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잉크
토니 모리슨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연이면 강연, 연설이면 연설, 에세이면 에세이 뭐 하나 흘려 들을 내용이 없다. 인종차별과 젠더 갈등, 문학과 교육, 세계화의 위험 등등 다룬 주제도 다양하다. 소설가로서만이 아니라 문학을 가르친 영문학자이자 비평가로서의 면모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어쩜 이렇게 지성미 철철인지 ㅠㅠ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21-03-30 1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성미 철철 너무 영접하고 싶네용!! 읽고 싶은 책장에 꾸욱 담아갑니당~

잠자냥 2021-03-30 13:26   좋아요 1 | URL
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3-30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담습니다. 잠자냥님은 지성미에 흠뻑흠뻑 빠지지는 흠뻑녀^^;;

잠자냥 2021-03-30 17:23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러게요 제가 좀 지성미에 약하네요. ㅋㅋㅋㅋ

레삭매냐 2021-03-31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낭중에 중고서점에 뜨면 만나 뵙는
것으로...

잠자냥 2021-03-31 16:09   좋아요 0 | URL
오우, 네 꼭 읽어보세요~
 

네이딘 고디머의 《거짓의 날들》을 읽고 완전 반해서 집에 있는 고디머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고 있다. 주로 단편들. 그이의 단편이 실린 책들도 대부분 절판 상태이다. 단편 <최고의 사파리 The Ultimate Safari>는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에 실려 있다. 고디머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왕은철 번역가가 ‘<최고의 사파리>를 중심으로 본 타자 재현의 문제-네이딘 고디머에 대한 애도를 겸하며’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다는 것을 보고, 이 작품을 좀 더 주의 깊게 읽기 시작했다.

《거짓의 날들》은 문체가 유려하고 서정적이었던 데 비해 <최고의 사파리>는 투박한 단문으로 이루어져 있어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조금 놀랐다. 그러나 곧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작품 화자는 아프리카의 어린 소녀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날 밤 어머니는 가게에 간다며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모르겠다. 아버지도 어느 날 집을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전쟁터에 나간 것이었다. 우리도 참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직 어렸기 때문에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같은 신세였다. 우리에겐 총이 없었다. 정부가 늘 노상강도라 부르던 아버지의 적군은 사방을 마음대로 다녔으며 우리는 개에게 쫓기는 닭처럼 도망 다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어머니는 식용유를 구할 수 있다는 말에 가게에 갔다. 식용유를 맛본 지 너무나 오래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행복해했다.’

시작 부분을 이렇게 길게 소개하는 까닭은 이 길지 않은 문장에  작품의 주요 상황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이다. 전쟁터에 나가 부재하는 아버지, 식용유조차 쉽게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식용유 한 병을 구하려고 가게에 간 뒤 돌아올 줄 모르는 엄마. 정부가 늘 노상강도라고 부르는 약탈꾼들의 존재, 남겨진 아이들과 할머니, 할아버지…….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다. 소녀의 엄마는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노상강도들이 세 번이나 마을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이제 마을에는 남은 것이 없다. 강도들이 불을 질러 소녀네 집 초가지붕은 무너져 내렸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지붕이 없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 그 약탈꾼들은 소녀의 집에 오지 않았다. 겁에 잔뜩 질려 아이들은 밤을 지새운다. 소녀의 오빠는 부러진 나무 조각을 한 손에 쥔 채로 다 타 버린 집 기둥에서 밤을 지새운다. 노상강도에게 들켰을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학교도, 교회도 모두 파괴되었으므로 소녀와 남동생, 그리고 오빠는 시간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는 채 어머니를 줄곧 기다린다. 그러나 끝내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고, 아이들만 남았다는 소리를 듣고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와서 손주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그곳에서도 한 달 가까이 엄마를 기다리지만 엄마는 돌아올 줄 모른다. 할머니의 집도 사정은 형편없어서 굶주림이 날마다 이어진다. 할아버지에겐 전에 소와 양이 있었지만 그 또한 노상강도들이 모두 빼앗아갔다.

