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과 광영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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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가 끝난 수건을 탁탁 털어서 건조대에 너는 중이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징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오, 저놈의 재난 문자는. 수건 다음에는 바지, 바지 다음에는 속옷, 속옷과 속옷 사이 공간에 양말……. 좋아, 건조대 테트리스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군. syo는 이렇게 생활 속 소소한 만족을 통해 자존감을 저금하는 중이다.
그랬는데, 한방에 자존감 로또가 터졌다. 재난 문자겠거니 했던 그 진동이 실은 메일 알림이었고, 꾹 눌러보니 알라딘이 쓴 편지가 나왔다. 축하합니다. 너 40만 원. 깜짝 놀랬지? 사나흘 뒤에 줌. 오!
서재에는 내 당첨 소식을 나보다 먼저 접한 이웃분들의 축하 댓글이 달려 있었다. 너가 받을 것 같다고 내가 그랬지? 하는 글들이 많아서 좋았다. 그 말들이 다 진심이셨군요. 여러분들은 진짜로 제가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계셨어요. 나조차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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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없는 인생 어디 있겠느냐마는, 이 최우수작 당첨의 이면에도 역시 어딘지 짠한 사연이 있었더랬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 짠한 사연의 시작은 도둑놈에서부터다.
거금 4만 원을 투자하여 『피에 젖은 땅』을 구매, 구매하는 김에 정희진 선생님의 신간과 또 다른 책까지 엮어 약 7만 원짜리 박스를 구성했다. 그리고 그 박스가 도착하기로 예정된 날, syo는 데이트 중이었다. 우리 집 택배 수령 시스템은 벨 누르기도 이름 부르기도 아니라, 그냥 택배형아가 알아서 대문 열고 들어와서 우리 집 현관 앞에 던져놓고 가는 방식이다. 데이트 중에 택배 잘 놓고 간다는 형아의 카톡을 확인했으니 집에 돌아오면 우리집 현관 앞에 알라딘 로고가 찍힌 박스가 있어야겠지? 그런데 없었다. 알라딘 박스 뿐 아니라 1.25kg짜리 하인즈 케찹이 든 박스도 같이 없었다. 택배형아에게 전화를 했는데, 형아는 틀림없이 평소 하던 대로 박스 두 개를, 하나는 책이고 하나는 뭔지 모를 그 박스들을 내려놨다고 했다. 그동안 우리 집에 택배 백만 개를 무사고로 가져다 놓았던 형아가 실수를 할 리가 없지. 아랫집 아저씨 역시 오후쯤 우리 집 현관 앞에 살포시 놓여진 박스 두 개를 목격했다는 진술을 보탰다. 그렇다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이건 필시 도둑놈이다.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도둑놈이 내 책과 토마토케찹을 가져간 것이다. 책과 토마토케찹을. 아, 천하에 나쁜 새끼, 그 책은 리뷰대회 나가려고 산 책이었고 케찹은 유기농이었단 말이다…….
책과 케찹을 잃은 syo는 실의에 빠져 리뷰대회 참가를 포기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연을 페이퍼에도 간략하게 서술하고 더덕단 친구들에게도 알렸다. 친구들아, 나는 축구 결승전에 나갈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축구화를 도둑맞아 버렸거든…… 조깅화를 신고 뛸 수는 없는 거잖아. 안 될 거야, 난……. 이렇게 슬픈 분위기도 연출했지만 동시에, 아, 아깝다, 내가 등판만 했으면 그냥 40만 원 집어 삼키는 건데, 아, 요거 도둑맞는 바람에 날라갔네, 아, 어쩔 수 없지, 하며 불난 집 지하에 금송아지 있었는데 이제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아쉽게 되었구나- 하는 식으로 까불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syo의 이렇듯 복잡다단한 감정 몸부림을 지켜보던 친구들 가운데, 평소에도 손이 빠르고 약간 기분파에다가 뭔가 하나에 꽂히면 무소의 뿔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친구가 벌떡 일어나면서(채팅이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는 것) 외쳤다. 내가 사줄게! 그러더니 진짜 『피에 젖은 땅』을 사줬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어어 아니겠지 어어어 하는 사이에 덜컥 사줬다. 그리고 1등 하라고, 넌 반드시 일등을 해야한다며 느낌표를 삼만 개쯤 날렸다. 일이 점점 커졌다. 11111(이게 뭔지는 pc에서만 제대로 보일 겁니다.)
