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 백석, 기역
1
"빌런은 왜 태어나는가! 비대한 인정욕구를 가진 히어로가 부족한 슈퍼파워를 긁어모아 폭발시키려다 보니 어둠의 길로 빠져 버리고 마는 거야. 충분히 뜨거운 불씨는 로켓을 우주로 날려 보내지만, 어중간한 불씨는 성층권에 가지 못하고 떨어져 땅 위를 불바다로 만드는 거라고."
_ 임태운,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syo가 살며 만난 수많은 히어로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슈퍼파워를 입으로(혹은 키보드로)만 알려주었다. 그들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갈라 칠 수 있겠다.
1. 내가 인마, 응? 지금은 좀 찌그러졌어도 응? 고생대 때는 인마, 내가 바다를 주름잡은 몸이야 내가, 알아? 와나, 진짜 그땐 완전 내 세상이었는데. : 삼엽충형
2. 내가 시대를 잘 못 만나서 이렇게 찌그러져 있지만, 언젠간 봐라, 이거 내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만 빵 터지면, 와나, 진짜 그땐 완전 나 없인 세상이 돌아가질 않을 걸? : 18차산업혁명형
안타깝게도 그들 중 누구도 액션으로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업적도 포텐셜도 syo에게는 그저 두메산골 화전밭 이름 모를 영감님 깨 터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고. 그럼에도 한 듯 안한 듯 하는 화장처럼, 관심이 있는 듯하지만 또 과하지는 않은 듯한 신묘한 맞장구 포인트를 찾아내겠다고 너는 부단히도 노력을 했지, syo, 이 자본주의의 짚신벌레 같은 놈아......
어쨌거나, syo를 스쳐간 저 수많은 입히어로들은 다시/결국 히어로가 되었을까? 시민들의 박수소리도 빌런들의 한탄 소리도 들리지 않고 세상은 언제나처럼 언제나 같기만 하다.
어쩌면, 그 히어로들은 어딘가에서 자신을 히어로라 믿는 작은 빌런이 되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몰 빌런 인 에브리데이 에브리나잇. 정말 나쁜 놈들은 비일상 영역의 빌런이 된다. 대체로 자기가 히어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서식처를 옮겨와서 정신을 살짝 놓으면, 아차 하는 순간 일상 속 빌런이 되고 마는 것이다. Family hero but Company villain, Company hero but Subway villain, Political hero but Sexual villain.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지.
2
어느 날 백석이 연둣빛깔이 나는 더블버튼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양복은 매우 고급스럽게 보였다. 어깨를 으쓱하며 그가 말했다.
“이건 이백원을 주고 맞춘 양복이야.”
신현중과 허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30원에서 40원 정도면 살 수 있는 양복을 입고 있을 뿐이었다. 2백원이라면 서너 달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돈이었다.
“역시 자네는 모던보이가 틀림없어.”
“당장 장가를 들어도 되겠군.”
백석은 보통 사람들이 한 켤레에 20~30전짜리 양말을 신고 다닐 때에도 1원이나 2원을 줘야 살 수 있는 양말을 신었다.
“양말이라고 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보이지 않는 것일수록 나는 완벽하게 챙겨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지 않으면 대체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백석은 빈틈이 없었다. 깔끔하지 않은 모든 것은 그의 적이었다.
_ 안도현, 『백석 평전』
백석의 시를 보노라면, 전혀 상상하기 어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시로만 백석을 만난 syo는 백석이 동치미 국수 세 그릇 먹고 툇마루에 앉아 구수하게 방귀를 뀌고, 자고로 막걸리는 나발이지, 이러면서 주전자 부리에 입 대고 들이켜다 친구들한테 등짝 스매싱 당하고,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사람 생각에 눈 오는 밤이면 얼룩얼룩 울기도 하는 그런 인간형일거라 굳게 착각하고 살아왔다. 역시 사람은 알고 볼 일이고, 대충 알고 깝치면 안 될 일이다.
3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_ 김사인, 「바짝 붙어서다」전문
1월에 결혼하는 친구에게 그간의 축가 준비 상황을 검사받는 날이었다. syo가 사는 곳은 가장 가까운 코인 노래방도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하는 오지다. 이래 놓고 광역시라 할 수 있는가, 시장의 멱살을 잡고 싶다. 잡아봐야 아무 소용도 없겠고, 시장이 멱살 잡힐 이유 역시 하나도 없지만. 백화점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횡단보도를 건너며 syo가 말했다. “와, 갑자기 열라 춥네, 바람도 엄청 불고......” 이 대사의 ‘불고’가 입 밖으로 나올 때쯤,
ㄱ이 보였다. 그건 정말 ㄱ이었다. ㄱ은 언제부터 ㄱ이었는지, ㄱ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어쨌거나 ㄱ이 되고나서부터는 계속 ㄱ일 수밖에 없었던 건지, >조차 되지 않고(못하고) 꿋꿋이 ㄱ이었다. ㄱ이 ㄴ을 밀고 가고 있었다. 무거운 종이를 잔뜩 실은 ㄴ은 이미 ㅂ이 되어있었지만, ㄱ은 끝없이 ㄱ이었다. 터덜터덜 ㄴ의 바퀴가 도로를 긁는 소리가 났고, ㄱ의 윗도리는 깡똥했고, ㄱ의 척추 뼈 가장 아래쪽 부분이 헐벗고 낮은 산처럼 도드라져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 바람맞는 부분이 ㄱ의 해발고도 지점일 만큼, ㄱ은 하염없이 ㄱ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는데, 눈물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입장조차 잘못된 것이 아닐까, ㄱ에게 한 톨도 도움이 되지 않는 눈물로 나 자신의 양심에만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해진 찰나, ㄱ은 ㄱ자 모퉁이를 ㄱ처럼 꺾어 돌아갔다. 이래 놓고 광역시라 할 수 있는가, 시장의 멱살을 잡고 싶다. 잡아봐야 아무 소용도 없겠지만, 시장이 멱살 잡힐 이유는, 정말 하나도 없는가?
-- 읽은 --
장강명 외,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데라치 하루나, 『같이 걸어도 나 혼자』
송찬호, 『10년 동안의 빈 의자』
-- 읽는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채호석, 안주영, 『한국 현대문학사를 보다 2』
안도현, 『백석 평전』
이진오, 『밥벌이의 미래』
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
이다혜,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옌스 죈트겐, 비탈리 콘스탄티노프, 『교양인을 위한 화학사 강의』
한강 외, 『작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