굶주림 속에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자 할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아이들은 떠나게 되어 기쁘다. ‘어머니가 있지 않은 곳’, ‘항상 배가 고픈 곳에서’ ‘노상강도도 없고 음식이 있는 곳’으로 아이들은 떠나고 싶었다. 집을 떠나 할머니가 목표로 삼은 ‘그곳’에 가려면 크루거 공원을 지나야만 한다. 아이들은 크루거 공원을 잘 알았다. ‘동물들만 사는 거대한 왕국, 코끼리, 사자, 자칼, 하이에나 하마, 악어, 모든 동물이 사는 곳’이다. 마을에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런 동물들이 이었는데, 노상강도들이 코끼리를 잡아 상아를 팔고, 사슴을 다 먹어 치웠다. 소녀는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 마을은 사람이 사는 곳이었지 동물의 왕국은 아니’라고. 크루거 공원을 잘 아는 이를 안내자 삼아 소녀의 가족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은 삼삼오오 떠난다. 크루거 공원에서는 울타리를 돌아 더 먼 길로 돌아가야 한다. 울타리를 손으로 만지는 순간 살이 타들어서 죽기 때문이다. 말이 ‘공원’이지, 소녀가 묘사하는 내용을 유추해 보면 크루거 공원은 ‘사파리Safari’임을 알 수 있다.

공원에서는 모닥불을 피울 수가 없다. 연기 때문에 그들이 공원에 있다는 사실이 탄로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찰관과 공원 관리인이 이들의 존재를 알면 그들을 돌려보낼 것이 틀림없다. 때문에 그들은 ‘동물들 사이에서 동물처럼’ 움직인다. 소녀는 이곳에서 코끼리, 수사슴, 멧돼지 등을 맞닥뜨린다. 동물들의 뒤를 쫓다가 물웅덩이를 발견하면, 동물들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물을 마신다. 소녀가 볼 때마다 동물들은 풀이나 나무나 뿌리를 먹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인간이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할머니가 가져온 곡물 가루도 이미 다 떨어졌고, 소녀는 개코원숭이들이 먹는 음식이나 겨우 먹을 수 있다. 인간이면서도 이곳에서는 인간이 아닌 존재와 마찬가지인 그들은 그렇다고 ‘동물처럼 행동하기’도 어렵다. 소녀는 날씨가 아주 더운 낮에는 누워서 잠든 사자들을 본다. 자신도 사자처럼 눕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누워 잠들면 사자에게 먹힐지도 모른다. 남동생은 점점 더 야위어 가고, 오빠는 어느새 말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여행은 지속되어 그들은 낮에도 밤에도 걷는다. 야영지에서 백인들이 요리하며 피우는 모닥불을 본다. 연기 냄새와 고기 냄새에 이끌려 일행 중 한 여인이 그들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자고 한다. 여인은 ‘쓰레기통에 버린 음식을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말하며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안내자는 크루거 공원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를 도우면 그들은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우리를 봐도 못 본 척할 수밖에 없다고. ‘그들이 본 건 단지 동물뿐’이라고. 크루거 공원을 지나는 동안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볼일을 보기 싫었는지 풀숲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할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일행들은 길을 떠나야 한다고 재촉하고, 할머니와 소녀와 오빠는 할아버지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지만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을 굶겨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결국 일행을 따라 길을 나선다. 할아버지는 어딘가에 남겨둔 채. 아빠와 엄마에 이어 할아버지마저 사라진 것이다.

드디어 소녀 앞에 저 멀리 아주 큰 천막이 보인다. 파랗고 하얀 천막이다. 소녀의 고향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 진료소 수녀의 말에 따르면 아기들을 제외하면 그 수가 200명쯤이다. 각 가족에게는 집 대신 큰 자루나 종이 판지 등 찾을 수 있는 것들로 사방을 막은 작은 구역이 주어진다. 이 공간이 자신의 것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이다. 문도 창문도 지붕도 없지만 이 공간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문도, 창문도 지붕도 없기에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남의 집안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일종의 사파리와도 같다. 진료소에서 나눠 준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배급을 받고, 옷을 얻어 입고 소녀와 오빠는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되었지만 남동생은 또래 아이들처럼 놀지 못한다. 할머니는 진료소를 찾아가고, 수녀는 남동생이 충분히 먹지 못해 머리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한다. ‘전쟁 때문에,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크루거 공원에서 굶주렸기 때문에 남동생은 종일 할머니 무릎 위에 누워 있거나 할머니한테 기대어 있기를 좋아한다.’

