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평소 잘 읽지 않는 분야인 국내 에세이 두 권을 읽었다. 위로가 조금 필요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두 권의 책은 <어린이라는 세계>와 <소년을 읽다>이다. 두 권 모두 보관함에 오래 담아두기만 했는데 이제야 읽었다. <소년을 읽다>는 조금 더 남다르게 다가온다. 국어 교사인 저자가 소년원에 갇힌 아이들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동안 국어 수업을 하면서 책하고는 담쌓고 지내던 아이들을 책의 세계로 이끌어간 이야기이다. 아마도 내가 국어를 전공했었고,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국어 선생님을 대부분 좋게 기억하고 있기에 이 책에 더 관심이 갔던 것 같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어도 선생님이 될 생각은 없었다.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그 일의 엄중함이 참 멀게만 느껴졌다. 대학생 때 과외를 해본 경험도 없다. 영어와 수학 위주로 돌아가는 과외 시장에서 국어라는 과목이 그다지 선호되는 것도 아니었고 내게 가르치는 재주가 있다고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우연히 누군가를 가르치게 되었다. 열일곱 소녀였다. 그때 나는 다니던 회사가 망해서 실업자로 살면서 테니스만 치던 시절이었다. 광고 일은 다시 하기 죽어도 싫고, 뭘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해서 허구한 날 공만 쳤던 그런 시절. 건너건너 아는 분의 딸이 고2가 됐는데, 국어 과외를 한 번 해볼까 싶다는 거였다. 그 아이는 외동이라 영어, 수학, 중국어 등등 온갖 과외를 다 받고 있었는데 성적은 딱히 오르지 않고 답답하던 차에 국어라도 좀 시켜볼까 했던 것이다.
슬쩍 물어보니 내신 등급이 낮은 터라 부담이 덜했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그 애가 고3이 되어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국어를 가르쳤다.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국어’ 책을 들고 공부하려니 초반에는 나도 좀 헤맸다. 그래도 문학은 자신 있었다. 고등학교 때 국어는 싫어했어도 문학은 좋아했다. 대학에서도 그랬다. 나는 아이에게 밑줄 긋고 단어가 지시하는 바는 무엇이고 이렇게 가르치기보다는 그냥 책을 읽혔다. 책과 거리가 멀었던 아이였던지라 “~~ 읽어봤니?” 물으면 거의 읽어본 것이 없었다. 그래서 매주 한국 근현대 단편을 몇 편씩 골라서 읽고 오게 했다. 때로는 외국 단편도 읽게 했다. 시(詩)도 매주 몇 편씩 읽혔다. 수업 중에 같이 낭독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단편과 시를 읽는 동안 나도 행복했던 것 같다. 대학 졸업 후 한국 소설이나 시는 좀 멀리했던 터였다. 그런데 다시 읽거나 새롭게 읽는 시들 가운데 좋은 게 어쩜 그렇게도 많던지. 읽는 내내 즐거웠다. 아이하고는 주로 서로 감상을 나눴다. 처음에는 “이게 대체 뭔 소리에요?” 하던 아이가 몇 달이 지나니 “쌤, 이게 이걸 뜻하는 거죠?” 하면서 신이 나 있더라. 어쩌면 당연하게도 성적은 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국어는 더. 그 애가 자기가 태어나 이런 등급은 처음 맞아본다면서 신이 나서 뛰어온 날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성적이 많이 올랐다고 그 애 어머님이 과외비를 올려주시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 애는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그 애를 가르치던 방에는 책이 많이 꽂혀 있었는데, 책에는 전혀 관심 없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책장 앞에 우두커니 서서 이것저것 골라보더니 “쌤, 이거 빌려가도 돼요?”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야금야금 골라가서 읽기도 했을 테고 읽지 못하고 갖고 온 책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 애 손에 있을 책도……. 어느 날 그 애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밝히기도 했다. 2년은 그렇게 흘러갔고, 그 애는 대학을 진학했고, 얼마 전 졸업을 했다고 한다. 대학에 간 뒤 연락이 몇 번 왔지만 받지는 않았다. 그렇게 스쳐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너건너 아는 분의 딸이라 간간이 그 애 소식을 듣기는 한다.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더라, 돌아왔다더라, 이제 취업해야 할 때인데 살 때문에 큰일이다더라(아이가 덩치가 큰 편이었다). 그러더니 얼마 전에는 그 애가 결국 성형수술을 하고 지방흡입 수술을 하고 그러고도 우울증을 못 벗어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술을 마시다가 좀 울었다. 그 애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페미니즘의 도전>을 선물해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 애 뿐만이 아니라 나의 가장 큰 조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그랬다. 그런데 나는 그 두 아이 모두에게 그 책을 선물하지 못했다. 과연 내가 선물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요즘 20대 여자애들에게 과연 이 책이 선물이 될까 싶기도 하다. 그 애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건 아닐까......
<소년을 읽다>를 읽는 내내 왠지 그 애 생각이 났다. <소년을 읽다>에 등장하는 아이들처럼 국어 수업을 통해 가까워진 비슷한 또래의 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으로 책으로, 또 다른 세상을 만난 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겐 어릴 때부터 부모가 책을 읽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열일곱, 열여덟이 될 때까지 그런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아이들의 이야기. 먹고살기에 급급해서 그것이 범죄인 줄 모르고 범죄에 가담했고, 끝내 자유를 잃고 감금당한 아이들. 그 소년들은 자신을 편견 없이 대해준 한 국어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의 재미를, 이야기의 힘을 새삼 깨닫고 공감과 연민을 알게 된다. 물론 그 아이들은 죄를 지은 범법자이다. 누군가에게 해를 입힌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쉽게 연민의 감정이 들어도 되는 걸까 고민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마음을 순하게 만드는 사람. 사납고 날 선 마음의 결을 조용히 빗질해서 얌전하게 만드는 사람. 싸우듯이 살다가도 팔다리에 긴장 풀고 몸도 마음도 평평하게 눕게 만드는 그런 사람.”(177쪽) 이런 사람, 이런 어른이 곁에 있었다면 아이들이 그토록 후회하는 일은 저지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애와 2년 가까이 문학을 공부했던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내 인생의 한 때였다. 그 애가 지금도 여전히 책을 열심히 읽고 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소년을 읽다>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래도 한때 자신이 어떤 책을 읽고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기분을 느꼈음을, 책으로 누군가와 의견을 나누고 공감했던 순간이 있었음을 살아가면서 가끔은 좋았던 기억으로 꺼내 들춰 볼 것이다. 나는 나의 단 하나뿐인 제자, 그 애가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가면서 상처받을 것이 안타깝고 가엾지만 그래도 연락은 하지 않을 것 같다. <소년을 읽다>의 선생님과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내가 그렇듯이 이 책의 지은이도 그 아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랄 것이다. 나의 그 학생에게도, 그리고 이 소년들에게도 세상이 조금은 덜 차갑기를. 좋은 어른들을 만날 기회가 더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