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 일 정도를 초점 없는 마음으로 멍하니 살다 보니, 겨우 조금씩 희미해지던 짝사랑이 있었다. 유행가 가사가 다 내 이야기 같지는 않았지만, 내 이야기로 유행가 가사를 만들면 정규 앨범 3집까지는 너끈하겠다 싶었다. 담배를 할 줄 알았다면 꽤 태워 없앴을 것이다. 담배값 인상 전이었다. 굉장히 좁은 방에 살고 있었는데, 사방의 벽이 다 코 앞에 있었다. 그러면 코 앞의 벽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국면부터는 그 사람도 그랬다. 코 앞에 앉아 있는데 벽 같았다. 오히려 벽과의 대화는 수월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대답을 상상할 수 있었으니까. 이기적인 대화는 내가 했던 모든 실수들을 되짚어 수정액을 바르고, 결국 품에 안는 것으로 결말을 정해놓은 채 세부적으로 오가는 말들을 한없이 변주하며 백 일을 갔다. 하나같이 다 더는 일이었다. 주었으나 그 사람이 받지 않았던 것들을 덜 주거나, 하였으나 그 사람이 듣지 않았던 말을 덜 하거나, 바랐으나 그 사람이 주지 않았던 마음을 덜 바라는 식으로.
쑥과 마늘 대신 환상과 환청을 먹으며 굴 속에서 백 일을 보내고, 나는 인간이 되어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윤중로엔 벚꽃이 피었다. 나 말고는 아무 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쌓여 있는 읽을거리들을 하나씩 척척 해치우며, 오늘의 나와 조금 더 가까운 내가 되었다.
작년 이맘때의 나는, 재작년에는, 그 전해에는, 이렇게 몇년을 거슬러보다가 떠올랐던 기억이다. 그때는 아직 그 사랑에 희망이 있을 때였다. 행복하고 초조했으며, 미우며 고마웠고, 좋은 사람이고 싶었지만 이미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도 같다.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 인정할 수 있는 과거로 바뀌는 것. 들뜬 흙과 모래가 층을 이루며 찬찬히 가라앉고 얼굴을 비춰 볼 수 있을 만큼 말간 물이 고요히 괴는 것. 이뤄졌든 그렇지 않든, 가끔 지나간 사랑을 떠올리다 보면 마음이 꽤 훈훈하게 덥혀진다. 마음의 온도를 유지하며 살기가 쉽지 않다.
인간은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과거를 바꾸고 있습니다. 바꿀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바뀌어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죠. 과거는 그만큼 섬세하고 감지하기 쉬운 것이 아닌가요?
_히라노 게이치로,『마티네의 끝에서』
소금기 진한 바람은 식당의 빛바랜 간판을 바꾸기도 합니다. 오래 전 '이모네 식당'은 '모네 식당'이 되었습니다. 곰치국의 간이 조금 진해졌지만 여전히 수련 같은 고명들이 가득 들어간 일이나 한해살이풀이 죽은 자리에 같은 한해살이풀이 자라는 일, 어제 자리한 곳에 오늘의 빛이 찾아 비치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그리 큰 일도 아니었습니다.
_박준,『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사랑도 예술도 적당해야 합니다. 지나치면 집착이 되고 푸념이 됩니다. 마음에 품은 걸 다 쏟으려다가 결국은 상대를 질리게 만듭니다. 살짝 비켜서기도 하고 잠자코 들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숨죽여 그 놀라운 기적에 경의를 표하고 감당 못할 축복을 삼가 받들어야 합니다.
_홍승찬,『오, 클래식』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_아니 에르노,『남자의 자리』
2
소설을 많이 읽었지만 소설은 정작 사랑의 중요한 순간이면 내 옆에 없었다. 소설을 읽으며 삶의 영점을 맞추는 것은 의외로 어렵다. 나를 감동시켰던 소설들은 항상 나와는 다른 시간 속 다른 사람,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먼 곳을 그린 것들이었다. 소설을 도대체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은 흔하다. 하지만 그럴 때 해줄 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온통 상투적인 것들만 떠올라서 난감하다.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지독한 불일치. 나는 그저 읽을 뿐이므로 공급할 대답이 항상 부족하여, 뭐 꼭 이유가 있어야만 읽어야 하는 이유는 뭔가요, 랄지, 대체 미적분 이거 살면서 쓸 일도 없는데 왜 배워야 되는 거냐고 따지는 아이들은 백발백중 수학 못합니다, 랄지, 이런저런 궁색한 말이나 내놓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것이다. 쩝, 당장은 이유를 알 수 없겠지만, 결국 소설을 읽는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소설을 읽는 것 뿐입니다. 다들 그렇게 찾았을 겁니다. 찾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찾은 줄 알았을 겁니다.
상상력이란 사회적인 것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비슷한 것들을 꿈꿀 때, 그것은 현실화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실제적인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소설이 힘을 가졌던 시기, 소설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믿게 만들었다. 같은 것을 상상하게 했다. 그렇게 문학은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더이상 아니다. 더이상 소설은 보편적 상상력이라는 과도한 책임을 떠맡으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소설이라는 말을 예술로 바꾸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언젠가부터 예술은 보편성을 포기했다. 그렇게 자유를 얻은 뒤 거침없이 하찮아졌다.
_김사과,『0이하의 날들』
이 지도과정은 변증법적이다. 문학이 우리를 좀더 삶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으로 만들면, 우리는 삶 자체에서 실습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것이 우리를 문학의 세부사항을 좀더 잘 읽는 독자로 만들면, 그것이 이번에는 우리를 삶을 좀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든다.
_제임스 우드,『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문학은 삶의 순간을 포착하고 미미한 것들을 소환해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관념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비슷비슷한 하루의 반복은 그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표상된 외면을 찢고 들여다볼 때 거대한 새로움이 있다. 문학은 우리의 머릿속에 짧게 스쳐가는 단상이나 눈앞에 빠르게 지나가는 파편적인 모습들을 정밀하고 미묘하게 묘사해 내서 결코 인식할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현상에 대한, 기억에 대한 문을 열어놓는 것이다.
_최은주,『책들의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