시간은 흐른다. 천막에서 얼마나 오래 생활했는지 소녀는 열한 살이 되었고, 동생은 세 살이 다 되어 간다. 동생은 여전히 몸집은 작지만 머리는 크다. 몸이 건강한 할머니는 일자리를 구했고, 소녀네 가족들은 굶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크루거 공원에서처럼 천막 안 공간도 비좁아 서로 가깝게 누워 있어야 할 만큼의 자리밖에 없다. 어느 날 백인들이 천막에 사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으러 왔다. 그들은 영화를 만든다고 한다. 한 백인 여자가 소녀네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가 할머니에게 묻는다. 백인 여자의 말을 알아들은 어떤 사람이 그 말을 통역해서 되물어 준다.



언제부터 이렇게 살고 있나요?
이곳을 말하는 겁니까? 할머니가 말했다. 이 천막에서 이 년하고 한 달 살았어요.
앞으로 바라는 것 있어요?
아무것도요. 여기에 있잖아요.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요?
아이들이 교육을 받아 좋은 직장을 구하고 돈을 벌기를 바랍니다.
고국으로, 모잠비크로 돌아가고 싶나요?
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이곳에 머물지 못할 텐데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할머니는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할머니가 그 백인 여자의 질문에 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백인 여자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더니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최고의 사파리>,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 389쪽)


이 짧은 단편에서 가장 압도적인 장면이 아닐까. 이 년 넘도록 천막 안에서 지내는 소녀의 가족. 남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자루나 종이 판지 등으로 사방을 막아도, 문도, 창문도, 지붕도 없기에 누구라도 마음먹으면 집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공간. 그 공간을 백인이 ‘영화’를 찍는다면서 ‘비집고’ 들어와 자기들의 언어로 질문을 퍼붓는다. 그러고는 소녀네 가족을 향해 ‘미소’ 짓는다. 야생동물의 생활 터전에 마음대로 들어가 그들의 생활을 염탐하고는 제멋대로 그 삶을 낭만화해 미소 짓거나 즐거워하는 사파리 관광객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크루거 공원을 지날 때 백인들의 음식 냄새에 이끌려 도움을 청하자고 했던 여인에게 안내자가 했던 말도 그런 의미에서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보여도 못 본 척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그들. 크루거 공원에서 그들은 동물처럼 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동물보다 그 존재가 뚜렷하게 인식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동물은 타인의 눈에 보이는 존재여도, 이들은 결코 보여서는 안 된다. 할머니는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집도 없다고 말하지만 소녀는 할머니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전쟁이 끝나고 노상강도도 없어지면 집에서 엄마가, 그리고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렇기에 다시 크루거 공원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는다. 소녀의 이 소망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사파리Safari'는 잘 알다시피 야생 동물을 놓아기르는 자연공원에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차 안에서 구경하는 일을 뜻한다. 원래는 스와힐리어의 ‘여행’이라는 뜻으로, 사냥을 하기 위해 사냥감을 찾아 원정하는 일을 이르던 말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이 작품 <최고의 사파리 The Ultimate Safari>라는 제목은 작품 내용과 어우러져 무척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부가 늘 ‘노상강도’라 부르던 아버지의 적군, 코끼리를 잡아 상아를 팔고, 사슴을 몽땅 먹어 치운, ‘노상강도’들은 그저 단순히 아프리카의 또 다른 종족들을 말하는 것일까? 만지는 순간 살이 타들어서 죽는 울타리를 크루거 공원에 친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이 아프리카 땅에서 사냥은 누가 했으며 진짜 사냥감은 누구였을까. 한쪽에서는 그렇게 집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난민들에게 천막을 제공해주는 하얀 얼굴의 백인들이 있지만,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난민의 삶을 영화로 만들겠다며 다정히 다가와 카메라를 들이대며 미소 짓는 백인들도 있다. 차 안에 편히 앉아 유리창 너머로 사파리를 돌아보는 관광객이나, 카메라 렌즈를 통해 난민의 삶을 담고 전시하는 백인이나 모두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삶을 ‘사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아프리카에서 긴 ‘여행’을 할 것이 분명한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아 보인다.

