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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하게 굴지 말자.

 

그들이 동성애가 소수라고 여기고 짓누를 때, 그들은 문화나 가치관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연, 섭리, 진리, 도덕, 인간 따위의 거대하고 추상적인 말을 시위에 매겨 소수자를 겨냥한다. 동성애는 문화나 가치관의 문제로 다뤄지지만 근본은 그 중의 무엇도 아니다. 향유하기 위해서 집단 문화나 개인적 가치관이라는 보조자의 힘을 빌려올 필요가 없는 타고난 권리일 뿐이다. 동성애자들은 그들을 향해, 그러지 말고 우리와 함께 동성애를 하지 않을래? 라고 요청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대로 그런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며 구역질한다. 당사자도 이해관계자도 아니면서 자신들에게 허락하거나 금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말들이 자신들에게 그런 자격을 부여한다고 믿는다. 추상적인 말의 화살을 계속 날린다. 소수자들은 문화나 가치관이라는 얇고 허약한 방패라도 빌려와 스스로를 지키고 싶지만, 그들은 들어주지 않는다. 자연, 섭리, 진리, 도덕, 인간. 거대한 단어를 투석기에 실어 계속 날릴 뿐이다. 

 

그러나 언젠가 역전의 순간이 온다. 항상 그랬다. 그것은 추세다. 우리가 오늘날 노예나 신민이 아닌 것은, 처음에는 소수자였던 사람들이 자연, 섭리, 진리, 도덕을 제것마냥 휘두르던 다수자들로부터 다양한 자유들을 하나씩 찾아와 품에 안고 마침내 스스로 다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는 아직도 노예거나 신민이라 해도, 같은 방식으로 언젠가 해방은 올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그랬듯 자연, 섭리, 진리, 도덕, 인간과 같은 말들이 지금 소수자인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다수자로 만들어 줄 때, 오늘의 다수자였던 그날의 소수자들은 문화나 가치관이라는 얄팍한 말 말고는 손에 들 수 있는 것이 없어질 것이다. 그때 부끄럽지 않으려면, 제발 오늘 치사하게 굴지 말자. 거대하고 실체가 없는 말 말고는 상대를 때릴 수 있는 무기가 없을 때, 그건 지금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인간은 신에 의해 자기를 해명할 수 없다. 오히려 신이 인간에 의해 해명된다. 신의 부름이 들리는 것은 사람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인간이 거기에 응답하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기획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만일 신이 실존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초월성을 인도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하다. 인간은 오직 다른 인간들로 이루어진 상황 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_ 시몬 드 보부아르,『모든 사람은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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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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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노래를 멋있게 부르지는 못했지만, 계란 후라이를 예쁘게 뒤집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마음이 따듯해서 괜찮은 사람이 되는 일. 그것은 마음의 일이라서 마음만 먹으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의 마음을 이해하고, 말을 지지하고, 몸짓에 응답하면 끝나는 쉬운 일인 줄 알았다.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다가갔다.

 

자주 혼자가 되었다. 혼자서는 미운 것이 참 많았다. 너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네가 미웠다. 너의 말을 지지하는 내 말을 지지하지 않는 네가 미웠다. 너는 벽이었다. 벽은 몸짓이 없었다. 무엇에 응답해야 할지 몰라 나는 빈 방을 울리는 메아리가 되었다. 미움으로 돌아오는 미움을 받아내는 것은 메아리의 일이었다. 미워하다 혼자서 잘도 지쳤다.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되고 싶다. 노래도 이제 웬만큼 하고, 계란 후라이도 척척 뒤집게 되었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은, 마음이 따듯할 줄 몰라서 괜찮지 못한 사람으로 사는 일. 그것은 마음의 일도, 말의 일도, 몸짓의 일도 모두 될 수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쉬운 일은 웃는 일이었다. 미움은 시간의 긴 꼬리를 따라가고 이제 내 방에 작작하게 웃음만 남았으니, 다시 너를 만나 너에게 따뜻한 사람이 될 일이 생긴다면, 웃겠다. 자주 웃겠다. 마음도, 말도, 몸짓도 아니라 낙낙한 웃음을 주겠다. 그것은 네게 한껏 나누어 주어도 그대로 내게 남아있는 모닥불 같은 것이겠으니, 잘하면 우리 그것만으로도 따듯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들이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든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_김태정,「물푸레나무」,『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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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8-24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점 쇼 님의 문장이 시가 되어 갑는군요..

