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는 다른 마음으로 영원히 기다리며

 

요 몇 번을 연이어 어딘지 구슬픈 이야기만 쓴 것 같아 억지로 쥐어짜서라도 이번엔 유쾌한 글 한 번 만들어 보자는 마음이었는데, 말도 안 되는 일격을 맞고 넋이 나가 어제는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이라도 이 모든 게 장난이었다며 낙낙히 웃는 얼굴로 그가 나타난다면, 장난 할 게 따로 있지, 따위의 닦달 한 마디 없이, 정치인으로서의 자질 운운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조금의 마모도 없이, 계속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도덕성은 자질로서는 필수적일지 모르나 무기로서는 최악이다. 도덕성의 칼날을 받아내야 할 자들은 애당초 도덕성이 없기 때문에 도덕성이 없다는 공격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성의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얕게 베여도 치명상을 입는다. 누구보다도 먼저 스스로 크게 수치스럽다.

 

지난 주말, 친구와 밥을 먹으며 장난처럼 말했다. 일베 놈들 분명히 노회찬도 노무현처럼 부엉이 바위로 달려가라는 댓글을 달고 있을 거라고. 말이 가볍게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개새끼들, 을 추임새처럼 붙이며 우리는 얕게 웃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믿어야만 하는구나, 체념할 때쯤, 흩어졌던 말들이 무겁게 돌아와 내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부끄러웠다. 죄책감에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내가 한 말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추호도 그런 기대를 한 적이 없었더라도, 밥 먹는 자리에서 마치 반찬처럼 타인의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이 악한 일이 아닐 수 있을까. 바닥에 뒹구는 심장을 줍는데 만 하루가 들었다. 나는 나쁜 인간이었다.

 

나와 정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종종 내가 가장 좋아할 것 같은 정치인으로 그를 지목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남들이 아는 만큼만 알았고, 그가 대통령이 되거나 그가 속한 당이 여당이 되는 일을 이번 생애는 보기 힘들 것이라고 남들이 생각하듯이,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그에게 가지고 있는 애착의 크기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그저 가끔 뉴스나 방송을 통해 그의 말을 읽고 들으며 내 나름대로 살았다. 그는 그저 멀리서 들려오는 말이고 소식이며, 얼굴 마주할 일이 없는 정의고, 이루어질 일 없는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언제나 그랬듯, 잃고 나서야, 앓고 나서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아픔의 크기를 통해 쓰라리게 깨닫는다.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할 참 나쁜 습관이다.

 

내 다음 세대쯤 진보 정당이 다수당이 되고, 진보 정당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면, 그 안에 그의 공로가 과반일 것이라는 정도의 막연한 기대만 품고 있었다. 늘 검박했고, 유쾌했고, 날카로웠고, 정의로웠다. 나는 그의 적들조차 그것을 인정했으리라고 믿는다. 그의 적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저 사람이 그랬다면 안 그랬을 놈은 단 한 명도 없겠군,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으리라 믿는다.

 

빈소를 다녀올까, 그래도 될까, 늦은 밤까지 친구와 한참을 고민했다.

 

 


비옥한 땅에서건 척박한 땅에서건 사람들이 살고꿈꾸고고뇌하는 가운데 조금 특별한 일을 실천하려 했던 기억이 한 땅을 다른 땅과 다르게 하고내 몸을 나도 모르게 움직이게 한다땅이 그 기억을 간직하지 못한다면이 나라 사람이 이 땅에서 반만년을 살았다 한들한 사람이 이 땅에서 백년을 산다 한들단 한순간도 살지 않은 것이나 같다.

황현산밤이 선생이다


 선

 구태의연한 사람의 선의는 악의와 다름이 없을 때가 더러 있고애써 구태의연하지 않으려는 선의는 위선과 닮아 보일 때가 더러 있다가장 자연스러운 선의만이 오해 없이 누군가에게 가닿지만 쉽게 피부로 느껴지질 않아서오래오래 살아가며 전달할 수밖에 없다.

김소연한 글자 사전


왜 어떤 일들은 구름이 모양을 바꾸는 것처럼 서서히 일어나지 않고 단 한순간에 완전히 빛깔을 바꾸어버리는 것일까따뜻한 기운을 품은 은은한 복숭앗빛 하늘이 왜 저토록 사나운 핏빛으로 변해버렸을까좀전까지 잘 어울리던 한 쌍의 커플이 왜 이리 급작스럽게마주치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끔찍한 악연으로 방향을 바꾸는 걸까왜 그런 일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갑자기 일어나는 걸까왜 어떤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고 내뱉은 한마디가 다른 어떤 사람을 다시 벗어나지 못할 수렁으로 몰고 가는 걸까.

최정화내가 그렇게 늙어 보입니까


 그는 자유롭고 안정된 대지의 시민이다그것은 그가 사슬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그 사슬은 그에게 현세의 모든 공간을 자유롭게 부여하기엔 충분히 길지만어떤 무언가가 그를 대지의 경계선 너머로 낚아채 갈 수 없을 만큼만 길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유롭고 안정된 천상의 시민이가도 하다왜냐하면 그는 또한 비슷하게 측량된 천상의 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지상으로 가려고 하면 천상의 올가미가 그에게 제동을 걸고또 하늘로 가려고 하면 땅의 올가미가 그를 붙잡는다.

프란츠 카프카죄와 고통희망 그리고 진정한 길에 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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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7-24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syo 2018-07-24 22:34   좋아요 1 | URL
아직도 고인이라는 게 잘 실감이 안납니다... 모레 썰전에 스윽 그가 나올 것 같아요..

stella.K 2018-07-25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요님과 같습니다.
우리가 섣불리 정치인들을 믿거나 옹호할 수 없기에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고인만큼은 믿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하던차에
이런 일을 겪게되서 참 뭐라 할 말이 없더군요.
그래도 저는 설마 부엉이 바위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정치인들이 감방 가는 건 그런가 보다 하는데
이렇게 죽는 걸 보면 이 나라 정치가 어느 정돈지 가늠하기가 어렵겠다 싶습니다.
요즘 정치에 뜻을 두는 젊은이들이 나오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생각하셨다면 한 번 다녀오시지 않구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syo 2018-07-24 22:36   좋아요 0 | URL
정치고 뭐고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걸 보니, 정치인으로서보다 자연인으로서의 노회찬을 더 사랑하였나 봅니다.

어제만큼 슬프진 않지만 여전히 무기력한 오늘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