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를 헤살 놓을 만한 내용(이른바 스포일러)이 잔뜩 있음.

올 초에 어찌어찌 “씨네21”을 강매당해서(^^), 1년치 정기 구독을 하고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받아 보는데, 일주일이라는 게 어찌나 빨리 흘러가는지,
제대로 넘겨보지도 못하고 다음 호를 받기 일쑤랍니다.
그래서 받을 때마다 “이건 왜 이리 자주 나오는 거야~” 한다지요. ^^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는 건 한 서너 권 되나?
꼼꼼히 읽다 보면 봐야 할 영화가 어찌나 많은지. -.-
안 볼 때는 요즘 영화관에서 무슨 영화를 하는지도 모르고 지나는데 말여요.

아무튼, 회사에서 구독하는 [말] 지와 지난번 “씨네21”을 넘겨보는데
두 잡지에 다 정성일님이 평을 쓰면서 서두에 스포일러가 잔뜩 있으니
영화 볼 사람은 읽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마침 회사에서 다 같이 보기로 한 참이라 참고 읽지 않았지요.
그리고 지난 수요일(8월 9일)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어제 “씨네21”에서 정성일님의 평을 찾아 읽었어요.
 
이 영화, 정말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영화라는 데 동의합니다.
영화 보면서 내내, 어쩌면 이렇게 요소요소에 아주 당연히 정치적인 상징을
배치해놓았나, 너무 노골적이라서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거든요.
느림뱅이 남주(배두나)도 그렇고,
남일(박해일, 정성일님 표현대로 ‘80년대에서 그냥 걸어나온 듯한 인물’)이
불붙인 꽃병(!)을 손에서 놓쳐버린 것,
남일의 운동권 선배로
연봉이 육칠천인데 빚도 육칠천이라는
‘이동통신사’의 뚱뚱한 남자,
영화 속에서 정부는 한강변 출입을 막기만 할 뿐
사태 해결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마지막에 사건에 대한 최종 조사 발표를 미국에서 하는 것,
강두(송강호)와 살아남은 아이 세주(이동호)는 밥을 먹으며
그 조사 발표 방송을 하는 TV를 무심히 꺼버린 것 등.

정성일님의 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을 알게 되기도 하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배우기도 했지만,
동의하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었어요.
그분의 해석이 옳은지도 모르지만,
저는 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우선 영어 제목인 Host에 대한 해석이 그런데요.
정성일님은 Host를 ‘숙주’로 해석하는 데 반대하면서
그 뜻은 ‘주인’으로 봐야 한다고 하네요.
기꺼이 환대하는 주인.
글쎄, 저는 ‘존재하지 않는 바이러스’의 ‘숙주’라는 역설적인
제목으로 생각되거든요.

둘째로, 아버지(변희봉), 강두, 남일, 남주가
괴물에게 잡혀간 현서(고아성, 강두의 딸이자 가족 모두의 자식)를 찾다가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는 장면. 이 장면에서는 갑자기 현서가 부스스
나타나 김밥을 먹어요. 다른 식구들은 전혀 놀라지 않고
소시지도 벗겨주고 이것저것 거둬 현서에게 먹입니다.
정성일님은 이 비현실적인 장면이 영화 전체의 사실적인 전개와 어울리지 않음을
들어 현서의 꿈, 혹은 강두의 꿈으로 보는데요.
글쎄요, 봉준호 감독은 아주 사실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간
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도 비현실적인 ‘군중 환호 배경’을 넣은 바 있잖아요.
제게 이 매점 장면은, 영화 초반에 강두가 주춤거리다 무거운 표지판을
들고 뛰는 장면과 함께 ‘눈물이 핑 도는 장면’ 베스트 2에 속합니다.