syo는 그 친구의 호쾌함에 얼떨떨한 감동을 받았고, 얼떨떨한 상태로 외쳤다. 그렇다면 여러분, 내가 1등을 한다면 여러분들에게 책 한 권씩을 돌리겠습니다!!!!! 다들 무슨 책 받고 싶은지 생각해 놓으세요!!!! 내가 뭘 쓸지는 나도 당최 모르겠지만, 아 뭐든 되지 않겠어? 나야, 나, syo라고!! 와아~!!! 맞아맞아!! 너는 syo야!! 와와와!!
더덕단은 저게 문제다. 다들 무슨 마른 더덕처럼 분위기에 활활 탄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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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이 드는 데 며칠 걸리지도 않았다. 책이 도착했고 책상 위에 올려놨더니 책상이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사실은 내가 힘든 것이고 책상은 내 마음을 표현하는 객관적 상관물에 불과했을 것이다. 800페이지였다. 그걸 알고는 있었지만,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고 보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른 법이다.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할지, 또 어떻게 써야 할지 정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둡도다, 나의 미래여. 그러게 깝치길 왜 깝쳐놔서…….
마감일 며칠 전에야 겨우 완독했고, 그 시점에는 증언록 형태로 글을 써야겠구나- 하는 기초적인 윤곽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방법에도 확신이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형식의 리뷰를 쓰는 참가자는 나밖에 없을 거고, 그렇다면 그건 굉장히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는 것이 윤리적으로도 썩 달갑지 않아서, 쓰는 내내 이걸 써도 되는 건지 아니지를 계속 캐묻는 마음한테 괴롭힘을 당했다. 그래도 시간을 많이 들여서 열심히 썼고, 그 결과 미운 자식이면서 동시에 굉장히 아끼는 자식이 태어났다. 이제 낙장불입이다. 밀어붙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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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고작 리뷰대회 1등 이게 뭐라고 이 호들갑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syo에게 이건 충분히 ‘뭐’고, 설령 이게 진짜로 뭐가 아니라 치더라도 그렇다면 이렇게 뭣도 아닌 것이 정말 뭐라도 되는 것처럼 기뻐해주고 칭찬해주는 내 친구들이야말로 진짜 ‘뭐’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어서, syo는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당당히 호들갑 떤다.
이 영광을 도둑놈에게 조금쯤은 바치고 싶다. 도둑놈아, 내 유기농 케찹은 얼마나 남았니.
그리고 영광의 대부분은 4만 원을 투자해 40만 원을 일구어낸 투자의 귀재, 무소의 뿔 그 친구에게 돌려야 하겠다. 내가 최우수상에 당첨되었을 때 그 친구도 호텔 숙박권에 당첨되었다고 한다. 호캉스는 시어머님 아들이랑 가는 거 아니라는 다른 이웃님의 센스 넘치는 댓글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시어머님 아들과 함께 다정한 호캉스를 떠나기로 했다고. 부럽다. 친구의 시어머님의 아드님께도 겸사겸사 영광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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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가 예측한 3명의 1위 후보에 대해 궁금해하셨던 분들이 계셨다. 모든 분들의 글을 다 꼼꼼히 읽은 것이 아니라 좀 그랬지만 이 마당이라 말씀드리자면, syo는 에일로이 님, 잠자냥 님, 초란공 님을 생각했다. 저 세 분이 최우수 우수를 차지하시고 남는 우수 자리 하나를 syo가 냉큼 집어먹을 수 있으면 베스트겠구나- 했는데, 겸연쩍게도 이렇게 되었네요. 허허허.