syo 2017-08-24 10:55   좋아요 0 | URL
저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쇼코 2017-08-24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문단을 좀 오래 읽었어요. 저에게도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거든요. 마지막에 ‘지쳤다‘는 술어까지 제가 그 사람을 떠올리며 자주 느꼈던 감정이라 읽는 순간 가슴이 덜커덩거리네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타인에게 이해받길 원하는 것도 이기심일텐데 그걸 놓기가 참 어렵습니다. 저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네요^^

오늘 글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날씨가 또 막!! 더워졌어요ㅜㅠ 건강 조심 하셔요^^

syo 2017-08-24 12:24   좋아요 0 | URL
제 글은 똥이지만, 저 시집은 너무너무 좋습니다. 아직 안 읽어보셨다면 추천합니다.

쇼코님도 더위 조심하시구요^^
 

 

1

 

유유는 정말 미쳤다. 악마다. 버어어어얼써 저격당해 숨이 끊어진 내 취향의 시체 위에다 여전히 갈겨대고 있다! 그만,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출판사야, 제발 그만하라고, 당신네들 책 보다가 조상님 영접......은 과장이지만, 과장 아니라 유유의 정말 모든 책이 다 나 보라고 나오는 것 같다. 내 취향을 분석하기 위해 유유에서 공작원이 파견된 것이 틀림없다. 지금도 어디선가 쌍안경을 들고 내가 일기 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듣기로 유유는 1인 출판사라던데, 그렇다면 전직원이 다 나를 감시하는데 투입된 셈이다. 책 출판 같은 소소한 일은 인공지능이 하고 있는 게 틀림없겠지.  

 

 

 

2

 

 

이 책들이 없었다면 내 글은 얼마나 더 끔찍했을까. 쌍안경으로 글을 쓰고 있는 syo의 모니터를 지켜보던 유유는 들끓는 울분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더러운 이 세상에 저런 머저리 같은 문장으로 똥물까지 타도록 놔 둘 수는 없지. 유유는 한 손으로는 쌍안경을 들고 여전히 내 동태를 살피는 한편, 나머지 한 손으로 인공지능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이세돌을 이겨먹은 인공지능 집안의 좀 모자라지만 구김살 없이 자란 막내놈쯤 되는 유유의 인공지능은 즉시 명령을 캐치하여 작가를 섭외하고, 디자이너를 섭외하고, 교열보고, 편집봐서 책을 출판한다. 책이 나올 때쯤 되면 제 아무리 자아성찰에 재능이 없는 syo로서도 더 이상 자신의 문장을 눈뜨고 볼 수 없게 되었기에, 알라딘을 뒤진다. 그리고 유유의 책을 찾아낸다. 일은 십중팔구 이렇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3

 

 

 

이 책들이 없었으면 나는 얼마나 더 무식했을까. 어느 날 카페에서 여자친구와 syo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syo야, 너는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음......아무래도 유물은 사적으로 소유하기보다는 박물관에 전시하는 게 좋지 않을까? 세상에, syo야, 니가 달고 있는 그 머리통은 너의 사적인 유물일 뿐이니? 대화를 도청하고 있던 유유는 syo의 묵시록적인 무식함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저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만도 못한 뇌하수체를 가진 놈이 이 사회를 활보하도록 풀어 놓을 수는 없지. 유유는 인공지능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명령을 캐치한 인공지능이, 판권을 확보하고, 번역하고, 감수를 받고, 이 책들을 출판했을 무렵, syo는 실연의 슬픔을 딛고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알라딘을 뒤지고, 이 책들을 발견해 읽는다. 그리고 외친다. 이 나쁜 기집애, 니가 그렇게 잘났냐, 그래봤자 너나 나나 똑같은 자연선택의 산물일 뿐이야, 이 남근선망의 결과물아!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늦었다. 헛소리는 허공에 산산히 부서지고, 굵은 눈물이 또르르 syo의 볼을 타고 흐른다. 이번만큼은 유유가 조금 더 선제적이었어야 했다.

