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정경湖畔情景 2

 

 

1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너는 매일매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우리가 어떤 용기를 내어 서로 손을 잡았는지 손을 꼭 잡고 혹한의 공원에 앉아 밤을 지샜는지나는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우리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되뇌고 되뇌며 그때의 표정이 되어서나는 언제고 듣고 또 들었다곰을 무서워하면서도 곰인형을 안고 좋아했듯이그 얘기가 좋았다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게 좋았다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귀여운 병아리들이 무서운 닭이 되어 제멋대로 마당을 뛰어다니다 도살되는 것처럼그날의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가 없어져버리는 게 좋았다먹다 남은 케이크처럼 바글대는 불개미처럼그날의 이야기가 처음 만났던 날을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게 좋았다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혹한의 공원에 앉아 떨고 있을 것이 좋았다우리가 그곳에서 손을 꼭 잡은 채로 영원히 삭아갈 것이 좋았다.

김소연다른 이야기」 전문 

 

조용히 부를수록 더 좋은 이름이 있어, 두 작은 목소리는 나란히 앉아 조용히 조용히 점점 더 조용히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불렀다. 이름이 작아질수록 세상이 커지고, 세상이 커질수록 들리는 것이 많아져 두 작은 목소리는 조용한 표정으로 열심히 열심히 더 열심히 자신의 이름을 듣고 또 들었다. 부르는 이름이 조용히 조용히 멀어지고 불리는 이름이 조용히 조용히 가까워지더니 가운데에서 딱 만나 이름이 이름으로서 이름을 휘감고 이름이 되어 다시 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이름은 열심히 작아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모든 것이 들렸고, 두 목소리는, 어느덧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르고 있던 두 목소리는 이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고 알 수 없이 좋았다. 세상이 열심히 작아져 하나의 이름으로 수렴하였다. 목소리는 그 이름이 누구의 이름인지 무엇의 이름인지 이 세상의 이름인지 알 수 없었다. 목소리는 이제 말할 수가 없었고 말할 수 없이 좋았다.

 

 

 

2


 

 ”책이 이해하기 어려워서 그럴 겁니다.“ 입에서 이 말이 새어나왔을 때베케트 박사는 좀 더 완곡한 표현으로 돌려서 말해야 했던 것은 아닌지 잠시 후회했다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바람이 새는 소리는 내도 고래고래 화를 내기에는 공기가 충분치 않은 폐로 마르크스는 으르렁거렸다. ”객관적인 학문적 사실을 제시하는데 셰익스피어나 하인리히 하이네의 언어는 필요 없소.“

일로나 예르거두 사람, 136

 


 ”정말로 제 책을 읽으려고 해 보신 것이오?“ 마르크스의 기분이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았다.

 ”시도해 보았습니다실패했지만요.“

 ”선생이 말한 것이 정말이라면그건 내게 수수께끼요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 어느 대학에서 공부하셨다고요?“

 ”케임브리지입니다.“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한 사람이 내 분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요도대체 뭐가 그렇게 어려운 걸까요어쩌면 선생에겐 인내심이 부족한 걸지도 모르겠어요영국인 벌레 수집가가 심지어 독일어로 읽고도 이해한 책이란 말입니다!“

같은 책, 137

 

조금 똑똑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무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은 스스로 약간 불안하기도 하다. 실은 그저 내 설명이 후진 것은 아닐까? 알고보면 내 말솜씨가 물솜씨는 아닐까? , 이 내가 여기다가 설명까지, 말까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 하는 생각. 그런 경우, 136쪽의 마르크스처럼 대응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하지만 정말 드물게 진짜 천재들을 만나면, 그들이 범재들의 범재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아니, 이게 어렵다고? 이 명백한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 도대체 왜? 천재들은 137쪽의 마르크스처럼 대응한다. 어려운 게 아니라 당신이 들을 마음이 없는 거라고. 136쪽의 마르크스는 분노하지만 137쪽의 마르크스는 좌절한다. 범재가 천재를 이해하지 못하듯, 천재도 범재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영국인 벌레 수집가는 찰스 다윈을 말하는 것인데, 실제로 마르크스는 <자본> 1권을 다윈에게 보냈다. 당시는 새 책의 낱장이 붙어서 출간되는 시절이라, 읽는 이가 도구를 이용해 직접 책장을 갈라야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다윈의 서재에 꽂힌 <자본>은 다윈의 사후까지도 104쪽까지만 책장이 갈라져 있었다고 한다. 다윈도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고 syo처럼, <자본>을 읽다가 집어던진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그 사실을 끝내 모르고 죽었다.

 

이 오해는 두 가지 사실을 함축한다. 첫째, 다윈이 마르크스의 혼란과 좌절을 부추겼다. 마르크스는 당신 생각에 조금의 노력만 투자하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자본>이 읽히지 않는 것을 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력이 아니라 의지력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건 혁명가에겐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 어느 한 분야에서 역사의 물길을 뒤바꿀 정도의 천재이더라도, 다른 분야에선 서글픈 범재일 수가 있다. 뒤집어 말하면, 만사에 범재거나 둔재로 보이는 syo조차 어쩌면 어딘가 천재적인 구석을 지니고 있으며, 단지 발견을 못해 비루해 보인다는 것! 와아.....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로 힘이 나네..... 힘이..... 와아.....

 

 


  전개된 가치형태에서는 '교환 가능성'이 '등가성'을 나타내지만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등가성'이 '교환가능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전자에서는 한 상품이 다른 상품으로 교환된다는 사실이 두 상품이 등가적임을 말해주지만후자에서는 일반적 등가물로 표시될 수 있어야 해당 상품이 다른 상품과도 교환될 수 있는 상품임을 인정받는 것이죠도시에서 어울려 살다 보면 시민이 되는 줄 알았는데시민권이 있어야 시민으로서 도시에서 어울려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할까요.

  이런 게 바로 표상권력대표권력입니다대표를 통해 내 의사를 표현한다고 생각했는데이제는 대표가 표현해주지 않으면다시 말해 대표를 통해 표현할 수 없으면내게는 의사가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음을 알게 된 거죠상품들은 상품어로 말한다고 했는데요이를테면 저고리는 아마포로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그런데 이제 이 언어구조가 그 자체로 권력구조라는 걸 깨닫게 된 거죠상품은 자기 가치를 말하기 전에 사회적인 것에 순응해야 합니다일반적 가치형태는 상품에게 '상품으로 인정받으려면 순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한마디로 가치형태는 주권형태입니다그것은 복종과 순응을 요구하는 명령체계입니다나는 앞서 '가치를 가진 사물'을 상품이라고 불렀는데요이제는 약간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치를 인정받은 사물'이라고요가치를 주장하기 이전에 가치를 '인정받아야합니다상품이 된다는 것은 순응을 강요받는 것복종해야 한다는 것즉 폭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고병권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121-122

 

친절함을 모르는 남자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고 한다.) "상품들이 가치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가치대상성)은 순전히 이 물건들의 '사회적 현존'에 의거하기에, ...... 결국 상품들의 가치형태는 사회적으로 타당한 형태여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걸 고병권 선생님은 저렇게 풀어낸다. 이러니 syo가 입문서 빠돌이를 벗어날 수가 없다.