--- 읽은 ---
164. 경제학의 모험
니알 키시타이니 지음 / 김진원 옮김 / 부키 / 2018
- 일독(1901xx)
- 재독(210511)
경제학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정말 기꺼이 추천할 만큼 쉽고 좋은 책인데, 쉽고 좋은 책이라서 자꾸 대충 읽게 된다. 대충 읽으면 당연히 안 된다. 당연한 건데 그게 잘 안 된다.
이를테면 “三은 syo에 비해 청소에 비교 우위가 있다”는 문장은 말로 들으면 三이 syo보다 청소를 잘 한다는 뜻 같지만 실은 저 문장만 가지고는 어떤지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syo는 설거지하는 데 10분, 청소에 30분을 소모하며, 三은 설거지에 20분 청소에 40분을 소모한다고 하자. 이 경우 두 사람은 각자 청소 한번 하는 동안에 syo는 설거지 세 번, 三은 두 번을 할 수 있다. 이럴 때 syo가 三보다 설거지에 비교 우위가 있다. 반면 청소를 기준으로 따져 보면, 청소 한번 하려면 syo는 설거지 세 번을 포기해야 하지만 三은 두 번만 포기하면 된다. 이러면 三이 syo에 비해 청소에 있어서 비교 우위가 있는 것이다. 즉 실제로 三은 설거지를 하나 청소를 하나 syo보다 10분씩 더 걸리는 비효율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청소에 비교 우위가 있는 것. 이처럼 ‘비교 우위’는 어떤 경제학 책을 읽어도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지만, 대충 읽고 넘어갔다가 일상 언어에서 ‘비교 우위’라는 단어를 만나면 아, 그게 비교적 우위에 있다는 소리였던가- 하며 엉뚱한 결론을 내리기도 하는 것이다. 쉬운 책일수록 꼼꼼히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얼마 동안은 소음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아직은 연주로 얻는 이익, 즉 이웃의 즐거움이 연주에 드는 비용, 즉 당신의 가벼운 짜증보다 더 크다. 사회 전체로 보면 이웃이 트럼펫을 계속 연주하는 게 최선이다. 그런데 3시간이 흐르자 트럼펫 소리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트럼펫 연습이 3시간째로 접어들지 당신 안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짜증이, 이웃이 연습으로 누리는 즐거움보다 더 커졌다.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이웃이 2시간 정도 연습을 하고 트럼펫을 잘 갈무리하는 게 더 이익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종종 이웃이 적당한 선에서 그만두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얼마나 오래 트럼펫을 불지 결정을 내릴 때 오로지 자신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이익과 비용(‘사적’ 이익과 비용)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때문이다. 이웃은 연주하며 느끼는 재미와 쉬지 않고 몇 시간이나 트럼펫을 부는 통에 입술이 얼얼해지는 통증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 그리고 더 큰 범위의 비용(‘사회적’ 비용)을 무시한다. 바로 당신에게 일으킨 두통을 등한시한다.
