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목현상에서



1

 

어느 시골 마을에 하얀 병 검은 병이 있어, 마을 사람들 섬기는 하얀 병과 검은 병이 있어, 예부터 전하는 말에 하얀 병에서 낮이 나왔고 검은 병에서 밤이 나왔다고 하여 사람들 섬기는 병이 마을에 있어, 순박한 사람들 낮에는 하얀 병을, 밤에는 검은 병을 산신당 앞전에 모시고 지나는 길마다 두 손 모아 빌었는데요. 하얀 병, 빛 머금어 더욱 더 하얀 병 앞에서 사람들 씨감자 주소서 빌면 씨감자 나오고, 호미도 낫도 괭이도 주소서 빌면 그것도 나오고, 산신님 덕분에 감자 잘 심었으니 빗님도 오소서 빌면 빗님도 나렸으니 사람들 하얀 병 앞에만 서면 그리 기껍게 웃을 수가 없었지요. 자꾸 자꾸 닦아대어 하얀 병은 날로 날로 하얘졌지요. 그리고 검은 병, 칡부엉이 날아올라 들쥐 찢어 먹는 겨울밤이면 검은 병 앞에서 사람들 우리 아이 고뿔 걷어 가소서 빌면 아이들 고뿔이 낫고, 볼거리님 마마님 걷어 가소서 빌면 앓던 이가 다음날 밭에 나오고, 무서운 범, 아이 물어가는 꼬리 긴 범 삼켜 주소서 빌면 산에 범 우는 소리가 걷혔으니 사람들 검은 병 앞에만 서면 사시나무 바람 흔들 듯 떨며 빌다 후드득 사라졌지요. 자꾸 자꾸 외로워 검은 병은 밤으로 밤으로 거메졌지요.

 

어느 시골 마을에, 하얀 병 검은 병 있는 시골 마을에 어미는 일찍 죽고 아비는 총포 들고 산에 들어갔다 여즉 소식이 없는 아이 하나 있어, 낮에는 이웃 영감 밭에서 조나 피를 뽑다가 밤이면 귀뚜라미 소리로 눈물을 틀어막고 잠들곤 했는데요. 아이는 하얀 병, 심어도 심어도 끝없이 심을 씨감자를 내놓는 하얀 병이 미워라, 갈아도 갈아도 끝없이 갈 호미를 내놓는 하얀 병이 미워라, 어느 산, 어느 지붕 없는 땅을 헤맬 아비의 옷이 젖을까, 빗님을 자꾸 뿌려대는 하얀 병이 미웠는데요. 아비를 주소서, 어미를 돌려 주소서 빌고 빌어도 모른 체하는 하얀 병이 자꾸 자꾸 미웠는데요. 그러던 어느 밤, 아이는 귀뚜라미 소리를 밟아 검은 병 앞에 섰는데, 검은 병에 손대면 도깨비 같은 순사님 나타나 육모 방망이를 휘두른다고 어른들 말씀하셨는데, 아이는 무람도 없이 검은 병에 눈싸움을 세게 걸었지요. 우리 아비를 주소서, 검은 병은 입이 없고 부엉이만 울었지요. 우리 어미를 주소서 검은 병은 귀가 없고 바람소리만 들렸지요. 아이는 골이 잔뜩 나 붉으락푸르락 하는 얼굴로 꽉 소리를 치더니 검은 병을 팽개치려 집어 든 게지요. 그때 드르륵 드르륵 검은 병이 몸을 떨지 않았겠어요. 아이는 깜짝 놀라 한쪽 눈을 감고 병 주둥이에 뜬 눈을 가져다대었는데요.

 

눈을 가져다 대면 토끼도 있고, 기린도 있고, 노루도 있고, 노루 잡으러 간 아비도 있고, 별님도 있고, 달님도 있고, 돛단배도 있고, 돛단배 타고 달님 구경 가신 어미도 있고, 거북도 있고, 고래도 있고, 어미 아비 손잡고 살러 가고 싶었던 푸른 먼 바다도 있고,

 

다시 눈을 들면 감자가 있고, 호미가 있고, 뽑아야 할 조와 피가 있고, 툇마루에 누워 곰방대만 훑는 영감이 있고, 아비가 갔다는 먼 산이 있고, 그 산에 다녀는 왔는지 하염없이 울어대는 부엉이가 있고, 부엉이의 날개로 몇 날을 날아도 갈 수 없다는 어미 사는 별나라가 있고, 눈처럼 겨울처럼 시리게 빛나는 하얀 병이 있고, 고뿔이 나은 아이가 있고, 그 아이의 아비 어미가 있고,

 

어느 시골 마을에 하얀 병 검은 병이 있어 순박한 마을 사람들 낮이면 하얀 병을 밤이면 검은 병을 섬겼는데요. 어느 겨울 새벽, 부엉이 조는 산신당 산신나무 아래 하얀 병을 조심히 받쳐 들고 온 영감이 있어, 하얀 병을 모셔 놓고 검은 병을 모셔 가는데, 눈이라도 마주치면 볼거리님 마마님 도깨비 같은 순사님 육모 방망이 내려칠까 차마 고개 숙이고 검은 병 모셔 가는데, 그날따라 어쩐지 묵직하여 흔들, 어쩐지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아 흔들, 잠깐 흔들어 보았지만 그래도 차마 안을 들여다보지는 못하고 영감은 얼른 검은 병 모시고 마을로 내려가는데요. 툇마루에 걸쳐 누워 곰방대를 물고는 아비 어미 없는 아이, 밭 갈고 귀뚜라미 소리 듣는 아이 이름을 길게 불러보았는데요.




이런 이상한 이야기는 일단 의심하게 되지만 그렇지만 이 이야기에는 뭔가 교훈이 있다그것은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믿음과 같았다입 밖에 내뱉은 말에는 아무튼 간에 뭔가 힘이 있긴 있다는 것이다그 말은 항상은 아니겠지만 어떤 순간에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박솔뫼사랑하는 개


 그런 날이 있다낮에 쇼핑을 하며 밖에 나와 있는 낯선 이들을 보는 것이 정말 외롭게 느껴지는 날그러니까 내가 입을 떼어내버리고 싶어 발작을 일으키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오늘 같은 날선명한 색 옷을 입은반짝거리는 머릿결을 한색색의 니트 스웨터를 가리키며 웃음 짓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 쉽지 않은 날.

 저 모두를 지워버리고 싶었다하지만 나는 또한 저 모두를 원했으니나는 그들을 지워버릴 수 없고 동시에 그들이 되고 싶어 할 수도 없었다.

에이미 벤더레몬 케이크의 특별한 슬픔

 

 얼굴 하나가 말했다

 

 나는 너 때문에 각도가 생겼어 모서리가 됐어 너 때문에 부피가 생겼어 사람들이 들고나올 만한 너 때문에 무게가 생겼어 사람들이 치고받을 만한

 

 여유가 생겼어 너 때문에 얼굴을 가리는 사람들이 있었어 뒤통수에 혹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어 앞이마에 흙을 묻히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림자가 거대해졌어

 

 그것을 묵묵히 나르는 사람이 있었다 삼백육십 개가 넘는 얼굴을 등에 지고 삼백육십 일이 넘는 날을 넘는 사람이 있었다 곱절이 제곱이 되는 삶이 있었다

 

 영영 마주 보지 못하는 얼굴 하나가 말했다

 

 나는 너 때문에 상상하게 됐어 굽는 것은 얼마나 뜨거울까 쌓아 올리는 것은 얼마나 지겨울까 찍어 누르는 것은 얼마나 잔인할까 찍어 눌리는 것은 또 얼마나 쓰라릴까

 

 그것을 밟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을 뭉개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을 피하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을 외면하는 사람이 있었다

 

 돌이 벽을 만나던 순간이 있었다

 벽돌이 돌벽이 되던 순간이 있었다

오은벽돌부분

 

 

2



고백하자면 나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모든 것을 걸고 싸워보지 않았다그런데 이 싸움은 자체가 수단이고 목적인 순수하고 절대적인 싸움이다.

김진영아침의 피아노

 

건다는 단어가 품고 있는 위태로움을 생각한다. 그것은 최선을 다 한다는 말과 호환되지 않는 진술이다. 최선을 다했더라도 실패로 잃는 것이 없다면 모든 것을 걸고 싸운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걸고 싸워 이겨내 크게 얻었더라도 그 싸움에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것은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는 일은 노력이나 계산의 문제고, 모든 것을 거는 일은 판돈의 문제다. 그 두 가지 과업의 차이와, 그 각각에 적절한 시기를 판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의외로 간과되기 쉬우니,

 

아마도 내 인생의 무수한 실패들을 도마 위에 늘어놓고 갈라 보면, 뜻밖의 사인死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나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싸움에 맞서서 아무것도 내놓지 않은 채 그저 최선을 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혹은 나는 최선을 다해야 할 싸움 앞에서 모든 것을 걸었으되 정작 있는 힘껏 싸우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3



우리는 보통 아마추어를 전문가에 미치지 못한 자혹은 아직 전문가가 되지 못한 상태라고 생각한다아마추어를 전문가로 이어지는 발전의 회로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하지만 아마추어는 전문가의 기준에서 평가될 수 없다아마추어와 전문가이 둘은 대상을 다루고앎을 생산하는 데 있어 완전히 다른 지평다른 관점 속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전문가들이 대상에게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려 한다면아마추어는 사랑연대감이라는 지평 속에서 대상과 만나고그 속에서 앎을 생산해 낸다그들은 무언가를 사랑함으로써 앎의 장 속에 들어선다그들에게 대상과의 거리감은 존재하지 않는다이것은 대상을 사랑하는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앎을 구성하는 새롭고 독특한 방법이다.

