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맛을 준비해 보았사온데…
짠맛
정의definition는 속인다 (이하에 쓰이는 모든 ‘정의’는 언급이 없으면 definition을 뜻합니다)
“그건 성추행이 아니지“라는 말은 성추행의 범주를 결정하는 말이 아니다. 발언자의 윤리를 드러내는 말이다. 반대의 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어야 한다/~이 아니어야 한다’라는 윤리의 말을 ‘~이다/~이 아니다’라는 정의의 말로 치환해 쓰곤 한다. 그것은 ‘이다/아니다’라는 어법이 감당하는 영역이 넓은, 우리말의 관용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언어사용자의 윤리 문제이기도 하다. 편한 말은 부정확하다. 부정확한 말은 오해를 낳는다. 그 오해가 타인의 것일 때도 문제지만, 놀랍게도 자신이 자신의 말을 오해하는 경우도 생긴다. 윤리의 뜻, 당위의 뜻, 즉, 토론과 조율의 여지가 있는 뜻들을 정의의 꼴을 한 단정적인 말 위에 태우는 일이 잦아지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 기준을 타인에게 투척할 수 있는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스스로 속는 일이 발생한다. 언어는 양쪽으로 날아오는 화살이다. 말은 늘 발화자를 겨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은 어떤 질적인 ‘결여’ 때문에 여성이다. 우리는 여자들의 본성에 타고난 결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된다.“ 그리고 성 토마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이어받아, 여자는 ‘불완전한 남자’이며 ‘우발적인’ 존재라고 단정했다. 보쉬에의 말에 따르면, 이브가 아담의 ‘여분의 뼈’ 하나로 만들어졌다고 전하는 ‘창세기’의 이야기는 여자의 불완전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 미슐레도 ‘여자, 상대적인 존재……’라고 썼다. 방다도 《유리엘의 보고》에서 ‘남자의 육체는 여자의 육체와의 의미를 제외하더라도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여성의 육체는 남성의 육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남자는 여자 없이도 생각할 수 있지만, 여자는 남자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라고 확언했다. (18)
누가 정의할 수 있는가. ”정의할 수 있는 역량과 자격을 갖춘 이가 정의해야 한다“ 이것은 윤리의 문제다(따라서 논의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정의의 윤리를 정의하는 메타적인 순간조차, 윤리는 정의의 역습을 받는다. 즉, 위의 윤리적 명제가 ”정의할 수 있는 역량과 자격을 갖춘 이가 정의한다“라는 정의적 명제로 쉽게 전용되면서, 정의에 대한 윤리가 윤리에 대한 정의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의할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하기 때문에 정의할 자격을 갖추는 셈이 된다. 여자가 무엇인지 정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의뿐이다. 정의할 수 있는 위대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계속해서 정의해야 한다. 정의의 영구기관이 탄생했다. 정의 위에 정의가 쌓인다. 이미 잔뜩 쌓여 있는 정의 위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위해서, 새로 쌓이는 정의는 점점 더 추악해진다. 정의justice롭지 못한 일이다.
권력은 나누어지지 않듯이, 새로 탄생하거나 총량이 증가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전될 뿐이다. 권력 보존의 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필적한다. 따라서 누군가 권력을 쥐었다면 누군가는 권력에 짓눌리는 대상이 된다. 누군가 정의의 영구기관을 가동시켜 손쉽게 권력을 획득하는 동안, 누군가는 영문도 모른 채 권력을 박탈당한다.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빼앗기고 나면 다음은 문화적 권력이다. 영구기관은 영구히 쉬지 않는다. 결국 누군가는 인간적 권력, 본질적 권력까지 송두리째 빼앗긴다. 그것을 우리는 ‘인권’이라고 부른다. 정의가 하는 일이 영 정의justice롭지가 못하다.