 

 

 

3



평양에서 삼수군으로 쫓겨날 즈음 백석에게 시는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시인으로 살아남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한 인간으로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백석에게는 더 시급했다해방 이후 백석의 북한에서의 작품 활동을 단순히 예술성을 망각하고 시를 정치도구화한 파렴치한 행위로 몰아붙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우리는 백석이 북한에서 아동문학논쟁을 통해 문학의 자율성과 미학주의를 주장한 마지막 시인 중 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당의 지도 아래 놓인 북한의 문학을 조금이라도 더 보편적인 미학의 논리도 되돌려놓겠다는 그의 문학주의는 결국 꺾일 수밖에 없었다.

안도현백석 평전, 413

 

오늘이라는 것은 언제건 어디서건 육박하는 물건이고, 그 속에서는 그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어려운 물건이고, 언제나 내일에게 논박당하는 물건이다. 주어진 오늘을 살아야 했던 백석은 어떤 백석일 수 있었으며, 어디까지 백석일 수 있었으며, 또 어디까지 어떤 백석이어야 했을까. 하물며 syo는 어떤 syo일 수 있으며, 어떤 syo여야 할까. 오늘의 syo는 어디까지 syo일까. 세상은 어느 언저리까지 syo를 침투하고, syo는 어디까지 양보하는 척 양도하며 살고 있을까.

 

흰 바람벽을, 치고 싶다.

 

 

 

-- 읽은 --



고병권,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안도현, 백석 평전

김소연, i에게

일로나 예르거, 두 사람

 


-- 읽는 --



앤디 메리필드, 아마추어

앤서니 스토, 공격성, 인간의 재능

오은, 나는 이름이 있었다

찰리 맥도넬, 웃기는 과학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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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2-19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서재의 달인 선정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syo 2018-12-19 22:02   좋아요 1 | URL
앗! 진짜네요 ㅎㅎㅎㅎ
서니데이님도 축하드립니다! 언제나 알라디너들의 가장 따뜻한 이웃이신 서니데이님 매일 쓰시는 글 보며 올해는 따뜻하게 잘 넘겼네요.

연말 잘 보내시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2018-12-19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19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나무 2018-12-19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어떤 분야의 천재일까. 오늘은 이 생각으로 잠 못들 것 같네요. ㅋㅋ
눈감기 전에 나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싶다아~~~~~~~~~


syo 2018-12-19 23:46   좋아요 1 | URL
저는 요즘 잠들기 천재......ㅋㅋㅋㅋ
 

 

눈 속의 눈

 

 

1

 

밤이 검은 게 아니라 검정이 밤을 닮은 것이다. 검어서 밤이라 부르는 게 아니라 어둠이 검정을 낳은 것이다. 그 고장에서만큼은 그랬다. 겨울이 깊어지면 밤의 명암도 깊어지는 고장의 겨울밤은 묻어날 듯 진한 어둠으로 사방을 둘러쳐 오직 이 겨울 속에 밤만이 나와 함께 있음을 느끼게 한다. 눈 내리지 않는 밤이면 세상은 검정 속에 깊이 돌아앉고 고요하게 나는 외로웠다. 눈 내리지 않는 밤이면.

 

눈에 눈 덮는 소리에 잠을 깨어 본 사람은 안다. 알고 보면 눈이 얼마나 떠들썩한 녀석인지. 허공은 눈송이의 놀이터, 눈은 야행성 동물이다.

 

밤 닮은 색을 검다고 부르는 고장의 눈 내리는 겨울밤이면 다시 온 세상이 내 쪽으로 돌아앉아 내리는 눈을 나와 함께 본다. 눈 내리는 모양을 말할 때, 왜 펑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나 펄펄 무언가 끓어오르는 소리를 쉽게 빌려다 쓰게 되는지 배우는 밤, 눈은 소리로 내린다. 밝은 소리로 내린다. 구름 반대편에 우주는 펼쳐져 있다. 눈송이보다 많은 별들이 우주에 매달려 저마다 목소리를 내며 흔들리다가 지금, 하나쯤, 두어 개쯤, 백만 천만 개쯤 되는 별들이 열매처럼 구름 위로 퐁당 뛰어들었을 것이다. 깊은 머그컵에 가라앉아가는 각설탕처럼, 별들은 녹고 번지고 흩어져 희고 가벼운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눈은 이렇게 밝고 눈 내리는 밤은 또 이렇게 밝고 왁자지껄하여 옅은 잠을 두드려 쫓아내는 것이다. 나는 잠도 잊고 밤도 잊고 어둠도 잊고 어두움도 잊고 외로움마저 잊은 채 깨어나 앉아 하얗게 창문을 두드리는 별의 치어稚魚들을 보았다. 하릴없이, 속절없이, 열없이, 덧없이 보았다. 스노우볼 속에 포획된 눈사람처럼 밤에 포획되어 흔들림 없이 나는 보았고 흔들리는 것은 밤과 시간뿐이었다. 페르세우스 이전에 메두사와 맞서야 했던 모든 전사들이 그랬듯, 나는 눈 내리는 밤과 함께 이대로 굳어버리기를 겁내는 한편 이대로 굳어버리기를 욕망하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은 하염없이 밤을 흔들고 밤은 한없이 시간을 흔들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커다란 짐승의 입 속으로 조금씩 잠겨들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밤의 머리칼은 수백 마리 뱀이었다. 나는 무엇인가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게 무엇인지 평생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밤이 수억 송이의 밝은 이빨로 내 목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찰나, 갑자기 내 손을 잡아채는 너의 손이 있었다. 그 손은 따뜻하다기보다는 뜨거웠고 나는 네 손에 크게 데었다. , 눈 열라 오네. 나는 놀라 너를 바라보았지만 너는 눈 내리는 밤을 내다보고 있었다. , 이거 다 치워야 되겠네. 시발, 잘하면 새벽에 깨울 수도 있겠다. , 조금이라도 더 자. 내 눈은 그치지 않고 내리는 눈을 보기를 그치고 네 눈을 보았다. 네 눈은 밤도 별도 어둠도 외로움도 없는 그런 눈이었다. 아름다울 것도 보잘 것도 없는 그런 눈이었다. 그럼에도 새벽이건 아침이건, 내일이건 모레건 치워지지 않을 눈이기도 했다. 그런 눈을 다시 감고 너는 돌아누워 잠을 청했다. 별의 치아가 여전히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침이면 너는 다시 눈을 뜨고 나와 함께 저 별의 이빨들을 쓸어내 길을 만드는 일을 할 것이다. 둘러보니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감긴 눈이 들숨과 날숨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모아 고작 백 개쯤 되는 눈을 뜨고 수천억 개의 눈을 물리치러 나갈 것이다. 중과부적이었다. 이기지 못할 싸움이었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잠깐 잡힌 손의 뜨거움에 기대어 또 하루를 건너가야 하는 것이다. 다시 해가 지면 밤은 여전히 밤이고 나는 여전히 외로울 것이었다. 끝나지 않을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한번 더, 내가 아는 수만 개의 눈들을 한번만 더 만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눈들을, 저 눈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오래, 길게, 꼼짝 않고 들여다 본 적은 있었는지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네 개의 눈으로 나란히 앉아 137억년 동안 내린 무한한 눈들을 함께 마주보고 싶은 사람이 저 밖 어딘가에서 지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렇게 그 밤, 나는 눈과 눈을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버리고 대신 눈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모포를 끌어올리고 누워 눈을 감았다. 내가 눈을 감으니 눈도 눈을 감았다. 눈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저 눈들이 코를 고는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꿈처럼 아침은 왔다.