셋째, 현서가 나오는 하수구 장면은 그 자체로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고
강두가 자거나 마취되려 하거나 마구 달려가거나 하는 장면 사이에
끼어 있음을 들어, 그게 모두 강두의 꿈, 혹은 의식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현서는 영화 초반 괴물에 잡혔을 때 이미 죽고,
그 뒤 현서가 등장하는 장면은 모두 강두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거지요.
매점의 식사 장면에 갑자기 현서가 등장하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이라고 해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보면 괴물이 왜 현서만 죽이지 않는지가 설명되지요.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저는,
이 괴물이 왠지 현서에게 애착(!) 혹은 집착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마지막에도 현서가 죽은 것은 괴물이 먹어서가 아니라고.
괴물은 그저 현서와 세주를 입에 넣고 이동했을 뿐이고,
현서가 죽은 것은 노란 독극물 가스가 두 번 괴물을 덮쳤을 때
(그때 괴물은 아주 괴로운 듯 요동치잖아요)라고.
괴물도 외로운 아이일 수 있으니까.
너무 감상적인 생각인가요?

* 괴물이 한강 변을 마구 달리며 처음 등장할 때는 하하, 웃기다고 생각했어요.
식인 물고기 캐릭터를 대형화한 듯한 생김새라니.
아, 그런데 한강 다리에 꼬리로 매달리며 솟구치는 그 날렵한 몸짓은!

* 영화 앞머리에 단체 영결식장에서 네 식구가 울부짖으며 뒹구는 장면은
보기 드문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건 그렇고, 이토록 정치적인 영화라도 장사가 된다 싶으면
전국 상영관을 싹쓸이할 만한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위대한(!) 소화력에 감탄합니다.

이러니 정치적으로 말 걸어 오는 영화를 보았다 해도
정치적으로 응답할 수 있을까요?
(이건 핑계이긴 해요.)


괴물 (The Host, 2006) | 감독  :  봉준호 | 1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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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8-12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영화평론가들은 오히려 영화를 너무 어렵게 만들어버린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습니다. 님이 말한 저위의 현서를 모두 강두의 꿈같은 걸로 취급하는것 같은 것 말예요. 사실 꿈이든 아니든 그건 영화를 보는데 별로 필요한 것 같지 않은데....어쨌든 저도 이 영화 굉장히 재미있게 인상깊게 봤습니다. 마지막 장면에 강두가 밥먹을 때는 밥만 먹어야지 하면서 tv를 꺼버리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일상의 힘 - 어찌보면 생존의 힘이랄까요. 오락영화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는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힘을 지닌 영화라는 생각입니다.

가랑비 2006-08-18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네, 재미있고 인상 깊었어요. 평론가의 글을 보면 영화가 너무 어려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나 스쳐 지나간 부분을 짚어주기도 하니까 뭐... ^^ 현서가 나오는 장면을 강두의 꿈으로 본다면 강두의 비중이 굉장히 높아지는데(이 영화가 강두를 위한 영화라 할 만큼), 마지막 장면을 보면 강두의 비중을 그 정도로 생각하는 게 맞을 것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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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것도 없는데 하루에 두세 분씩 꼭 와주시네요. 송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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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8-11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물만두 2006-08-11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1240

로드무비 2006-08-11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자주 모습 보여주시라요.^^

울보 2006-08-11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41245

瑚璉 2006-08-1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쓰시라는 하늘의 계시지요.

가랑비 2006-08-11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야클님, 저는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는데, 고마워요.
역시 만두 언니... ^^
로드무비님, 왜 이리 정신이 없는지... 더위 지나면 홍대 앞에 맥주 마시러 오세요~
울보님, 류도 잘 있지요? 흑흑.
호질님, 아니 제가 언제는 글을 썼다고 그러셔욧. ^^

세실 2006-08-12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 저두 왔답니다. 어여 힘 내셔서 재기 하셔야죠~~

반딧불,, 2006-08-12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1277
히히^^

가랑비 2006-08-18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실님, 반딧불님, 휴가 갔다 돌아왔어요~ 반가워요!
 

