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내 서재의 소개 문구이다. <스토너>를 읽은 후에 이런 말이 떠올랐던 것 같다. 오래전 읽은 터라 기억은 희미하지만 스토너를 한 인간으로서 평가할 때 훌륭하다거나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는다. 그냥 평범한 사람, 그렇기에 욕망도 좌절도, 상처도, 방황도, 고독도 인간이 겪을 수 있을 정도의 평균치로 겪었던 사람. 그러나 그때마다 책과 문학으로 버티고 이겨낸 인생…. 그에게 문학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스토너 같은 사람을 최근에 또 만났다. <소네치카>가 그렇다. ‘소네치카’의 삶도 전체적으로 행복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인간의 삶이 대부분은 그렇듯이 행복할 때도 불행할 때도 절망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소네치카, 그녀가 힘들 때마다, 괴로울 때마다 피할 수 있었던, 기댈 수 있고 의지할 수 있었으며 다시 살아갈, 버텨나갈 힘을 준 성소(聖召)와도 같은 대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책, 다름 아닌 문학이었다. 스토너와 소네치카에겐 문학이 구원이었다. ‘구원’이라는 말은 때로 너무 거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사전적 정의대로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이라고 받아들이면 조금 더 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구해준다기보다는 버틸 힘, 견딜힘을 준다는 정도의 의미? 내게 책은, 문학은 그런 존재이다.
책을 읽고 새로운 지식을 얻어 고개를 끄덕이고 무릎을 칠 때도 있지만 문학은 지식보다는 공감이다. 그러나 그 공감이 더 큰 깨달음을 줄 때가 많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능력, 이런 공감의 능력은 문학 작품 속을 거닐 때 조금 더 넓어지기도 한다. 나 아닌 타인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이런 노력은 때로 삶의 태도랄까 자세를 바꿔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최근 읽은 <비행선>에도 그런 인물들이 등장한다. 열여섯 살 소년 ‘피’와 열아홉의 대학생 ‘앙주’가 바로 그들이다. 대학에서 문헌학을 전공하는 앙주는 외톨이다.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거의 혼자 책의 성소 안에서 나날을 살아가는 그런 대학생(앙주는 아멜리 노통브의 분신과도 같다). 앙주는 생활비를 벌고자 과외 교사 자리를 구하던 중 ‘피’를 알게 된다. 피는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으로 부잣집 도련님이다. 그런데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이 소년에게도 큰 결함이 있다. 책은커녕 단어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아이에게 책 읽기를 가르치라고?! 이게 과연 가능할까?
이런 이야기가 대개 그렇듯이 책 읽기를 가르치던 앙주와 피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둘 다 서로를 만나기 전에는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였다. 책 속에 파묻혀 지내던 앙주는 누군가 타인의 온기를 그리워하면서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젊음이다. 피는 더하다. 부잣집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 물질적으로는 한없이 풍요롭지만 사랑 없는 부모, 아버지의 억압과 감시, 물건에만 집착하는 엄마 등 집 안에 말 그대로 갇혀 있는 신세나 마찬가지이다. 앙주처럼 외톨이인 데다가 무기나 비행선처럼 현실 세계에서는 딱히 그에게 필요 없을, 그런 물건들에 열광하면서 나날을 보내던 소년이다.
피는 자신을 가르치러 온 이 구원자이자 (어떤 의미로는) 파괴자에게 묻는다. “독서는 어떻게 해야 하죠?” 앙주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비결은 없어. 그냥 펼쳐서 읽으면 돼.” 피는 다시 묻는다. 조금 삐딱하다. “읽어 봤을 테니 그냥 내용을 이야기해 주면 되잖아요.” 앙주는 이 꼬마 도련님이 가소롭다는 듯이 다시 말한다. “독서는 남이 해줄 수 없는 거야.” 이런 대화들을 엿보고 있노라니 오래전 나의 기억이 떠오른다. 언젠가 <소년을 읽다>라는 책을 읽고 남긴 ‘다시 만나지 않더라도’라는 글에서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던 그 아이가 떠오른다. 나의 유일한 제자였던 아이. 책이라고는 제대로 읽은 적도 없고, 문학이라는 말은 오글거린다고 생각하던 아이. 시를 읽어보라니까 창피하게 왜 그런 걸 시키느냐고 쀼루퉁해지던 아이….