 


늙은 거미집처럼이라고 적는다.

 

버려진 집에 뒹구는 이 빠진 종지처럼이라고

 

서리 덮인 새벽 둑방 길처럼

 

섣달 저녁의 까마귀처럼이라고 적는다.

 

폐분교의 엉터리 충무공 동상처럼


변두리 차부의 헌 재떨이처럼이라고

 

찾는 이 없는 옛 우물과

 

오래전 버려진 그 곁의 수세미처럼

 

문을 닫고 힘없이 돌아서는 처용이처럼이라고 적는다.

 

선득 종아리에 감기다 가는 개 울음소리처럼

 

혼자 깨어 누는 한밤중의 오줌처럼이라고 적는다.

 

 

 

외롭다고 쓰지 않는다 한사코.

김사인옛 우물전문 

  

마음이 무겁고 흔들릴 시간이 없다남겨진 사랑들이 너무 많이 쌓여 있다그걸 다 쓰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김진영아침의 피아노 

 

  형을 만나기 전 내게 미지는 언제나 기쁨이었어하지만 나는 이제 그것을 두려움 없이 한 껏 빨아들이기란 불가능하리란 걸 느낀다아직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너무나 많지만원한다고 꿀 수 없는 꿈처럼형도 그러니까 이제 그런 사람이 된 것이지요그럼에도 당신 생각으로만 가득한 이곳에서 나는형이랑 만나는 꿈을 꿨어요당신의 없음이 아니라 있음으로 가득찬 이 공간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돌이켜보고 겹쳐보고후회해보고떠올려보고상상해보고기억해보는 그 모든 것 중에 내가 단 하나만 할 수있다면그 무엇보다 형을 그저보는꿈을 꾼다고.

  딱 한 번만 더 형이 보고 싶었다.

  더는 순환하거나 반복되지 않는자기 지시적이지도 않을 순정한 다음의 풍경이 보고 싶었다.

  어떤 모습이든어떻게든나는 그것이 보고 싶었다.

김봉곤라스트 러브 송


 

 

2




다윈 에이블링 씨저는 마차 선두에 서서 그 움직임을 팽팽하게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과는 거리가 멉니다물론 자유로운 사고를 철저하게 옹호하는 사람이기는 합니다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과연 어떤 효과가 있을지 의문스럽소사고의 자유를 성취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안은 인류의 머릿속에 하나둘씩 차근차근 불을 켜 가는 방식인 것 같소학문의 진보를 통해서 말이지요무신론을 위한 프로파간다에 내가 이용되는 것엔 동의할 수 없고바로 이것이 선생의 부탁을 거절하는 이윱니다.

엠마(다윈의 부인) : (끄덕끄덕암만그래야 내 남편이지.)

에이블링 무엇이 그렇게 겁이 나시는 겁니까선생님은 이제 잃을 것이 없지 않습니까유명한 분이고세계는 선생님의 의견을 경청합니다.

- 다윈 왜 그렇게 공격적입니까그리고 내가 무신론자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선생의 착각이에요.

- 에이블링 선생님이 무신론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 다윈 나는 불가지론자요.

- 에이블링 그건 그냥 무신론자임을 좀 더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이잖습니까!

- 다윈 용감하시군젊은이선생의 생각을 한번 끝까지 밀어붙여본 적이 있습니까나는 세계의 시작에 대해 어떤 특정한 것을 기대하도록 강요받는 느낌이 든다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의 태초에 관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기 때문에 나는 나를 오히려 유신론자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요.

- 굿윌(교구의 사제) : (진짜당신이 유신론자라니나도 몰랐는데......)

- 마르크스 : (이 개새끼아내와의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해 자기가 해 온 모든 업적을 부정하고 앉았군신은 인간이 만든 것이오!

- 뷔히너 : (무기력하게포이어바흐군요......

- 다윈 신사 여러분나는 소위 원숭이에 관한 질문을 던져 그 질문에 인류를 모욕하는 방식으로 답한 사람일 뿐이라고 평가절하 되는 일을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그리고 인간에게서 신을 앗아갔다는 이유로 교회의 가치를 수고하는 사람들에게 반역자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또 바로 그 때문에 좌파들에게는 온갖 찬사를 받는 것도 이제는 고통스러워요.

- 에이블링 하지만 바로 그 반역이 선생님이 하신 일 아닙니까그저 그 일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으신 것 아닙니까어쨌거나 여기서 빼앗았다는 말은제게 물으신다면적합한 단어가 아니긴 하지만요인류에게서 뭔가를 빼앗아 가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해방시키신 것이잖습니까저한테 물으신다면요.

- 다윈 하지만 난 선생에게 묻지 않았소그리고 그 외에도 선생은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서 인정하기까지 했어요내가 보기에 무신론자들의 논리는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과 똑같습니다충분한 토론 과정을 생략해 버리고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배제하고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을 주장하고생각을 전파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굴지요이 과정에는 도대체 조금의 겸허함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오?

- 마르크스 : (하아아아품)

- 에이블링 : (부들부들)

- 엠마 : (이 양반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쌈닭이 되었지.....)

- 굿윌 왜 점점 어두워지지? (갑자기 쓰러지며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다.)

일로나 예르거두 사람』 244-247쪽을 가지고 syo가 극형식으로 재구성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음이 확실한 어느 저녁 식사를 가정하여 창조해 낸 정밀한 시궁창이다(책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퀀스의 갈등 국면이요). 다윈의 거친 생각과, 엠마의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마르크스.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그 와중에 기절하는 사제 하며. 기절하는 사제의 저 대사는 아무리 봐도 절창이다. , 왜 점점 어두워지지? 라니.....