1. 대학에서 배우는 것

『대학』에서는 도 닦는 목적과 방법을 가르친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학’에서는 ‘이익’을 가르친다. 이익, 곧 자본주의적인 이로움을 잘 취하는 사람이 오늘날 대학이 추구하는 인재상이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맹헌자 이르기를…… 집안에 취렴하는 신하를 둘진댄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둔다고 하였다.”
-164쪽, 「대학 읽기」 중에서

이 말은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다가 자기 집 창고를 채워 주는 신하를 두느니 차라리 자기 집 창고 물건을 훔쳐 낼 도둑을 기른다는 뜻이다.

맹자가 양혜왕(梁惠王)을 보러 가니 왕이 말하기를,
노인장께서 천릿길 멀다 않고 이렇게 오심은 이 나라에 무슨 이익을 주고자 하심인가?
맹자 대꾸하되,
왕께서는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다만 인의(仁義)가 있을 따름이외다.
왕께서 이 나라에 무슨 이로움이 있을까를 물으면,
대부(大夫)는 우리 집안에 무슨 이로움이 있을까를 물을 것이고,
선비와 서인(庶人)들은 내 신상(身上)에 무슨 이로움이 있을까를 물을 것이며,
위·아래가 번갈아 서로 이로움을 취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제후(諸侯)의 집안에서 나올 것이요,
제후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대부(大夫)들 가운데 있을 것이외다.
만(萬)에서 천(千)을 가지고 있고 천(千)에서 백(百)을 가지고 있는 것도
적게 가졌다고 할 수 없거니와
굳이 의(義)를 뒤에 두고 이(利)를 앞세우면
나머지도 모두 빼앗기 전에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진 사람으로 자기 부모를 버린 이 아직 없고
의로운 사람으로 자기 임금을 뒷전에 둔 이 아직 없습니다.
왕께서 다만 인의(仁義)를 말씀하실 일인데, 하필 이(利)를 물으십니까?(『맹자』, 양혜왕장)
- 166~167쪽, 「대학 읽기」 중에서


2. 중용이란 중간치기가 아니다  

학문의 지극한 공[學問之極功]은 오직 사람으로 하여금 중화(中和)에 이르도록 돕는 데 있다.
- 194쪽, 「중용 읽기」 중에서

‘중화(中和)’란 적정한 데 들어맞는 것이다.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는 것이다. 중화(中和)에 이르는 것, 그것이 배워야 할 본(本)이다.

그는 또한 언제나 중심에 선다[中立]. 그래서 어디에도 기울지 않는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는 법 없이 균형을 잃지 않는다. 이 말은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갈등 구조, 또는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갈등 구조 속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 절대 중간노선을 걷는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그런 중간노선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모든 경우에 불편부당한 하느님이 아니라, 억울한 자를 편들고 강한 자를 끌어내리며 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중용의 도를 제대로 걷는 군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중심에 서서 어디에도 기울지 않는다[中立而不倚]는 말은 어느 한 쪽을 편들어야 할 경우,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편을 든다는 말이다. 누구를 끌어내려야 할 경우에도 그를 끌어내려야 할 만큼,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끌어내린다. 호리(毫釐)라도 사욕이 작용하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다. - 220~221쪽, 「중용 읽기」 중에서

중용이란 ‘중립’을 가장한 기회주의가 아니라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적절하게 화내고 적절하게 기뻐하고 적절하게 슬퍼하고 적절하게 싸울 줄 아는 것이 중용이다. 싸워야 마땅한 때에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 딱 맞게 싸우는 것이 중용이다.

---------------『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에 대해 http://blog.naver.com/hsk5119/1200238796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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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2006-08-08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헤헤, 감사 감사!
 