네이딘 고디머의 시선과 통찰력은 이렇게 짧은 작품에서도 빛이 난다. 그렇다고 고디머의 작품이 아프리카의 현실을 고발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다른 단편 <발견>(《견딜 수 없는, 미쳐 버리고 싶은》)에서는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해, 여자라면 환멸을 느끼게 된 남자가 홀로 바닷가 휴양지로 떠나 겪는 일을 유쾌하게 그리고 있다. 이런 작품들을 읽노라니 당연히 네이딘 고디머의 작품을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절판된 책들도, 그리고 아직 한 번도 번역되지 않은 그 많은 작품들도 속히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빌어본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21-03-29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 읽었어요. 옛날 옛적에요. ㅎㅎㅎ 그래서 기억 안 나요. 암튼, 저도 예전 제 글을 보면서 제가 나딘 고디머를 잠자냥님처럼 엄청 좋아햤더라고요. ㅋㅋ 암튼 <보호주의자> 주제넘게 추천합니닷! 읽으시고 멋진 글 써주세요. (근데 정말 우리 취향 비슷해요!!😅)

잠자냥 2021-03-29 21:45   좋아요 0 | URL
<보호주의자>는 현재 절판이라 구할 수가 없네요. 나중에 읽게 되면 꼭 리뷰 남기겠습니다.

다락방 2021-03-30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를 읽었다는 기억은 나거든요. 그래서 혹시 뭔가 써놓은게 있나 싶어 검색해봤더니, 2014년에 밑줄긋기 단 한 건을 했더라고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문장이 나딘 고디머의 것은 아닌듯 합니다.

잠자냥 님의 글로만 봐도 참 좋은 단편일 것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 기억은 전혀 없을까요. 대체 책은 왜 읽는 걸까요... 하아-

잠자냥 2021-03-30 10:06   좋아요 0 | URL
단편은 금방 잊히긴 하죠. 제가 이 책 링크 하느라 옛 리뷰들 좀 찾아보니 다락방 님은 페이퍼를 몇 개 쓰셨더라고요. 그때 이 책에 실린 <아들의 죽음>을 인상 깊게 읽으셨나 봅니다. 물론 지금은 기억 못하시겠지만...*힐끔*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3-30 12:06   좋아요 0 | URL
페이퍼도 썼어요, 제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혀, 기억이 안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아. 독서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021-04-12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2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케이 2021-04-21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밑의 [견딜 수 없는 미쳐버리고 싶은] 저 책 대학생 시절 밀란 쿤데라 단편 때문에 빌려 읽었던 책이네요. 원래 쿤데라 단편 제목이 [히치하이킹 게임] 인데 왜 이상한 제목을 갖다 붙였을까 의문스러웠던 기억만 나고 쿤데라 소설 외 다른 소설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네요..십수년전 읽었던 책 표지를 보니 기분이 묘해요.

잠자냥 2021-04-21 09:45   좋아요 1 | URL
ㅎㅎㅎ <견딜 수 없는....> 이 책 제목 참 이상하죠. 단편 모음집의 단점이라면, 몇 년 지나면 그 안에 실린 단편 대부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ㅎㅎ 하긴 요즘 저는 장편도 좀만 지나면 아주 강렬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기억이 희미해집니다. -_-;
 