정철현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


인간은 모르는 것을 사랑하고, 아는 것을 사랑할 수 있지만, ‘아는 것은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고 나는 믿는다. 사물에 관한 것이건 사람에 관한 것이건, 얼마만큼 알고 나서부터는 더 많이 아는 일이 곧바로 더 큰 사랑을 담보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고, 그 앎이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앎을 두껍게 만드는 과정 속에서는 애정이 좀처럼 약동하지 않으며 오히려 아, 내가 아직 이 사람에 대해 잘 몰랐구나, 이 사람에게 이런 면도 있었구나, 하는 식의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종종 사랑의 확장을 경험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면 결코 그 대상에 대해서 객관적일 수 없다. 뒤집어, 그 대상을 객관적으로 알고,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그것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모르는 길을 고른다. 이국, 바다, 우주, 가보지 않은 곳을 끝없이 동경하고, 읽다보니 알겠다 싶은 책은 두 번 읽지 않으며,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잘 모른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분야에서 의미를 찾고 매력을 느낀다. 나는 내 일을 잘 하고 사랑한다는 말만큼 모순되거나 기만하는 말이 있을까. 그냥 나는 내 일을 잘하고, 일을 잘 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읽다가 모르는 것이 없어질까 봐 무섭다. 정확히 말하면, 모르는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더 남아 있는 빈 공간을 탐구할 생각, 그러니까 사랑이 사라질까봐 겁이 난다. 그만 알아도 되겠다는 마음은 아는 것이 늘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줄어서 생긴다. 알고 싶은 것이 줄어드는 증상은 사랑을 잃어가는 병의 초기 증세다.

 

 

 

 

-- 읽은 --



유상균, 시민의 물리학

다니자키 준이치로, 슌킨 이야기

갈로아만화로 배우는 곤충의 진화

 

 

-- 읽는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김경윤,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철학 수업

차병직, 단어의 발견

클라이브 해밀턴, 인류세

채호석, 안주영,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1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읽거나 말거나

정철현,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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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유리잔에 끓인 물을 따라 부으면 금세 사라지는 물방울 만들며 천천히 잔은 차오르고, 수면의 키가 자라면 잔은 조금씩 다른 소리를 내고, 아쉽게도 물은 금방 가득 차고, 잔 너머 쌓아놓은 책들과 그 등에 박힌 이국 작가의 이름들이 굴절되어 일렁이고, 잔의 꼭대기에 올라선 물은 하염없이 머리칼을 풀며 흩날리고, 얼굴을 가까이 대면 그 따뜻하고 진 머리칼들 안경알에 칭칭 휘감겨 사물이 온통 희부옇게 번지고, 고개를 들면 성에는 새처럼 얼른 날아가 세상은 다시 자기 자리를 잡고, 손잡이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손바닥으로 잔을 감싸 쥐고, 뜨겁고,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의 옆구리를 손톱으로 두드려 보고, 한 모금을 더 마시고, 잔의 옆구리를 다시 두드려 소리가 옷을 갈아입었는지 확인하고, 또다시 한 모금, 이번에는 더 큰 한 모금을 마시고, 그러는 사이 뜨거움은 눅어 견딜만한 따뜻함이 되고, 나도 모르게 뜨거웠던 이름과 견딜 만큼 따뜻했던 이름들을 떠올리는 사이 조금씩 잔은 제 몸을 비우고, 잔의 안쪽으로부터 밖을 내다보며 눌린 손가락, 눌린 손바닥의 지문이나 손금 같은 것을 오래 들여다보기도 하고, 무언가 오래 뒤로 밀어 놓았던 이야기들이 슬쩍 보이는 것도 같고, 이제 도리어 내 손이 온기를 빌려주어야 할 정도로 잔은 식어버리고, 내려놓고, 그 너머로 여전히 굴절중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눈에 마음에 힘을 빼고도 읽을 수 있는 작가들의 이름이 보여, 나는 다시 그 책을 펼치어 읽었습니다.

 

 

그때나는 묻는다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그때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발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허수경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181116 181130 : 28 권



1. 아무튼, 트위터

: syo같은 애정결핍범은 SNS의 압력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더라. 일찌감치 포기하고 살았는데, 이 책을 읽어 보니, 하는 이들의 삶 역시 하는 이유가 있는 삶이었고, 그에 따라 조금은 불안해졌다. 나만 멍충멍충 사는 건 아닐까. SNS를 해서 생기는 이해득실의 문제가 아니라, 하는 이들의 생활, 문화, 사고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2. 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상합니까?

: 시인의 산문은 얕보기 어렵다. 벌컥벌컥 읽다가도 덜컥덜컥 멈추고, 되짚고, 뒤늦게 탄식을 하기도 한다. 손미 시인의 이 산문집을 휘감은 제일 큰 정조는 아무래도 외로움이겠고, 외로운 이야기는 종종 외로운 이들을 더 외롭게 만들기도 하므로 우리는 아무쪼록 이 책을 조심해야 하겠다.

 

3. 심야의 철학도서관

: 인물들의 대화가 일어나는 장소가 도서관의 철학서가라서 이런 제목이 붙었지만, 철학책은 아님.

: 톨렌스와 포넨스라는 두 인물이 인간의 의식이란 무엇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토론하는데, 마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는 것 같다. 끝까지 읽었지만 고도는 오지 않았고, ‘의식역시 끝내 오지 않았다......

 

4.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꿈꾼 유토피아

: 마르크스를 다룬 부분보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나 엥겔스에게 할애한 데가 더 의미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뭐 되게 상세하지는 않지만. 마르크스 파트는 되레 부실한 데가 있고, 한형식 선생님의 <맑스주의 역사 강의>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가볍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많은 독자들에게 이 책이 외려 더 나을 수도 있겠다.

 


5. 혼자를 위한 미술사

: 혼자가 되어 그린 그림 앞에 선 인간은 혼자가 된다. 사적인 그림일수록 그린 사람 이외의 그 무엇도 가르쳐주지 않을 것 같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런 그림에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우리 자신에 대해 배우게 되기도 한다. 미술사의 시기시기를 작풍이나 기술로 구분하지 않고 개인에 깊이 침잠해들어가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의외로 유익하다.

 

6. 오늘도, 무사

: 책방 하는 모든 이들의 무사를 기원한다. 이들은 존재 자체가 사회를 위한 헌신인 고귀한 사람들이다. 책방 많은 사회가 모든 면에서 나은 사회다. 그보다 더 나은 사회는 딱 하나다. 그 많은 책방이 잘 살아남는 사회.

 

7. 지구 온난화 이야기

: 균형 있는 입문서라는 것은 이런 것이로구나. 단지 10년 된 책이라는 것, 작금에 심화되고 있는 환경 문제에서는 10년이 말도 못하게 긴 기간이라는 것이 좀 아쉽다.

 

8. 위대한 사상들

: 뻔뻔하다. 뻔뻔할 만도 하달 만큼 좋은 글이 아니었다면 중간에 집어던졌을 것이다.

: 위대한 사상가 10, 위대한 시인 10, 최고의 책 100,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애초에 인류라는 개념을 보는 틀이 좁다. 동양의 사상가나 동양의 시인도 들먹여는 놓았지만, 정말 들먹인다는 느낌, 자신이 개방적이고 동양까지 아우르는 시야를 가진 인물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들러리로 세워놓았다는 느낌, . 그러니까, 틀렸다는 게 아니라 틀렸으면 좋겠다 싶다.

: 읽고 있으면 같은 사피엔스의 1인으로서 뿌듯함이나 벅차오름 같은 걸 느끼기도 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광대한 우주를 맞닥뜨려 스스로의 먼지스러움을 자각하게 만들려고 했나 싶은 느낌인데, 그렇지, 우주 앞에 선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 근데 당신이 우주는 아니잖아요. 글은 정말 잘 쓰시네요. 정말 글 잘 쓰는 먼지시네요. 부러워요.

 


9. 애덤 스미스 국부론

: 이상하지. 국부론에 관련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진짜 읽어봐야 될 건 국부론 아니라 도덕감정론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상하지, 참 이상하지.

 

10. 이제 나부터 좋아하기로 했습니다.