 

 

 

3



 

까르띠에도 속수무책이었다그는 죽은 선원을 해부하라고 지시했지만 끔찍하게 변한 내부 장기에서 알아낼 건 아무것도 없었다까르띠에 자신은 건강했다그러던 어느날 그는 숲 속을 산책하다가 한 인디언을 만났는데몇 주 전만 해도 아팠던 인디언이 지금은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까르띠에가 어떻게 회복했느냐고 묻자 인디언은 모든 질병을 낫게 해준다는 사철나무에 대해 이야기했다인디언은 이로쿼이어로 '아네다'라는 나무의 가지를 까르띠에에게 가져다주었다까르띠에는 인디언이 알려준 대로 나뭇가지를 차로 끓여 배의 병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처음에는 선원들 대부분이 인디언의 차를 마시지 않으려 했다결국 2명의 자원자가 나서서 차를 마셨는데 몸이 금세 좋아지는 것을 느꼈고두세 번 더 차를 마시고는 병이 완전히 나았다까르띠에는 프랑스 의학부의 가장 유명한 박사들이 1년 동안 처방한 온갖 약제보다 일주일 동안 마신 나무 차가 훨씬 더 효과가 컸다는 기록을 남겼다그는 거의 모든 선원을 구할 수 있었다선원들은 혹독한 캐나다의 겨울도 이겨냈다까르띠에는 효과 높은 약재 덕택에 5월에 닻을 올렸고추장 돈나코나를 포함해 이로쿼이족 무리를 납치해 프랑스로 데려갔다프랑스에서 이로쿼이족은 곧 병을 앓다가 다시는 고향을 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옌스 죈트겐비탈리 콘스탄티노프교양인을 위한 화학사 강의

 

제목이 저래서 독자들의 부당한 외면을 받을까봐 걱정이다. 아무래도 과학책은 그야말로 많이 보는 사람들은 많이 보고, 조금 보는 사람들은 셀럽급 과학자들의 책 위주로 보고, 안 보는 사람들은 아예 안 보기 때문에. 아직 읽는 중이라, 굉장히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지 판단하기에는 이르지만, 달아놓은 타이틀만큼이나 책 자체가 무미건조하지는 않다.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운운하는 시리즈에 비해서도 그다지 지루하지 않다. 아닌 듯 은근 시니컬한 저런 서술을 보면 알 수 있으시겠지만, 독후 1시간 안에 팔 할이 소실되고 마는 그런 기계적인 지식을 기계적으로 나열하는 과학책은 아닙니다.

 

 

 

-- 읽은 --



채호석, 안주영,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2

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

장윤석, 전공이 보이는 미분적분학

이다혜,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 읽는 --


일로나 예르거, 두 사람

이기원, 운동 미니멀리즘

옌스 죈트겐, 비탈리 콘스탄티노프, 교양인을 위한 화학사 강의

박이문, 나의 문학, 나의 철학

김소연, i에게

이진오, 밥벌이의 미래

찰리 맥도널, 웃기는 과학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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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12-17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래 불렀잖아요...

다윈의 거친 생각과, 엠마의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마르크스.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syo 2018-12-17 17:57   좋아요 0 | URL
알아내시다니 세대가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ㅎㅎㅎㅎㅎ

stella.K 2018-12-17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남자가 이렇게 시적입니까? 흥뿡칫~

그러고 보니 <웰컴 투 동막골>이 생각났습니다.
장진 감독이 눈을 팝콘에 비유하잖아요.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전 이 정도 밖에 생각이 안 나던데...ㅠ

syo 2018-12-17 18:26   좋아요 1 | URL
눈이 왔거든요.
제가 멍뭉이과라 그런가 눈 오면 신나서 깡깡 짖습니다ㅎㅎㅎㅎ

스텔라님은 멍멍이과가 아니신가 보죠 뭐 ㅎ

stella.K 2018-12-17 18:42   좋아요 0 | URL
멍뭉이...ㅎㅎㅎ
맞습니다. 저 멍뭉이꽈 아녀요.ㅋㅋ

아, 그런데 좋아할만도 했겠습니다.
거기 대구잖아요. 대구 웬만해서 눈 안 오잖아요.
그런데 짖기까지...?!ㅋㅋㅋ

syo 2018-12-17 18:4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달이 뜨면 개가 된다는 전설 속의 멍뭉소년처럼...

stella.K 2018-12-17 18:47   좋아요 0 | URL
달이 뜨면 늑대되는 거 아닌가?ㅋㅋㅋㅋ

syo 2018-12-17 18:48   좋아요 1 | URL
걘 늑대소년이구요. 이쪽은 멍뭉소년. 개가 됩니다. 보름달이 뜨거나...... 술을 마시면....
 

 

빌런, 백석, 기역

 

 

1


 

"빌런은 왜 태어나는가비대한 인정욕구를 가진 히어로가 부족한 슈퍼파워를 긁어모아 폭발시키려다 보니 어둠의 길로 빠져 버리고 마는 거야충분히 뜨거운 불씨는 로켓을 우주로 날려 보내지만어중간한 불씨는 성층권에 가지 못하고 떨어져 땅 위를 불바다로 만드는 거라고."

임태운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syo가 살며 만난 수많은 히어로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슈퍼파워를 입으로(혹은 키보드로)만 알려주었다. 그들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갈라 칠 수 있겠다.

 

1. 내가 인마, ? 지금은 좀 찌그러졌어도 응? 고생대 때는 인마, 내가 바다를 주름잡은 몸이야 내가, 알아? 와나, 진짜 그땐 완전 내 세상이었는데. : 삼엽충형

2. 내가 시대를 잘 못 만나서 이렇게 찌그러져 있지만, 언젠간 봐라, 이거 내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만 빵 터지면, 와나, 진짜 그땐 완전 나 없인 세상이 돌아가질 않을 걸? : 18차산업혁명형

 

안타깝게도 그들 중 누구도 액션으로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업적도 포텐셜도 syo에게는 그저 두메산골 화전밭 이름 모를 영감님 깨 터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고. 그럼에도 한 듯 안한 듯 하는 화장처럼, 관심이 있는 듯하지만 또 과하지는 않은 듯한 신묘한 맞장구 포인트를 찾아내겠다고 너는 부단히도 노력을 했지, syo, 이 자본주의의 짚신벌레 같은 놈아......

 

어쨌거나, syo를 스쳐간 저 수많은 입히어로들은 다시/결국 히어로가 되었을까? 시민들의 박수소리도 빌런들의 한탄 소리도 들리지 않고 세상은 언제나처럼 언제나 같기만 하다.