시나 소설에 밑줄 긋고 의미가 뭔지 지시하는 게 뭔지 상징하는 게 뭔지 그런 식으로 가르치고 싶지 않아서 시를 읽게(낭독)하고 이런저런 단편소설을 한주에 두 서너 편씩은 꼭 읽어오게 했다. 숙제가 너무 많다고 투덜대던 그 아이는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나니 어느 순간, 시를 감상할 줄 알고 문학의 재미를 느낄 줄 아는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쌤, 이게 이거죠?”하면서 어느 날은 어깨에 힘 빡 주고 내 앞에서 녀석이 잘난 척할 때의 기쁨이라니.... 그렇게 내가 문학을 2년 가까이 가르쳤던 그 아이는 어느 순간 ‘문학의 독자’로 변모해 있었다.
앙주의 제자 ‘피’처럼 부유한 집의 외동이었으나 그러면서도 부모에게, 특히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고, 세상에 불만이 많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열등감도 많았던 그 아이. 함께 문학 공부를 하면서 가까워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수업이 끝나도 집에 가지 않고 밍기적 거려서 보내는 게 더 골치 아파지기도 했던 그 아이, 외로워서 그랬으려니 한다. 그때 그 녀석은 성적이 많이 올라서 자존감이 커졌고, 엄마의 인정도 받았고, 한때에 그쳤을 꿈이었겠지만 작가라는 새로운 꿈을 꿔보기도 했고, 웃기도 많이 웃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문학을 감상할 줄 알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 무렵 인생의 방황기를 살던 나도 어쩌면 그 애를 가르치면서 오래전 손 놓았던 한국 문학을 다시 접하고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했는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겉돌며 저녁이면 도시의 거리를 홀로 정처 없이 걸어 다니던’ 앙주가 피를 만나 자기 내면에 잠자고 있던 삶을 향한 욕망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나에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줘요. 나에게는 그게 꼭 필요하니까.”(155쪽)
피에게 책 ‘읽는 법’은 곧 ‘사는 법’이다. 단어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던 열여섯 소년이 스탕달의 <적과 흑>을 시작으로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변신>을 읽으면서 때로는 앙주도 놀랄 정도의 자기만의 해석을 내놓고 한발 더 나아가 <클레브 공작 부인>, <육체의 악마> 같은 작품을 읽으면서는 마침내 자기만의 문학적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은 흐뭇함을 넘어서 어떤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그들이 책을 읽고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 장면을 지켜보노라면 불쑥 끼어들어 한마디 의견을 내놓고 싶어지기도 한다. 비행선을 타고 하늘을 둥실 떠다니면서 그저 부유하고만 싶던 소년은 앙주와 함께 문학을 읽고 토론하면서 점차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그들에게 “위대한 문학은 무해성(無害性)의 학교를 제외한 모든 것”(186쪽)이다.
피와 앙주 외에도 또 한 사람- 앙주를 사랑하게 되는 교수 도미니크 또한 앙주로부터 다른 학생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지적인 발견을 함으로써 새롭게 사는 법을 배운다. 나는 이 세 사람이 저마다 문학을 통해 사는 법을, 자기들만의 구원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문학으로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쳤고 또 그런 영향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피에게서 앙주에게서 또 때로는 도미니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웃음 짓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열여섯 소년의 이런 말에 자기도 모르게 울컥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날 변화시켰어요. 당신 덕분에. 난 독자가 됐어요. 평생 위대한 책들을 읽을 거예요. 그리고 누가 나에게 그런 취향을 심어 줬는지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185쪽)- 이렇게 맺어졌던 인연은 결국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다시 볼 수 없더라도 책을 읽을 때면 간혹 서로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