: 엔도 슈사쿠의 책이 줄지어 나오고 있다. 엔도 슈사쿠의 동물기를 되게 재밌게 읽었던지라 되게 기대하고 되게 빨리 빌려서 되게 빨리 읽기 시작했는데 되게 빨리 실망하고 엔도 슈사쿠에 대한 흥미를 되게 잃었다.

 

11. 그들은 왜 더 행복할까

: 다 읽었는데 그들처럼 행복하기 위해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민 말고는. 그 사실 자체가 그들이 행복한 제일 큰 이유 같다.

 

12.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

: syo는 오늘날 우리 지구가 이 모양 이 꼴인 게 우리가 한계를 몰라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수백 수천의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 현재 보유한 기술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한도로 정밀하게 고안해 낸 지구 한계치가 이미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몰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모른 척 하거나 우물쭈물 하다가 망하는 것이다.

 


13. 이명헌의 과학책방

: 한 권을 읽으면 수십 권을 읽은 꼴이 되는 무거운(무서운) 책이다. 진도를 쭉쭉 빼지 못하는 까닭도 같다. 소개된 책들 가운데 너무 옛날 책이 많은 것도 이유겠지만, 어쩐지 이것만으로도 너무 배가 부른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원전들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데, 이건 장점인가 단점인가.

 

14. 고인돌, 역사가 되다

: 갑자기 왜 고인돌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알고 싶었던 만큼보다는 훨씬 더 많이 알아버렸다. 까먹겠지만. 그래도 어느 날 또 갑자기 고인돌에 대해 알고 싶어지면, 망설이지 않고 손에 들 책을 알았으니 그걸로 된 거지.

 

15.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

: 해야 할 이야기가 명확하고 그 말을 뒷받침하는 명분이 충분하면 글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뻗어나갈 밖에. 환경 문제는 심각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가야할 길은 의외로 선명하다. 단지 먹고사니즘에 치여 그 길을 가지 못할 뿐. 진단과 처방이 잘 버무려진 글들이지만 문제는 진단을 받으러 찾아오는 사람조차 없다는 점이겠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 너무 적다.

 

16. 지도로 읽는다 한눈에 꿰뚫는 세계사 명장면

: 역사책을 읽을 때면 무의식적으로 영화를 기대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스틸사진이다. 장면은 더없이 선명하고 세밀하게 포착되었지만, 그만큼 서사가 빈곤하다. 남는다면 지식으로 남겠으나 남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겠다.

 


17. 왼손은 마음이 아파

: 퇴보일까, 건성일까? syo는 마음이 아파.

 

18. 문명의 그물

: 유럽의 역사를 씨실로 꿰었다. 질이 좋은 씨실이다. 최고의 씨실이 갖추어졌으니 이제 날실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면 아름다운 직물이 될 것이다. 그래야 아름다운 직물이 될 것이다. 더 읽어야 한다.

 

19. 과학 같은 소리 하네

: 생각해보면, ‘4차산업혁명시대라는 굉장히 공학적이고 과학적인 단어를 공학자나 과학자보다 입에 더 많이 올렸던 이들이 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거나 대충 아는데도 모르는 게 없거나 완전히 아는 것처럼 말했고, 우리 사는 모양새는 이 모양 이 꼴이다. 과학과 공학이 정치인의 입에 오르내리기 전에, 혹은 그러기 시작할 때, 우리가 그것들을 다 알고 있으면 참 좋겠으나 녹록치 않다. 모르니까 우리는 잘 속을까? 의외로 그렇지도 않다. 속이는 놈들도 잘 모르는 건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결국 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실을 검증하는 법, 믿을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소스, 통계의 장난질에 놀아나지 않을만한 기초적 안목, 뭐 이런 간단한 지식들 아닐까? 이 도구들은 생각보다는 얻기가 쉽다. 성의의 문제에 가깝다.

 

20. 에디톨로지

: 표지에는 창조는 편집이다라고 쓰여 있지만, 실은 편집은 창조다정도를 겨우 증명한 책이 아닐까? 다양한 지식들로 편집된 이 책이 창조되었다는 것이 그 증거. 그리고 그게 끝인 것 같다. 읽는 내내 아, 결국 저 말인데 뭘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21. 마흔에게

: 뭐 그다지 눈에 띄는 이야기도, 마음에 확 들어오는 이야기도 없는 단순한 에세이집. 주제는 늙는 법이고 원제 역시 마흔이라는 똑 떨어지는 숫자와 상관이 없는데도 번역하면서 제목에다 굳이 마흔을 타겟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이렇게까지 드러내는 이유를 알고 싶다.

 

22.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 늦게야 정이현에 눈뜬 것 같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랄지, <달콤한 나의 도시> 같은 작품으로 명성 떠르르하던 시절에는 그렇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요즘은 그의 건조한 문장이 왜 이렇게 좋은 걸까. 언제든 추락할 것 같은데 추락하지 않고 가늘게 떨리기만 하는 문장 위에서 아슬아슬 줄을 타다가 불시에 뚝, 하고 떨어지는 경험을 한다.

 

23. 비상문

: 인간은 언제나 다른 인간에게 하나의 질문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인간의 죽음은, 또한 그 죽음이 스스로에게 선사한 죽음이라면, 그건 정말 거대한 질문이 된다. 그 질문을 마주하여 결국은 통속적이거나 자조적인, 혹은 자기계발적인 대답만 내놓고 다시 바쁘게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syo처럼 별 볼일 없는 인간의 한계겠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겠다.

 

24. 이성의 운명에 대한 고백 순수 이성 비판

: <순수이성비판>을 읽은 다음 <실천이성비판>을 읽고 <판단력 비판>을 읽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있다. 실제로 그래야 하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얼추 알기로 실천은 순수를 깔고 앉았다고는 하던데. 근데 이놈의 순수는 정말 순수하게 어려워서 잘 따라가는 것 같다가도 자꾸 허방을 짚게 만든다. 원전 번역본은 사놓았지만 읽는 것은 다음 생의 과업으로 미루어 놓은 상태고, 결국은 이런저런 입문서나 개론서를 전전하다가 슬그머니 헤겔로 넘어갈 생각인데, 잘 될지 모르겠다. 좋은 책인지 아닌지 선명하게 판단하려 다른 책을 몇 권 더 읽어 봐야하겠다. 일단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는 제일 좋았다. 지금까지 읽은 책은 무려 두 권. 한 권이 아닙니다.

 


25. 이 모든 것을 만든 기막힌 우연들

: 빅 히스토리는 정말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따로 과학적 기본지식을 갖추고 와서 읽어야 하는 건지, 읽고 나서 과학적 지식을 갖추어야 하는 건지 항상 헷갈리게 한다. 사실 이건 독자의 딜레마인 동시에 저자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빅 히스토리의 가장 큰 변별점은 과학과 역사의 오묘한 배합 속에서 드러나기 마련인데, 과학 독자와 역사 독자의 간격은 기실 유대교 신자와 이슬람 신자 사이의 간격과 유사하여 서로를 꽤나 알 것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잘 섞이지는 않는다. 결국 과학에 힘을 주면 역사 독자가 성화고 역사에 힘을 주면 과학 독자가 아우성을 칠 테니, 저자는 야훼와 알라 사이에서 망설이고 독자는 타나크와 꾸란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다.

 

26. 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

: 에피소드식 역사 지식은 잘난 척 할 때나 쓰는 거라는 인식을 오래 쥐고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쓰곤 했다. , 그런 건 어떻게 알아? , 어쩌다 보니(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시크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놓고 막상 책을 평가할 때는 에피소드식 역사책을 하급으로 취급하는 요 양면성, 이중 잣대. 하지만 알고 보니 그저 syo가 멍청한 것이었을 뿐, 에피소드의 이면이나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했을 뿐, 역사책은 언제나 옳다!(짝퉁 역사만 아니라면) 심지어, 재미난 이야기로서의 역사책이라면? 옳고도 옳은 거지.

 

27. 우리가 꿈꾸는 나라

: 그가 없는 세상에 우리에게 부족한 세상이듯, 그가 남긴 말만으로 우리는 부족하다. 다시 살아 돌아오실 게 아니라면, 그의 평전이라도 만나고 싶다. 1주기쯤 이와 관련된 어떤 일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28. 침묵의 봄

: 고전이 얼추 다 그런 면이 있지만, 과학의 고전은 유독 더 읽어 볼 명분이 적다. 왜냐하면 책 속에 든 주장과 증명들이, 책이 나왔던 시점에는 놀랍도록 혁신적이고 심지어 급진적이었던 그 이야기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상식이 되어 대중지식 속에 자리를 잡고, 같은 분야를 다루는 후발 주자들이 그 지식들을 당연한 전제로 깔고 뒷이야기를 이어나가기 때문이다. 더는 천체학에 대해 알기 위해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를 읽지 않고, 물체의 운동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뉴턴을 읽지 않는다. 독서의 왕국에서 그 책들은 기념비처럼 존재하며 유독 부산스런 독서가들의 순례지가 될 뿐이다. 이 책이 그렇다. 이 책은 수많은 일을 하고 수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는 데에 채 반 세기의 시간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곧장 기념비가 되었다. 뒤는 다른 책들이 맡았다. 50년 전에 나온 이 책을 오늘날 다시 읽는 것에 가치가 없지 않겠으나, 오늘은 오늘의 문제를 다룬 오늘의 책을 읽어야 한다.