호객 행위라니까요. ^^;;;

 

이현주의 동양 고전 읽기 세트 -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이아무개의 장자 산책, 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이현주 (지은이) | 삼인


정   가 : 58,000원
판매가 : 52,200원(10%off, 5,800원 할인)
쿠   폰 : 5000원 추가할인(08.01~08.31) 
마일리지 : 5,220원(10%)


이 세트는 아래 세 권을 묶은 것입니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신국판 변형 양장/732쪽/값 25,000원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
신국판 변형 양장/371쪽/18,000원

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신국판 변형 양장/349쪽/15,000원


 <알책 14호>에서--------------------------------------------------------------------------------

예수와 장자, 노자, 공자, 부처를 다 같이 스승으로 모시는 목사 이현주가 쓴 『대학 중용 읽기』의 개정판이 나왔다. 이현주 목사가 쓴 지는 10년 만이고, 다산글방에서 초판이 나온 지는 6년 만이다. 장일순 선생과 문답을 주고받으며 노자의 도덕경을 읽은 기록인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는 2003년 11월에 개정판이 나왔고, 『이아무개의 장자산책』은 2004년 10월에 개정판이 나왔으니, 이로써 이현주 목사의 고전 읽기 시리즈가 완전히 복간된 셈이다.

이현주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한 개신교 목사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의 경직된 틀에서 벗어난 목사다. 이현주 목사는 앞선 사람들의 지혜를 읽고 사색하는 구도자로서, 동양 고전을 풀어 쓸 때 선생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그는 위엄 있는 스승이 아니라, 독자의 손을 잡고 바로 반걸음 앞에서 이끌어 주는 친절한 안내인이다.

진지하고 따뜻하고 간곡한 노자의 도덕 이야기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는 장일순 선생과 이현주 목사가 함께 노자의 『도덕경』을 한 구절씩 읽은 기록이다. 장일순 선생(1928~1994)은 1970년대 이래 한국 민주화 운동의 숨은 지도자, 신용협동조합과 도농 공동체 ‘한살림’ 활동을 통해 우리 삶의 근본적인 쇄신을 꾀한 사상가이자 실천가다.

두 사람은 도덕경의 본문을 주석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노자가 그 ‘말씀’으로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했다. 노자의 손가락이 아니라,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노자의 사상뿐 아니라 기독교, 불교, 유교, 동학, 마르크스주의 등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들며 지혜와 통찰을 구하게 되었다.

인간 중심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하며,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이아무개의 장자 산책』은 상식적 세계와 세속적 가치들에 대한 풍자를 통해 소위 ‘인간적인’ 질서를 흔들어, 거기 생긴 틈새에서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장자의 자취를 따라간다. 그 길은 삶에 갇힌 인간의 모습보다 더 큰, 움직이는 세계〔(道)가 된 인간〕이다.

지은이가 『장자』를 읽는 법은, 한 구절씩 짚어 읽으면서 장자와 예수, 석가뿐만 아니라 노자, 공자, 간디, 아퀴나스, 소크라테스를 서로 불러 모아 대화하게 하는 것이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금강경』 『산해경』과 조선의 선시(禪詩), 수사(修士)의 글들을 떠올리며 이 많은 스승들과 ‘말씀’들이 무엇을 뚫고 나아가려 했고, 어디에서 일치하고 갈라서는지를 장자를 경유해 펼쳐 보인다.

가장 깊은 곳에서 길은 하나로 통한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가 노자의 『도덕경』 읽기이면서 단순히 노자에 대한 해설서나 주석서가 아니며, 『이아무개의 장자산책』이 『장자』의 내편(內編) 읽기이면서 『장자』 해석서가 아니듯이, 『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도 그러하다.

『대학』과 『중용』을 해설한 책은 여럿 나왔지만, 『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가 특별한 것은 유학에 입각한 고전 주석서가 아니라, 그저 도(道)를 찾는 사람, 곧 구도자의 한 사람이 인위적인 종교·사상적 경계 없이 앞선 사람들의 지혜를 표지판 삼아 읽고 사색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지은이의 사색을 따라가 보자.

