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자의 회고록
La Mémoire des Vaincus
미셸 라공 Michel Ragon 지음 | 이재형 옮김 | 예하 | 531쪽
발행일 1992년 5월 10일, 당시 값 6,700원.
원서는 프랑스 Albin Michel 출판사에서 1990년에 냈는데,
프랑스판 위키피디아에는 작가가 1989년에 썼다고 나온다.
예하에서 나온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지인에게 빌려주었다가
알게 된 책입니다. 지인이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뒤표지 날개에 소개된 제목을 보고,
이 책도 있느냐고 묻더라구요. 자칭 아나키스트인 그이는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이야기라는 데 끌렸던 게지요.
그래서 저도 호기심이 생겼는데, 절판되어버린 이 책은 헌책방에도
쉽게 나타나지 않더군요. 1년 넘게 틈틈이 헌책방 사이트를 뒤져도 못 찾았는데,
올 8월 혹시나 하고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검색해 보았더니
기적처럼 한 권이 나왔습니다. 놓칠세라 당장 주문했지요.
알라딘 중고서점을 검색한 것도, 이용해본 것도 처음이었어요.
책값은 저렴하여라, 5000원에 배송비 2200원.
제목을 직역하면 ‘패배자들의 기억’입니다. 그러니까 소설의 주인공인
알프레드 바르텔르미 한 사람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20세기 혁명적인 상황이 벌어졌을 때마다
가장 열심히 투쟁하고도 늘 배신당하고 배제당했던
아나키스트들, 혹은 아나키스트 운동 자체에 관한 이야기라고나 할까.
아나키즘은 본래 ‘우두머리가 없다’는 뜻이므로
‘무정부주의’는 잘못된 번역이라고 하지만,
“볼셰비키들은 (압제와 권력을 의미하는) 정부와 군대를 없애겠다고 해놓고
지금 어느 때보다 더 강한 정부와 군대를 만들고 있다”고
소련의 권력 구축 과정을 비판한
이 책 속 아나키스트들의 관점에서는 ‘무정부주의’라고 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정부’라고 하면 무질서와 혼란을 연상하기 쉬운데,
이러한 연상 역시 ‘정부’만이 질서를 관리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의 소산 아닐지요.
이 책에는 너무 많은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1899년에 태어나 1985년에 세상을 떠난 프레드, 곧 알프레드 바르텔르미
(작가는 어느 실존 인물의 가명인 것처럼 썼어요)는
부모를 잃고 고아로 길거리를 방황하던 어린 시절에 우연히
아나키스트인 리레트와 빅토르의 도움을 받은 뒤로 평생을
노동자로, 혹은 소련 정부의 일원으로, 혹은 망명객으로,
혹은 자유롭고 또 외로운 아나키스트 활동가로서
고민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방황합니다.
러시아 혁명과 에스파냐 내전을 비롯해 역사가 크게 굽이치던 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기에, 이 사람의 인생을 스쳐 가는 사람도 많을 수밖에요.
하지만 저는 아나키즘과 러시아 혁명사를 공부하지 않은 터라
그 사람들, 그 사건들을 바로 이해하고 넘어가기 어려웠어요.
그런 점에서 그리 친절하지는 않은 소설입니다.
그리고 프레드가 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는지도 나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는 나오지만.)
아나키즘의 무엇이 길거리를 방황하던 ‘부랑아’ 프레드를 설득했는지,
프레드가 아나키즘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는,
그의 자유로운 성정과 정직한 심성,
그리고 정말 해야 할 말은 하는 용기를 통해서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단 한 번도 권력을 쥔 적 없었고
영웅이 된 적도 없었던 이 사람의 일생이,
패배하기만 했던 아나키즘이,
무용한 것이라거나 패배했으니 사라져야 할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섣부른 생각이겠지만, 아나키즘은 패배할 운명이라서 가치 있는지 모릅니다.
아나키즘은 권력을 배격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패권을 쥘 수가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권력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별수 없이 있게 마련이고,
권력이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배제하고 소외시키게 마련이라면,
인간이 그나마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건
패배해도 패배해도 도전과 저항을 그치지 않는
아나키즘 같은 정신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그래서 프레드가 결국 앙상한 껍데기같이 늙어갔더라도,
아름다웠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에서도 그랬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20세기까지(사실은 지금도 그럴지도)
어떤 ‘사상’은 남자들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여성 공산주의자, 여성 아나키스트가 등장하지만
주인공이 남자다 보니 여성들은 동료나 벗이라기보다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요.