 




이만하면 올해도 할 만큼 했으니, 12월부터는 적게, 오래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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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11-30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같게 읽어 본 책 딱 한 권이 있으며, 소감도 같게 공감합니다. ^^

syo 2018-11-30 21:02   좋아요 1 | URL
4, 8, 20, 28 중에 그 한 권이 있나요?? ㅎㅎㅎㅎ 찍기

북다이제스터 2018-11-30 21:07   좋아요 0 | URL
역시 무서운 분 ㅎㅎ
신기도 있으세요. 20번요~~~~^^

syo 2018-11-30 21:15   좋아요 1 | URL
북다님이 읽으실 만한 것들, 딱히 읽으실 것 같진 않지만 읽으셨다면 저랑 같은 반응이실 것 같은 책 위주로 한 번 골라봤습니다 ㅎㅎㅎㅎ

카알벨루치 2018-11-30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5일동안 30권의 책을 읽는 사람! ㅜㅜ 계속 읽어주세요 도전 늘 팍팍 받고 있으니~ㅎㅎ

syo 2018-11-30 21:03   좋아요 1 | URL
이제 30일동안 15권 읽는 사람으로 거듭날 겁니다. 맨날 다 날라가고 없어ㅠㅠ

카알벨루치 2018-11-30 21:26   좋아요 1 | URL
난 16번, 20번 읽는중인데 두권다 용두사미 되는거 아닌가 싶네요 ㅎ

syo 2018-11-30 22:55   좋아요 2 | URL
카알님의 용두용미를 기원합니다.

북프리쿠키 2018-12-01 14: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8번 딱 한권 겹칩니다..흐흐;; 전 카알벨루치님과는 다르게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을 껍니다~!!! ㅠ.ㅠ

syo 2018-12-01 14:40   좋아요 1 | URL
그렇다면 누구든 오르려는 사람은 오를 수 있는 나무로 거듭나는 12월의 syo가 되겠습니다 ㅎㅎㅎ

레삭매냐 2018-12-02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침묵의 봄, 마저 다 읽어야 하는데...
사실 사서 서문 정도만 읽은 것 같네요.

읽을 책들이 주변에 너무 많은데도
우선 순위에서 밀려 나는 통에 ㅇㅇ

이제 한 달 남았네요, 열심히 읽어 보겠습니다.

syo 2018-12-02 15:10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의 꾸준한 독서와 기록이 항상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12월도 2018년도 알찬 독서로 마무리하시기를 ^-^

페크pek0501 2018-12-0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게 오래 읽기. 저도 동참합니다.

syo 2018-12-02 15:10   좋아요 0 | URL
동지! 2018년을 천천히 오래 마무리하자구요^^

cobomi 2018-12-09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독서량에는 못 미치지만, 저도 최근 ˝좀 적게 읽자. 거듭 읽자.˝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침묵의 봄>에 대한 의견에는 공감해요. 고전이지만, 따분하기도 하고 낡은 인상을 받기도 하고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제목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고 했음에도 가장 인기 없는 책이기도 해서 살짝 심란했는데 syo님도 읽으셨다니 반갑네요 ㅎㅎ

syo 2018-12-09 11:30   좋아요 0 | URL
많이 그리고 빠르게 읽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적게 거듭 깊이 읽는 일이 훨씬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에너지 소모도 크구요.

사실 <침묵의 봄>과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 중 한 권을 고르라면 오늘날 우리는 당연히 후자를 골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북플은 이 책을 읽은 이가 저밖에 없다고 알려주네요. cobomi님처럼 읽으셨지만 표시하지 않은 분들이 실제로는 더 계시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씁쓸하네요^-^

다락방 2020-06-14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묵의 봄 읽어야지 싶어 검색했더니 여기로 왔다. 무려 70개의 공감이 있는 쇼님의 페이퍼로...

syo 2020-06-14 22:24   좋아요 0 | URL
지금 봐도 놀랍다 70개! 😁
 
비참한 날엔 스피노자 필로테라피 1
발타자르 토마스 지음, 이지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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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여덟 살 터울의 동생은 반은 오빠고 반은 아빠인, ‘와빠같은 오빠 때문에 제 방을 가지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가난을 탓할 수도 있겠으나, 작은방은 syo겐 늘 내 방이었고, 그 안에 자기 책상도 놓여있지만 동생에겐 늘 오빠 방이었다. 제 오빠가 대학을 다니러 서울로 올라갔을 때, 동생은 얼마나 좋았을까. 공식적으로 방의 점유권을 양도하는 절차는 없었지만, ‘실효적 점유를 주장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실효적 점유는 굉장히 실용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으니, 방학을 맞아 돌아왔더니 이미 우리 집엔 내 방같은 건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건 누가 봐도 동생의 방이었다. 여전히 내 방이겠거니 하고 방문을 벌컥 열었는데, 방을 둘러친 포스터 속, 도합 서른두 개의 눈동자가 거란족 오랑캐를 바라보는 고려군마냥 기세가 등등하여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데, 당혹스러운 마음에 , 저것들 다 뭐야.” 소리를 질렀더니 덤벼들 듯 대답하는 동생. “여봐요, 저것들이라니. 우리 동방신기 오빠들한테!” ..... 니 오빠는 동방신기가 아니라 syo잖아.....

 

syo는 동방신기의 다섯 멤버를 정확히 구분하고 동생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포스터 속 인물의 이름이 무엇인지 0.5초 안으로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앉지도 못하고 서서 치열하게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네들의 이름은, 보수의 심장이라는 도시에서 남중 남고 생활을 포함, 가부장가부장 스무 해를 살아온 남자가 입에 올리기에는 뭔가 낯부끄러운 구성이라서 교육시간은 자꾸만 길어졌다. “봐봐, 이 분은 누구셔.” “준수....” “무슨 준수셔.” “.....시아준수.” “그럼 저기 저 분은 누구시라고?” “.....키 유천” “?” “.....미키.....” “, 진짜! 미키 아니라 믹키라고, 아직도 모르겠어? 오빤 왜 이렇게 배우는 게 느려?” ..... 그러니까 이건 모르고 느린 게 아니잖아.....

 

어느 날인가는 물었다. “, 너는 나랑 동방신기랑 물에 빠지면 누굴 먼저 건질 건데?” 동생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무슨 수로 건져. 내가 죽는다.” 역시 syo의 동생. “그럼, 나랑 동방신기랑 물에 빠졌어. 그래서 니가 기도를 한 거야. 하느님이 바다를 갈라준다네? 그럼, 내가 빠진 데를 가를 거야, 동방신기가 빠진 데를 가를 거야?” 동생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몇 명 빠졌어?” “?” “동방신기 오빠들, 몇 명 빠졌냐고. 다섯 명 다 빠졌어?” 세상에, 동생년 업어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잖아.....

 

그런 이유로 syo는 일찌감치 아이돌이라는 존재가 싫었다. 애기 땐 참 귀여운 아이였는데, 저런 되바라진 초6이 되고 말다니. 내 동생을 돌려주고 동방으로 꺼져버려, 이 한류스타들아...... 그러나 한류스타들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자꾸자꾸 태어나더니, 어느 시점부터는 아이돌이 아이돌 아닌 가수보다 많아졌고, 어어어 하는 사이에 이제 가수하면 기본적으로 아이돌(최소한 아이돌 출신)을 떠올리게 되는 시점에 도달했는데, 그런 내내 syo는 꾸준히 아이돌을 멀리했다. 다른 젊은이들이 아이돌에 열광과 환장을 바치는 동안 꿋꿋이 저항운동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가장 잘 팔리고, 구하기도 쉬우며, 스스로를 취향 있는 인간으로 보이도록 도와주는 편견을 하나 주워 얼른 장착했다. 저게 노래냐, 저게 가수냐, 하는 스타일의,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보수적인 관념이지만, 그땐 그걸로 충분했다. 사실 누군가를 싫어하는 진짜 이유는 싫음 그 자체일 때가 많다. 왜 싫으냐면 싫어서 싫은 것이므로, 벗겨놓고 봤을 때 중요한 건 그저 내가 쟤네를 싫어한다는 것, 그것뿐인 셈이다.

