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를 헤살 놓을 만한 내용(이른바 스포일러)이 잔뜩 있음.

올 초에 어찌어찌 “씨네21”을 강매당해서(^^), 1년치 정기 구독을 하고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받아 보는데, 일주일이라는 게 어찌나 빨리 흘러가는지,
제대로 넘겨보지도 못하고 다음 호를 받기 일쑤랍니다.
그래서 받을 때마다 “이건 왜 이리 자주 나오는 거야~” 한다지요. ^^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는 건 한 서너 권 되나?
꼼꼼히 읽다 보면 봐야 할 영화가 어찌나 많은지. -.-
안 볼 때는 요즘 영화관에서 무슨 영화를 하는지도 모르고 지나는데 말여요.

아무튼, 회사에서 구독하는 [말] 지와 지난번 “씨네21”을 넘겨보는데
두 잡지에 다 정성일님이 평을 쓰면서 서두에 스포일러가 잔뜩 있으니
영화 볼 사람은 읽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마침 회사에서 다 같이 보기로 한 참이라 참고 읽지 않았지요.
그리고 지난 수요일(8월 9일)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어제 “씨네21”에서 정성일님의 평을 찾아 읽었어요.
 
이 영화, 정말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영화라는 데 동의합니다.
영화 보면서 내내, 어쩌면 이렇게 요소요소에 아주 당연히 정치적인 상징을
배치해놓았나, 너무 노골적이라서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거든요.
느림뱅이 남주(배두나)도 그렇고,
남일(박해일, 정성일님 표현대로 ‘80년대에서 그냥 걸어나온 듯한 인물’)이
불붙인 꽃병(!)을 손에서 놓쳐버린 것,
남일의 운동권 선배로
연봉이 육칠천인데 빚도 육칠천이라는
‘이동통신사’의 뚱뚱한 남자,
영화 속에서 정부는 한강변 출입을 막기만 할 뿐
사태 해결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마지막에 사건에 대한 최종 조사 발표를 미국에서 하는 것,
강두(송강호)와 살아남은 아이 세주(이동호)는 밥을 먹으며
그 조사 발표 방송을 하는 TV를 무심히 꺼버린 것 등.

정성일님의 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을 알게 되기도 하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배우기도 했지만,
동의하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었어요.
그분의 해석이 옳은지도 모르지만,
저는 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우선 영어 제목인 Host에 대한 해석이 그런데요.
정성일님은 Host를 ‘숙주’로 해석하는 데 반대하면서
그 뜻은 ‘주인’으로 봐야 한다고 하네요.
기꺼이 환대하는 주인.
글쎄, 저는 ‘존재하지 않는 바이러스’의 ‘숙주’라는 역설적인
제목으로 생각되거든요.

둘째로, 아버지(변희봉), 강두, 남일, 남주가
괴물에게 잡혀간 현서(고아성, 강두의 딸이자 가족 모두의 자식)를 찾다가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는 장면. 이 장면에서는 갑자기 현서가 부스스
나타나 김밥을 먹어요. 다른 식구들은 전혀 놀라지 않고
소시지도 벗겨주고 이것저것 거둬 현서에게 먹입니다.
정성일님은 이 비현실적인 장면이 영화 전체의 사실적인 전개와 어울리지 않음을
들어 현서의 꿈, 혹은 강두의 꿈으로 보는데요.
글쎄요, 봉준호 감독은 아주 사실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간
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도 비현실적인 ‘군중 환호 배경’을 넣은 바 있잖아요.
제게 이 매점 장면은, 영화 초반에 강두가 주춤거리다 무거운 표지판을
들고 뛰는 장면과 함께 ‘눈물이 핑 도는 장면’ 베스트 2에 속합니다.

셋째, 현서가 나오는 하수구 장면은 그 자체로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고
강두가 자거나 마취되려 하거나 마구 달려가거나 하는 장면 사이에
끼어 있음을 들어, 그게 모두 강두의 꿈, 혹은 의식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현서는 영화 초반 괴물에 잡혔을 때 이미 죽고,
그 뒤 현서가 등장하는 장면은 모두 강두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거지요.
매점의 식사 장면에 갑자기 현서가 등장하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이라고 해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보면 괴물이 왜 현서만 죽이지 않는지가 설명되지요.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저는,
이 괴물이 왠지 현서에게 애착(!) 혹은 집착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마지막에도 현서가 죽은 것은 괴물이 먹어서가 아니라고.
괴물은 그저 현서와 세주를 입에 넣고 이동했을 뿐이고,
현서가 죽은 것은 노란 독극물 가스가 두 번 괴물을 덮쳤을 때
(그때 괴물은 아주 괴로운 듯 요동치잖아요)라고.
괴물도 외로운 아이일 수 있으니까.
너무 감상적인 생각인가요?

* 괴물이 한강 변을 마구 달리며 처음 등장할 때는 하하, 웃기다고 생각했어요.
식인 물고기 캐릭터를 대형화한 듯한 생김새라니.
아, 그런데 한강 다리에 꼬리로 매달리며 솟구치는 그 날렵한 몸짓은!

* 영화 앞머리에 단체 영결식장에서 네 식구가 울부짖으며 뒹구는 장면은
보기 드문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건 그렇고, 이토록 정치적인 영화라도 장사가 된다 싶으면
전국 상영관을 싹쓸이할 만한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위대한(!) 소화력에 감탄합니다.

이러니 정치적으로 말 걸어 오는 영화를 보았다 해도
정치적으로 응답할 수 있을까요?
(이건 핑계이긴 해요.)


괴물 (The Host, 2006) | 감독  :  봉준호 | 119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돌이 2006-08-12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영화평론가들은 오히려 영화를 너무 어렵게 만들어버린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습니다. 님이 말한 저위의 현서를 모두 강두의 꿈같은 걸로 취급하는것 같은 것 말예요. 사실 꿈이든 아니든 그건 영화를 보는데 별로 필요한 것 같지 않은데....어쨌든 저도 이 영화 굉장히 재미있게 인상깊게 봤습니다. 마지막 장면에 강두가 밥먹을 때는 밥만 먹어야지 하면서 tv를 꺼버리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일상의 힘 - 어찌보면 생존의 힘이랄까요. 오락영화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는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힘을 지닌 영화라는 생각입니다.

가랑비 2006-08-18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네, 재미있고 인상 깊었어요. 평론가의 글을 보면 영화가 너무 어려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나 스쳐 지나간 부분을 짚어주기도 하니까 뭐... ^^ 현서가 나오는 장면을 강두의 꿈으로 본다면 강두의 비중이 굉장히 높아지는데(이 영화가 강두를 위한 영화라 할 만큼), 마지막 장면을 보면 강두의 비중을 그 정도로 생각하는 게 맞을 것도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