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1


그리스는 최초로 민주주의를 발명했다. 시민들이 직접 광장에 나와 의견을 내놓고 조율하여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 이 위대한 체제를 벌써 몇 천년 전에 그들이 고안해냈다. 비록 그 '시민'은 일정 연령 이상의 남성으로, 여성이나 노예는 '시민'안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때는 다 그랬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1776년 미국은 독립과 동시에 스스로 위대한 나라임을 뽐내기에 충분한 진리를 독립국의 이념으로 선언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양도할 수 없는 몇몇 권리들을 부여하였으며....." 그 나라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최초의 국가였다. 비록 흑인은 그 '사람' 안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때는 다 그랬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그 시대의 상황에 맞게 평가해야 한다.


1848년 2월, 프랑스 노동자들은 혁명을 일으켜 기어코 선거권을 쟁취해냈다. 신분과 경제력에 관계 없이 누구나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보통선거'가 시민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비록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보통'의 범주 밖이라고 생각되어졌지만, 그때는 다 그랬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그 시대의 피치못할 사정 때문에 위대한 혁명의 결과를 폄훼해서는 안 된다.


"한계가 있었다"로 마무리되어야 할 것들이 "한계가 있었으나", "한계에도 불구하고"로 서술되는 수없이 많은 예들, 그것은 어쩌면 객관적 진리를 말하는 모양새 뒤로 주관적 관점이나 기득권을 가리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2




 "이제 네 소식을 어떻게 듣지? 놈들이 널 죽여도 내가 모를 텐데. 놈들이 널 해칠 수도 있는데. 네 소식을 어떻게 듣지?"


 톰이 불편한 웃음을 터뜨렸다.


 "뭐, 케이시 말처럼, 사람은 자기만의 영혼을 갖고 잇는 게 아니라 커다란 영혼의 한 조각인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뭐, 톰?"


 "그렇다면 문제 될 게 없죠. 저는 어둠 속에서 어디나 있는 존재가 되니까. 저는 사방에 있을 거예요. 어머니가 어디를 보시든, 배고픈 사람들이 먹을 걸 달라고 싸움을 벌이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케이시 말이 옳다면, 사람들이 화가 나서 고함을 질러댈 때도 제가 있을 테고, 배고픈 아이들이 저녁 식사를 앞에 두고 웃음을 터뜨릴 때도 제가 있을 거예요. 우리 식구들이 스스로 가꾼 음식을 먹고 스스로 지은 집에서 살 때도, 저는 거기 있을 거예요. 아시겠어요?"


_존 스타인벡,『분노의 포도 2』


절망에 빠져 있는 민중을 구하기 위해, 민중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하도록 하기 위해, 스타인벡은 그 민중 가운데에서 두 명을 뽑아 각각 임무를 맡긴다. 톰은 광야의 시련을 겪고 돌아온 예수처럼, 어두운 동굴에서 혼자 긴 시간을 고뇌한 끝에, 민중 속에 스며드는 것이 자신의 일임을 깨닫는다. 그는 영혼의 투쟁을 맡았다. 그는 이제 동굴에서 나와 사람들 사이를 걸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되고, 생각이 되고, 믿음이 되고, 이념이 될 것이다. 배고픈 사람, 얻어맞는 사람, 분노하는 사람들은 모두 톰을 가지게 될 것이다. 톰으로 하나가 될 것이다.


다른 또 하나의 주인공, 톰의 여동생 로저샨 또한 같은 임무를 받는다. 사람과 사람을 엮는 다리,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의 고난과 배고픔을 나누며 그 속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일. 로저샨의 임무는 결국 '톰'의 임무와 같다. 그러나 방식이 다르다. 로저샨이 여자이기 때문이다. 스타인벡은 그녀에게 가혹한 선택을 강요한다. 헛간에서 죽어가는 노인에게, 처음 보는 노인에게 젖을 물리는 일. 그녀는 기꺼이 그 일을 받아들이고, 젖을 빠는 노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기까지 한다. 그렇게 소설이 마무리된다.