 

인간은 사물의 범주를 만드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상당히 축약시킨 유사성의 함수를 이용해 경험을 분류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진 유사성이 사실 지나간 경험에서 결정적이었던 정서의 핵심에 거의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어떤 사람을 닮았기 때문에 한 사람을 사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의 정서를 이끌어냈던 바로 그 속성을 새로운 사람이 가졌을 때만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미움의 정서에도 또한 분명하게 이와 동일한 구조가 있다. 과거에 한 사람의 어떤 특별한 성격이 우리에게 미움을 불러일으켰다. 나중에 우리가 싫어했던 바로 그 특성은 아니지만 그 사람이 가졌던 또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새로운 사람 역시 우리에게 미움을 불러일으킨다. 과거에 알았던 어떤 인물의 특성 중 우리가 싫어했던 바로 그 특정한 속성을 새로운 사람이 가진 것이 아닌데도 그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61쪽)


싫어하는 것도 역시 관심이 있어서일까. 나이를 먹다보니 세상에는 근거 없이 싫어할 아이돌 말고도, 정말 싫어할 이유가 명백해서 싫은 인간들도 천지였고, 싫은 것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와 시간이 듬뿍 낭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이돌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사라졌다. 허허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요.

 

최근 방탄소년단은 온 세계를 진동시키고 여기저기서 존재감을 드러내더니 심지어는, 한국전쟁 통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거친 개발독재시대의 풍랑을 헤치고 이 나라 경제를 반석에 올려놓는데 이바지하였으며 이제는 하루 종일 종편 정치 시사 프로그램만 보는 배 모 할아버지(70, 대구 북구 거주)의 눈에도 그들이 UN에서 연설하는 모습이 포착될 정도의 위상을 갖춘 것 같다. 방탄소년단 멤버들 가운데 오빠도 있지만 동생도 있을 정도로 나이를 먹어 버린 동생과 함께 TV를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쟤들은 왜 저렇게 인기가 많은 걸까? 난 늙어서 그런가, 쟤네 좋은지를 모르겠던데.” “잘 하긴 잘 하는데, 쟤네만큼 하는 애들 되게 많은데, 왜 쟤네만 저렇게 잘 되는지, 난 그게 궁금해.” “난 쟤네 누가 누군지도 몰라. 누가 누군지는커녕, 쟤네 여섯 명 이름 자체를 다 몰라.” “......오빠, 쟤네 일곱 명이야.”

 

그러니까, 여기가 모순과 편견이 숨어있는(사실 대놓고 있는) 지점이었다. ‘쟤네 좋은지를 모르겠어쟤네가 몇 명인지도 몰라가 양립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좋은 가수인지 아닌지, 어떤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려면(그 판단이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어쨌거나), 기본적으로 판단 대상에 대해서 알만큼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이름도 멤버 수도 모르는 상황에서 쉽게 판단을 내려버리면 안 되는 게 아닐까? 그것은 스치듯 노래를 한 번만 들어봐도 답이 나올 정도로 내 식견이 탁월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내가 이미 형성된 취향이나 관점에 매몰되어 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면서도 스스로는 그걸 모르는 꼰대가 되고 있는 징후가 아닐까? 이런 비극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그건 아마도 싱글 포스터와 단체 포스터를 포함 도합 서른두 개의 눈알로 syo를 포위공격 했던 동방신기와, 그네들의 신기하고도 놀라운 이름들을 구구단 외듯 읊어야 했던 트라우마, 그리고 그 모든 공포를 조장했던 지옥에서 온 초6 내 동생의 탓도 있겠지만, 면역 없던 어린 시절 편견에 노출되어 열심히 그 편견에 복무했던 내 무지의 발로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2

 

사물을 진정으로 안다는 것, 즉 적합하게 안다는 것은 그 대상을 어떻게 다룰지, 대상의 자극에 어떻게 대응할지, 대상을 어떻게 포용할지를 안다는 말이다. 진정한 읾은 우리의 진정한 필요에 부적합하게 사물의 어떤 측면을 자의적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진정한 앎은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해당 사물의 적합한 관계를 아는 것이다. (171-172쪽)

 

라는 말에 기대어 꽤 긴 시간 유튜브를 방랑하면서 방탄소년단의 뮤비며, 공연이며, 팬들이며, 팬들이 자지러지는 모습이며, 팬이 아닌 사람들이 입덕하는 모습이며를 열심히 찾아본 것이다. 저러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고, 어쩐지 그 이유를 모르고서는 21세기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하지만 syo는 춤을 모르고 음악을 몰라서, 저 잘생긴 소년들이 되게 잘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다른 다수의 잘생긴 소년 소녀들에 비해 유독잘하는 것인지를 알아보기가 힘들었고, 그것은 곧 왜 수많은 소년 소녀들 가운데 바로 저 소년들만이 세계를 진동시키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물음의 큰 의미는 답에 도달하는 데 있다기보다 대체로 물음 자체에 숨어있기 마련이라, 나는 왜 이런 걸 묻고 있지? 하며 스리슬쩍 나란 놈은 대관절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가를 되새겨보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를테면, 먼저 syo는 도대체가 춤을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을 판단하는 데 예술적인 감각이 얼마만큼 필요한지와 관련된 문제다. 그리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무엇인가에 대해(특히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감정과 채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식견을 갖추고 있으리라 자연스레 가정하는 오만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예술은 언제나 평가되어야 한다. ‘함부로 평가하지 마세요라는 실은 평가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욕하지 말라는 말이고, 누구도 칭찬에 대한 대답으로 저 말을 하진 않는다. 인간은 세상 모든 것을 평가한다. 땅바닥에 구르는 낙엽을 보고도 환경미화원의 근무 태도를 평가하는 평가의 동물이다. 예술이 무슨 용 빼는 재주 있다고 저 혼자 저울에서 달아날 수 있을까. 단지 평가 전에 우리가 어디까지 알아야 하고, 어디까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하는지가 논의의 대상이 될 뿐이다. ‘니가 한 번 해 보세요라는 말을 피하기 위해, 평가대상보다 우월함을 갖춘 이후에야 평가 자격이 주어지는 것일까? 거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소위 전문가소리를 들을 만한 경험, 실적, 혹은 학위 따위가 필요한 것일까? 어쩌면 그냥 아무나 해도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소설을 평가하려면 최소한 어느 정도의 문해력, 알레고리를 읽어내는 눈치, 내가 캐 낸 주제를 뒷받침하는 최소한의 배경지식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음악에 대해서, 춤에 대해서는 뭘 얼마만큼 알고 있어야 판단할 수 있을까? 방탄소년단에 대해, 칭찬이든 아니든 syo가 뭐라고 할 수나 있는 걸까?

 

두 번째로, syo성공의 큰 요인으로 자연스럽게 실력을 지목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대 그렇지 않더라는 사실을 무수히 경험하고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고 실력을 쌓기가 어렵긴 해도 완전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실력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렵긴 해도 완전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고, 심지어 이놈의 세상은 이걸 오히려 가능 쪽으로 점점 더 가까이 끌고 가는 중이다. 실력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실존한다고 해도 그건 그야말로 추상이라 수치로 구체화하거나 깔끔하게 서열을 매기는 일이 불가능하다. 그 틈새를 그냥 행운, 시대변화에 동반된 행운, 각양각색의 연과 맥들, 심지어 채점자나 면접관, 바이어의 그날 아침 밥상에 고기반찬이 올라왔는지 아닌지 따위의 돌발변수들이 개입하여 성공 방정식에 미묘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큰 성공일수록 그렇다. 작은 성공은 큰 노력으로 이루어지지만, 큰 성공은 큰 노력으로 부족하고 하늘의 뜻이 조금은 필요한 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공사례를 보면서, 성공한 이가 노력으로 성공을 일구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자동추측의 밑바닥에 실은 그랬으면 좋겠네가 깔려있다. 노력이,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실력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세상이 옳은 세상이고, 이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여기서 세 번째로, syo는 당위와 현실, 법학자들이 좋아하는 말로 SollenZein을 혼용 또는 혼동하는 경향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방탄소년단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피 땀 눈물>이 흐르다 못해 말라버릴 정도로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아이돌 들이 과연 그들보다 피, , 눈물을 적게 흘렸는지를 비교해 보기 전까지는, 그들의 노력과 성공을 일차선 도로로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방탄소년단은 노력했고 성공했다라는 명제는 엄연한 현실이지만 이를 끊임없이 노력하면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식의 사례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무수한 피해자만을 양산할 뿐이다. 100만 명이 노력하던 세상에서 1000만 명이 노력해도, 왕좌는 하나에서 열 개로 늘어나지 않는다.