 

어쩌면, 그 히어로들은 어딘가에서 자신을 히어로라 믿는 작은 빌런이 되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몰 빌런 인 에브리데이 에브리나잇. 정말 나쁜 놈들은 비일상 영역의 빌런이 된다. 대체로 자기가 히어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서식처를 옮겨와서 정신을 살짝 놓으면, 아차 하는 순간 일상 속 빌런이 되고 마는 것이다. Family hero but Company villain, Company hero but Subway villain, Political hero but Sexual villain.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지.

 

 

 

2


 

 어느 날 백석이 연둣빛깔이 나는 더블버튼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양복은 매우 고급스럽게 보였다어깨를 으쓱하며 그가 말했다.

 “이건 이백원을 주고 맞춘 양복이야.”

 신현중과 허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들은 30원에서 40원 정도면 살 수 있는 양복을 입고 있을 뿐이었다. 2백원이라면 서너 달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돈이었다.

 “역시 자네는 모던보이가 틀림없어.”

 “당장 장가를 들어도 되겠군.”

 백석은 보통 사람들이 한 켤레에 20~30전짜리 양말을 신고 다닐 때에도 1원이나 2원을 줘야 살 수 있는 양말을 신었다.

 “양말이라고 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보이지 않는 것일수록 나는 완벽하게 챙겨야 한다고 생각해그러지 않으면 대체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백석은 빈틈이 없었다깔끔하지 않은 모든 것은 그의 적이었다.

안도현백석 평전

 

백석의 시를 보노라면, 전혀 상상하기 어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시로만 백석을 만난 syo는 백석이 동치미 국수 세 그릇 먹고 툇마루에 앉아 구수하게 방귀를 뀌고, 자고로 막걸리는 나발이지, 이러면서 주전자 부리에 입 대고 들이켜다 친구들한테 등짝 스매싱 당하고,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사람 생각에 눈 오는 밤이면 얼룩얼룩 울기도 하는 그런 인간형일거라 굳게 착각하고 살아왔다. 역시 사람은 알고 볼 일이고, 대충 알고 깝치면 안 될 일이다.

 

 

 

3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김사인바짝 붙어서다전문 


1월에 결혼하는 친구에게 그간의 축가 준비 상황을 검사받는 날이었다. syo가 사는 곳은 가장 가까운 코인 노래방도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하는 오지다. 이래 놓고 광역시라 할 수 있는가, 시장의 멱살을 잡고 싶다. 잡아봐야 아무 소용도 없겠고, 시장이 멱살 잡힐 이유 역시 하나도 없지만백화점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횡단보도를 건너며 syo가 말했다. “, 갑자기 열라 춥네, 바람도 엄청 불고......” 이 대사의 불고가 입 밖으로 나올 때쯤


ㄱ이 보였다. 그건 정말 ㄱ이었다. ㄱ은 언제부터 ㄱ이었는지, ㄱ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어쨌거나 ㄱ이 되고나서부터는 계속 ㄱ일 수밖에 없었던 건지, >조차 되지 않고(못하고) 꿋꿋이 ㄱ이었다. ㄱ이 ㄴ을 밀고 가고 있었다. 무거운 종이를 잔뜩 실은 ㄴ은 이미 ㅂ이 되어있었지만, ㄱ은 끝없이 ㄱ이었다. 터덜터덜 ㄴ의 바퀴가 도로를 긁는 소리가 났고, ㄱ의 윗도리는 깡똥했고, ㄱ의 척추 뼈 가장 아래쪽 부분이 헐벗고 낮은 산처럼 도드라져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 바람맞는 부분이 ㄱ의 해발고도 지점일 만큼, ㄱ은 하염없이 ㄱ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는데, 눈물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입장조차 잘못된 것이 아닐까, ㄱ에게 한 톨도 도움이 되지 않는 눈물로 나 자신의 양심에만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해진 찰나, ㄱ은 ㄱ자 모퉁이를 ㄱ처럼 꺾어 돌아갔다. 이래 놓고 광역시라 할 수 있는가, 시장의 멱살을 잡고 싶다. 잡아봐야 아무 소용도 없겠지만, 시장이 멱살 잡힐 이유는, 정말 하나도 없는가?

 

 

 

-- 읽은 --



장강명 외,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데라치 하루나, 같이 걸어도 나 혼자

송찬호, 10년 동안의 빈 의자

 



-- 읽는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채호석, 안주영, 한국 현대문학사를 보다 2

안도현, 백석 평전

이진오, 밥벌이의 미래

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

이다혜,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옌스 죈트겐, 비탈리 콘스탄티노프, 교양인을 위한 화학사 강의

한강 외, 작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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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13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마무시 쇼님!

syo 2018-12-13 20:1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시는 카알님.

카알벨루치 2018-12-13 20:39   좋아요 0 | URL
거기하고 여기하고 가깝쟎아요! ㅎㅎ 여긴 ㄱ인데...ㅋ

공쟝쟝 2018-12-13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아 재밌네요.. 저도 스요님 글 속의 백석일거라 짐작 생각했었는 데, 그렇단 말이죠 .. ㅋㅋ

카알벨루치 2018-12-13 20:00   좋아요 0 | URL
백석 빌려놓고 먼지쌓기 중 ㅜㅜ

syo 2018-12-13 20:20   좋아요 0 | URL
장난 없죠.
이 양반 지금 남들 손 닿은 데 더럽다고 팔꿈치로 문 열고 난리도 아니에요, 1930년대에 글쎄.

공쟝쟝 2018-12-13 20:23   좋아요 0 | URL
실망!! 열무김치 파김기 치 손가락 쪽쪽 빨아 드실거 같은 시인이라고 생각했는데...

syo 2018-12-13 20:26   좋아요 0 | URL
심지어 여자 문제는 또 엄청 꼬여 있다......

카알벨루치 2018-12-13 20:40   좋아요 0 | URL
정말 백석 같은 느낌이다 대리석 같은 시인~ㅋ

공쟝쟝 2018-12-13 20:44   좋아요 0 | URL
얼굴값은 할줄 알았으니 놀랍지 않사오나, 양말부심에 결벽증이라니! 췟.. 그래도 그의 시는 좋아요.

syo 2018-12-13 20:47   좋아요 1 | URL
양말에 관해서는 저기 등장하는 친구 신씨한테 양말을 극구 권해서 결국 신씨, 그 양말 신고 그에 관한 감상문을 기고했다고 하는데......

시는 역시 백석이죠. 이런 유별난 인물인 거 다 알고 봐도 시는 역시 백석.

카알벨루치 2018-12-13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글 보니 백석 시 말고 평전 읽고 싶네요 ㅎ

syo 2018-12-13 20:48   좋아요 0 | URL
평전 안에도 백석의 유명한 시나 산문들이 거의 전문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ㅎㅎ

비로그인 2018-12-13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ㄱ
칼바람이 부는데....