3


나는 스타인벡이 도저히 다른 도리가 없어서 그런 식으로 임무를 분배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작중 인물들 가운데 톰이 해야 할 일을 가장 잘 해낼 것처럼 보이는 인물은 톰의 어머니다. 로저샨의 일도 마찬가지다. 나는 '젖'이 나눔과 희생을 표상할 수 있는 유일한 상징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톰이 엉덩이나 허벅지의 살을 끊어내 구워 먹이는 선택지를 만들 수도 있었다. 나는 스타인벡이 이 결말을 놓고 한차례 정도는 고민했으리라고 보지만, 톰이 맡은 일을 로저샨에게, 로저샨이 맡은 일을 톰에게 줄지를 고민하진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냥 그렇게 나눠줬을 것이다. 이념은 남자의 몫이고 모성은 여자의 소유다. 투쟁은 남자가 하고 희생은 여자가 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보면 우습고 화가 나는 역할분담이지만 그때는 다 그랬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더 큰 그림, 작품이 하나의 커다란 전체로서 주장하는 가능성을 봐야하지, 지엽적이고 소소한 작품 내적 표현의 문제들을 따지는 것은 이 위대한 걸작을 대하는 방법으로 옳지 못하다.


나는 이 작품에 별 다섯 개를 던질만큼 좋아하고, 저 충격적인 결말을 고려하고서도 반드시 한 번은 읽을 책으로 여기저기 추천하고 다닐 것이지만, 젖을 물리는, 그러면서 미소를 짓는 저 결말만큼은 아무래도 똥이다. 그땐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똥이다. 그땐 그랬으니까 그때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은 난 모른다. 그저 내겐, "그땐 어땠을지 알 수 없는 지금의 똥"이다.   




하지만 인생의 가장 큰 한계요 진실은 이것이다-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그때, 거기가 아니다.


_이언 매큐언,『넛셸』




4


과거와 오늘날의 현실을 비교하며 작품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아무에게나 그런 권리가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 어떤 일본 군인이 본인의 의사에는 어긋나지만 상부의 명령과 시대 현실에 굴복하여 식민지 여성을 성 노예로 착취하는 일에 동참했다고 할 때, 만에 하나 그 군인의 행동에 자발성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평가하거나 용서해 줄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피해자에게만 있다. 그 어떤 경우든, 그땐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그 어쩔 수 없는 일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니라면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이 아니고, 입에 올려도 아무런 사회적 의미가 없는 말이다. 그저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의 개인적 의식을 드러낼 뿐이다. 그땐 어쩔 수 없었으므로, 나라도 같은 상황이었으면 아마 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하는 정도의.




5


고전이란 시대를 건너며 생명을 유지하는 작품이라는 정의는, 새 시대에는 새 시대의 기준으로 다시금 고전을 평가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특히 윤리적인 부분에서는. 과거에 발표된 어떤 작품이 비윤리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그 작가가 그 글을 쓸 무렵 비윤리적인 인간이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그냥, 그 작가가 갑자기 오늘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똑같은 작품을 발표한다면 그 작가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비윤리적인 인간으로 취급당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더 긴 시간이 흐른 뒤는 어떨까. 수많은 오늘의 고전들이 내일의 똥이 될 것이고, 수많은 어제의 똥들이 새로운 고전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작품은 별자리처럼 어느 시대에 떡하고 박혀 있는 화석이 아니다. 그저 쓰려고 쓰는 게 아니라, 읽으라고 쓰는 작품이라면, 우리가 오늘의 안경으로 읽었을 때 똥인지 된장인지,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의 한 순간을 살며 오늘 읽고, 그때는 똥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부차적인 역사일 뿐이다. 오늘 다시 읽어야 한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역사는 누가 어디서 무엇을 이야기하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나와 당신들의 오만하고 이기적인 수많은 역사들이 존재할 뿐이다.


_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한 순간만 하세요. 우린 단 한순간만 다룰 겁니다. 순간을 연기하세요. 이 순간에 당신이 뭘 연기하건 그것만 연기하세요. 그리고 다음 순간으로 넘어갑니다. 어떻게 될지는 중요치 않아요. 그런 걱정은 접어 두세요. 그저 순간, 순간, 순간, 순간으로만 인식하세요. 우리가 할 일은 다른 걱정은 접고, 이 다음에 어떻게 되든 이 순간 안에 존재하는 겁니다.


