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
1
읽기도 시원찮고 쓰기는 귀찮다고 징징댔더니, 북플이 네 과거의 기록을 보라며, 작년 오늘의 syo 역시 슬럼프 운운하며 징징거리고 있었음을 알려왔다. 심지어 그때는 무려 무기력+비참+우울+절망 씩이나 들먹여가며! 아우슈비츠냐고……. 읽었더니 쪽팔려서 슬럼프가 절반쯤 달아난 것 같다. 정말 답도 없고 손도 많이 가는 놈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놈 건사하며 이런 계절을 9번씩 넘겨낸 여친이시여, 아 당신은 도대체…….
2
그냥 10월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너무 열심히 사느라 숨 돌릴 틈도 없는데 나랑 못 놀아준다고 미안해하기까지 하는 사람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그냥 뒹굴고, 생각하고, 반성하고, 계획하면서 남은 열흘 남짓을 태우기로 했다. 그러다 다시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세상에 깔리는 날이 오면 일어나서, 생각한 것들, 반성한 것들, 계획한 것들과 함께 또 걸어야겠다.
3
나는 어려서부터 힘내라는 말을 싫어했다. 힘내라는 말은 대게 도저히 힘을 낼 수도, 낼 힘도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다정하지만 너무 느지막하거나 무심해서 잔인하게 건네지곤 했고, 나를 힘없게 만드는 주범인 바로 그 사람이 건넬 때도 많았다. 나는 너에게 병도 줬지만 약도 줬으니, 힘내. 힘들겠지만 어쨌든 알아서, 힘내. 세상에 "힘내"라는 말처럼 힘없는 말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때만큼은 "힘내"라는 말이 내 혀끝에서 만들어지는 순간, 매일매일 술이나 마시고 다니던 그 시간들 속에서 사실 나는 이 말이 듣고 싶었다는 걸,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무슨 의도로 말했든 상관없이, 그냥 그 말 그대로, 힘내.
_ 김혼비, 『아무튼 술』
하루에 몇 번씩 힘내라는 말을 하면서, 나는 내 생각을 한다. 힘을 내어 자기 앞에 던져진 바윗덩어리 같은 것들을 휙휙 치우는 그 사람이 아니라, 사실 나는 내 생각을 한다. 그 사람이 웃어야 내가 웃기 때문에, 그 사람이 웃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 내가 웃고 싶은 것이다. 그 사람이 울면 내가 울기 때문에, 그 사람이 울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실 울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이다. 그 사람은 강하고 나는 약해서, 밀물의 해변에 선 작은 게처럼, 그 사람이 밀고 들어오면 나는 온통 젖기 때문이다. 힘내라는 말은, 밀물의 큰 파도에다 던져 넣는 한줌 설탕과 같이 값싸고 약하다. 썰물로 물러나는 것은 바다의 일이고, 사실은 지구와 달과 우주와 중력이 하는 일이다. 그 크고 강한 힘들이 잠깐 틈을 내줄 때, 나는 갯벌로 들어가 이것저것 주워 나온다. 그리고 다시 비바람과 함께 큰물이 밀려들어올 때면, 성큼 물러나 외친다. 힘내. 물살에 녹아 바다가 듣기를 바라며. 발이 젖는다.
--- 읽은 ---
+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 박찬국 : ~ 267
+ 사회과학은 처음입니다만 / 이시카와 야스히로 : 126 ~ 231
+ 그렇게 물어보면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 / 김호 : 143 ~ 271
--- 읽는 ---
- 사서 / 옌롄커 : 202 ~ 383
- 작은 마음 동호회 / 윤이형 : ~ 130
- 마르크스 철학 연습 / 한형식 : ~ 82
- Do it! 점프 투 파이썬 / 박응용 : ~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