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학에서 배우는 것
『대학』에서는 도 닦는 목적과 방법을 가르친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학’에서는 ‘이익’을 가르친다. 이익, 곧 자본주의적인 이로움을 잘 취하는 사람이 오늘날 대학이 추구하는 인재상이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맹헌자 이르기를…… 집안에 취렴하는 신하를 둘진댄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둔다고 하였다.”
-164쪽, 「대학 읽기」 중에서
이 말은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다가 자기 집 창고를 채워 주는 신하를 두느니 차라리 자기 집 창고 물건을 훔쳐 낼 도둑을 기른다는 뜻이다.
맹자가 양혜왕(梁惠王)을 보러 가니 왕이 말하기를,
노인장께서 천릿길 멀다 않고 이렇게 오심은 이 나라에 무슨 이익을 주고자 하심인가?
맹자 대꾸하되,
왕께서는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다만 인의(仁義)가 있을 따름이외다.
왕께서 이 나라에 무슨 이로움이 있을까를 물으면,
대부(大夫)는 우리 집안에 무슨 이로움이 있을까를 물을 것이고,
선비와 서인(庶人)들은 내 신상(身上)에 무슨 이로움이 있을까를 물을 것이며,
위·아래가 번갈아 서로 이로움을 취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제후(諸侯)의 집안에서 나올 것이요,
제후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대부(大夫)들 가운데 있을 것이외다.
만(萬)에서 천(千)을 가지고 있고 천(千)에서 백(百)을 가지고 있는 것도
적게 가졌다고 할 수 없거니와
굳이 의(義)를 뒤에 두고 이(利)를 앞세우면
나머지도 모두 빼앗기 전에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진 사람으로 자기 부모를 버린 이 아직 없고
의로운 사람으로 자기 임금을 뒷전에 둔 이 아직 없습니다.
왕께서 다만 인의(仁義)를 말씀하실 일인데, 하필 이(利)를 물으십니까?(『맹자』, 양혜왕장)
- 166~167쪽, 「대학 읽기」 중에서
2. 중용이란 중간치기가 아니다
학문의 지극한 공[學問之極功]은 오직 사람으로 하여금 중화(中和)에 이르도록 돕는 데 있다.
- 194쪽, 「중용 읽기」 중에서
‘중화(中和)’란 적정한 데 들어맞는 것이다.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는 것이다. 중화(中和)에 이르는 것, 그것이 배워야 할 본(本)이다.
그는 또한 언제나 중심에 선다[中立]. 그래서 어디에도 기울지 않는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는 법 없이 균형을 잃지 않는다. 이 말은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갈등 구조, 또는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갈등 구조 속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 절대 중간노선을 걷는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그런 중간노선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모든 경우에 불편부당한 하느님이 아니라, 억울한 자를 편들고 강한 자를 끌어내리며 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중용의 도를 제대로 걷는 군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중심에 서서 어디에도 기울지 않는다[中立而不倚]는 말은 어느 한 쪽을 편들어야 할 경우,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편을 든다는 말이다. 누구를 끌어내려야 할 경우에도 그를 끌어내려야 할 만큼,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끌어내린다. 호리(毫釐)라도 사욕이 작용하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다. - 220~221쪽, 「중용 읽기」 중에서
중용이란 ‘중립’을 가장한 기회주의가 아니라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적절하게 화내고 적절하게 기뻐하고 적절하게 슬퍼하고 적절하게 싸울 줄 아는 것이 중용이다. 싸워야 마땅한 때에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 딱 맞게 싸우는 것이 중용이다.
---------------『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에 대해 http://blog.naver.com/hsk5119/1200238796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