거짓의 날들
나딘 고디머 지음, 왕은철 옮김 / 책세상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이따금 언제나 모든 화제가 자기 가족 이야기로 국한된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또 가끔은 자기가 속한 세계가 자신을 대변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있다. 그런 이들일수록 출신 학교와 지역, 사는 동네, 직장 이름에 민감하게 군다. 나는 이 두 부류의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아빠 차는 뭔데, 너네 아빠 차는 뭐니자랑하는 유치원생을 보는 것 같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성장이란 키가 크고 몸이 커지는 등 육체적 자라남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정신의 자라남도 반드시 포함된다. 인간은 어떤 의미로든 성장한다. 진정한 성장을 위해서는 여러 요소들이 따라야 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이 속한 세계를 타인의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능력과 다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도 마치 자기 일처럼 느낄 줄 아는 공감 능력은 꼭 필요하다. 자신이 나고 자라온 가족, 현재 속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그러나 그렇기에 쉽게 갖기 어려운 능력인가. 게다가 자신과 상관없는(또는 그렇게 보이는) 세계에 속한 사람에게 느끼는 공감과 연민의 능력은 또 어떤가.

 

네이딘 고디머의 <거짓의 날들>에는 이 두 가지 모습이 모두 그려진다. 고디머가 유일한 자전적 작품이라고 꼽은 이 작품의 주인공 헬렌은 고디머 그 자신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0년대. 남아프리카 광산 지역의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헬렌. 책을 좋아하는 이 소녀의 세계관은 그때는 아직 협소한 광산촌과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부모의 세계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여느 흑인을 대할 때와 달리 집안일을 돌봐주는 흑인 하녀 애나와 엄마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엄마가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평범한 소녀이다. 백인의 특권은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서 헬렌은 그걸 특권이라고 느끼지도 못하고 자란다. 단지 저 유럽, 그것도 영국 중상류층 가정 아이들의 평범한 생활을 다룬 동화책이 더 신기하다. 어느 책에도 헬렌의 집 애나처럼 집안일을 하고 요리를 하며, 주인집 어머니와 아버지를 마님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흑인 여자아이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헬렌은 이상하다는 느낌만 있을 뿐 그게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제 열일곱 살인 이 소녀가 계속 그 부모와 광산촌에만 머무른다면 소녀의 성장은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육체는 성장을 멈출 때까지 계속 자라겠지만 정신은 그 어떤 변화도, 충격도, 깨달음도 얻지 못하고 그저 부모의 영향 아래, 협소한 광산촌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만 머물렀을 것이다. 비록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실제로 경험하는 세상과는 달리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녀는 어느 여름, 집을 떠나 나탈의 남부 해안에서 한때를 보내게 된다. 광산촌에서 바닷가로 장소 이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헬렌은 첫 번째로 자기 세계가 깨지는 경험을 한다. 풋풋한 첫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루디와의 만남이 그렇다. 루디는 헬렌의 부모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다. 부와 명예, 명성 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헬렌의 부모와 달리, 루디는 그 무엇도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심지어 헬렌이 속한 세계인 광산촌을 이렇게 말한다. “광산촌에서 사는 건 너무 협소하고 기계적이고 소득 없는 삶이야.”(85). 헬렌은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라고 충격을 받아서 혼날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말을 더듬는다. 화가 나고 비참하기도 하다. 그는 더 신랄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생산하기 위해 어두운 지하에서 흙을 파다가 여덟 시간이 지나면 신성불가침의 위계질서 속으로 돌아와 하느님 같은 감독관을 비롯한 윗사람들에게 웃으면서 인사하고, 아랫사람들한테 인사를 받고 말이야. 그렇다고 내 밑에 누가 있다는 말은 아니야. 흑인들을 제외하면 말이야. 그들 위에 군림하는 건 특권이 아니라고! 나는 그런 일을 원치 않아. 좋은 일자리, 좋은 가족, 따분한 도시, 속이 좁은 사람들을 원치 않아.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다고.”(85~87). 다만 이런 말을 하는 루디가 헬렌보다 무려 열 살이나 많다는 게 지켜보는 입장으로서는 꽤 못마땅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루디와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여름방학처럼 스쳐지나간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헬렌은 조금 달라져 있다. 자신의 둘러싼 광산촌의 삶이 진부하고 부모의 위선도 부끄럽고 민망하다. 그렇지만 루디도 처음에 열광했던 그 모습 그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나이를 초월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실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는 어른에 불과하다는 사실’(89)을 깨닫는다. 이 또한 다행이다. 열일곱 소녀를 탐하는 스물일곱 남자, 그러면서도 그 앞에서는 자못 인생을 아는 것처럼 말하며 우쭐대는 모습이라니, 당신도 아직 성장하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루디를 볼 때마다 치밀어 올랐는데, 헬렌의 눈에도 어느 순간 그 모순이 보였으니 말이다. 학교를 졸업한 지 일 년이 지났고, 그 일 년 동안 아버지가 다니는 애서턴 광산 사무실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던 헬렌은 처음에는 루디의 영향으로 대학도 거부하더니, 마침내 요하네스버그 대학교로 진학한다. 두 번째 변화의 계기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계기는 헬렌이 속했던 애서턴과의 진정한 결별을 뜻하기도 한다.