_필립 로스,『전락』


하나의 문장은 그 자체로 완벽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장을 다른 맥락 속에 위치시킬 때, 다른 문장들과 만나게 할 때, 완벽함이 생각만큼 대단한 가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_금정연,『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과거의 사유를 그저 답습하고 되뇌는 사람은 그것이 마음의 빗장이 되어 세계와 존재의 의미가 들어오는 통로를 스스로 막아 버린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것을 만들어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_김종엽,『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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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9-25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이 시간 쯤이면 페이퍼가 올라와 있지 않을까 와봤는데 있다!! ㅎㅎ
읽었으므로 나는 잡니다. 굿 나잇.

syo 2017-09-25 22:30   좋아요 0 | URL
전 이제 놀기 시작합니다 ㅎㅎㅎ 다락방님은 새나라의 어린이시군요. 새 나라의 어린이는~

아 걔는 일찍 일어나는 애였지;;

단발머리 2017-09-2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바야흐로 판결의 시간.
똥과 된장의 시간이 왔네요.
이 와중에도 가슴을 파고드는 필립 로스의 문장. 아, 나는 이런 사람을 사랑했네ㅠㅠ

8시간 전에 공지영 작가님을 만나고 왔어요. 북콘서트 주제가 ˝가장 소중한 것˝이었는데 자신이 깨달은 소중한 건 3가지는..
지금, 여기, 그리고 나 자신...
이라고 하더라구요.
<전락>의 순간, 순간, 순간과 닿아있네요.
나도 다락방님과 같은 생각했어요.
일단 고정팬 2인 확보^^

syo 2017-09-25 23:26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단발머리님하고 다락방님이 요즘 필립 로스의 똥들에 대해 논하고 계셨었죠.....

고정팬 2인 감사합니다. 첨 가져보네요, 그런 멋진 건^^

cyrus 2017-09-25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고등학생 때 배운 국어교과서에 축약된 <분노의 포도>가 실려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걸 왜 배워야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어요. 틀에 박힌 해석(답)을 찾도록 요구하는 우리나라 교육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 소설을 가지고 비판적 독서를 시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syo 2017-09-25 23:28   좋아요 0 | URL
제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는 ˝수레바퀴 아래서˝가 있었는데..... 이 세대차이 뭐죠? 슬프다ㅠ

cyrus 2017-09-25 23:43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용 국어교과서가 한 종이 아니라 10종이 넘을 정도로 수가 많아요. 교과서 종류가 다양하니까 교과서에 실린 문학 작품들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syo님이 같은 세대라고 가정하면 저는 ‘분노의 포도‘가 있는 국어교과서를 사용했고, syo님은 ‘수레바퀴 아래서‘가 있는 교과서를 사용했던 것이죠. ^^

syo 2017-09-25 23:42   좋아요 0 | URL
명쾌하군요. 위안이 됩니다.

독서괭 2017-09-26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과 6펜스>와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며 ˝여성에 관한 부분은 맘에 안 들지만 그땐 다 그랬으니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했던 저를 부끄럽게 만드시네요. ˝이 부분에선 똥내가 나지만 그래도 훌륭한 작품이다˝가 아니라 ˝이런 부분은 훌륭하지만 저런 부분은 명백한 똥이다˝라고 말해도 되는 거였어요. 깨달음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저 결말 좀 충격적이네요. syo님 스포 덕에 안 읽게 될 듯.. ㅋㅋㅋ

syo 2017-09-26 06:58   좋아요 0 | URL
와.... 전 그냥 결말은 똥이다. 그리고 오늘의 똥은 그냥 오늘의 똥이다. 뭐 이런 말을 한건데, 독서괭님의 해석이 훨씬 고퀄이시다.... 꿈보다는 역시 해몽이죠!

그나저나, 스포라고도 할 수 없는게, 마지막 장면이긴 하지만 저건 사실 결말이라기보다는 결말 다 난 뒤의 일종의 에필로그 같은 장면이라고 보이거든요. 저런 결말을 향해 전개가 차근차근 흘러가는 게 아니라 그냥 갑툭튀다보니.... 솔직히 이 책은 사람들이 빨리고 분노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데 가치가 있습니다.

독서괭 2017-09-26 07:38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그럼 언제 읽을지 기약은 없지만 보관함에 넣어둬야겠습니다ㅋ 그리고 여기 고정팬 1인 추가입니다.

syo 2017-09-26 08:06   좋아요 0 | URL
3번 고객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