 

요컨대,

노력으로 성공했다에 살짝 손을 대어

노력만으로 성공했다로 치환하는 작은 무심함이,

노력하는 이가 성공하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 은근슬쩍

노력하는 이가 성공하는 세상 이 좋은 세상으로 바뀌는 데 힘을 보탤 수도 있는데,

그 메커니즘에 복무하지 않도록 좀 더 꼼꼼하게 생각하고, 그 꼼꼼함을 위해 더 많이 찾아보고, 듣고, 느낄 여지가 syo에게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3

 

생존하기 위해 수다한 다른 것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스피노자가 욕망을 "그 자신 안에서 존속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정의내리는 코나투스로 언명한 까닭이다. 그 자신인 것으로 존재하려면 그 자신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 정체성은 다소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것들, 그것들과의 결합, 만남에 의존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으로 존재하기란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것아 아니라 노력과 탐색, 욕망을 함축한다. (40-41쪽)


조금 더 메타적으로 바라보면, syo라는 놈은 저렇게 묻는 인간이라는 사실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내달리는 의문의 꼬리를 잡고 몸통 위로 기어올라 그 얼굴을 확인하면, 언제나 저렇게 생긴 의문들을 따져 묻는 인간이라는 것. 똑 떨어지지는 않지만 언제나 비슷한 과녁을 노리고 있고, 그 과녁을 바라보며 화살을 거는 활줄이 마르크스였다가, 루쉰이었다가, 소로였다가, 때로는 방탄소년단이기도 한 셈이다. 날아가는 화살의 궤도가 활 쏘는 이의 몸과 마음에 달렸듯, 활 쏘는 이의 몸과 마음이 또 활에 달려 있기도 하다. 어쩌면 과녁은 그냥 그 자리에 있는 물건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고, 진짜는 오로지 활을 들고, 화살을 메기고, 시위를 당기고, 숨을 멈추고, 보고, 놓고, 날아가고, 보고, 숨을 들이쉬는 과정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언가 만나고, 그로 인해 생각을 하고, 생각하는 스스로의 몸가짐을 한 번 더 추스른다면 그 만남이 충분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4

 

그리고 그 와중에 또, 이런 생각이 드는 건 피할 수가 없다. 난 저 아이들만큼 치열하게 살지도 못했고 못할 것이므로 이번 생은 안 되겠지. 우주가 생긴 그 날부터 계속, 무한의 세기를 넘어서 계속, 나는 전생에도 아마 다음 생에도 영원히 안 되겠지. 이 모든 건 우연이 아니니까...... DNA.



아무래도 전 <DNA>가 제일 좋더라구요.


그것은 또한 새로운 기쁨으로 열리는 것, 즉 우리에게 낯설어 보이는 대상과의 적합성을 찾아낸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신체에 더 많이 익숙해져야 하고 신체가 더 많이 민감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신체가 다른 사물의 행위와 동일한 것을 더 많이 만들어낼수록 다른 사물의 본성과 공통된것을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된다. 신체가 더 많이 민감해질수록 셀 수 없이 많은 정서를 구분하고 느낄 수 있게 되며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스포츠 훈련, 여러 기예를 닦는 것, 악기를 다루는 일, 식당이나 양조장에서 그러하듯 미각이나 후각을 훈련하는 일, 감각적 즐거움의 경험, 사막을 횡단하는 일이나 만년설을접하는 등의 극단적 상황이나 전혀 낯선 상황에 처하는 일 등은 신체가 새로운 현실에 접할 수 있게 해주고 이는 그 신체에 새로운 역량을 부여한다. 경험하기 이전에 무서웠던 일, 사막의 건조함이나 만년설과 같은 것이 우리와 조화로운 공통된 접점을 가지게 되고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 우리가 더 많은 사물에 익숙해질수록, 그것들을 더 편하게 느끼게 될수록 우리가 슬픔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는 줄어들고 경험한 것만큼의 기쁨을 얻게 된다. (187-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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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11-29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요컨대, 문단 너무 좋아요. 노력한 사람의 문장이예요.

2. 저도 방탄의 인기 요인이 궁금하기는 해요. 가사, 도전적이고 사회비판적인 가사나 프로듀싱 능력 등을 이유로 대기도 하던데요.
글쎄요. 제 생각엔.... 워낙 한류 시장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그런 애들, 잘하는 애들이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다른 그룹에 비해 특별히 잘한다기 보다는 서로 경쟁하다가 잘하게 되었다는....
그리고 케미? 멤버간의 케미가 다른 그룹에 비해 좋은 것 같아요. 그리하여 시너지효과... 제가 보기엔요.

3. 전 <아이돌>이 좋아요. You can call me artist. You can call me idol. 아님 어떤 다른, 뭐라해도 I don‘t care!
그리고 RM (하트뿅뿅!) 스피노자는 안 보임. 방탄 땜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8-11-29 15:10   좋아요 0 | URL
단발님의 요런 댓글을 대충 예상은 했습니다만, 왜 갑자기 RM인가요. 최애가 바뀌셨나요 ㅎ

소년 소녀들 전부 예쁘고 악착같이 열심히 하는데 다들 잘 됐으면 좋겠지만요, 이 세상은 또 그런 게 아니니까요....

카알벨루치 2018-11-29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이 사람!!! 대형사고쳤네 ㅋㅋ

syo 2018-11-29 15:11   좋아요 1 | URL
방탄을 깐 것도 아닌데 무슨 대형사고씩이나.... 이러다 사람들 오해해요. 살려주세요 ㅎ

stella.K 2018-11-29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입니다.
저도 방탄은 뭐가 좋은지 모르겠더군요.
뭐 걔들 뿐이겠습니까?
대중 음악은 자기 시대에 들었던 음악 그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저는 이문세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댄데
지금도 그 이상으로 좋은 가수를 못 찾겠더군요.
물론 성량이나 환경이 그때의 가수들 보다 월등이 좋아졌는데도
정서가 다르다고 보는 거죠.
지금 방탄 좋다고 하는 아이들이 앞으로 10년 20년 뒤에도 좋아할 겁니다.
그러면서 방탄 같은 가수들이 안 나온다고 아쉬워하며 꼰대가 되어가겠죠.
사람은 그런 것 같아요. ㅋ

syo 2018-11-29 16:29   좋아요 1 | URL
저는 방탄 좋던데요? 나는 살고 싶다ㅋㅋㅋㅋㅋ

그렇지만 ‘뭐 걔들 뿐이겠습니까?‘ 에서부터는 모든 말씀에 100% 공감합니다.
특히 마지막 세 줄은 최고 ㅎ

stella.K 2018-11-29 16:33   좋아요 0 | URL
야하~! 제가 스요님께 칭찬도 들어보고
이거 앞으로 댓글 더 잘 써야겠는데요?ㅋㅋㅋ

syo 2018-11-29 16:35   좋아요 1 | URL
무슨 말씀이세요 ㅋㅋㅋ 제 칭찬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요ㅎㅎ
스텔라님은 글도 댓글도 항상 잘 쓰시는데요.

목나무 2018-11-29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퇴근을 기다리며 조금 여유가 있는 이런 날엔 syo!
오늘 글도 느므 좋습니다!
그나저나 귀여운 여동생은 요즘은 누굴 좋아하려나요? 설마 아직도 동방신기????

syo 2018-11-29 20:2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감사합니다!
동생의 덕질족보는 제가 샤이니까지는 따라갔는데 그 이후는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psyche 2018-11-29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락 싸면서 간만에 북플에 들어왔다가 방탄이라는 말에 눈이 확 떠졌습니다. ㅎㅎ

방탄의 인기가 워낙 폭발적이니 그 원인을 한두가지로 말 할 수는 없겠지만 저와 제 주변의 의견은 무엇보다 가사의 힘!입니다. 가사가 예술이에요. 자신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줘서 그런 가 구절구절이 가슴을 찌르고 희망과 위로를 주거든요. 사실 저는 아들뻘 청년들이 해주는 말에 위로받는 다는게 좀 민망하기도 했는데 뭐 어쩌겠어요. 그게 사실인걸. 요즘처럼 사는 게 참 힘들다 싶을 때, 마구마구 우울속으로 파고 들어갈 때 조금이라도 몸을 일으킬 힘을 주더라고요.

저는 좋아하는 방탄 곡이 너무 많아서 한개만 뽑는 것은 불가능하고 요즘 제 맘을 울리는 곡으로 RM 의 ‘지나가‘

syo 2018-11-30 10:14   좋아요 0 | URL
프님의 방탄사랑은 익히 알고 있던 부분이지요 ㅎㅎㅎㅎ

말씀하신대로 정말 가사가 좋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저는 주로 사랑노래를 좋아하지만요 ^-^

입덕까지는 못 돼서 미친듯이 들어대지는 않겠으나 한 번 들을 때 흘리지 않고 집중해서 음미하게는 되었지요 ㅎ

공쟝쟝 2018-12-01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먹나봐요.. 저도 지난 명절때 유튭보면서 방탄 공부했는데.. 랩몬 빼고는 지금도 얼굴 구분을 잘 못하겠어요.. 하지만 역시 dna는 좋구.. 몇년 전에 동생분이 상심이 크셨겠네요.. 동방신기라니... 이젠 아련한 믹키...읍읍..😷😷

syo 2018-12-02 15:12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그 전에 이미 털고 나와서 믹모 남성의 사건에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았던 동생입니다.