 

내가 교복이나 명예를 위해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님은 확실했다. 나는 의심과 무료함과 삶에 대한 경이감 때문에 대학에 갔다. 그것은 모든 탐색의 시작이었고 자아를 찾기 위한 혼란스러운 여행의 시작이었다. (156)

 

열일곱 헬렌에게 다른 세상도 있음을 보여준 사람은 루디 단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학에 진학한 헬렌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유대인 친구 요엘’, 흑인 친구 메리’, ‘이사’, ‘마커스 부부등 다양한 인종에, 다양한 출신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고, 스치듯 연애도 하던 헬렌은 드디어 진짜 사랑이라고 할만한 을 만나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러는 사이 헬렌은 이 수많은 사람들의 영향으로 인종차별이 나날이 심해지는 남아프리카의 현실에 눈을 뜬다. 특히 흑인 친구 메리를 통해 지금까지 흑인들의 말소리가 개 짖는 소리나 새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던 헬렌은 바로 그 흑인들 속에서 자신이 자라왔음을, 자신 또한 이 세계에서는 이방인임을 통렬하게 깨닫는다.

 

헬렌과 메리가 처음 만나는 곳은 대학교의 화장실이다. 헬렌은 화장실에서 메리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백인과 흑인이 한 공간에 나란히 있다니! 그도 그럴 것이 대학은 남아프리카에서 흑인과 백인이 같은 장소에서 손을 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였다. 요하네스버그를 통틀어 그런 곳은 대학 밖에 없었다. 헬렌은 이런 상황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흑인 대학생이나 백인 대학생이 인종차별 없다는 엄숙한 선언보다 더 실감 나게 다가오는 그런 사실에 익숙해지는 데는 상당한 적응 기간이 필요’(164)하다. 헬렌은 메리와 평범한 친구 관계가 되고자 무던히도 애쓰지만 무언가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일상생활에서 흑인들을 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져보려는 하찮은 시도 또한 번번이 벽에 부딪히는 것이다. 백인인 헬렌은 메리가 어떤 곳에 들어갈 수 없고, 어떤 출입구를 사용할 수 없고, 어떤 의자에 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린다.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흑인들처럼 메리는 금기시 되는 것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걷는 법을 배워야 했지만 헬렌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당연했다. 그러는 사이 헬렌은 처음으로 백인으로서의 죄의식을 느낀다.

  

나는 메리에게 손을 뻗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사람들은 예수의 희생정신과 정의감과 인권선언을 가지고 노력한다.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그것은 선언되는 순간 넌센스가 된다. 절대적인 것은 흑과 백처럼 합해지고 변화하는 삶에서는 현실성이 없다. 그것이 올 때는 아무 관련 없이 온다. 이렇게 싸구려 냄새가 나는 쓸모없는 분위기에서, 개인적인 감정을 깊이 수용하는 데서 온다. (371)

 