 

 

 

4

 

   

그리고 이 책들이 없었다면 지금쯤 나는 얼마나 더 지루한 놈이 되고 말았을까. 실연의 밤을 눈물과 지식으로 수놓으며 새로운 인연을 기다렸으나 syo의 곁자리에는 끝내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고, 아, 내가 무식한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구나, 하는 슬픈 사실을 깨달았을 때쯤 syo는 이미 어떤 코미디에도 웃지를 못하는 메마른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syo의 비루한 모습을 역시 쌍안경으로 지켜보던 유유의 가슴 속에 어찌 타는 듯한 연민과 동정심이 샘솟지 않았으랴. 그래, 너는 심장이 없어, 너는 심장이 없어, 너는 아프다고 말하면 더 아플 것 같고, 슬프다고 말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냥 웃지, 그냥 웃지...... 하여간 인도적인 차원에서라도 저 못난 자식에게 웃음이라도 되찾아 주어야겠군. 유유는 인공지능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명령을 캐치한 인공지능은 15세기부터 시작해 출판된 모든 고전을 훑어내려가며 syo가 웃지 않고는 배겨 낼 도리가 없는 걸작들을 찾아내고, 번역하고, 양념을 치고, 출판한다. 그 무렵 syo는 정말로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었기 때문에, 이유없이 구글에 트림, 똥, 방귀 따위를 때려 넣으며 소일하고 있었는데, 떡하니 검색된 책과, 그 근처에 있는 책들을 읽는다. 그리고 마침내 메말랐던 마음에 촉촉히 개그의 단비가 내림을 느낀다.....

 

 

 

5

 

이런 짓은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지만 여기서 그만 둔다. 읽은 책들은 더 많다. 지금도 유유는 쌍안경을 통해 내가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사람 하나 만든 거지, 하면서. 동의한다. 유유, 당신은 분명 이 글을 보고 있다. 당신은 좀 더 보람을 느껴도 좋겠다. 이제 syo는 물가에 내 놔도 걱정이 덜 되는 인간이 되었고, 당신은 더 이상 다음에 출판할 책을 결정하기 위해 내가 어떤 머저리 같은 짓을 할지 지켜볼 필요가 없다. 내키는대로 만드시라. 이제 당신이 무슨 책을 만들어도, 나는 읽을 것이다. 이미 방귀도 읽은 마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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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8-22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이사람 ㅋㅋㅋㅋㅋㅋㅋㅋ 글 실력 늘어가는 것 좀 보소!!!!!

syo 2017-08-22 21:38   좋아요 0 | URL
아시다시피 제 스타일이 뭘까 찾기 위해 이것저것 해보는 중입니다.

다락방님은 즐거운 글을 선호하시니까 좋아하실 것 같았어요ㅎㅎㅎ

다락방 2020-10-06 08:19   좋아요 0 | URL
나 유유 검색하다가 이 글 보면서 이 글 참 재미나네, 댓글 달라고 했더니 여기 이미 내가 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0-10-06 13:0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시절 내가 좀 잘 썼다?

책읽는나무 2017-08-22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김영하 작가님을 제친 유유책이라굽쇼???
음.....그래도 어쨌거나 좋아요 한 개는 지금 눌렀어요.
이제 몇 개 남은거죠??

syo 2017-08-22 22:23   좋아요 0 | URL
ㅎㅎㅎ음, 백만 개요??

졔졔 2017-08-22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만화보는 것처럼 킄킄ㅋ대면서 읽었어요ㅋ 재밌는 글이에요! 유유 출판사는 독특한 시그니처(?) 디자인을 갖고 있네요?! 책 디자인을 많이 보는편이라^^;

syo 2017-08-23 06:25   좋아요 0 | URL
엄청 품격있는 디자인은 아니어도 어떤지 모아보고 싶게 만드는 맛이 있는 것 같습니다 ㅎㅎㅎ

오거서 2017-08-23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유유 책을 볼 때면 syo 님이 바로 떠오를 것 같아요. ^^;

syo 2017-08-23 08:12   좋아요 0 | URL
앗, 바람직하지 않은 기억은 빨리 잊혀지기를 바랍니다. 좋은 책들 보는데 syo같은 게 떠오르면 뒷맛이 찝찝할 거예요^^
 

 

1

 

 

