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도서관으로 돌아오는데 나보다 한 열 걸음쯤 앞서서 한 검은 청년, 그러니까 피부가 검은 것은 아닌데, 검은 신발에 검은 바지에 검은 가방에 검은 티셔츠를 입은 검은 머리의 청년인지라 도저히 검은 청년이라고밖에는 달리 부를 도리가 없는 검은 청년이,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검은 티셔츠 등판에 어떤 이의 상반신 사진이 정말 커다랗게 박혀 있었는데, 엇, 저것은 프로이트잖아? 아무리 봐도 영락 없이 프로이튼데? 세상에, 프로이트 티셔츠라니. 그러니까,
정확히 이 사진이었다. 와, 신기하다, 프로이트 티셔츠라니, 내가 체 게바라 티셔츠는 봤는데, 하며 검은 청년의 등짝프로이트와 눈을 마주치며 계속 걷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주까지만 해도 열심히 프로이트를 읽던 syo가 조금 흥미가 떨어진 거라, 다음 주부터는 융이나 라캉으로 슬쩍 옮겨 타려고 책을 빌려다 놓은 참이었던 것이다. 야, 너, 이제 나 안 읽을 거지? 그치? 아니, 그게...... 맞잖아, 안 읽을 거잖아. 아,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솔직히 말해 봐 내 책 빌려 놓은 거 있어? 아니,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집에도 니 책 있고, 나, 니 전집도 가지고 있는데..... 가지고 있으면, 읽냐? 니가? 허, 어이가 없네, 야, 나야 나, 이게 지금 누굴 속여 먹을라고, 나 프로이트야 임마, 무의식의 지배자, 니네 엄마를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해치우고 싶어하는 니 무의식을 지금 당장 까발려 준다? 어디, 마음 한 번 심하게 불편해 볼까? ......나 지금도 불편해, 이 미친 영감아, 그만 좀 꼬라보라고, 나 그래도 너 읽을만큼 읽었단 말야. 니가 날 안다고? 고작 입문서 몇 권 띡 읽고? 그럼 말해봐, 지금 니가 내 눈을 보며 제 풀에 마음이 불편하고, 나랑 이 말도 안 되는 마음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 이 심리 상태를, 내가 뭐라고 불러? 그건......
생각이 안 났다! 검은 청년이 도서관에 들어서고, 4층까지 계단을 올라오고, 열람실로 들어 와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 나는 그의 뒤를 따르며 최선을 다해 머릿속을 헤집어 엎었으나, 생각이 안 났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600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프로이트 책을 한 권 더 빌릴 수 밖에 없었다. 안녕, 융아. 안녕, 라캉아. 우린 아직 만나기에 이른 사이였나 봐. 가련한 융아, 니가 왜 저 영감에 학을 뗐는지 나도 알 것 같아.
검은 청년은 왜 검은 가방을 양쪽 어깨로 매지 않았나, 그랬다면 저 매서운 눈과 마주칠 일이 없었을 텐데, 검은 청년이 나빴어, 이게 다 검은 청년 탓이야. 프로이트는 요런 방어기제를 "투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늦었다. 장학퀴즈 끝나고 벨 누르기다. 심지어 질문의 답도 아니다. 여러분, 날림으로 책 읽으면 이 꼴 납니다. 조심하세요!
물론 syo만 조심하면 된다.
170918-170922 : 32권
마르크스 : 4권
1. 자본론 공부
: 이제 드디어 종이와 펜이 필요한 순간이 왔다. 별로 복잡할 것 없는 놈들이지만, 그래도 수식이라고 오랜만에 보니까 설레는구만. 자본론 공부하면서 김수행 선생님 책 한 권 안 보고 지나가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다.
2.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 귀엽잖아. 쉬는 시간에 커피 한 잔 하면서 술술 읽기에 좋다. 뒷쪽에 알찬 추천도서 목록이 있어서 전의를 불태울 수 있다.
