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엄마는 책이었다. 엄마는 책 한 권 읽지 않지만 아들이 가장 자주 펼치는 책이었다. 가장 함부로 읽는 책이었다. 아들은 자라며 엄마의 여백에 아들의 생각을 휘갈겨 놓거나 밑줄을 치거나 귀퉁이를 접어 놓거나 했다. 그 모든 일이 무심하게 이루어졌다. 아들에겐 아들만 있었고,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순한 책이었다. 묵묵하고 깊었다.

 

종이로 된 수천 권의 책을 읽고 돌아와서야 아들은 엄마가 책이었음을 깨달았다. 엄마의 조심스러운 미소 안에서 언젠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어 놓은 밑줄들을 보았다. 아들은 제가 그은 그 밑줄들을 '세월'이라고 읽고 싶었지만 이내 그것을 '상처'라고 읽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접어 놓은 귀퉁이가 허리와 무릎에서 여전히 접혀 있었다. 아들이 펴 놓았어야 할 것들은 아들이 펴지 않았으므로 그 누구도 펴지 않은 채 남았다. 엄마는 책이었다. 아들이 가장 함부로 읽어 이제 더는 아무도 읽지 않는 빛 바랜 책이었다. 자기가 새긴 글자들은 바스라져 시간의 어느 자리에 가라앉히고, 이제는 아들이 휘갈겨 놓은 아들의 말, 아들의 행동, 아들의 생각, 아들의 이름만을 담고 있는, 아무도 읽지 않으려 하는 책이 되었다.

 

아들은 오늘 시간이 우연히 펼쳐 놓은 그 책의 어느 낱장을 읽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그 위를 훑고 지나가도 바스라질 것 같지 않은 제 이름이 보였다. 그 순간이 날카롭고 따뜻한 펜이 되어, 아들의 책장을 열어젖히고 처음으로 밑줄을 그었다. 아들은 책이었다. 종이로 된 수천 권의 책을 읽고 돌아와서도 제가 책인 줄 몰랐던 아들은, 엄마가 책이었음을 깨닫고 비로소 저도 책이 되었다.

 

 

 

누구든 빌린 책에서 밑줄이 그어진 문장을 만난다면, 거기에 밑줄을 그은 사람과 그 감정에 대해 잠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잘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까.

 

_ 이유경,『독서공감, 사람을 읽다』

 

 

2

 

 

 

군장(軍裝)을 메고 금학산을 넘다보면 평야를 걷고 싶고 평야를 걷다보면 잠시 앉아 쉬고 싶고 앉아 쉬다보면 드러눕고 싶었다 철모를 베고 풀밭에 누우면 밤하늘이 반겼다 그제야 우리 어머니 잘하는 짠지 무 같은 별들이, 울먹울먹 오열종대로 콱 쏟아져내렸다

 

_ 박준,「별의 평야」,『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산을 타고, 자갈 위를 달리고, 진흙 속을 뒹굴며 며칠을 보낸 뒤의 저녁이었다. 몸과 군장은 첫날보다 훨씬 무거워졌다. 가벼워진 것은 마음 뿐이어서 우리는 마음에 의지해 걸어야 했다. 철원의 밤은 10월부터 추웠다. 추운 10월의 밤을 터벅터벅 걸었다. 걷다 보면 더웠다. 덥다 싶을 때쯤 쉬었다. 쉬다 보면 다시 추웠다. 땀이 몸을 가지고 놀았다. 한번 내려 놓으면 다시 메고 싶지 않을까봐 우리는 등에 멘 군장을 풀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누워 쉬었다. 담배를 태우거나 소변을 보는 이는 군장을 벗었지만 철모는 벗을 수 없었다. 병장은 철모를 벗을 수 있었다. 병장은 이 길을 다 걸으면 이틀을 쉬었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철원은 10월에도 밤이 추운 곳이지만, 아직 별이 많은 곳이므로 하늘을 자주 보라고 했다. 이등병은 철모를 벗을 수 없었다. 철모가 익숙치 않아 고개를 들자 목이 확 꺾였다. 별이 눈으로 확 들어왔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별이었다. 우리는 다시 걸었다. 다시 걷는 동안 이등병은 하늘을  올려다 볼 필요가 없었다. 지휘관 몰래 망막에 박아 훔친 별들이 앞서 걷는 이의 뒷꿈치에 묻은 진흙으로, 채 다 털지 못한 엉덩이의 모래알로 남아 하나하나 셀 수도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모두 서로의 뒷모습에서 별을 세는 것 같았다. 금학산 어디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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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8-15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쇼 님이 이제는 거의 작가‘가 되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syo 2017-08-15 19:36   좋아요 0 | URL
설마요... 그래도 곰발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기쁩니다. 사실은 힘 줘서 썼거든요. 아니다, 힘 빼서 쓴건가...

독서괭 2017-08-1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는 책이었다. 이 글 정말 좋네요. 하트 100개입니다.

syo 2017-08-15 19:38   좋아요 0 | URL
칭찬 감사합니다 ㅎ
하트는 짝수번 누르면 0개가 됩니다ㅎㅎㅎ
독서괭님의 마음만 기쁘게 받습니다^^

단발머리 2017-08-15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좋다,는 말 말고 좀 더 근사한 말을 하고 싶은데, syo님처럼 멋지게 말하고 싶은데... 부족한 저의 표현력을 탓합니다.
syo님은 더 많이 써야 해요~
더 많이 쓰고 이렇게 알라딘에 올려줘야 해요~

syo 2017-08-15 22:16   좋아요 0 | URL
ㅠㅠ 과찬이시고 과공이세요. 많이 써야 한다는 말씀보다 더 근사한 말이 어딨겠어요. 감사합니다.

cyrus 2017-08-16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엄마를 들이기 위해 전 엄마를 중고서점에 판 저는 불효자였습니다. ㅎㅎㅎ

syo 2017-08-16 10:53   좋아요 0 | URL
고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