헬렌이 흑인의 인권을 생각하는 것도, 남아프리카의 참혹한 현실과 모순도, 백인으로서의 죄의식을 느끼는 것도 모두 개인적인 감정을 깊이 수용한 것에서 시작된다. 더욱이 헬렌이 미치도록 사랑하는 남자 은 흑인사무국에서 일하면서 흑인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온몸을 던지는 백인 남자가 아닌가. 헬렌은 그의 영향도 받지 않을 수 없다. 광산도시 애서턴에서 나탈의 바닷가, 그리고 이제 요하네스버그라는 도시로 이주한 헬렌. 처음에는 집을 떠나 친구 부부의 방 한 칸을 빌려 독립하고, 그 다음에는 폴의 집에서 그와 동거하면서 삶의 모습도,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도 서서히 변화해 간다. 헬렌이 도시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의 모습은 그저 이상주의자였다. 그녀 스스로도 한 인간이 남아프리카에서 자기를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흑인들에 대한 압제에 맞서는 것이라고 믿는 시기였다. 공부할 장소가 없는 메리를 위해 무턱대고 부모에게 메리를 초대하겠노라 말하던 헬렌의 모습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이상주의자일 뿐이다. 훗날 헬렌이 깨달았듯이 옳은 일을 한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다고 믿는 위선적인 사고방식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인도인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고 인종의 벽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578)라는 것을 헬렌을 뒤늦게 깨닫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게 행동했다. 그러나 몇 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헬렌은 그런 삶의 방식이 초래하는 결과, 즉 그런 믿음을 가질 권리와 그 믿음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의 부적절함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426)하게 된다. 정신적으로 한결 성장한 것이다.

 

괜찮은 삶에 대한 생각과 실제로 사는 삶사이의 모순 사이에서 고민하고 번뇌하던 헬렌은 자신이 조금씩 성장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아차렸을까. 그녀는 심지어 영원할 것처럼 사랑한 폴과의 관계에서도 모순이 있음을 깨닫는다. 너무나 익숙했던 폴의 방이 사실은 폴의 공간일 뿐, 자기 자신을 위한 곳이 결코 아님을 깨닫는 헬렌. 그 방이 낯설게 여겨질 때 그녀는 다시 그곳을, 그리고 폴을 떠날 수밖에 없다. 헬렌은 이제 남아프리카가 아닌, 한 번도 발을 디뎌본 적 없는 유럽으로 가고자 한다. 남아프리카도 아닌, 아직 유럽도 아닌 곳에 머물 때 헬렌은 가장 객관적으로 지나온 자기의 삶과 자기가 떠나온 도시를 돌아볼 줄 안다. 그렇게 훌쩍 성장한 것이다. ‘거짓의 날들이라고 느꼈을지언정, 그 모든 날들이 헬렌의 성장에 밑바탕이 되었다. 물론 헬렌이 그러한 삶의 조각들을 긍정적인 자기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을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한몫했으리라. 이 아름답고 눈부신 작품은 헬렌이라는 한 소녀의 7여 년간의 세월을 그리며 인간이라면 어떻게 자라야하는지를 담담히 보여준다. 헬렌은 그 이후로도 계속 성장하기를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네이딘 고디머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더 이상 자기기만을 하는 게 아니야. 달아나는 것도 아니야. 사랑의 모험이든, 백인이기 때문에 느끼는 죄의식이든 이상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것에 따르는 위험이든, 다시 말해 내가 달아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든 더 이상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야. 내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아니까.(604~605)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3-26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앞부분에 공감이 가네요~잠자냥님 별5개면 일단 보관함으로^^

잠자냥 2021-03-26 14:11   좋아요 2 | URL
네 이 책 정말 모두에게 추천입니다. 특히 여성에게.
그나저나 절판이라는 점이 안타까운데, 아마 많은 분들이 찾으면 다시 재발간하지 않을까요.
네이딘 고디머가 저작권료에 비해 사람들이 많이 안 찾아서 수지가 안 맞는지 원.....-_-

레삭매냐 2021-03-26 15: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욱겨요...

잠자냥님이 책을 땡기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장 중고서점에 사러 갔는데
상권이 없어서 일단 하권이 사두었답
니다. 상권만 있으면 읽기라도 할 텐데
하권 밖에 없으니 읽을 수도 없더라는.