이 책에 등장하는 아나키스트들에게는 더욱,
뭐랄까, 원초적인 ‘남자’ 느낌이 납니다.
세련된 지식인의 교묘한 남성중심주의보다는 그게 낫지만요.
주인공 프레드가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평생의 연인 플로라,
소련에서 일했을 때의 아내 갈리나,
프랑스로 돌아와 숙련 노동자로 안정된 가정을 꾸렸을 때의 아내 클로딘,
에스파냐 내전에서 만난 많은 여성 전사들,
그리고 노년의 프레드를 돌보았던 이자벨(이름만 나오고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그리고 이름 모를 헌신적인 여성들...
그들의 생애에 프레드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프레드와 플로라가 너무 어렸을 때 낳은 아들 제르미날은,
전쟁 때문에 부모가 헤어져버려 아버지 없이 자라지만,
성장하여 정치와 사상에 귀 기울이게 되자
자신을 키워준 엄마 플로라보다는
그때까지 남이나 다를 바 없었던 아버지 프레드와 친구이자 동지가 됩니다.
프레드가 우러러 사모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도
멀리서 "마음으로만 의지하는" 어머니 같은 존재지요.
프롤로그와 본문 다섯 장(章)의 앞에
인용된 글귀가 인상 깊어, 여기에 옮깁니다.
(프롤로그 앞)
이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이상이 갖고 있는 사상을 위해
죽을 수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며, 정치라는 것은 우리가
그 사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때 존재한다.―샤를르 페귀
(1장 ‘생선 수레를 타고 온 소녀’ 앞)
하지만 난 불쌍한 녀석이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이승에서는
이렇게 불행하게 지내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하늘나라에서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우리들이 벼락을 내리게 될 거야.
―게오르그 뷔흐너, 《보이체크Wayzeck》
(2장 ‘트로츠키 동지의 쓰레기통’ 앞)
모든 예술이 최고의 아름다움들을 만들어 냈지만
통치술만큼은 추잡한 괴물들밖에 만들어 내지 못했다.
―생 쥐스트
(3장 ‘비앙쿠르의 식인귀’ 앞)
비겁한 사람들이 실로 아연실색할 만큼 무분별해지면,
결국 가장 용감한 사람들에 비견된다. 그들의 심복들을 하나는
근위병으로, 하나는 재판관으로, 또 다른 하나는 세무서원으로
위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이는 한, 그들은 화염에 휩싸인
도시 한복판을 비스킷과 통조림으로 살아내면서, 머지않은 장래에
보수파가 승리하기를 숨죽여 기다릴 테니까.
―조르주 베르나노스 《보수주의자들의 대공포La Grande Peur des bien-pensants》, 1931
(4장 ‘인민의 치욕’ 앞)
……결국 또다시 권력이 승리할 것이다. 결코 죽지 않는
영원한 권력. 쓰러졌다가도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나는 권력.
사람들은 혁명을 통해서, 소위 혁명이라 이름붙인 학살행위를
통해서 권력을 무너트렸다고 믿었다. 그러나 권력은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난 것이다. 다만 까만색에서 빨강색으로 그리고
노란색으로 파란색으로 자주색으로 색깔만 바뀐 채. 한편 인민들은
또다시 권력에 굴복하거나 순응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권력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리아나 팔라치, 《한 인간Un homme》, 1979
(5장 ‘헌책 장수’ 앞)
이성의 이름으로 영혼이 소멸되고 나면
그 이성 또한 소멸되고 말리라.
정의의 이름으로 자비심이 소멸되고 나면
그 정의 역시 소멸되고 말리라.
물질의 이름으로 정신이 소멸되고 나면
그 정신(* ‘물질’의 오타인 듯!) 역시 소멸되고 말리라.
무가치한 것의 이름으로 인간이 소멸되리라.
인간의 이름이 소멸되리라.
더 이상 이름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바로 우리처럼
―아르망 로뱅, 《달갑지 않은 시Les Poèmes indésirables》, 1945
이 책은 곧 지인에게 선물할 것이라서, 사진을 찍어두었습니다.
표지 앞날개의 작가 소개.
저작권 표시.
권두의 헌사. ‘장 말라위리’가 누구일까요?
혹시 알프레드 바르텔르미의 실제 모델?
차례.
표지 뒷날개의 예하 책목록.
[레이스 뜨는 여자]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도
예하에서 먼저 나왔더랬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