백석평전, 참.... 좋게? 감동적으로? 아프게? 읽었던 책이네요. 안도현 시인의 팬심이 무럭무럭 느껴져서 재밌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저는 무엇보다 말년의 백석이 그렇게 슬프더라고요. 그 깔끔한 모던보이가, 옷도 그렇지만 시에 있어 그토록 깔끔했던 그가, 바로 그랬기에, 사상과 체제 앞에서 시를 쓸 수 없었을 그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보이지 않는 양말도 신경 쓰는 그가, 시를 어떻게 대충 쓸 수 있었겠어요? 시 앞에서 고개 빳빳이 들 수 있었겠어요?

syo 2018-12-13 22:39   좋아요 0 | URL
전 이제 겨우 자야 만나고 자야 만나면서 박경련한테 목 매고 그러고 있는 대목까지 읽었거든요!

idahofish님 말씀 들으니까, 얼른얼른 읽어 나가야겠다.ㅎㅎㅎㅎ

cobomi 2018-12-14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광역시에 사는데 집 앞이 강과 논과 밭입니다만... 같은 시장일까, 문득 궁금하다가 시장이 누군지 얼굴만 기억나고(이사온 지 얼마 안 돼서,라고 합리화) 이름을 모르겠... 다고 적는 순간 이름도 떠올랐어요.ㅎㅎㅎ

syo 2018-12-14 11:0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시장 이름 한참 모르고 살다가, 선거철 되면 다시 반짝 알았다가, 또 시간 지나면 다시 까먹었다가..... 이름도 까먹은 사람 멱살을 잡으려고만 했다니 무책임했었네요 ㅎ cobomi님 말씀 듣고 검색해서 이름 다시 알아냈습니다. 다시 까먹을 때까지 저는 이제 시장 이름 아는 사람입니다^-^
 

 

호반정경湖畔情景

 

 

1

 

말이 공간을 휘감고 돌아 약간의 말만으로도 따뜻해지는 카페에 앉아 입김처럼 커피를 마시고 옛 사진 속 하얗고 통통한 아이를 보며 웃고 손을 만지고 머리를 만지고 발끝으로 발끝을 만지고 마음으로 마음을 만지고 아무리 둥글게 둥글게 갈아 놓아도 진심은 진심이고 약간의 진심만으로도 눈물은 뚝뚝 흐르고 휴지는 필요 없다며 힘주어 눈물의 허리를 끊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기왕에 눈물이라면 눈물과 함께 슬픔도 증발하라 증발하라 속으로 외치고 어차피 세상의 모든 마음이 부패의 운명에서 달아날 수 없는 것이라면 기왕에 눈물이라면 눈물과 함께 부패도 정지하라 정지하라 속으로 외치다 보니 창 너머엔 저녁이 밤 속으로 저녁저녁 걸어 들어가고 있었으므로 하루치 사랑을 충실히 마치고 다시 마음의 공간을 휘저어 걷어 올린 몇 마디 사랑의 말을 따뜻하게 서로의 목에 감아주며 주차장으로 나선 우리는 휘발유 가격이 가장 싼 주유소를 검색해 한 주치 기름을 먹인 차를 타고 차근차근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어른들의 노래는 대부분 단조로 되어 있다이주 가끔장조의 노래가 있을 뿐이다어쩌다 만들어지는 장조의 노래는 단조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한 역설이거나우리 삶에 스며든손에 쥐고 싶지만 스쳐갈 뿐인 행복의 순간적 포착이다.

목수정월경독서

 

나는 밀려오는 것이 좋았고 짝꿍은 아마도 밀려가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짝꿍이 해변의 작은 모래언덕을 내려가다 잠시 멈춰 서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나는 그런 짝꿍을 뒤에서 바라봤다거기짝꿍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알 수 없으나 나는 나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있는 것이 한 사람의 행복이길염원했다연인을 이루는 두 사람은 이렇게도 다르다해변에서 깨치게 되는 인생의 진리 중에서 가장 그윽한 것은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서로에게 애정을 가진 두 사람에게 그 앎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

김현아무튼스웨터

 

 

 

2



 용건을 마치고 돌아왔더니아오타가 아까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초콜릿 여자애애게 이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괜찮아정말 아까 괴롭힘을 당한 거 아니지?”

 “정말로 아니라니까요.”

 초콜릿 여자애가 조금 화가 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다행이지만여자들끼리 모이면 아무래도 옥신각신하거든우리 슈퍼에서도 아줌마 아르바이트가 고등학생 아르바이트를 들볶는 문제가 많아서 껄끄럽고 질척거리고 그래여자들은 좀 음험한 면이 있잖아!”

 그러면서 혼자 웃던 아오타는 내가 돌아온 것을 보고 대놓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그 표정을 보고 정말 아까 괴롭힘을 당한 거 아니지?”의 괴롭히는 주체가 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임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오타의 바짝 긴장한 얼굴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괜찮니?”

 초콜릿 여자애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이 사람이 괴롭히거나 하지 않았어?”

 아오타가 무슨 말씀을 하시냐며 웃으려고 했는데 나도 여자애도 웃지 않자 다시 얼굴을 굳혔다.

 “다른 사람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악담을 해서 번잡한 일에 끌어들이려고 하는 건 음험하고 껄끄럽고 질척거리는 괴롭힘이니까설마 남자가 그런 짓을 하진 않겠지아이고다행이야안심했어.”

나는 생긋 웃었다.

 “악담이라니요...... 혹시 아까 제가 한 얘기 들으셨어요제가 말한 아줌마는 다른 아줌마 아르바이트들을 말하는 거고요시마다 시는 아직 젊으니까 당연히 괜찮지요.”

 당연히 괜찮아뭐가?

 아오타 쪽으로 돌아선 나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이 미소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괜찮다고괜찮아요사십일 년간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그야 당연히 괜찮죠이봐요, ‘아줌마란 단순히 중년기 이후의 여성에 대한 호칭혹은 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야사전을 보면 그렇게 적혀 있어요. ‘아줌마를 욕이라고 생각하는 건그쪽이 젊지 않은 여자에게는 가치가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이잖아요댁이 사귈 여자를 고를 때라면 그래도 상관없어요나이든 뭐든 댁이 좋아하는 기준에 따라 마음껏 고르라고요하지만 나는 여기에 그냥 일하러 왔어요당신의 그 웃기지도 않은 성적 대상 선정의 장에 나를 멋대로 끌어들여서는 아줌마는 안 되겠다느니 뭐니 생각한다면 불쾌하고 불편하니까 그만둘래요? ‘당연히 괜찮지요라니 뭐가 괜찮아그게 위로랍시고 하는 소리야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래나는 아직 괜찮구나다행이다하고 기뻐할 줄 알았어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당신이 나를 감정해줄 필요 없어요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내가 정하니까.”

