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읽다
서현숙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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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평소 잘 읽지 않는 분야인 국내 에세이 두 권을 읽었다. 위로가 조금 필요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두 권의 책은 <어린이라는 세계>와 <소년을 읽다>이다. 두 권 모두 보관함에 오래 담아두기만 했는데 이제야 읽었다. <소년을 읽다>는 조금 더 남다르게 다가온다. 국어 교사인 저자가 소년원에 갇힌 아이들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동안 국어 수업을 하면서 책하고는 담쌓고 지내던 아이들을 책의 세계로 이끌어간 이야기이다. 아마도 내가 국어를 전공했었고,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국어 선생님을 대부분 좋게 기억하고 있기에 이 책에 더 관심이 갔던 것 같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어도 선생님이 될 생각은 없었다.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그 일의 엄중함이 참 멀게만 느껴졌다. 대학생 때 과외를 해본 경험도 없다. 영어와 수학 위주로 돌아가는 과외 시장에서 국어라는 과목이 그다지 선호되는 것도 아니었고 내게 가르치는 재주가 있다고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우연히 누군가를 가르치게 되었다. 열일곱 소녀였다. 그때 나는 다니던 회사가 망해서 실업자로 살면서 테니스만 치던 시절이었다. 광고 일은 다시 하기 죽어도 싫고, 뭘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해서 허구한 날 공만 쳤던 그런 시절. 건너건너 아는 분의 딸이 고2가 됐는데, 국어 과외를 한 번 해볼까 싶다는 거였다. 그 아이는 외동이라 영어, 수학, 중국어 등등 온갖 과외를 다 받고 있었는데 성적은 딱히 오르지 않고 답답하던 차에 국어라도 좀 시켜볼까 했던 것이다.

슬쩍 물어보니 내신 등급이 낮은 터라 부담이 덜했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그 애가 고3이 되어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국어를 가르쳤다.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국어’ 책을 들고 공부하려니 초반에는 나도 좀 헤맸다. 그래도 문학은 자신 있었다. 고등학교 때 국어는 싫어했어도 문학은 좋아했다. 대학에서도 그랬다. 나는 아이에게 밑줄 긋고 단어가 지시하는 바는 무엇이고 이렇게 가르치기보다는 그냥 책을 읽혔다. 책과 거리가 멀었던 아이였던지라 “~~ 읽어봤니?” 물으면 거의 읽어본 것이 없었다. 그래서 매주 한국 근현대 단편을 몇 편씩 골라서 읽고 오게 했다. 때로는 외국 단편도 읽게 했다. 시(詩)도 매주 몇 편씩 읽혔다. 수업 중에 같이 낭독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단편과 시를 읽는 동안 나도 행복했던 것 같다. 대학 졸업 후 한국 소설이나 시는 좀 멀리했던 터였다. 그런데 다시 읽거나 새롭게 읽는 시들 가운데 좋은 게 어쩜 그렇게도 많던지. 읽는 내내 즐거웠다. 아이하고는 주로 서로 감상을 나눴다. 처음에는 “이게 대체 뭔 소리에요?” 하던 아이가 몇 달이 지나니 “쌤, 이게 이걸 뜻하는 거죠?” 하면서 신이 나 있더라. 어쩌면 당연하게도 성적은 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국어는 더. 그 애가 자기가 태어나 이런 등급은 처음 맞아본다면서 신이 나서 뛰어온 날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성적이 많이 올랐다고 그 애 어머님이 과외비를 올려주시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 애는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그 애를 가르치던 방에는 책이 많이 꽂혀 있었는데, 책에는 전혀 관심 없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책장 앞에 우두커니 서서 이것저것 골라보더니 “쌤, 이거 빌려가도 돼요?”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야금야금 골라가서 읽기도 했을 테고 읽지 못하고 갖고 온 책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 애 손에 있을 책도……. 어느 날 그 애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밝히기도 했다. 2년은 그렇게 흘러갔고, 그 애는 대학을 진학했고, 얼마 전 졸업을 했다고 한다. 대학에 간 뒤 연락이 몇 번 왔지만 받지는 않았다. 그렇게 스쳐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너건너 아는 분의 딸이라 간간이 그 애 소식을 듣기는 한다.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더라, 돌아왔다더라, 이제 취업해야 할 때인데 살 때문에 큰일이다더라(아이가 덩치가 큰 편이었다). 그러더니 얼마 전에는 그 애가 결국 성형수술을 하고 지방흡입 수술을 하고 그러고도 우울증을 못 벗어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술을 마시다가 좀 울었다. 그 애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페미니즘의 도전>을 선물해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 애 뿐만이 아니라 나의 가장 큰 조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그랬다. 그런데 나는 그 두 아이 모두에게 그 책을 선물하지 못했다. 과연 내가 선물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요즘 20대 여자애들에게 과연 이 책이 선물이 될까 싶기도 하다. 그 애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건 아닐까......
     