이런 꿈을 꾸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사람은 분명 조석이었다. 잠에서 깨어 생각해보건대, 그 얼굴과 가장 닮은 사람은 서태지이지만, 꿈 속에서 그는 분명 웹툰 작가 조석이었다. 나는 보자마자 그 서태지가 조석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을 뿐인데 그 서태지는 본인 입으로, 네 맞습니다. 조석입니다, 라고 시인했다. 안녕하세요, 조석씨. 나는 일곱 권의 책을 반납했다. 스무 권의 책을 빌리고 일곱 권을 반납했으니 열세 권이 남았을텐데, 어찌된 일인지 나는 카운터에서 한 발 물러서서 몇 권이 남았는가를 어플로 알아보고 있었다. 몇 권을 더 빌릴 수 있는지 계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멍청하게도, 스무 권을 빌릴 수 있는 도서관에서 스무 권을 빌렸다가 일곱 권을 반납했으니 내 손에는 열세 권이 남았고, 스무 권을 빌릴 수 있는 도서관에서 열세 권을 빌렸으니 일곱 권을 빌릴 수 있다는 계산을 하려했던 것 같다. 엄마가 너한테 사과 스무 개를 줬어. 근데 너가 사과 일곱 개를 먹었어. 자, 그럼 여기서 문제. 너는 사과를 몇 개 먹었니? 어쨌거나 그때 갑자기 조석이 나를 보며 말했다. syo씨의 글에는 리듬이 있어요. 네? 그러니까 이런 리듬 말입니다, 좌삼삼 우삼사. 네? 그것은 좋다는 뜻입니다. 우와, 정말요? 네, 제가 만화로 그리고 싶습니다. 만화로요? 네, 그러니까 이런 캐릭터로 말입니다, 좌삼삼 우삼사. 네? 그것은 좋다는 뜻입니다. 우와, 정말요? 네, 아무래도 syo씨의 글에는 리듬이 있으니까요.

 

이런 대화가 한없이 이어지다가 점차 가늘고 희미해더니 잠에서 깨었다.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꿈을 꾼 거지? 그러니까 어제 이백오십만 년만에 맥주 두 잔 먹고, 4킬로미터를 걸어걸어 집으로 왔고, 두 시까지『쓰기의 말들』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요즘 쓴 리뷰나 페이퍼들이 갑자기 칭찬을 받아서 꽤 기분이 좋았나보다. 열심히 쓰라는 꿈인가 봐. 칭찬은 syo를 춤추게 한다. 그러니까 이런 춤 말입니다. 좌삼삼 우삼사.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당최 저놈의 좌삼삼 우삼사가 뭔지를 모르겠다...... 좌삼삼 우삼사가 내 "쓰기의 말"이 되고 싶어서 얼른 꿈에 나온 걸까?

 

 

힘들면, 도망가고 싶다. 쓰는 삶에서, 쓰는 상황에서. 술을 마시거나 하염없이 걷지만, 일시적인 기분 전환일 뿐 마음이 홀가분하지도 걸음이 자유롭지도 않다. 글 쓰는 에너지를 회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글쓰는 것. 몸의 감각이 쓰기 모드로 활성화되고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밑 원고가 다져진다. 모터가 돌아가고 원고가 불어나 있으면 그 불어난 힘이 글의 소용돌이로 나를 데려간다.

_ 은유,《쓰기의 말들》

 

 

2

 

빵 굽는 사람은 빵을 굽고, 집을 짓는 사람은 집을 짓는다. 빵 굽는 사람은 빵으로 말하고, 집을 짓는 사람은 집으로 말한다. 나는 날마다 짐승처럼 엎드려 여덟 시간씩 글을 쓴다.

_장석주,《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불굴의 생산력을 자랑하는 작가들. 오늘 책이 나왔다고 하니 지금쯤 다음다음다음 책을 준비하고 있겠다 싶은 책 머신들. 강준만, 우석훈, 박홍순 그리고 장석주. 엎드려 여덟 시간의 글을 쓰는 문장의 짐승남은 멋이 있다. 가끔씩 저런 삶을 꿈꾸기도 한다. 평생을 치열하게 읽기와 쓰기에 매달려 살아온 것이 충분히 자랑할 만한 일이 되고 널리 존경받을 이유가 되는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겠다.  