“앎에 이름은 물(物)을 격(格)하는 데 있다.”[致知在格物] (중략) 물(物)을 격(格)한다는 말은 사물을 깊이 연구하여 그것에 가서 닿는다는 말이니 드디어 연구 대상이던 물(物)과 하나로 됨을 뜻한다. (중략)
‘격’(格)이라는 한 문자에 연구한다는 뜻과 가서 닿는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음이 기특하다는 얘기는 전에 했다. 무엇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하여 알 뿐 아니라 그것을 꿰뚫어 알고 나아가 마침내 그것과 일체로 되는 것이다. (중략)
개미를 연구해도 좋고 메뚜기를 연구해도 좋고 산야초(山野草)를 연구해도 좋고 하늘의 별을 연구해도 좋고 사람을 연구해도 물론 좋다. 어느 것을 택하였든 그놈을 깊이 파고들면 마침내 천리(天理)로 통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개미든 메뚜기든 산야초든 별이든 그것을 통해 무궁한 ‘깊이’로 들어가지 않고 번잡한 거죽 현상에만 매달려 알기는 참 많이 아는데 진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도 모르는 데 있다. - 88~90쪽, 「대학(大學) 읽기」 중에서

『대학』의 ‘격물치지’는 『중용』의 ‘성(誠)’과 통하는 개념이다.

지극한 성[至誠]은 출발점과 종점이 따로 없다. 흐르는 것이 물의 본질이듯이, 그래서 개울은 바다로 흐르고 바다는 하늘로 흐르고 하늘은 다시 개울로 흐르듯이, 지극한 성(誠)은 다만 흐르고 흐를 뿐이다. 여기가 성(誠)의 처음이요 여기가 성(誠)의 나중이라고 잘라 말할 곳이 없다. 예수님이 알파요 오메가라는 말은 그분에게는 모든 곳이 출발점이요 모든 곳이 종점이라는, 그러니까 처음과 나중이 따로 없다는, 그런 뜻이다. 있는 것은 끊임없이 흐르는 과정process이 있을 따름이다. - 314쪽, 「중용(中庸) 읽기」 중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과정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과정이란 길, 곧 ‘도(道)’다.

도(道)는 길이다. 길이란 사람이나 짐승이 밟고 다니는 것이다. 길을 따라서 다니면 잘 다닐 수 있거니와 길을 잃으면 고생만 하다가 생명을 잃는 수도 있다. 길을 찾으면 살고 잃으면 죽는다. 길 곧 생명인 까닭이다. 그래서 예수는 당신이 ‘길’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생각건대 참 대단한 선언이다.
길은 처음부터 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사람이나 짐승이 살아가면서 내고 닦고 하는 것이다. 길에는 눈으로 볼 수 있고 발로 밟을 수 있는 길〔路〕이 있고 보면서 보지 못하고 밟으면서 밟지 못하는 길〔道〕이 있다. 이 보이지 않는 길 역시 처음부터 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세상에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는 한,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오가는 길 또한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길이 오가는 사람이나 짐승이 없는데도 거기 그렇게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길을 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닦아야 한다. 한번 내어 놓은 길도 계속하여 그 길을 사용하지 않으면 세월과 함께 없어지거나 무너지고 만다. - 178쪽, 「중용 읽기」 중에서

길, 곧 도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왜, 무엇 하러 닦는가?