<소년을 읽다>를 읽는 내내 왠지 그 애 생각이 났다. <소년을 읽다>에 등장하는 아이들처럼 국어 수업을 통해 가까워진 비슷한 또래의 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으로 책으로, 또 다른 세상을 만난 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겐 어릴 때부터 부모가 책을 읽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열일곱, 열여덟이 될 때까지 그런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아이들의 이야기. 먹고살기에 급급해서 그것이 범죄인 줄 모르고 범죄에 가담했고, 끝내 자유를 잃고 감금당한 아이들. 그 소년들은 자신을 편견 없이 대해준 한 국어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의 재미를, 이야기의 힘을 새삼 깨닫고 공감과 연민을 알게 된다. 물론 그 아이들은 죄를 지은 범법자이다. 누군가에게 해를 입힌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쉽게 연민의 감정이 들어도 되는 걸까 고민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마음을 순하게 만드는 사람. 사납고 날 선 마음의 결을 조용히 빗질해서 얌전하게 만드는 사람. 싸우듯이 살다가도 팔다리에 긴장 풀고 몸도 마음도 평평하게 눕게 만드는 그런 사람.”(177쪽) 이런 사람, 이런 어른이 곁에 있었다면 아이들이 그토록 후회하는 일은 저지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애와 2년 가까이 문학을 공부했던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내 인생의 한 때였다. 그 애가 지금도 여전히 책을 열심히 읽고 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소년을 읽다>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래도 한때 자신이 어떤 책을 읽고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기분을 느꼈음을, 책으로 누군가와 의견을 나누고 공감했던 순간이 있었음을 살아가면서 가끔은 좋았던 기억으로 꺼내 들춰 볼 것이다. 나는 나의 단 하나뿐인 제자, 그 애가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가면서 상처받을 것이 안타깝고 가엾지만 그래도 연락은 하지 않을 것 같다. <소년을 읽다>의 선생님과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내가 그렇듯이 이 책의 지은이도 그 아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랄 것이다. 나의 그 학생에게도, 그리고 이 소년들에게도 세상이 조금은 덜 차갑기를. 좋은 어른들을 만날 기회가 더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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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8-31 10:38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아.. 책 안 읽던 아이가 선생님과 함께 책을 읽으며 책을 좋아하게 되고 성적까지 오르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했는데... 씁쓸하네요 ㅜㅜ 그래도 잠자냥님이 알려주신 독서의 기쁨이 우울증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소년을 읽다>에서 열일곱, 열여덟이 될 때까지 누군가가 나를 위해 책을 읽어준 적이 없다는 이야기에 많이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어른의 잘못이 너무 크다는 생각에 참 미안했습니다.

잠자냥 2021-08-31 10:44   좋아요 7 | URL
그 애가 대학생 됐을 때만 하더라도 꿈도 많고 참 행복해했는데.... ㅠㅠ 세상이 참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로 상처를 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무살이 넘었으니 아이는 아니겠지만 아직 아이 같아서요. 에효.

저도 그 부분 참 기억에 남았어요. 깜짝 놀라기도 했고요. 그 아이뿐만이 아니라 어딘가에 여전히 십대에 이르기까지 누군가가 책 읽어준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있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스산합니다.

다락방 2021-08-31 10:54   좋아요 10 | 댓글달기 | URL
책을 좋아하지 않고 책과 가까이 지내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책을 접한 경험이 별로 없었겠죠. 이 책 속의 선생님이나 이 글 속의 잠자냥 님 처럼 누군가가 책을 읽어주고 같이 읽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아 책 읽는게 좋구나, 즐거운 거구나 느껴볼 수 있을텐데요. 책 뿐만이 아니어도 접하지 못해서 모르고 싫다고 생각하는 그런 지점들이 세상엔 아주 많을 것 같아요.

잠자냥 님의 하나뿐인 제자 이야기가 너무 아프네요. 성형수술, 지방흡입은 사실 대한민국에서 사는 여성이라면 어릴 때부터도 계속 생각하잖아요. 전 몇 년전에 서른 훌쩍 넘은 여성으로부터 예쁜이 수술 하고싶다는 얘기도 들었었어요. 그 때 진짜 제 멘탈이 나갈 것 같더라고요.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그리고 청소년들에게 좋은 어른들을 만날 기회가 좀 더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잠자냥님의 바람과 같이요.

잠자냥 2021-08-31 11:16   좋아요 6 | URL
네, 책이 의외로 신기하게 재미난 거구나 하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만으로 아이들에겐 다른 세상을 보여줄 가능성이 열리는 것 같아요.