그리고 원래부터 시아준수 팬이었더라구요.

kpio99 2018-12-0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얼마 전에 봄날이라는 노래를 듣고 꽂혔어요. 그런데 그 노래가 방탄소년단 것이더라고요. 유튜브에서 뮤비를 봤는데 그 안에 세월호, 젊은 세대가 겪는 아픔에 대한 공감 등이 담겨 있더군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방탄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철학을 가진 사람들 같아요. 물론 다른 연예인들이 그렇지 않다는 게 아니지만요.

syo 2018-12-02 15:13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이 다양한 관점으로 방탄의 성공 요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다 공감이 가더라구요. 백진호님의 말씀 역시 그렇구요.

입덕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도 그 소년들이 승승장구했으면 좋겠네요.

행복한책읽기 2021-01-06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참한 날엔 스피노자 리뷰 추천이라 보니 쇼님이었군요. 2년전에도 활동을 많이 했고, 입담 글발이 장난 아니었군요. 스피노자 들으러 왔다 서른두 개 눈동자만 새기고 갑니다 ㅋㅋ

syo 2021-01-06 20:38   좋아요 0 | URL
ㅎㅎㅎ 한참 철없이 날아다니던 시절이네요. 허허허.
 

 

인간의 화석

 

 

1

 

어머니의 말처럼 내가 웃는다면, 돌아간 아버지의 웃음으로 내가 웃는다면,

 

나의 웃음이 아버지의 웃음을 닮았듯이, 아버지의 웃음이 아버지의 아버지의 웃음과 또 닮았다면, 미소 짓는 입꼬리나 웃음의 끝소리를 붙잡고 한없이 하염없이 거슬러 올라 태초의 웃음까지 가 닿을 수 있을까. 말도 없고 불도 없던 시절에 인간이 지닌 단 하나의 도구였을 그 표정까지 미칠 수 있을까. 큰 나무를 미는 바람처럼, 큰 나무를 쪼개는 번개처럼, 인간의 눈가를 밀고 입가를 쪼개고는 한순간에 사라지는 그 신비한 전설을 만져볼 수 있을까. 돌아간 아버지의 웃음을 오래 기억하면, 많이 기억하면, 많이 기억할 수 있도록 많이 웃게 하였더라면 좀 더 수월했을까.

 

많이 웃어야겠다. 행여 누군가 첫 번째 웃음으로 찾아가는 행로를 내 웃음에서 시작할지도 모르니, 최대한 많이, 오래, 웃음을 남겨놓아야겠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사는 이들의 마음에다 웃음을 총총 박아놓아야겠다.




 스페인 여행에서 어느 도시가 가장 좋았냐는 물음에 곰곰이 생각하다 마드리드를 꼽았다호안 미로의 작품이 지천이던 바로셀로나나 남부 스페인 바다를 파란 쟁반의 은구슬같이 품은 말라가가 근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내가 마드리드를 선택한 이유는 그곳에서 많이 웃었기 때문이다.

 

 삶이 너절할수록 간절해지는 것이 여행이다.

 여행하고 싶다는 바람도 한 꺼풀 벗겨보면 웃고 싶은 마음에 다름없을 것이다.

정은우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손에 잡히지 않아서이해할 수 없어서다 이해되지 않아서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이 세상엔 있다효율로만 평가하려고 하는 이 세상에 비효율로 남아 있어서 고마운 것들우리를 간신히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사실 그런 비효율들이다너무 쉽게너무 자주너무 무심히모든 것에 효율을 들이대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는 단 한 번의 심벌즈를 위해 한 시간 넘게 준비하고 있고또 누군가는 0의 존재가능성을 밝히느라우주 탄생의 가설을 세우느라한 문장으로 우리를 구원하느라 밤을 새우고 있다라고 생각하면 마음 어딘가가 편안해진다따뜻해진다.

김민철하루의 취향


야마토, 내일도 만나자그리고 별것도 아닌 얘기를 날이 저물도록 하자.

카와하라 카즈네아루코내 이야기!! 2

 


 

 

 

2



초기의 대포는 가볍고 짧았으며튼튼하지 못했다무게가 130킬로그램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나무 받침대(포대)위에 대포를 올려놓고 쏘았다화통을 만드는 금속이 약해서 옮기다가 몸체가 깨지는 일도 다반사였다이 때문에 대포를 전쟁터로 옮기는 게 아니라 대포를 만드는 장인들이 전쟁터를 따라다녔다즉 전투가 벌어지면 장인들이 전장으로 가서 주변 지역의 종을 징발한 후 그것을 원료로 해서 대포를 만들었다전투가 끝나면 장인들은 대포를 녹여 다시 종을 만들어주었다.

정기문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

 

종을 녹여 대포로 만드는 마음과 대포를 녹여 다시 종으로 만드는 마음의 간격에 대해서 생각한다. 수레에 실려 대장간으로 들어가는 종을 바라보는 마음과, 사람을 죽이거나 성벽을 파괴하고 돌아와 대장간에서 다시 나오는 종을 바라보는 마음의 간격에 대해서 생각한다. 마을의 종루에 걸려 하루의 끝을 알리던 종의 마음과, 한 사람의 끝을 알리고 돌아온 종의 마음 사이에 있을 간격에 대해서 생각한다.

 

인간은 대포 하나 만들 여유가 없어도 기어이 싸우고 무너뜨리고 죽인다.

 

 

 

3



 형단풍이 빨갛게 물드는 거 왜 그런지 알아?

 가을이잖아.

 노폐물이야.

 뭔 소리야.

 노폐물이라고.

 뭐라는 거야.

 나무가 죽어 가면서 배출하는 오물을 보고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관광하고 사진 찍고 그러는 거라고.

 야너는 쫌.

 한창 살아 있을 때푸를 때는 왜 아름답다고 하지 않지?

 말을 알아듣게 해.

 푸를 때는 왜 덥다고 짜증만 내냐고.

 여름은 덥고 더우면 짜증나지당연하잖아.

 다 푸르니까 모르지 사람들은살아 있는 그 함성을시끄럽다고.

 야최신우너도 그래.

 내가 뭐.

 시끄럽다고.

 ......

 너도 푸르고.

 ......

 아름답고.

 ......

 하루만 더 살아 줘.

 뭐 달라진다고.

 제발하루만.

 다를 게 뭐냐고.

 어떻게든 찾아볼게내가.

 뭘 해형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너한테 꼭 필요하다면.

최진영비상문 

 

잃어버린 친구가 있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꼭 필요했을 그 친구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은 우리들은 무엇을 해줄 수 있었을까. 왜 그랬을 지에 대한 이런 저런 추측들은 금세 추문이 되고, 이내 추억이 되었다. 그러나 가끔 깊은 밤이면, 잠 못 이루고 생각을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그 추억에 가닿는 밤이면, 나는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 친구의 것이 되지 못한 이유는 내 것 역시 되지 못했고, 끝내 이유를 찾지는 못했으나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으니 살지 말아야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기 전에 잠에 빠지는 통에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살아야 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가 내 이유가 되지 못해서 결국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는 산다. 내가 이유라고 믿었던 것들 역시 불면의 밤을 만나 깊이 해부되다 보면 시체가 되어 새벽과 함께 시궁창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나는 다음날 아침 다시 이유 없는 하루를 위해 이를 닦고 수염을 깎는 것이다.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새로운 이유를 찾아 밖으로 나선다. 하루짜리, 운이 좋으면 한 달, 한 해를 기대고 살 이유를 찾기도 하지만, 불면의 밤은 언제나 다시 온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차피 이유를 찾는 일은 계속 실패하고 궁극적으로 실패한다. 그렇다면 내가 친구를 잃은 까닭은, 그 친구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나갈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형은 최신우를 살려 놓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살아가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해서라는 말은,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것을 찾지 못한다는 말로도 읽히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는 말로도 읽을 수 있다.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건 모두 다르다. 그러나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안다. 그건 대개 비슷하다.

 

 

 

-- 읽은 --



정기문, 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

월터 앨버레즈, 이 모든 것을 만든 기막힌 우연들

최진영 지음, 변영근 그림, 비상문

김상현, 이성의 운명에 대한 고백 순수 이성 비판



 

-- 읽는 --



박이문, 하나만의 선택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유상균, 시민의 물리학

움베르토 에코, 0

마르셀 에나프, 진리의 가격

정철현,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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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11-27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을 위한 종을 만든 기술이 대포 만드는 기술로 전이 되었다는 아이러니요...^^

syo 2018-11-27 23:01   좋아요 1 | URL
되게 객관적인 문단이었는데도 이상하게 턱 걸려서 오래 읽게 되더라구요. 대포와 종이라니, 정말 아이러니의 극치 같죠?