3. 오늘『자본』을 읽다
: 김수행 선생님에게 "강"이 있다면 강신준 선생님에겐 "유"가 있다.『자본론 공부』와 이 책을 나란히 놓고 보면, 동일한 주제, 같은 서술 방식임에도 각각의 존재 가치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자본』의 한 구절 한 구절을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에 딱딱 매칭시키는 기가막힌 능력.
4. HOW TO READ 마르크스
: 이 시리즈를 입문서라고 생각하고 덤비는 사람들은 반드시 엉엉 울며 돌아선다. 얘네들은 저자가 대상 철학자들을 읽어내는 본인들의 철학적 방법과 관점을 제시하는 명백한 철학서들이다. 어렵고 깊이가 있다.
철학 / 정신분설 일당 : 3권
5. 현대 철학 아는 척 하기
: 이런 책의 딜레마는 두께에서 온다. 컨셉상 얇아야 미덕일 것 같지만서도 암기가 아니라 이해로 끌고 가려면 어느 정도의 분량을 확보해야만 흐름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500쪽쯤 되는데, 200쪽짜리보다는 확실히 낫다.
6. 융
: 정신없는 그림과 서술. 이 시리즈가 대부분 그렇지만 유독 이 책은 심하게 파편화되어 있어서 융에 대한 선명한 그림을 그리는데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7. 나는 누구인가
: 아, 꼴랑 프로이트 쬐끔 알고 읽을 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 알고 읽었더라도 아, 굳이 읽을 책은 아니었다, 했을 것 같다.
경제학 첫발 떼기 : 6권
8, 아이언맨 수트는 얼마에 살 수 있을까?
9. 작은 자본론
: 제목은 이래도 마르크스의 이름은 한두 번 나올 뿐이고, 자본론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불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고 있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21세기에 자신들의 사상을 퍼뜨릴 사도 바울 후보 명단에 저자의 이름을 올린다면, 나는 그에게 한 번 배팅해 볼 생각이다.
10. 경제 선생님, 스크린에 풍덩
11. 저는 경제공부가 처음인데요
12. 만화로 보는 경제학의 거의 모든 것
: 단지 만화로 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다니는 도서관에서는 이 책을 청소년 문고에 집어 넣었다. 이 도서관 청소년 문고에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국가. 정체』,『리바이어던』이런 게 막 꽂혀 있다. 좋은 책을 청소년 문고에 넣으면 성인이 안 보고, 어려운 책을 청소년 문고에 넣으면 청소년과 성인이 모두 안 보니까, 청소년 문고의 존재 가치는 참 역설적이다. 이 책이 썩 좋은 책이라는 말입니다.
13. 경제학은 배워서 어디에 쓰나요?
문학 : 11권
14.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 톨스토이가 말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왜 도스토옙스키를 그렇게 많이 읽고 레스코프를 읽지 않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그가 진짜 몰랐을까? 두 작가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말이라면, 솔직히 난 바로 알겠는데?
15. 문학 소녀
: '문학 소녀'나 '소녀 감성'을 멸칭 비슷하게 썼던 그들, 20세기에는 그렇게 '여성들의 이성 부족 감성 과잉'이라는 택도 없는 이데올로기를 마술지팡이처럼 휘둘러 자신들의 공감 능력 부족을 어찌저찌 덮거나 부인할 수 있었겠으나, 어쩌냐, 이제 20세기 끝났다, 20세기들아.
16. 산책
: 희한하다. 리듬. 쉴 새 없이 헤매고 방황하고 혼란스러운데, 그게 다 아름답다.
17. 분노의 포도 2
: 한 동안 인생책이 될 것 같다. 서재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분노의 포도 알갱이" 컨셉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성형 수술을 결심할 정도의 대작인 것이다. 아직 안 읽으신 분들, 두껍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진짜 금방 넘어가요.
18. 상속자들
: 익숙해지기까지 60페이지. 그 시간만 잘 버텨내면, 그 이후에는 골딩의 손이 놀리는 펜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게 된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라도 정신줄 놓치면 그 길로 바로 안드로메다 직행이다......
