.
최근 영화로 나왔다고 해서 관심이 가긴 합니나만
그걸 또 스콜세지 감독이 만들었는 줄은 몰랐습니다.
스 감독은 그 독특함 때문에 저도 나름 좋아하는 감독이긴 합니다만
<침묵>을 만들만큼 거룩한 것 같진 않거든요.
영화를 한번 봐야겠슴다.

근데 시험은 잘 보셨습니까?
보셨을 것 같은데...ㅋ

syo 2018-07-30 11:27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바로 어제부로 시험이 끝이 났지욯ㅎㅎㅎㅎㅎㅎ요호!!

이제 신나게 읽을 일만 남았습니다만ㅎ

카알벨루치 2018-07-30 12:33   좋아요 0 | URL
축하합니당당당~syo님! 좋은결과 있기를

syo 2018-07-30 22:14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님 감사합니다 ㅎㅎㅎ
묵은 짐 내려놓은 기분이네요.

붕붕툐툐 2018-07-30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저도 침묵밖에 떠오르는게~ 그래서 보자마자 바로 읽고 싶은 책으로 찜했습니다. 전 침묵 읽고 진짜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syo 2018-07-30 11:33   좋아요 0 | URL
저는 침묵을 읽지 않았지만, 아마 많이많이많이 다른 느낌이실거예요 ㅎㅎㅎㅎㅎ

몰리 2018-07-30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재밌습니다.
장편 확장 부탁드립니다! 마루의 삶.

syo 2018-07-30 13:21   좋아요 0 | URL
심장사상충으로 마무리된 그의 기이한 삶...

붉은돼지 2018-07-30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뭐 침묵에 대해서는 침묵입니다만
그 왜 가토 기요마사하고 고니시 유키나가 하고 등장하는 숙적 이라는작품도 있잖아요
뭐 역시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언제 한번 읽어봐야지 생각은 하고 있는데
이게 품절이라서 ㅋ

syo 2018-07-30 13:23   좋아요 0 | URL
숙적 그것도 어쩐지 불교와 기독교의 한판 승부 같은 느낌이네요.
이번에도 한번 읽어봐야지 하지만 언제 읽을지는 미정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요....

2018-07-30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30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07-30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무슨 시험 있었는지 모르지만,
애쓰셨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좋은 결과 진심으로 매우 많이 기원합니다. ^^

syo 2018-07-30 22:0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북다님 ㅎㅎㅎ
이제 다시 북다님에 뒤지지 않는 알라딘 빨강이로 열심히 활동할까 하구요. 그게 되겠습니까만은 ㅎㅎㅎ

모운 2018-07-31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나는 읽었는데 시오님이 안 읽은 책을 알게 되면 짜릿한 기분이 듭니다.🤪 영화도 책도 흥미롭게 보고 읽은 작품입니다.

syo 2018-07-31 15:28   좋아요 0 | URL
그게 뭐라고요. 짜릿할 것까지야 있을까요. 하여간 추천하신대로 침묵은 조만간에 읽어볼 작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