여성의 기능으로써 여자를 정의하는 것이 불충분하고 우리가 '영원한 여성'으로 여자를 설명하려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러나 한편 잠정적으로 지상에 여자들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여자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17)
그리하여 정의를 돌려주는/돌려받는 일이 정의롭다. 그것은 이 두꺼운 책이 하려는 일차적인 일이다.
이미 반백년도 더 전에 나온 책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보부아르가 주장하는 ‘여성’의 ‘정의’를 그대로 받아 안을 필요가 없다. 이 책을 읽고 우리가 챙겨야 할 것은 ‘여성이 여성을 정의하는 정의justice’일 것이다. 정의는 권력의 문제지 젠더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권력은 젠더 안에서는 충분히 젠더의 문제다. 따라서 나는 이 책에서 권력의 탈환을 시도하는 비권력의 작전을 눈여겨 볼 것이다. 젠더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랬듯 충분히 받아들일 뿐이다.
짠한 맛
산과 바다 그리고 이야기 1
남쪽 바다로부터 뱃길을 따라 일곱 낮 일곱 밤을 가면 사방 삼십 리 크기의 섬에 닿는다. 그 이름을 적滴 혹은 물방울이라 한다. 섬사람들은 성姓이 없고 대이인大耳人 혹은 큰귀사니라 부르는데, 귀가 커서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도 듣는다. 반대로 입은 작고 뾰족하여 말하는 데 주로 쓰이지 않고 술을 마시기에 적합하다. 심성이 곱고 다툴 줄을 몰라, 물산이 척박한 섬에서 맑은 술을 빚으며 삼백 년을 살아도 사람이 사람을 해하는 흉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기이한 풍습이 있다. 아이가 나면 부모와 산파는 입과 마음을 닫고 말을 흘리지 않는다. 아비가 아이를 강보에 싸거나 요람에 넣어 대문 앞에 나가 앉으면 지나는 이들이 저마다 마음이 흐르는 대로 아이를 부른다. 아비는 고개를 젓는데, 그러면 부른 이는 소리 없이 웃으며 지나가고 다시 다음 사람이 와서 아이를 부른다. 이런 식으로 아비는 속으로 수를 세며 열여덟 번 고개를 저어 열여덟의 이웃을 물린다. 마침내 열아홉 번째 이가 와서 부르는 말이 그대로 아이의 이름이 된다. 그제야 아비는 아이의 무른 귀에 대고 “이게 너의 이름이란다”라는 말을 속삭인다. 열아홉 번째 들은 말이 채 이름으로 굳기 전에 귀 밖으로 쏟아지지 않도록 스무 번째 말을 마개로 쓰는 것이다.
아이는 이름 지은 이를 열아홉아비, 낳은 이를 스무아비라 부르며 섬긴다. 아이가 어른이 되면 열아홉아비가 죽을 때까지 계절마다 공양한다. 열아홉아들은 땔나무와 바다고기를 올리고 열아홉딸은 맑은 술을 빚어 올린다.
어미 태중에 있을 때 아비가 바다에 나가 죽은 아이가 태어나는 날이면, 마을 사는 모든 이가 산청 앞에 모여 아이를 기다린다. 열아홉아비가 이름을 지으면, 남은 이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이게 너의 이름이란다”라고 외쳐서 갓 지은 아이의 이름이 죽은 제 아비를 찾아 먼 바다로 흘러가지 않도록 한다. 크게 외칠수록 큰 악운을 막는다 여긴다.
그리하여 파도 거센 작은 섬에서 삼백 년을 살아도 스무아비 없는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다.
