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이나 2017이나, 2018이나 2019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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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고 깊게 읽는 12월을 함 만들어 보세- 하고 마음을 다잡았으나, 적게 읽는 일은 되는데 깊게 읽는 일이 안 되고 있으니 이를 절반의 성공이라 불러야 할지 최악의 상황이라 불러야 할지 아리송까리송한 상태로 벌써 일주일이 탕진된 12월. 오늘은 대설大雪이라 하는데, 눈은 오지 않지만 눈 맞고 선 것마냥 춥다. 어쨌거나 하루에 한 권 이상을 다 읽고 집어던지는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싶어 방방 날뛰는 욕망을 틀어막고는 있으나, 아무래도 이 성난 망아지를 길들이는 데 시간은 물론, 하늘의 뜻도 조금은 필요하겠다. 책이 아무리 귀하고 좋은 물건이라 하나 제 깜냥에 넘치도록 읽는 것은 이번 생을 조지는 길이렷다. 문제는 그런 사실을 안지가 꽤 되었음에도 여전히 차도가 없었다는 것이고, 역시 중독이란 놈은 인식이나 인지만으로 걷어낼 수 있는 성질 순한 녀석이 아닌지라, 쫓겨나는 길에도 금단증상이라는 빅똥을 싸놓고 가는 법이다. 증상 1. 하루에 커피 석 잔, 녹차 여섯 잔, 매실차 한 잔, 맹물(hot) 여섯 잔, 맹물(cool) 두 잔씩을 섭취하고 있다(여기서 ‘잔’은 350ml를 가리킨다) 증상 2. 따라서 우리 집 변기에서는 세 시간당 두 번 꼴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증상 3.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으나 어쩐지 피부가 조금 좋아진 것만 같다?
이것은 읽는 영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이고, 쓰는 영역에서는 이달이나 지난달이나 달라진 것도 나아진 것도 없는 그달이 그달이다. 뭐 특별히 대단한 책, 숨어 있는 보석 같은 책들을 찾아 읽는 고수가 못 되어서 결국 syo가 읽는 책은 남들이 다 읽는 책들이고, syo가 읽고 쓰려는 글은 남들이 다 읽고 써 놓은 글들인 것인데, 이것 참 서글픈 일이다. syo는 세상에 syo만이 할 수 있는 것 따위는 결코 없다고 믿는 사람이고, 혈연이나 인연의 그물을 철거하고 산출, 결과물, 영향력의 관점에서 보면 syo의 독자적인 존재가치란 없으며, 오늘 갑자기 뿅 하고 사라진다고 한들 내일의 세상에 작디작은 파문 하나 남기지 못하리라는 쓰린 팩트를 받아들인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쓰려는 것이 이미 쓰여 있는 세상에서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에 좌절이 버무려진 망설임이 생기는 일은 피하기가 어렵다. 어차피 뭐 대단한 물건 써내는 것도 아닌데 그냥 쓰면 되지 지가 무슨 보르헤스라고 거창하게 이 지랄이지, 하는 또 다른 팩트에라도 기대지 않았더라면, 아마 아무것도 쓰지 않고 먹고 싸는 일에만 꾸역꾸역 집중하며 고민 없이 잘 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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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똥을 빚는 일 말고는 잘하는 것이 전혀 없어서, 읽고 쓰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안하는 셈이 되어서, 이러고 산다. 이전에도 이러고 살았고 앞으로도 이러고 살겠지. 작년 이맘때의 syo가 쓴 페이퍼들을 뒤적여 보니, 걘 어쩐지 지금의 syo보다 더 밝고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식의 낙관적인 철없음을 뿜뿜 세상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뿜고 앉았다. 저 아이는 올해의 내가 될 줄을 몰랐을 것이다. 작년의 syo가 올해의 syo가 되고 만 것은 전부 내 탓이다. 2019의 syo가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 될 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그 역시 내 탓이겠고, 운이 좋으면 내 덕이 될 것이다.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2019에는 먹고 싸는 일보다 더 잘 하는 것이 읽고 쓰는 일 말고도 또 생겨나서 그걸 꾸준히 잘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물론 그 전까지는 지금처럼 부질없음을 알고서도 읽고 가치 없음을 알고서도 쓰면서, 2019의 syo를 기다릴 것이다.




인생은 그리 길지 않고, 한가지 일만 하기에도 짧습니다. 그렇기에 한가지라도 제대로 해낸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클 것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직업이든 심혈을 기울여서 일하고 가치를 창출한다면, 세상에서 내리는 평가 이상의 거룩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더 훌륭하고 좋은 일들이 많지요. 하지만 직업에 귀천이 없듯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다른 일을 할 생각과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일로써 우리나라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저의 꿈이기에 앞으로도 계속할 것입니다.
_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대단한 대가가 되는 일 같은 건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일, 열심히 해도 잘하기는 쉽지 않은 일, 무엇보다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매달리고 싶어지는 그런 때가 있다. 요약하면 그것이 바로 '쓸데 없는 일'의 필요충분조건이기도 하다.
야근과 야근 혹은 야근과 회식이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날, 불 꺼진 방으로 늦게 퇴근하게 되는 그런 날이면 이따금 의미 없이 독일어 숫자 1에서 10까지, "아인즈, 츠바이, 드라이..."를 한 번 읊어보고 잠이 든다. 아무래도 이번 생에 독일어를 잘하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이런 뜬금없는 질척거림, 모르는 말에 대한 쓸데없는 동경이 때때로 한국어로 가득 찬 지루한 일상의 마라톤을 버티게 해주기도 한다.
_ 조지영, 『아무튼, 외국어』
마이클 모부신은 2012년에 출간한 <내가 다시 서른 살이 된다면>에서 연속으로 꾼 꿈에 영감을 얻어 마지막 두 자리가 48로 적힌 복권을 산다면 스페인 국민 복권에 당첨될 거라 믿게 된 한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는 사방팔방 다 뒤져본 뒤에 그런 번호가 적힌 복권을 샀고 정말로 복권에 당첨되었다. 기자가 왜 그 특정 숫자를찾아서 구입하려고 애썼는지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일주일 내내 매일 밤 숫자 7이 나오는 꿈을 꿨습니다. 뭐, 7이 일곱 번 나왔으니, 7곱하기 7은 48이죠."
_ 로버트 H. 프랭크,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역경에 처한 자의 요령은 노력이외다. 근면이외다. 번민만 하고 있는 동안은 타임은 가고 그 타임은 절망과 파멸밖에 갖다주는 것이 없나이다.
_ 나혜석,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 읽은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김경윤,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철학 수업』
차병직, 『단어의 발견』
클라이브 해밀턴, 『인류세』
-- 읽는 --










채호석, 안주영,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1』
박이문, 『하나만의 선택』
테리 이글턴, 『유물론』
장윤석, 『전공이 보이는 미분적분학』
다니자키 준이치로, 『요시노 구즈』
안도현, 『백석 평전』
장강명 외,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세상을 알라』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