_ 니알 키시타이니, 『경제학의 모험』
--- 읽는 ---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 에이드리언 리치
마르케스의 서재에서 / 탕누어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 아리스토텔레스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 허새로미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 시라이 사토시
초속 5센티미터 / 신카이 마코토
메리, 마리아, 마틸다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메리 셸리
덧
※ 이 아래를 읽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될 수 있습니다
당첨된 기쁨에 겨워 리뷰를 한 번 더 읽다가, 퍼뜩 깨달았다. syo는 전에도 이런 형식의 글을 쓴 적이 었었다. 그건 리뷰도 아니었고 대회도 아니었다. 그냥 인정욕구에 목마른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어린 syo가 2007년, 그러니까 무려 이십 대 초반에 심심풀이로 써서 작은 커뮤니티에 올렸던 글이다. 그간 소실된 줄 알았다가 작년인가 우연한 기회에 재발견했다. 지금 다시 보니 고치고 싶은 데가 놔두고 싶은 데보다 훨씬 많고, 특히 마지막 단락은 통째로 들어내고 싶다. 보고 있노라면 저렇게 쓰다니 진짜 어린 나여, 넌 정말 어지간히도 쎄게 빻았었구나- 하게 된다(그런데 사실 이건 뭐 새삼스럽다). 가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글을 고친다고 과거의 멍청했던 syo가 고쳐지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그대로 첨부해 본다. 이걸 쓴 때는 그래도 내가 글쓰기에 재능이 좀 있지 않나 하는 착각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이내 독서량이 좀 늘면서 나는 그냥 하던 대로 반도체공학이나 운영체제론을 열심히 공부하는 게 맞겠다 싶어졌다. 그리고 이러구러 살다 보니 오늘의 syo가 되었다. 소설가도 되지 않았고 되려 하지도 않으며, 공학자도 되지 않았고 역시 되려 하지도 않는 오늘의 syo가, 둘 다가 될 수 있다고 믿던 과거에 쓴 글이다.
성춘향 탈옥 사건에 대한 증언들 [2007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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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결코 춘향에게 수청 들기를 요구한 적이 없음이요, 둘째는 설사 본관이 그리하였더라도 관기인 춘향이 그를 거부하는 것 자체가 분명 법도를 흐리는 일이라는 것이외다. 춘향이 비록 그 아비가 사대부에 속하여 성씨 성을 받았다 하나 어미가 천기이니 그 신분이 천한 것은 국법이 정한 일이오. 또한, 춘향은 엄연히 그 이름이 기적(妓籍)에 오른 관기란 말이오. 그러니 설사 이 사람이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 하였더라도 그것은 이 나라 조선의 국법에 따라 아무런 과실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오.
공께서 이 고을에 내려와 저잣거리를 지나셨다면 분명 춘향이 내 수청 들기를 거부하였기에 하옥되었다는 풍문을 들으셨겠지요. 허나 그것은 말 좋아하는 천것들의 입에서 나온 한낱 낭설에 불과하오이다. 춘향의 죄목은 다른 것이 아니라 관기로서 점고(點考)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는 엄연히 국법을 어긴 것일진대 내 이 고을의 원(員)이 되어 어찌 형으로 다스리지 않을 수 있었겠소이까.
분명 춘향은 미색이 범상치 않을뿐더러 재주를 갖춘 기재녀임은 틀림이 없소이다. 이 사람 또한 사내대장부로 났으니 한번 그 꽃을 꺾어보고자 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전연 없다 하지는 않겠소이다. 허나 나라님께서 내리신 남원 부사의 자리에 앉고서야 어찌 사심이 공심을 앞질렀겠소이까. 공께서 부디 저 상것들의 헛소리에 현혹되지 마시고 사대부로서 이 사람의 위신에 손상을 입지 않도록 잘 수습하여 주시기를 바라겠소이다. 공도 이 사람도 공히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 아니오? 핫핫핫.
참, 도읍에 계시는 영상(領相)대감께서는 어떻게, 강령하신지 모르겠소이다. 얼마 전에 사람 편에 남원에서 나는 좋은 약재를 보내드린 일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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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그날 밤 소인이 옥사를 지켰습죠. 분명히 옥사 밖으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요.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습죠. 천지신명님께 맹세코 절대 한눈을 판 일은 없었습니다요. 정말입니다요. 어휴. 사또께서는 이놈이 춘향이와 밤도망이라도 치려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천부당만부당입지요. 하긴, 소인 놈이 생각하기에도 칼 찬 죄인이 무슨 수가 있어서 혼자서 이 옥사를 나왔을는지, 춘향이 그것이 귀신이 아니고서야......