데라치 하루나같이 걸어도 나 혼자, 69-71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이 정도까지 대놓고 수준이 낮으며 답 없는 인간은 이제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거지 실제로는 다 멸종했을 거야,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세상을 너무 쉽게 봤지. 오늘만 해도 카페에서 거의 저 수준의 이야기를 큰 소리로 떠드는 남정네 두 명을 뒷자리에 앉혀놓고 커피를 마시자니 비싼 커피 맛이 영 별로였다. 그들은 하루 빨리 결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랬다. 서른 넘은 여자는 순수하지 못해서만나서 결혼까지 가기가 힘들다. 그래서 서른이 안 된 여자랑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좋고,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여자가 서른이 되기 전에 사귀기 시작하면 서른을 넘겨도 결혼할 만은 하다. 어쨌든 그렇게 결혼하려면 하루 빨리 뭐라도 시작해야 한다. 안 그러면 장가를 못 간다.

 

당신들은 안 그래도 장가를 못 가고 그래도 장가를 못 가고 하여튼 장가를 못 갈 것만 같다.

 

 


3



하비 교수는 기득권의 아웃사이더였고(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전문가주의를 떨쳐낸 아마추어였다그는 옥스퍼드라는 타이틀에도 괘념치 않았다또 동료 교수들보다는 대학원생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하비 교수와 나는 제리코 북바인더라는 술집에서 당구를 치거나동네 놀이터 구석에서 그의 딸을 지켜보면서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다(그러면서 교수를 관찰할 수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지적 아마추어주의의 두 가지 중심축을 기반으로 돌아갔다첫째는 탈전문화에 대한 감수성이었고둘재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정치적 충성이었다데이비드 하비 교수는 전혀 전문가처럼 행동하지 않았고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앤디 메리필드아마추어, 35

 

책 날개에 박힌 작가 소개 첫 머리에서 마르크스주의 도시이론가라는 타이틀을 발견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 데이비드 하비였다. 작기는 34쪽만에 데이비드 하비와의 관계를 실토하였고 그것만으로도 syo는 작가가 사랑스러워졌다. 하비는 syo가 아주아주아주아주 사랑하는 할아버지인데, 이제 보니 하고 다니는 것도 syo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비할배의 <맑스 자본 강의>는 정말 축복 같은 책이고,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역시 젊은 syo에게 개안의 경험을 전해 준 역작이다. 그때 뜬 눈이 세월의 더께가 앉아 지금은 다시 감겼는데, 그렇다면 오랜만에 다시 한 번 데이비드 하비를 한 바퀴 돌면서 눈을 번쩍 뜨면 좋겠다. 가끔 이렇게 오늘의 책이 어제의 책을 내일의 책으로 정해주는 경험을 할 때마다 이 맛에 읽는 거지 싶고 그렇다.


 



 

-- 읽은 --



박이문, 하나만의 선택

사토 다카유키, 나는 회사 다니면서 공부하기로 했다

채호석, 안주영,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1

 

 

 

-- 읽는 --



테리 이글턴, 유물론

장강명 외,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데라치 하루나, 같이 걸어도 나 혼자

장윤석, 전공이 보이는 미분적분학

앤디 메리필드, 아마추어

고병권,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송찬호, 10년 동안의 빈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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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8-12-11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 그러다 장가 못 간다 라는 노래 들으면 왠지 어마어마한 욕 같은 느낌인데 카페의 그 분들은 뭐랄까 욕도 아깝네요ㅎㅎ

syo 2018-12-11 22:01   좋아요 1 | URL
조용히도 아니고 찌렁찌렁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호연지기가 하늘을 찌르더라구요.

반유행열반인 2018-12-11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분들이 마신 커피도 아깝네요ㅎㅎㅎㅎ

syo 2018-12-12 00:18   좋아요 1 | URL
하하하하 그러네요. 생각해 보니 제일 불쌍한 건 그들이 마신 커피네요. 빻은소리의 연료로 쓰이다니.....

공쟝쟝 2018-12-12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은 저녁저녁... 근데 그 남자분들 본질을 잘 짚으셨네요... 진짜 서른넘으면 절대 결혼 안하고 싶음..

syo 2018-12-12 22:41   좋아요 0 | URL
아이러니네요. 삐꾸와 현자의 한끗 차이...
 

 

2018이나 2017이나, 2018이나 2019

 

 

1

 

적고 깊게 읽는 12월을 함 만들어 보세- 하고 마음을 다잡았으나, 적게 읽는 일은 되는데 깊게 읽는 일이 안 되고 있으니 이를 절반의 성공이라 불러야 할지 최악의 상황이라 불러야 할지 아리송까리송한 상태로 벌써 일주일이 탕진된 12. 오늘은 대설大雪이라 하는데, 눈은 오지 않지만 눈 맞고 선 것마냥 춥다. 어쨌거나 하루에 한 권 이상을 다 읽고 집어던지는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싶어 방방 날뛰는 욕망을 틀어막고는 있으나, 아무래도 이 성난 망아지를 길들이는 데 시간은 물론, 하늘의 뜻도 조금은 필요하겠다. 책이 아무리 귀하고 좋은 물건이라 하나 제 깜냥에 넘치도록 읽는 것은 이번 생을 조지는 길이렷다. 문제는 그런 사실을 안지가 꽤 되었음에도 여전히 차도가 없었다는 것이고, 역시 중독이란 놈은 인식이나 인지만으로 걷어낼 수 있는 성질 순한 녀석이 아닌지라, 쫓겨나는 길에도 금단증상이라는 빅똥을 싸놓고 가는 법이다. 증상 1. 하루에 커피 석 잔, 녹차 여섯 잔, 매실차 한 잔, 맹물(hot) 여섯 잔, 맹물(cool) 두 잔씩을 섭취하고 있다(여기서 350ml를 가리킨다) 증상 2. 따라서 우리 집 변기에서는 세 시간당 두 번 꼴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증상 3.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으나 어쩐지 피부가 조금 좋아진 것만 같다?