북다이제스터 2018-11-28 22:39   좋아요 1 | URL
저도 얼마 전 읽은 <전쟁의 세계사>에서 동일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어, 읽다가 동일하게 턱 걸렸습니다.
웬일인지 같은 느낌이셨나 봅니다 ^^

2018-11-28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8 0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11-28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나만의 선택>이 <하나님의 선택>으로 보여 쇼님이 개종했나 싶어 깜놀~머 눈에 머만 보인다더만 ㅎㅎ

syo 2018-11-28 16:5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알라딘의 신앙인1 카알님이 댓글을 다시고 신앙인2 스텔라님이 좋아요를 누르셨군요!

카알벨루치 2018-11-28 16:58   좋아요 0 | URL
신앙인3 달아도 된답니다~쇼님이!ㅋㅋ

syo 2018-11-28 17:57   좋아요 0 | URL
거룩한 숫자 3을 제가 가질 수가 있나요. 3000000번 번호표 뽑고 기다리겠습니다.

북프리쿠키 2018-11-28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여기 종횡~!! ㅋ

syo 2018-11-29 00:04   좋아요 1 | URL
종횡놀이가 이어지고 있군요. 뿌듯합니다 ㅋㅋㅋ
 

 

추억 이면異面

 

 

1

 

이제는 없는 밤이 오늘은 있다. 수도꼭지를 열면 불이 콸콸 쏟아질 것만 같은 밤이 호수 주위로 겨울을 빙 두르고 있다. 사랑이 늘 그렇듯이 사랑의 추억 역시 아차 하는 사이에 마음을 데우고 태우고 얼른 재가 되었으나, 사람이 늘 그렇듯이 사람의 사랑 역시 그 재를 뒤지고 빚어 겨울처럼 밝고 하얗게 도시를 세운다. 새하얀 도시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날의 첫 키스를 영원히 반복한다. 46억 번, 137억 번의 첫 키스가 끝나면 도시는 다시 재로 무너질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귀를 파 주거나 새치를 뽑아주러 방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날의 달뜬 고백이 달로 뜬 하늘을 뒤로하고 그림자 따라 아늑하고 슬픈 성냥갑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서로의 머리를 부딪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두 개비의 성냥으로 나란히 누울 것이고, 불이 쏟아지는 수도꼭지를 잠가 둘 것이다. 밤으로 녹을 것이다. 인화될 것이다. 재 될 것이다. 무한히 되돌아오는 겨울을 기다릴 것이다. 호수가 함께 기다려 줄 것이다.

 



 "좋아." 슈쿠마가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을 때그 포르투갈 식당 말이야난 웨이터에게 팁 주는 걸 잊어버렸어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그곳으로 가서는 그 웨이터의 이름을 알아내서 지배인에게 팁을 맡겼어."

 "단지 웨이터에게 팁을 주려고 서머빌까지 그 먼 길을 다시 갔단 말이야?"

 "택시를 타고 갔어."

 "웨이터에게 팁 주는 걸 왜 잊어버렸는데?"

 생일 양초는 다 타버렸지만그는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또렷이 그릴 수 있었다약간 기울어진 커다란 눈도톰한 포돗빛 입술두 살 때 높은 의자에서 떨어져 턱에 생긴아직도 눈에 띄는 쉼표 모양의 상처슈쿠마는 한때 자신을 압도했던 그녀의 아름다움이 나날이 시들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전에는 불필요하게 보였던 화장품이 이제는 필요했다용모를 개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그녀를 또렷이 드러내려면.

 "식사가 끝날 무렵당신과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묘한 느낌이 들었어." 그는 그녀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처음으로 인정하는 말을 했다. "그게 내 정신을 산만하게 한 것 같아."

줌파 라히리일시적인 문제축복받은 집


한 편의 그림을 이해한다는 건 우리가 그 그림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이 공간이 오히려 먼저 아주 특정하고도 다양한 곳들에서 돌진해 나오는 것이다이 공간은 우리가 아주 중요한 과거의 경험들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각도와 구석에서 자신을 열어 보인다말하자면 무언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모스크바 일기

 

연애 9결혼 후 1우리 부부는 많은 부분을 양보했고타협했고조정했다. '바깥세상'에 기대어 현실을 외면하지 않아도 된다결혼을 정말 잘했구나싶은 순간이 있는데 그건 저녁을 먹고 가볍게 동네를 한 바퀴 돌 때이다두 손을 마주 잡고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며같이 바람을 맞고나눠 마시는 한 잔의 물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여서 다행이다새벽 3시에 나는 다른 이유로 깨어 있다피가 도는 사람이 옆에서 잠들고나는 책을 읽다 잠든다.

조안나당신을 만난 다음 페이지

 

 


2



 교토대학의 중세철학 연구실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읽습니다라틴어로 쓰인 책인데그 내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대합니다.

 “다 읽으려면 이백 년 정도 걸리겠지.”

 그렇게 말했던 교수님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지금도 연구실에서는 그 책을 읽고 있을 겁니다정신이 아득해질 듯한 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것은 눈앞에 있는 한 행 한 행과 마주하는 시간이고 거기서 얻은 것들입니다다 읽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시미 이치로마흔에게

 

뭣이 중헌디는 인생의 화두 급 명언이 틀림없다. 인간은, 아니다, 인간이라고 하면 안 될 것 같고, 그러니까 syo는 가만히 있을 때도 뭣이 중헌지를 모르고 가만히 있지 않을 때는 더더욱 모른다. 질문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질문의 의미가 아니라 질문이라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순간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는 것, 지금 품고 있는 생각을 계속 품는 것, 지금 쥐고 있는 권리나 권위를 계속 쥐고 있는 것이 뭐가 중요하냐고 물어보는 순간이 자주 필요하다. 물어보는 순간 흩어지는 것들은 흩어지게 두어야 하고, 내가 중히 여긴 모든 것들이 결국 다 흩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무엇인가를 꾸준히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지우고, 지우고, 또 지워나가다, 결국 중요한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 자체가 중요하지 않게 되는 순간.

 

 

 

3



지금은 말이야거기 어른들이 많이 힘드실 수 있지 않을까힘드신데 너희들을 보면 강이 생각이 더 많이 날 수도 있어.”

도우는 우유를 마시지는 않고 손가락 끝으로 컵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러니까 나중에 가는 게 좋겠어.”

세영의 말이 끝나자도우가 있는 힘껏 컵을 잡았다.

나중에...... 언제요엄마시간이 없어요.”

정이현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오늘의 어려운 일을 내일의 어려운 일로 만들 수 있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을 속이곤 한다. 오늘 전해져야 했던 말, 오늘 나누어주어야 했던 체온, 오늘 지켜주어야 했던 마음, 오늘, 오늘, 오늘, 그 수많은 오늘들은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곳으로 가 외로이 죽고, 우리에겐 내일만이 남는다. 결코 오지 않는 내일만이


사실 누구나 안다. 내일의 우리는 여전히 오늘의 우리일 것이고, 우리가 오늘 외면한 모든 것들은 내일도 외면 받을 것이며, 오늘의 내일은 내일의 내일로 한없이 지연될 뿐, 오늘을 대신할 내일 같은 것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일은, 내일 온다.

 

그리고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한 오늘들의 공백은, 점점 더 무거운 질량으로 쌓이고 덩치를 키워나가다 마침내 폭발하여 날카로운 파편처럼 우리의 일상을 찢어놓곤 한다.

 

그러니까 늦지 말자. 늦추지 말자. 놓지 말고 놓치지 말자.

 

 

 

-- 읽은 --



조홍식, 문명의 그물

데이브 레비턴, 과학 같은 소리 하네

김정운, 에디톨로지

기시미 이치로, 마흔에게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 읽는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읽거나 말거나

월터 앨버레즈, 이 모든 것을 만든 기막힌 우연들

유상균, 시민의 물리학

카롤린 엠케, 혐오 사회

정기문, 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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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6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6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11-27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주에 도서관 가면 [당신을 만난 다음 페이지] 빌릴거에요. 마침 저희 도서관에 있더라고요? 헤헷.

syo 2018-11-27 09:3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이 도서관을 이용하시는 모습을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다락방 2018-11-27 09:53   좋아요 0 | URL
[문맹]과 [아무튼, 방콕]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답니다? 으하하하하

syo 2018-11-27 10:45   좋아요 0 | URL
이제부터 막 막 막 읽는 것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11-27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횡!무!진!짜 넘한다 쇼님! 저만치 앞서 달려가시는구만유

syo 2018-11-27 09:38   좋아요 0 | URL
와, 종횡무진 그거 안 잊고 복수하신다 ㅋㅋㅋㅋㅋㅋ

카알벨루치 2018-11-27 13:00   좋아요 0 | URL
아...뒷끝이...ㅎㅎ

프리즘메이커 2018-11-28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활의 노래에도 추억이면이라는 숨은 명곡이 있죠. 하루에 몇시간 정도 책을 읽으시는지 궁금해집니다.

syo 2018-11-28 18:05   좋아요 1 | URL
슬픈 노래 래디오로~ 흘러 비를 부르면~ 창 밖을 보오던 너의~ ♬ ㅎㅎㅎ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뭔가 읽고는 있습니다.
꼭 독서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