그래도 참말, 참말입니다요. 되려 소인은 춘향이가 영영 이 옥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싶었는걸요. 예, 그랬습지요. 나으리는 이 고을 사람이 아니시라 모르시겠지만요, 이 고을 사내치고 양반 상것 할 것 없이 춘향이 미색에 마음자리 한번 들썩 안 해본 이는 없을 겁니다요. 가끔씩 향단이를 데리고 그네터에 가는 날이면 언덕 너머 바위 뒤에는 그 모습 훔쳐보는 사내들로 매번 장사진입지요. 색동저고리에 다홍치마 곱게 차려 입은 춘향이가 그네 구르는 모습 보고 있자면 어찌나 이놈의 가슴이 쿵쿵 내달리는지, 혹시나 그네 뛰는 춘향이가 듣고 놀라 그네에서 떨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요. 아, 금박댕기 아래로 출렁거리는 삼단 같은 검은 머리에, 그 새하얀 손은 또 어찌나 섬섬한지......에흠, 흠. 죄송하구만요.
어쨌든 춘향이가 옥에 갇히고 난 며칠 동안 소인은 참말로 좋았습죠. 이곳은 이놈에게는 집 같은 곳 아니겠습니까요. 마치 춘향이가 이놈의 마누라라도 된 양 혼자 들떠서는 하루 종일 옥사에 붙어 지냈습지요. 제발 사또께서 춘향이 옥살이를 하루라도 더 시켰으면 하고 말입니다요. 주제에 못된 맘 품은 죄를 다 받았는지 소인이 춘향이 대신 옥사에 들어앉은 꼴이 되었습니다요.
그러나 저러나 춘향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목에 찬 칼은 또 어떻게 훌훌 풀어낸 건지. 이거야 원 참말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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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것이 효성은 지극하였는데 어찌 이리도 독하게 감감무소식인지 모르것소. 하나 있는 딸년이 어릴 적에는 말썽 하나 없이 얌전하더니 과년하여 이리 에미 속을 썩일지 어떻게 알았겄소.
사실 우리 춘향이는 사대부의 핏줄인데도 쇤네가 천한 기생인지라 어쩔 수 없이 기생으로 살아야 했지요. 기생년 사는 게 어디 사람 사는 거라 하겄소. 이 한몸 이리 살았으면 되었지 어찌 딸년한테까지 이리 모진 삶 살라 하겄어요. 그래서 기적에는 올렸지만 양갓집 규수처럼 곱게 곱게 키웠지 않겄소.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요. 한 번 기적에 이름 석 자 박혀버리면 그것 파내기란 대낮에 별을 따는 일인 것을.
얼마나 속이 탔으면 춘향이 갇혀 있는 옥에 찾아가 그냥 눈 딱 감고 변사또 수청을 들라고 했겄소. 이도령이라는 작자는 좋다고 신랑질을 할 때는 언제고, 과거 보러 한양에를 간다더니 춘향이 이것이 옥에 갇혀 다 죽어가면서 수절해도 코빼기도 아니 비치니 어미 된 입장이 다 그렇지 않겄소? 이도령이든 변사또든 어차피 다 양반님네들이니 천기로 옥에 갇히는 것보다야 그게 낫지 않느냔 말이오. 헌데 춘향이 그 고집만 잔뜩 들어앉은 것이 수청을 들래도 절레절레, 이도령을 기다리냐고 물어도 절레절레, 그저 입은 꾹 다물고 답답허니 옥 천장만 뚫어져라 보고 앉았으니 이 속이 터지겄소, 안 터지겄소.
이제는 다 되었소 다 필요 없으니, 아이고 나으리. 제발 제 못난 딸년 좀 찾아주시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옥사에서 도망을 쳤는지, 또 어디로 사라져서 지 에미한테 얼굴도 안 들이미는지, 딸년 둔 에미는 그대로 죄인이라더니 이렇게 하루하루 춘향이 고것이 올까봐 걱정, 안 올까봐 새까맣게 속 태우며 지내는 것도 인제는 도저히 못하겄소. 아이고, 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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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었구만요. 저희 도련님께서 분명 광한루에서 춘향이와 노니는 것을 좋아라 하셨지만, 정실부인이라니요. 언질조차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나으리도 생각을 해보시지요. 뼈대 있는 가문의 장손에다 이번 과거에 장원급제까지 하신 우리 도련님께서 무엇이 아쉬워 그런 기생년을 정실로 들어 앉힌단 말입니까.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십시오. 행여나 구설에 오를까 걱정입니다.