 

이것은 읽는 영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이고, 쓰는 영역에서는 이달이나 지난달이나 달라진 것도 나아진 것도 없는 그달이 그달이다. 뭐 특별히 대단한 책, 숨어 있는 보석 같은 책들을 찾아 읽는 고수가 못 되어서 결국 syo가 읽는 책은 남들이 다 읽는 책들이고, syo가 읽고 쓰려는 글은 남들이 다 읽고 써 놓은 글들인 것인데, 이것 참 서글픈 일이다. syo는 세상에 syo만이 할 수 있는 것 따위는 결코 없다고 믿는 사람이고, 혈연이나 인연의 그물을 철거하고 산출, 결과물, 영향력의 관점에서 보면 syo의 독자적인 존재가치란 없으며, 오늘 갑자기 뿅 하고 사라진다고 한들 내일의 세상에 작디작은 파문 하나 남기지 못하리라는 쓰린 팩트를 받아들인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쓰려는 것이 이미 쓰여 있는 세상에서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에 좌절이 버무려진 망설임이 생기는 일은 피하기가 어렵다. 어차피 뭐 대단한 물건 써내는 것도 아닌데 그냥 쓰면 되지 지가 무슨 보르헤스라고 거창하게 이 지랄이지, 하는 또 다른 팩트에라도 기대지 않았더라면, 아마 아무것도 쓰지 않고 먹고 싸는 일에만 꾸역꾸역 집중하며 고민 없이 잘 살았을 것이다.

 

 

 

2

 

그럼에도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똥을 빚는 일 말고는 잘하는 것이 전혀 없어서, 읽고 쓰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안하는 셈이 되어서, 이러고 산다. 이전에도 이러고 살았고 앞으로도 이러고 살겠지. 작년 이맘때의 syo가 쓴 페이퍼들을 뒤적여 보니, 걘 어쩐지 지금의 syo보다 더 밝고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식의 낙관적인 철없음을 뿜뿜 세상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뿜고 앉았다. 저 아이는 올해의 내가 될 줄을 몰랐을 것이다. 작년의 syo가 올해의 syo가 되고 만 것은 전부 내 탓이다. 2019syo가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 될 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그 역시 내 탓이겠고, 운이 좋으면 내 덕이 될 것이다.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2019에는 먹고 싸는 일보다 더 잘 하는 것이 읽고 쓰는 일 말고도 또 생겨나서 그걸 꾸준히 잘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물론 그 전까지는 지금처럼 부질없음을 알고서도 읽고 가치 없음을 알고서도 쓰면서, 2019syo를 기다릴 것이다.

 


 

인생은 그리 길지 않고한가지 일만 하기에도 짧습니다그렇기에 한가지라도 제대로 해낸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클 것입니다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어떤 직업이든 심혈을 기울여서 일하고 가치를 창출한다면세상에서 내리는 평가 이상의 거룩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제가 하고 있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더 훌륭하고 좋은 일들이 많지요하지만 직업에 귀천이 없듯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저에게는 다른 일을 할 생각과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지금 하고 있는 일로써 우리나라에 기여하고자 합니다이것이 저의 꿈이기에 앞으로도 계속할 것입니다.

노회찬우리가 꿈꾸는 나라



 대단한 대가가 되는 일 같은 건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일열심히 해도 잘하기는 쉽지 않은 일무엇보다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매달리고 싶어지는 그런 때가 있다요약하면 그것이 바로 '쓸데 없는 일'의 필요충분조건이기도 하다.

 야근과 야근 혹은 야근과 회식이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날불 꺼진 방으로 늦게 퇴근하게 되는 그런 날이면 이따금 의미 없이 독일어 숫자 1에서 10까지, "아인즈츠바이드라이..."를 한 번 읊어보고 잠이 든다아무래도 이번 생에 독일어를 잘하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이런 뜬금없는 질척거림모르는 말에 대한 쓸데없는 동경이 때때로 한국어로 가득 찬 지루한 일상의 마라톤을 버티게 해주기도 한다.

조지영아무튼외국어

 

마이클 모부신은 2012년에 출간한 <내가 다시 서른 살이 된다면>에서 연속으로 꾼 꿈에 영감을 얻어 마지막 두 자리가 48로 적힌 복권을 산다면 스페인 국민 복권에 당첨될 거라 믿게 된 한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그는 사방팔방 다 뒤져본 뒤에 그런 번호가 적힌 복권을 샀고 정말로 복권에 당첨되었다기자가 왜 그 특정 숫자를찾아서 구입하려고 애썼는지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일주일 내내 매일 밤 숫자 7이 나오는 꿈을 꿨습니다, 7이 일곱 번 나왔으니, 7곱하기 7은 48이죠."

로버트 H. 프랭크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역경에 처한 자의 요령은 노력이외다근면이외다번민만 하고 있는 동안은 타임은 가고 그 타임은 절망과 파멸밖에 갖다주는 것이 없나이다.

나혜석나혜석글 쓰는 여자의 탄생 

 

 

-- 읽은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김경윤,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철학 수업

차병직, 단어의 발견

클라이브 해밀턴, 인류세

 

 

 

-- 읽는 --



채호석, 안주영,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1

박이문, 하나만의 선택

테리 이글턴, 유물론

장윤석, 전공이 보이는 미분적분학

다니자키 준이치로, 요시노 구즈

안도현, 백석 평전

장강명 외,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세상을 알라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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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12-0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진짜 책에 7 곱하기 7이 48이라고 나와요? 그 책 꼭 좀 읽어봐야겠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8-12-07 14:04   좋아요 0 | URL
굉장히 재미있는 에피소드죠? ㅎㅎㅎㅎㅎ
꿈대로였다면 49번을 고르고 망했을 텐데, 구구단을 못했기에 당첨이 되다니.....

카알벨루치 2018-12-07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좋아요가 바로 올땐 쇼님이 여기서 정차중이시란 이야기~ㅎ

syo 2018-12-07 14:4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안녕하세요 ㅋㅋㅋ

카알벨루치 2018-12-07 14:52   좋아요 0 | URL
ㅎㅎㅎ쇼님 글이 딱 올라와 있는거 아닙니까!!!ㅋㅋ

syo 2018-12-07 14:55   좋아요 0 | URL
카알님도 어느덧 저의 습성을 파악하셨군요..... 서로가 서로를 자꾸 알아가고 있다 ㅋㅋㅋㅋ

카알벨루치 2018-12-07 14:58   좋아요 0 | URL
🥰🥰🥰

syo 2018-12-07 15:26   좋아요 0 | URL
뭐죠 이 공백은?? ㅎㅎㅎ

카알벨루치 2018-12-07 15:38   좋아요 0 | URL
이모티콘이 안 떴나 보네요 ㅋ

페크pek0501 2018-12-08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머싯 몸의 팬이라서 <인간의 굴레에서 1, 2>를 비롯해 다섯 권을 읽었고 이번에 에세이와 단편집을 추가해 그의 전작을 다 읽어 보겠다고 벼르고 있던 제가... 님의 페이퍼의 다양한 책들의 제목을 읽고... 음마!!!(페크가 기죽는 소리임.) ㅋ

syo 2018-12-08 21:46   좋아요 0 | URL
읽기는 읽는데 읽은 것들이 모여서 동반자살하는 곳이 뇌 속 어딘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읽고 나서 뭐 달라진 거 있느냐는 관점에서 보면 페크님이 기죽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