외모에 대한 강박을 끊임없이 심어주는 이 사회가 참 원망스러우면서도 저부터도 그러지 말자 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얄라알라 2021-08-31 10:58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이틀 연속, 잠자냠 님의 완결형 고품격 페이퍼에 감동 먹고 갑니다. 지방흡입으로 인한 우울이 잠자냥님의 제자분을 얼마나 힘들게 했을지....지인 중에 지방흡입하며 A/S(?)병원에서 무료로 약속해주었지만, 수술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공짜로 지방 빼준대도 다신 안한다고 하신 말씀 기억납니다. 몸도 아프고,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자신도 못 미덥고, 제자분이 괴로웠을 것 같아요

그래도 선생님과 책 읽으며 문학에 심취했던 시절의 힘....남아 있을 거고 다시 일으켜주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잠자냥 2021-08-31 11:19   좋아요 7 | URL
이틀 연속 북사랑 님의 칭찬 감사합니다. 수술을 하고도 또 주변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이중으로 고통을 받는 것 같아요. 타인의 몸(삶)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고 말하는 이 사회가 좀 변해야 할 텐데 그저 답답합니다.

그래도 그 아이가 이겨낼 수 있으리라, 이겨내길 믿어봅니다.

coolcat329 2021-08-31 11: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스쳐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해서 거리를 뒀던 과외제자의 안타까운 소식을 어느 날 듣고 술 마시다 눈물을 흘렸다는 부분은 그 마음 알것도 같습니다.

이 책 저도 읽고 싶고 아이도 읽어보라고 하고싶네요.

잠자냥 2021-08-31 11:54   좋아요 5 | URL
어른들이 읽어도 좋고(더 많은 어른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고요), 또래 아이들이 읽어도 또 여러 생각이 들 책인 것 같습니다.
행복한책읽기 님 따님(중2)은 이 책 읽고 독서기록장에 이곳 소년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썼더라고요. ㅎㅎ

coolcat329 2021-08-31 17:28   좋아요 3 | URL
오 청소년이 읽어도 좋은 책이군요~독서기록 편지로 쓰기도 좋네요~

공쟝쟝 2021-08-31 20: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흡족해하며 끄덕이며 읽다가 아찔해지고 슬퍼지고 여운이 남고 그런 독후감이네요. ‘다시 만나지 않더라도‘ 제목도 한번더 생각해보게되구요.

잠자냥 2021-08-31 21:33   좋아요 2 | URL
슬포 말고 어여 고앵이 사진 올려줘여~~

붕붕툐툐 2021-08-31 2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네요~ 아마도 그 친구는 그 시절 책도 좋아했지만 잠자냥님을 좋아했던 거 같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늘 따라하고 싶으니까요...
저 이런 책 너무 좋아해요~ 두 권 묶어서 다 잘 읽을게요.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1-09-01 08:32   좋아요 1 | URL
툐툐 님이 읽으시면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리뷰에 이야기도 한보따리 나올 듯!!

행복한책읽기 2021-09-01 00: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쩝. 나두 이리 쓸것을. 난 제자 이야기 많은데. ㅋ 자냥님 리뷰는 북사랑님 말대로 고품격이라 따라하기 힘듬요^^ 암튼, 전 이 책 참 좋았어요. 이런 어른이 되고팠는데, 난 머하지, 그랬어요. 자냥님 제자 이야기 읽다 많이 뜨끔했네요. 저 아이들한테 뚱뚱하다 놀리거든요. 반성반성. 하지만 . . . 도돌이표가 되고 말 듯한. ㅡㅡ

잠자냥 2021-09-01 08:34   좋아요 2 | URL
이 책과 관련한 책읽기 님 글도 다 좋았습니다. 책 읽고 나서 다시 다 읽으니 더 좋더라고요. ㅎㅎ

초딩 2021-09-04 13: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금주의 북플 뉴스레터 선정 축하드려요~

잠자냥 2021-09-04 13:33   좋아요 1 | URL
와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1-09-04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금주의 뉴스레터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잠자냥 2021-09-04 14:36   좋아요 0 | URL
아이고 감사합니다~

바람돌이 2021-09-04 15:53   좋아요 0 | URL
궁금함요. 저는 왜 금주의 뉴스레터를 모르는걸까요? 알라딘 레터는 죄다 수신하는데 왜 저는 이게 뭔지 모르는걸까요???? ㅠㅠ 제발 제게도 알려주실분????

잠자냥 2021-09-04 17:22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 님, 알라딘에서 매주 토요일 오전에 광고성 메일로 보내는 게 있는데요, 그 주에 서재 글과 북튜브 중 몇 개 추려서 보냅니다. 이번주 메일 제목은 ‘(광고) 한 장의 그림, 한 장의 편지’였어요. 아마 광고의 성격이라 스팸메일함으로 가 있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