연정이오? 나으리께서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도련님께서는 춘향을 그저 한낱 기생으로 끼고 계셨던 것밖에는 그 어떤 마음도 품은 적이 없으십니다. 아무렴 그렇고 말구요.
춘향이 칼을 벗어내고 옥에서 도망 나왔다는 이야기는 향단이 편에 들었습니다만, 이쪽으로는 절대 발걸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행여, 춘향이가 우리 도련님만 믿고 예까지 왔다 해도 소인이 잡아다가 관아에 끌고 갔을 겁니다. 그러니 얼른 돌아가시지요. 우리 도련님은 지금 행차 준비로 바쁘니 만나지 않으시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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쇤네가 아씨를 숨기고 있다구요? 저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걸요. 사람들은 쇤네가 좋아서 아씨를 모신 줄로 알고 있나 본데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어차피 쇤네나 춘향 아씨나 똑같은 천민인데 어이해 누구는 금기서화에 호의호식하고 어이해 누구는 물동이나 지어야 하냔 말이어요. 아씨라는 말부터가 가당찮은 게 아닌가요?
이 고을 남정네들은 춘향 아씨를 그저 아리땁고 얌전한 규수로 여기고 있지요. 우스울 뿐이어요. 이제와 이야기지만 춘향 아씨는 누구보다 영리하고 스스로를 끔찍이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취기가 오를 때마다 사랑한다고, 정실부인 삼겠다고 큰소리를 떵떵 치던 이도령의 그 거품 같은 약조를 아씨는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어요. 다 자식 잘되기를 바라서 그러는 거라고 말씀은 하지만 실상은 아씨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마님의 속내도 이미 아씨는 다 알고 있었지요. 왜 옥을 나와도 집에는 연통조차 주지 않는지 쇤네는 알 것도 같아요.
아씨가 파옥하던 날 새벽에 그네를 뛰시는 모습을 광년이가 봤다고 했어요.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지만 저는 믿어요. 아씨는 그네를 좋아하셨지요. 아마 아씨는 이 남원고을의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는 저 먼 곳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 그네를 타셨을 거여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으실 거여요. 쇤네는 오히려 그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아씨한테도, 쇤네한테도 말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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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 춘향, 춘향 언니! 나 춘향 언니 아니다. 춘향 언니 없다. 날아갔다. 나 봤다. 그네, 그네.
그네, 타도된다 했다. 헤헤, 춘향 언니가 나도 그네 타라 했다. 그래서 해 뜨기 전에 나 그네 타러 온다. 매일 매일 온다. 슈~웅. 이렇게 탄다. 슈~웅. 발에 힘주고, 발에 힘주고 이렇게 탄다. 슈~웅. 헤헤, 춘향 언니가 가르쳐 줬다. 그네 타는 거. 줄 꼭 잡는 거 아니다. 그러면 하늘까지 못 간다고 했다. 춘향 언니가 그랬다.
춘향 언니 하늘까지 그네 탔다. 저~기 구름까지 간다고 했다. 헤헤, 나, 나 너무 멋있어서 좋았다. 근데 햇님! 햇님이 산에서 나왔다. 눈부셔서 손으로 눈 막았는데, 막았는데, 갑자기 춘향 언니 없어졌다. 그네, 그네 위에 있었는데, 갑자기 휙. 근데 나 봤다. 그네가 구름까지 가서, 춘향 언니 날아갔다. 우와, 새, 새였다. 햇님 쪽으로 새, 춘향 언니 새 날아갔다.
나 다 봤다. 나도 그네, 나도, 나도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