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를 사람
1
나이가 드니 머리통이 커지는 기분이다. 이목구비가 코끝을 중심으로 한 밀집대형으로 재정렬 되는 느낌이다. 이마 위에서 족구 할 만하겠다 싶은 기분이고, 턱은 90도를 향해 지치지 않고 달려가는 느낌이다. 어릴 적 보았던, 추억 속의 내 아버지 얼굴처럼. 아, 별로야.
2
syo는 이니셜이 아닙니다. 그런 경험이 다들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syo가 대체 뭐냐고 물어 보시는 분이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별 거 아닌데. 대부분 이니셜일 거라고 짐작하시며, 어떤 분은 추정되는 이름 몇 개를 나열하면서 세밀한 압박을 가해오시기도 했지. 그럴 때면 잠시 내 이름에 대해 생각한다.
어릴 적에는 이 이름이 마냥 좋았다. 되게 특이하지는 않지만 또 그리 흔하지도 않은 이름이라, 초중고를 헤치고 나오는 동안, 같은 이름에 성이 다른 친구조차 한 번을 맞닥뜨리지 않았다. 학교에 나는 딱 나 하나였고, 성 없이 이름으로 불러도 그건 언제나 나였다. 야구를 잘 할 것 같은, 그것도 레전드 급으로 잘 할 것만 같은 이름이라 괜히 주눅 든 적은 좀 있었지만, 그런 것 말고도 사는 게 썩 녹록지는 않았던 관계로 이름을 탓하지 않고서도 씩씩하게 잘 클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 이름에 똥물을 튀기는 사람들이 자꾸만 나타났다.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주범은 아니지만 종범쯤은 되는 인물이 내 이름을 쓰는 바람에 TV를 보는 마음이 한동안 복잡다단했다. 어떤 놈은 여친을 폭행하고 촬영하고 협박하여 세상을 아주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찾아보니 내 이름에 '–하다'를 붙인 동사도 한동안 나돌았던 모양이다. 성까지 나하고 같은 걸 쓰는 어느 조연배우 아저씨는 끽해야 한 해에 한 편 정도만 작품 활동을 하시는 듯하니 TV에서 모습을 찾아보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제발 누구라도 들고 일어나 내 이름의 수난시대를 종식시켜 주기를 앙망하는 중이긴 하다.
그런 저간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이름의 소릿값이 좋다. 성까지 포함해서 세 글자 전부 종성이 울림소리라, 발음하면 두루뭉수리하게 흐르지 않고 제법 또랑또랑한 소리가 난다. 혀와 입이 부지런해진다. 게다가 울림소리 가운데서도 모두 콧소리다보니 제아무리 무뚝뚝한 사람들도 내 이름을 부르려면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소리 가운데 가장 귀여운 소리가 나는 기관들을 풀파워로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이 불리면 그 소리가 사르르 허공에 녹아 세상을 한 스푼 치 더 달게 만드는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애칭으로 부르고, 엄마는 아들이라고 부르고, 동생은 오빠라고 부른다. 가장 친한 친구들은 콩이라고 부르거나 이름 맨 마지막 글자만 다정하게 부른다. 그 외에 친구가 많지 않아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적다. 세상 더 달달해지라고, 친구를 좀 많이 만들어야겠다. 더 많이 불려야겠다. 이것 참 어깨가 무겁다.
"경민아."
한아는 익숙한 이름을 불렀지만 부를 때 이름의 주인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아에게 경민이란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처럼 여겨졌다. 아주 특별한 사랑을 이르는 말. 이제 그 사랑의 온전한 소유권은 이 눈앞의 존재에게 있었다. 언젠가 사라질 섬에서, 사라지지 않을 감정을 가지고 두 사람은 잠이 들었다.
_ 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
3
한 마디 말로 온 밤을 뒤채게 하는, 창밖에 눈이 새벽을 덧칠하는 소리 쿵쿵 울리는데 마음을 팔팔 끓여 이마 위에 내려앉은 겨울을 와르르 녹이게 하는, 혹은 반대로 자정이 흘리는 끈적한 땀을 온 몸에 휘감은 여름에도 손발이 덜덜 떨리게 하는, 뭔가 자꾸 세어보게 하는, 자꾸만 그리게 하는, 기다리게 하는, 기다리지 않게 하는, 기다렸다가 기다리지 않았다가 다시 한 번 기다리게 하는, 어둡고 깊은 물을 하나도 겁나지 않게 하는, 얕은 물에도 무한히 빠져죽게 하는, 숨 막히는, 숨 막는, 그런데 또 숨통 트이는, 아무 노래도 들리지 않게 하는, 그러다가 모든 노래를 내 노래로 듣게 하는, 한없이 먹어도 배가 고픈, 몇 년을 삼키지 않아도 가슴께 걸린 것이 끝내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는, 그보다 더 아름다운 말도 더 잔인한 말도 모조리 집어먹어 세상에 없도록 하는, 결국에 세상의 모든 사전을 단 하나의 단어로 가득 채우게 하는.
있잖아.
응.
그래도 어쨌든 다 혼자지, 그치?
나는 혼자가 너무 싫은 나머지 괜히 그렇게 말한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하면 얘는 조금 웃으면서 나를 엄청 세게 껴안는다. 안 그래도 무겁지만 허벅지는 근육 덩어리라 특히 더욱더 무겁다. 그 몸의 센 포옹을 감당하다가 숨이 막혀서 나는 갑자기 조금 혼자이고 싶어져 버린다. 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마음의 균형을 찾도록 도와준다. 순식간에 혼자여도 괜찮다고 믿게 된 나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얘랑 먹을 아침 메뉴를 고민한다. 우리는 둘 다 오후에 일을 시작하고 자정 넘어서 마칠 예정이다. 오늘은 얘한테 같이 자자고 말하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한다. 안 말할 자신이 아침에는 있는데 밤에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_ 이슬아, 『일간 이슬아 수필집』
- 읽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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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계 공부는 난생 처음입니다만 / 김범석 : 155 ~ 278
+ 초기 그리스 철학 / 피터 애덤슨 : 109 ~ 215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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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사람 여관 / 이병률 : ~ 87
-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 위화 : ~ 66
- 제2의 성 / 시몬 드 보부아르 : 533 ~ 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