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적으로 슬퍼하기
내상은 거의 치료되었다. 안부를 묻는 친구에게, 이제는 슬프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다만 소진되었을 뿐. 사흘 만에 슬프지 않게 된 것은 사랑이나 슬픔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만 슬퍼하는 데도 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슬픔의 체력.
세상은 우리를 쉬지 않고 슬프게 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커다란 슬픔이 있는가하면, 내게 포착되지 않은 다른 크고 작은 슬픔들 역시 어딘가에서 내 눈길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세상은 슬픔의 거대한 채석장이다. 슬픔의 매장량이 수십 억 인간을 든든히 먹일 만하다.
그럼에도 슬픔의 체력은 몸의 체력과는 달라서, 많이 슬퍼할수록 많이 슬퍼할 수 있게 되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 원리를 알기가 참 어렵다. 이런 슬픔을 겪고 나면 저런 슬픔에 무디어지는가 하면, 저런 슬픔을 겪고 나면 이런 슬픔에 예민해지기도 한다. 한 슬픔과 오래 뒤엉켜 울었던 기억이 다음 슬픔을 일찍 되돌려 보내는가 하면, 오래 물러나지 않는 슬픔의 가면 뒤에서 지난 슬픔의 얼굴을 발견하기도 한다.
생각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것들은, 내가 지켜줄 수 없는 것들은, 사랑하되 그 안에 들어가지는 않기로 하자고. 내 힘으로 죽음을 막을 수 없는 정치인이나, 실점을 막을 수 없는 LG트윈스 같은 것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또 사랑하되, 그것과 하나가 되지는 말자고.
나는 프로슬픔선수가 되고 싶지 않다. 내가 제아무리 슬픔을 잘 다루게 된들, 그 플레이를 보고 환호할 팬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슬픔을 전시하지 않아도, 세상은 이미 넉넉히 슬프다.
+ 덧
A : 야, 혹시 내한테 냄새 같은 거 안 나나?
B : 냄새? 무슨 냄새?
A : 글쎄, 뭐라도. 더우이까네 땀 냄새 날 수도 있고, 맨날 처박혀 있으이까 아저씨 냄새 같은 거 날 수도 있고.
B : (몇 번 킁킁거리더니) 잘 모르겠는데?
A : 진짜가?
B : (다시 한두 번 킁킁거리더니) 안 나는 것 같다.
A : 진짜제? 혹시 내 민망할까 봐 나는데 구라치는 거 아이제?
B : 뭐할라꼬. 안 난다니까.
A : 야, 나중에라도 내한테서 냄새 나면 바로 캐줘야 된데이.
B : 알았다.
A : 망설이지 말고. 이런 거 바로바로 캐주는 게 진짜 친구 아이가. 그런 건 한 개도 기분 나쁠 일도 아이고. 오히려 어데 가가 쪽 팔고 댕기지 말라는 진심 어린 배려라고 봐야지 안 되겠나.
B : 아, 그래, 알았다꼬.
A : 그래, 알았다카니깐 말인데, 니 몸에서 냄새 나는 것 같다.




애도의 시련과 심각한 우울 상태를 비교한 프로이트는 애도가 각별한 존재를 잃어버림으로써 발생하는 우울이라면, 심각한 우울 상태는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의 자아에 대한 애도임을 보여주었다. 애도하는 자가 누군가를 잃은 것이라면, 우울한 자는-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었거나 혹은 그럴 가능성을 보여줬던 존재를 잃음으로써-자기 자신을 잃은 것이다. "누군가를 애도할 때는 세상이 초라하고 공허하게 느껴지지만, 우울증에 빠지면 자기 자신이 초라하고 공허하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이때 애도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고인의 부재를 보상할 만큼 흥미로운 대상들을 찾음으로써 우울을 극복하고 세상 속에 다시 편입될 수 있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는 사랑할 만한 자아, 결코 나타나지 않거나 영원히 사라져버린 자아에 대한 애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아를 천천히든 급작스럽게든 제거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않은 채 자아가 밉상으로 시들어가게 내버려둔다.
_ 프레데리크 시프테,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티는 내 나름의 이론을 터득했다. 내 앞에 주어진 시간을 수천 개의 레고 조각으로 만들어진 아주 기다란 막대라 생각하고, 그 조각들을 열 개 정도씩 뭉뚱그려 하나의 커다란 조각으로 만든다. 그러면 레고 조각의 숫자는 단박에 몇 백 개로 줄어든다. 다시 그렇게 뭉뚱그려진 커다란 조각 열 개를 모아 또 하나의 더 커다란 조각으로 만들면, 레고 조각의 숫자는 몇심 개로 줄어든다. 이제 새로운 레고 조각, 그러니까 시간의 새로운 단위는 원래 시간 단위의 100배쯤으로 농축된, 밀도 있는 것으로 변해버린다. 물론 밀도가 높은 시간을 견디기란, 그렇지 않은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힘들고 지겨웠다. 그렇지만 하나의 레고 조각을 통과하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길고 큰 조각이었건 간에 다 지나가버렸다는 기억만 훈장처럼 가슴에 남을 터였다.
_ 류동민, 『기억의 몽타주』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 문태준
검푸른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들어섰다
감나무를 바싹 껴안아 매미 한 마리가 운다
울음소리가 괄괄하다
아침나절부터 저녁까지 매미가 나무에게 울다 간다
우리의 마음 어디에서 울음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듯
매미가 나무의 어느 슬픔에 내려앉아 우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무도 기대어 울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는 이렇게 한번 크게 울고 또 한 해 입을 다물고 산다
_ 문태준, 『가재미』
손님 : 책이 그렇게 다양하고 충실하게 갖춰져 있진 않네요.
직원 : 저희 가게는 만 권이 넘는 책을 보유하고 있는데요.
손님 : 그래요? 그런데 제가 쓴 책은 안 갖다 놓으셨잖아요!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_ 젠 캠벨 외, 『그런 책은 없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