덕(德)을 이룬다는 말은 도(道)를 속에 제대로 모시고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을 자기 속에 가두지 않고 제대로 받들어 모시는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짐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아무 하는 일 없이 모든 일을 이룬다. - 68쪽, 「대학 읽기」 중에서

도를 닦으면 도를 자신의 속에 모시게 된다. 도를 제대로 모시는 사람은 아무 하는 일 없이 모든 것을 이룬다. 아무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진짜 전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일부러 남의 눈에 띄는 무언가를 지어내고 만들려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사실 일부러 남의 눈에 띄는 일을 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날마다 새롭게 하면서 자기 몫의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은 더 어렵고 힘들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말하고 행동하고 다른 생명과 교류할 것이다. 그러면 그와 교류한 생명은 날마다 새로운 관계를 체험하게 되고, 그가 세상 전체와 교류할 때 세상 전체와 그의 관계는 날마다 새로워진다. 이현주 목사는 환갑 진갑 다 지났지만, 지금도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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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8-02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컥.. 매번 침만 흘리지만 절.대.로. 챚장에 꽃혀있을 듯 해서
패스하는 책을!!!!!

가랑비 2006-08-02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화장실에서 한 장씩 술술 읽을 수도 있는 책이에요, 반딧불님~

물만두 2006-08-02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과가 아니구려~ 알리미!

가넷 2006-08-02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천원 할인 쿠폰도 있느니 4만7000원에 구입 할 수 있겠네요... 알아 먹기가 힘들 것 같으나 지르고 싶네요.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또 지르기가 뭐하지만... 일단 보관함에 두어야 겠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stella.K 2006-08-02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기는 한데 조금 더 있다가...근데 목사가 썼어요. 동양철학을 기독교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인가요?

조선인 2006-08-02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욱, 부들부들... 알면서 낚이는 난 바보. ㅠ.ㅠ

chika 2006-08-02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아무개님 글을 엄청나게 좋아하지만, 저 책은.... 정말 내 수준을 넘어설 것 같아서 선뜻 손이 안가는 책인지라....흑~ (호객행위 맞구려~;;;)

가랑비 2006-08-02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 언니/감사 감사!
Yaro님/어머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___________________^
스텔라님/그렇게도 볼 수 있고... 하지만 "재해석"이라기보다는 고전의 원문을 충실하게 읽되 그 속에서도 예수의 가르침을 찾아냈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해요.
조선인님/아니 그렇다고 부들부들 떠실 것까지야... 속은 괜찮으시우? ^^
치카님/(맞다니깐요;) 어렵지 않아요. 정말 화장실에서 한 장씩 읽어도 되거든요.
따우님/글쎄 많이 팔 수 있을까요? -.-

瑚璉 2006-08-02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파셔요! x 2

가랑비 2006-08-02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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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삼해서...

네, 호질님, 많이 팔아야지요. 제 맘대로 될 일은 아니지만... 사실 이런 "호객행위"로 대접하기 죄송한, 귀한 책들인데...


로드무비 2006-08-0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달 전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를 사버렸으니.....
좀 기다릴 걸.^^

가랑비 2006-08-02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산사춘 2006-08-10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이 말로만 듣던 낚임?
이 분야는 꼴랑 소동파 밖에 안읽어봤는데, 그 기세(?)를 몰아 노자에 도전해 봅지요. 많이 파세요, 삼인 짱!!!

가랑비 2006-08-10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춘님 멋쟁이!
 

비가 참 부지런히 온다.

차 앞유리창에 한 숨도 쉬지 않고 와서 부딪쳐대는 빗방울을 보고 든 생각이다.

유리창에 부딪는 빗방울 소리가

영화 [영웅]에서 수십만 대군이 빗발치듯 화살이 쏟아질 때 나던 소리 같았다.

화살은 빗발치듯 쏟아지고 빗발은 화살 쏟아지는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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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7-28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친듯이 오는 거 같어 ㅠ.ㅠ

가랑비 2006-07-28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 우산을 막 뚫고 내려와요. -.-

141110

chika 2006-07-28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머나! 그쪽은 비가 우산을 뚫는군요!
우리 동네 비는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비예요! 회오리 비 같은;;;;;;

가랑비 2006-07-28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왓, 보고 싶네요.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회오리 비...;;;
나침반님/글게 말여요. 많이 젖진 않았나요? 감기 조심!

가랑비 2006-07-3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예쁘단 말이지요, 헤헤헤.

2006-07-31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