19.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1
: 읽는 데 며칠이 걸린 걸까. 의식의 흐름은 진짜 요물이다. 내 의식이 내 바깥으로 흘러 나간다. 그렇게 실컷 싸돌아다니던 의식은 책상에 엎어져 침을 흘리고 있는 나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며 쓰윽 다시 내게 복귀하고.
20.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2
: 리뷰를 한 번 해보겠다는 호기로운 결심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안녕. 별이 되어 사라진 나의 기억들아. 주인공은 불쌍한 놈이고, 누가 나쁜 놈인지도 알겠는데, 그것 말곤 아무것도 모르겠다...... 훌쩍.
21. 젊은 예술가의 초상
: 세상에다 퍼붓고 싶은 자기 생각을, 아무리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렸다지만 이렇게까지 대 놓고 쏟아내는 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문장이 이렇게까지 웅장해버리면 따질 말을 잃는다.
22.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
23.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2
24.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3
: 완간 기념 정주행 중. syo는 벌건 피가 범벅이기 일쑤인 추리물을 선호하지 않지만, 잘려나간 사지 육신이 아니라 책이 사방에 춤을 추는 이야기라면 안 좋아할 수가 없다. 내 모자란 친구의 칠칠맞은 형의 모니터 앞에 피규어로 놓여 있는 그 가슴 큰 여인이 누군지 이 책의 표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읽기 / 젠더 / 인문일반 : 6권
25. 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 제목 덕을 봤다는 것이 중론이다. 저자의 센스를 짐작할 수 있는 문체는 매력적이고, 서술 대상으로 삼은 항목들도 참신하다. 그러나 확실히 가볍고, 역사책이라기보다는 "인문학" 책에 가깝겠다.
26. 월경독서
: 목수정을 처음 알게 된 책이다. 추억 돋네. 오랜만에 봤더니 어쩐지 내 문장이 그녀의 문장과 좀, 아주 쪼오오끔 닮아 있다. 사랑하면 닮는 법이지.
27. 음악 혐오
: 솔직히 내가 뭘 읽었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다시 도전해야지. 하지만 그 다음이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온통 모르겠다.
28.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
: 『만화로 보는 경제학의 거의 모든 것』을 읽고 내친 김에 한 번 읽어 보았는데, 아뿔싸, 무슨 최면에라도 걸린 것마냥 이 책을 반납함과 동시에 두 권 1000페이지가 넘는『미국 민중사』를 대출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보니 좀 무섭다.
29. 헬페미니스트 선언
: 『나쁜 페미니스트』를 540명이 읽은 동안,『헬페미니스트 선언』은 syo 포함 9명이 읽었다. 60배. 왜 사람들이 '나쁜 조선' 혹은 '배드 조선'이 아니라 '헬조선'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도 같다. '헬'의 농도가 '나쁜'의 60배는 되기 때문이다! 알아요, 아무말인 거. 이 책, 좋으니까 읽어보자구요.
30.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읽으면 한없이 부끄러워 질 거, 알았잖아, 알면서, 왜 또 읽고 말았니...... 그러나 취미로 하건 업으로 하건, 리뷰 쓰는 사람 중 장정일과 마주하여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그 외 : 2권
31. 굿바이 그래머
32. 시사인 522
-『자본론』세트(6권, 12만원)를 사 버렸다! 잘 한 짓일까? 그건 앞으로 하기 달렸다. 그간의 역사를 바탕으로 예측해 보면, 똥 됐다. 또 책장에 벽돌을 쌓는 데 돈을 썼구나.
- 마르크스는 한동안 더 읽게 될 것 같다. 오늘 내 코피를 터뜨린 건 검은 청년과 프로이트였지만, 언젠가 마르크스가 등짝에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빨간 청년이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런 말도 있잖아. "적과 흑".
- 미국 민중사를 책상에 올려놨는데, 책등에 저자인 하워드 진의 얼굴이 떡하니 박혀 "살인미소"를 날리고 있다. "살인(나기 싫으면 어서 읽는 게 좋겠지 꼬마야? 라는)미소".
- 빌려는 놨지만, 솔직히 프로이트 쟤 별루야. 읽을수록 비참해져. 라캉이는 안 그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