 

 

3

 

그리하여, 지식과 재능을 가진 당신이 그 위에 뜨거운 심장을 갖고 있다면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당신과 동료는 자신의 지식과 재능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복무하려고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점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주인이 되려고 함이 아니라 투쟁의 동료가 되기 위함입니다. 지배하려고가 아니라 미래를 정복하려고 앞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당신 자신을 고취시키고자 함입니다. 가르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대중의 갈망을 이해하고 정확히 표현하려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들이 청년의 모든 도약과 함께 삶 속에서 녹아내리도록 부단히 활동하기 위함입니다. 그때라야, 비로소 당신은 하나의 완전한 삶, 이상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_P. A. 크로포트킨,《청년에게 고함》

 

또한, 책상에서만 글 쓰는 사람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싸우되 싸움 안에서 내가 가르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사람, 쓰되 쓴 것을 바로 내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채우고 그 이웃은 또 다른 이웃을 채우며 빙빙 돌아와 마침내 내게 오도록 하는 사람 되면 좋겠다.

 

으, 오글오글,

 

도와주세요. 중2병이 낫질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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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7-08-19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2병도 이만한 문장으로 표현되면 작품입니다. 꿈 내용 너무 재밌네요. 서태지 얼굴을 한 조석은 뭔가요. 좌삼삼 우삼사는 또..ㅋㅋㅋㅋ 앞으로도 많이 춤추세요!^^

syo 2017-08-19 11:25   좋아요 0 | URL
뭘까요 저 좌삼삼 우삼사는...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으니까 꿈에 나온걸 텐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ㅋㅋㅋㅋ
좋은 주말 되세요, 독서괭님.

시이소오 2017-08-2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syo님 글이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는것 같아요. 다락방님 리뷰글도 넘 좋던데. 계속 좌삼삼우삼사해주시길^^

syo 2017-08-20 13:46   좋아요 0 | URL
시이소오님이 생업에 종사하시느라 덜 읽고 덜 쓰시는 까닭에 제 못난 글들이 이웃분들 눈에 띄는 것이겠지요. 그립습니다.....

AgalmA 2017-08-21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얼굴이 좌삼삼 우삼사로 상상되려고 해요ㅋㅋ 그게 어떻게 생긴 거냐고 물으시면 꿈에서 보여 드릴 수 있다고... 줄행랑))) ㅎㅎ

syo 2017-08-21 11:09   좋아요 1 | URL
거울을 봤더니 정말 제 얼굴이 좌삼삼 우삼사로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생긴 건지는 AgalmA님 꿈으로 확인하실 수 있겠으나, 힌트를 드리자면 꿈에서 만나보라고 추천할 만한 얼굴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좌삼삼 우삼사가요.
 

1

 

엄마는 책이었다. 엄마는 책 한 권 읽지 않지만 아들이 가장 자주 펼치는 책이었다. 가장 함부로 읽는 책이었다. 아들은 자라며 엄마의 여백에 아들의 생각을 휘갈겨 놓거나 밑줄을 치거나 귀퉁이를 접어 놓거나 했다. 그 모든 일이 무심하게 이루어졌다. 아들에겐 아들만 있었고,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순한 책이었다. 묵묵하고 깊었다.

 

종이로 된 수천 권의 책을 읽고 돌아와서야 아들은 엄마가 책이었음을 깨달았다. 엄마의 조심스러운 미소 안에서 언젠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어 놓은 밑줄들을 보았다. 아들은 제가 그은 그 밑줄들을 '세월'이라고 읽고 싶었지만 이내 그것을 '상처'라고 읽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접어 놓은 귀퉁이가 허리와 무릎에서 여전히 접혀 있었다. 아들이 펴 놓았어야 할 것들은 아들이 펴지 않았으므로 그 누구도 펴지 않은 채 남았다. 엄마는 책이었다. 아들이 가장 함부로 읽어 이제 더는 아무도 읽지 않는 빛 바랜 책이었다. 자기가 새긴 글자들은 바스라져 시간의 어느 자리에 가라앉히고, 이제는 아들이 휘갈겨 놓은 아들의 말, 아들의 행동, 아들의 생각, 아들의 이름만을 담고 있는, 아무도 읽지 않으려 하는 책이 되었다.