왜 좋은 책들은 하나 같이 구하기가
어려운 건지 참 -

잠자냥 2021-03-26 15:14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권부터 읽으시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인공의 인생을 회고록 읽듯이 읽는 겁니닼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3-26 15:19   좋아요 3 | URL
이상하게도 이쪽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작가들 책이 절판이 많더군요. 쿳시는 그래도 최근 다시 나오긴 하는데... 아무래도 저작권료에 비해 수지가 안 맞는가 봅니다.

청아 2021-03-26 1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반에 써주신 내용에 공감되기도하고 딱 저렇진 않지만 찔리는 부분도 많네요.^^; 책을 읽어나가면서 내가 참 미숙한 인간이구나 여러번 느껴요. 저도 찜~♡

잠자냥 2021-03-26 16:13   좋아요 2 | URL
찔리긴요.ㅎㅎㅎㅎ 책 읽으며 함께 성장해 보아요. ㅎㅎㅎㅎ

Falstaff 2021-03-26 17: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흠. 별 다섯 개짜리 절판 책은 리뷰 쓰지 말기 할까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1-03-26 17:58   좋아요 3 | URL
아닙니다. 저는 이 책의 재출간을 바라는 마음으로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겁니다!!! ㅋㅋㅋㅋㅋㅋ
(이 작품 정말 문장이 아름답습니다. 서정성 철철, 번역가 역할도 한몫했겠지요.)

mini74 2021-03-26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읽어도 참 재미있을거 같아요. 좋은 성장소설을 읽으면, 예전의 그 나이때로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몸은 사그라들고 있지만 마음은 성장하는 느낌 ㅎㅎㅎㅎ 근데 왜!!! 절판인거죠 ㅠㅠ

잠자냥 2021-03-26 21:56   좋아요 2 | URL
네 작가가 이 작품을 스물아홉에 썼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빼어난 작품입니다. 이걸로 노벨문학상도 받았고요. 그런데 정말 절판이라니! 말이 안 됩니다!!
 
거짓의 날들
나딘 고디머 지음, 왕은철 옮김 / 책세상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우아한 문장으로 써 내려간 극도로 아름다운 성장 소설. 백인의 눈으로 바라본 차별받는 흑인의 삶도 진솔하게 그려진다. 한 인간이 헬렌처럼 성장한다면 이 세상에서 더 바랄 게 있을까. 헬렌은 나딘 고디머 그 자신으로 보여 그녀에게 더 존경스러운 마음이 든다. 이 좋은 책이 절판이라니!!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1-03-24 1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말고 지금 왕은철이 번역한 다른 흑인 여성 소설 읽고 있습니다. 아우, 왕은철이 거의 안 그랬던 거 같은데 지금 읽는 책 번역은... 암만해도 퇴고를 별로 안 한 거 같아요. 물론 전체는 아니고 부분 부분이 말입니다. 아, 점심 먹고 졸립긴 하지 거 참 힘드네요, 흑흑....

잠자냥 2021-03-24 14:23   좋아요 3 | URL
ㅎㅎ 베시 헤드 작품 읽으시나요? ㅎㅎ 이 책은 번역도 아주 깔끔합니다. 암튼 판권 다른 곳에서 사 가서 다시 나오면 좋을 것 같네요.

Falstaff 2021-03-24 14:26   좋아요 3 | URL
하여튼 귀신이셔~ ㅎㅎㅎ

FLAKSUIT 2021-11-0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은데 책이 없어요
 
글쓰기에 대하여 - 작가가 된다는 것에 관한 여섯 번의 강의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박설영 옮김 / 프시케의숲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쓰기 스킬을 가르쳐주리란 기대로 읽으면 실망할 듯. 작가란 어떤 사람이며 작가의 의무란 무엇인지가 더 주를 이룬다. 아울러 결국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애트우드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총 6개 강연 내용 중 인용되는 문학 작품수도 어마어마. 참 해박하다, 그러니 그런 글을 쓰는 것이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