눈물이 우리들 첫 숟갈의 밥이었던 것은 알지만
그것이 바다가 되어
지상을 칠 할하고도 반이나 덮어버린 것은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사람의 가슴마다 물결인 것은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저 많은 눈물을 누가 다 흘렸을까
한껏 차오르다 기어이 무너지는 낮과 밤
밀려가고 밀려오는
미친 술병들의 바다
거대하게 떠밀리는 언어의 물거품들
어느새 다 마시고 어디로 떠났을까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_ 문정희, 〈해벽〉 전문
짜자잔! 한 맛
미셸, 나는 온 마음으로 자네와 함께 있네. 나는 자네와 함께 얘길 나누고 싶고, 나에게 아픔을 안겨 주고 있는 알제리 앞에서 지금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자네에게 말하고 싶네. 하지만 이렇게 멀리서, 그리고 거기서 목격한 것을 나에게 전해주는 자네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네. […]
친애하는 미셸, 나는 자네를 놓아주겠네. 나는 자네를 많이 생각하네. 이 세계에 나눠 가져야 할 절망밖에 없다면, 나는 그것을 자네와 항상 나눠 가질 준비가 되어 있네. 이것은 거짓도 맹목도 없이 지금 내가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확신이네.
_ 브누아 페터스,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두꺼운 평전을 읽으면 좋은 이유 가운데 하나로 평전의 주인공이 보내고 받은 편지글을 풍부하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을 꼽고 싶다. 편지글만 모아 놓은 책도 있지만, 이 편지라는 것이 저간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은 채 덜렁 내용만 읽어서는 감동이 적다. 평전, 평전, 만세. 평전 이 매력적인 내 지갑 도둑놈들아…….
아무튼 오늘의 데리다는,
나름 열심히 공부했으나 썩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으로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근데 선생님들(이미 유명하거나 장차 유명하게 될 선생님들)한테는 엄청 잘 보여놨지. 심지어 부총장한테는 고물차로 운전까지 가르쳐줘서 완전 최애 됨. 최애라고 부총장이 미국도 보내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하는 마르그리트와 함께 도미, 빡센 생활을 이어나가던 중 귀국하여 입대, 알제리에서 애들 가르치는 일로 군생활을 하고 있었음. 앞날은 깜깜하고, 알제리에서 알제리인 막 쏴 죽이는 프랑스 놈들은 나를 도리어 뭔 공산주의 괴물에 유대인 쓰레기로 취급하는데, 심지어 진보 잡지 읽는다고 까고, 아내가 러시아 소설 번역한다고 깐다. 아, 이러다가 총 맞아 죽겠다, 아님 내가 다 쏴 죽이거나…… 싶을 때, 어느 한적한 시골 도시의 고등사범학교 준비반에서 선생자리가 난 거라. 좋다구나 하고 받았는데, 출발하려고 보니 얼씨구,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사 자리를 준다네? 와, 내 삼재 끝났나! 했는데, 아놔, 고등사범학교 준비반에서 날 안 놔 주네…… 짤없이 거기 가야 되네…… 왔는데 와, 여기 애들 내가 고등사범 준비할 때랑 다르네…… 멍청하네…… 심지어 이 동네(르 망)는 자동차 경주 성지네…… 그래서 그 차가 르망이었나…… 아, 나 철학해야 되는데 이 동네 열라 시끄럽네…… 확 절라 ‘해체’하고 싶네…… 그래, 이번 생 이 갑갑한 와중에 시끄럽기까지 한 시골에서 띨빵한 애들 구구단이나 가르쳐가며 살다 가는 거지…… 망한 거지…… 정신과 쌤 예약이나 하자, 쌤 폰 번호가…… 했는데, 소르본에 자리가 났다고?! 이번에는 쌤들이 알아서 절차까지 착착 다 해놨네? 몸만 가면 되네? 우와! 사랑해요 강디약! 우윳빛깔 이폴리트!
이렇게 조울조울 삽니다.
--- 읽은 ---
+ 카르마의 바다 / 문정희 : 98 ~ 164
--- 읽는 ---
+ 우리가 사랑한 모든 책들 / 제인 마운트 : ~ 113
= 20세기 중국사 / 알랭 루 : ~ 275
=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 브누아 페터스 : 114 ~ 212
=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 / 크리스 하먼 : ~ 89
= 사회과학은 처음입니다만 / 이시카와 야스히로 : ~ 126
= 황혼의 기슭 새벽의 하늘 / 오노 후유미 : ~ 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