 

아들은 오늘 시간이 우연히 펼쳐 놓은 그 책의 어느 낱장을 읽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그 위를 훑고 지나가도 바스라질 것 같지 않은 제 이름이 보였다. 그 순간이 날카롭고 따뜻한 펜이 되어, 아들의 책장을 열어젖히고 처음으로 밑줄을 그었다. 아들은 책이었다. 종이로 된 수천 권의 책을 읽고 돌아와서도 제가 책인 줄 몰랐던 아들은, 엄마가 책이었음을 깨닫고 비로소 저도 책이 되었다.

 

 

 

누구든 빌린 책에서 밑줄이 그어진 문장을 만난다면, 거기에 밑줄을 그은 사람과 그 감정에 대해 잠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잘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까.

 

_ 이유경,『독서공감, 사람을 읽다』

 

 

2

 

 

 

군장(軍裝)을 메고 금학산을 넘다보면 평야를 걷고 싶고 평야를 걷다보면 잠시 앉아 쉬고 싶고 앉아 쉬다보면 드러눕고 싶었다 철모를 베고 풀밭에 누우면 밤하늘이 반겼다 그제야 우리 어머니 잘하는 짠지 무 같은 별들이, 울먹울먹 오열종대로 콱 쏟아져내렸다

 

_ 박준,「별의 평야」,『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산을 타고, 자갈 위를 달리고, 진흙 속을 뒹굴며 며칠을 보낸 뒤의 저녁이었다. 몸과 군장은 첫날보다 훨씬 무거워졌다. 가벼워진 것은 마음 뿐이어서 우리는 마음에 의지해 걸어야 했다. 철원의 밤은 10월부터 추웠다. 추운 10월의 밤을 터벅터벅 걸었다. 걷다 보면 더웠다. 덥다 싶을 때쯤 쉬었다. 쉬다 보면 다시 추웠다. 땀이 몸을 가지고 놀았다. 한번 내려 놓으면 다시 메고 싶지 않을까봐 우리는 등에 멘 군장을 풀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누워 쉬었다. 담배를 태우거나 소변을 보는 이는 군장을 벗었지만 철모는 벗을 수 없었다. 병장은 철모를 벗을 수 있었다. 병장은 이 길을 다 걸으면 이틀을 쉬었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철원은 10월에도 밤이 추운 곳이지만, 아직 별이 많은 곳이므로 하늘을 자주 보라고 했다. 이등병은 철모를 벗을 수 없었다. 철모가 익숙치 않아 고개를 들자 목이 확 꺾였다. 별이 눈으로 확 들어왔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별이었다. 우리는 다시 걸었다. 다시 걷는 동안 이등병은 하늘을  올려다 볼 필요가 없었다. 지휘관 몰래 망막에 박아 훔친 별들이 앞서 걷는 이의 뒷꿈치에 묻은 진흙으로, 채 다 털지 못한 엉덩이의 모래알로 남아 하나하나 셀 수도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모두 서로의 뒷모습에서 별을 세는 것 같았다. 금학산 어디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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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8-15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쇼 님이 이제는 거의 작가‘가 되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syo 2017-08-15 19:36   좋아요 0 | URL
설마요... 그래도 곰발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기쁩니다. 사실은 힘 줘서 썼거든요. 아니다, 힘 빼서 쓴건가...

독서괭 2017-08-1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는 책이었다. 이 글 정말 좋네요. 하트 100개입니다.

syo 2017-08-15 19:38   좋아요 0 | URL
칭찬 감사합니다 ㅎ
하트는 짝수번 누르면 0개가 됩니다ㅎㅎㅎ
독서괭님의 마음만 기쁘게 받습니다^^

단발머리 2017-08-15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좋다,는 말 말고 좀 더 근사한 말을 하고 싶은데, syo님처럼 멋지게 말하고 싶은데... 부족한 저의 표현력을 탓합니다.
syo님은 더 많이 써야 해요~
더 많이 쓰고 이렇게 알라딘에 올려줘야 해요~

syo 2017-08-15 22:16   좋아요 0 | URL
ㅠㅠ 과찬이시고 과공이세요. 많이 써야 한다는 말씀보다 더 근사한 말이 어딨겠어요. 감사합니다.

cyrus 2017-08-16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엄마를 들이기 위해 전 엄마를 중고서점에 판 저는 불효자였습니다. ㅎㅎㅎ

syo 2017-08-16 10:53   좋아요 0 | URL
고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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