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있잖아요, 누나. 한 번쯤은 누나 얘기도 좀 해주세요. 궁금해요.
너도 알잖아. 별거 없어. 대학 졸업하고, 하던 일들 다 망하고, 지금은 그냥, 노는 여자.
그런 거 말고요. 누구랑 친하고, 어떤 사람이 싫고, 뭐 할 때 기쁘고, 지금까지 누구를 만나왔고, 지금 만나는 분과는 어떻게……
태혁아. 내가 먹는 약이 있어. 먹으면 마음도 편해지고 잠자는 걸 도와줄 거야.
나는 얼른 태혁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수면제를 꺼내 태혁에게 건네주었다. 태혁은 내가 준 약을 넙죽넙죽 잘 받아먹었다. 독이면 어쩌려고. 약을 삼킨 태혁은 또 슬픈 개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애써 태혁의 얼굴을 외면하며 캐리어에서 와인 한 병을 꺼냈다. 오프너로 와인을 따고 미니바에서 글라스를 챙겼다. 태혁아, 누나는 욕조에 좀 들어가 있어야겠다. 대답은 듣지 않고 얼른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바닥에 잔과 와인을 내려놓고 문에 기대앉았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혁은 꼭 예전의 나 같았다. 상대방에게 내 가장 약한 부분을 드러내고, 상대의 아픈 부분을 알게 되는 것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믿는 것. 일종의 신앙과도 같은 믿음. 그 순진한 믿음이 거울을 보는 것처럼 소름 끼치게 싫었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마, 묻지도 말아줘. 넌 그냥 어깨가 넓고 키가 크고 커야 할 모든 것들이 적당히 큰 군인에 불과해. 세상의 다른 모든 남자와 다르지 않은 한 명의 남자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말하지 마. 나의 아픈 부분까지 알아내려고 하지 마. 특별해지려고도 하지 마. 그냥 심심하면 만나 섹스를 하고 쓸데없는 얘기나 하는 남자로 남아 있어줘. 부탁이야.
_ 박상영, 「부산국제영화제」, 127-128
상상해 봐. 밤은 충분하고 너와 나는 마주 앉아 우리가 될까 말까 계산하고 있는 순간이야. 바람은 살랑거리지, 말은 달지, 술은 꿀 같지, 자꾸만 발끝이 정강이를 스치지, 그런데 우린 그걸 모른 척하지. 나는 모른 척 하고 너는 내가 알고 있는 걸 모른 척 하고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걸 네가 알고 있는 걸 모른 척하다보면 어지럽잖아. 밤하늘이 핑핑 돌겠지. 주량은 아직 충분한데 자꾸만 취하겠지. 나는 취한 척 하고 너는 내가 취하지 않은 걸 모르는 척 하고 나는 내가 취하지 않은 걸 네가 아는 걸 모르는 척하다보면, 자꾸만 발끝이 정강이를 스치다보면, 술이 너무 꿀 같다 보면, 근데 말이 술보다 더 달다 보면, 애꿎게 누구 하나가 그저 아, 바람이 살랑거린다, 그러겠지. 다른 하나가 정말이다, 바람 참 좋다, 그러겠지. 그러다 보면 우리가 될까 말까 계산은 대충 끝나거나 또 미루어지고, 어쩌다 눈을 맞추면 우리는 생각하겠지. 아직 밤이 충분하다고.
매일 누르던 현관 비밀번호를 뜨겁게 두 번 틀리겠지.
짖겠지 물겠지 찢겠지 울겠지 흐트러질 거고 무너질 거고 무너뜨리려고 만난 사람처럼 밤새도록 세상을 무너뜨리고도 부족해 기어코 나를 너를 무너뜨리겠지 안쪽부터 녹아나듯 가루가 된 마음이 눈물에 녹듯 끈적하게 녹아버린 체온을 서로의 몸에다 발라주겠지 미친 사람처럼 마침표도 쉼표도 없는 문장을 써대겠지 뭉개진 발음으로 읽고 탄성으로 탄식으로 읽고 읽고도 무슨 말인지 몰라 지금 어디쯤 읽었는지 몰라 자꾸만 더듬겠지 확인하겠지 그래봤자 확인은 되지 않을 거고 확신은 들지 않을 거고 확정은 나지 않을 거고 확률은 높지 않을 거고 네가 이유도 모르고 들었다 놨다 하는 동안 나는 영문도 모르고 들락날락대기나 할 거야 찌르고 찔리고 할퀴고 베이면 잠깐씩 핥아가며 생각이란 걸 하기도 할 거야 내일이란 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겠고 내일 쉬어야 할 숨까지 오늘 쉬느라 숨이 찬 가운데 아무도 몰래 오늘이 내일 앞에서 옷을 벗겠고 오늘의 맨살이 너무 어둡겠지 아니지 어두운 맨살은 내일의 것인가 어두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색도 알 수 없는 알약을 상상하며 삼킬지 뱉을지 따져 보겠지 흔들면 흔들리고 뒤집으면 뒤집히고 짜면 짜이고 목 조르면 목 졸리는 것이 몸의 일인지 마음의 일인지 따져 보겠지 책이 들어가는 많은 단어들을 주고받으며 숨을 고르겠지 책임 책무 책망 가책 자책 힐책 귀책사유… 그러다 장난처럼 책상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해서 내가 와르르 물건들을 쓸어내버리고 책상 위를 비운다면 그래서 모든 것들이 다시 시작되는 동시에 다시 끝난다면 시작되지 않은 것조차 끝난다면 우리가 차마 끝나지 않을 것을 시작한다면
상상해 봐.
- 읽은 -


+ 눈사람 여관 / 이병률 : 87 ~ 153
+ 그리스인 이야기 1 / 앙드레 보나르 : 235 ~ 363
- 읽는 -




-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 박상영 : ~ 135
- 여행자를 위한 고전철학 가이드 / 존 개스킨 : 105 ~ 223
-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 줄리언 반스 : 102 ~ 208
- 농담 / 밀란 쿤데라 : ~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