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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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작가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다. 《경계선》을 쓴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인데, 저 먼 스웨덴의 백인 남자가 나는 왜 궁금해지는 걸까? 시작은 <렛 미 인>이다. 나는 아직 책은 읽지 못했다. 오리지널 영화를 보고 이 작품에 홀딱 반했다. 다락방 님처럼 뱀파이어물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나는 뱀파이어도, 호러/공포물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렛 미 인> 영화도 개봉 후 한참 지나서 봤다. 그런데 이 영화는 뱀파이어가 등장하지만 단순히 뱀파이어물로 정의 내리기엔 무리가 있다. 왕따 소년과 그에 못지않은 왕따(뱀파이어이기 때문에 인간 세계에 속할 수 없는) 소녀의 우정 또는 절절한 사랑이야기로 읽힌다. <렛 미 인>의 원작자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도 이 작품을 ‘자전적’이라고 말했다. 그 자신이 뱀파이어일 리는 없고(아닌가? 혹시 정말 그런가? 알라딘 작가 소개란에 있는 그의 얼굴 사진은 좀 그렇게도 보인다), ‘자전적’이라고 말한 까닭은 아마도 그 자신이 유년기에 왕따 소년 ‘오스카르’에 가까운 경험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무시무시하고 환상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십대 때부터 거리 마술쇼를 선보였고, 마술사로 활동하며 북유럽 카드 트릭 챔피언십에서  입상’하기도 했다는 그의 이력을 보면 평범하지는 않다. 조금 유별나고 독특해서 사람들에게 이상한 녀석이라고 손가락질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렛 미 인>도 처음에는 이야기가 너무 괴상하다고 출판사 여덟 곳에서 거절을 당했단다. 그러나 이 작품을 나처럼 영화로든 원작 소설로든 만나본 이들은 그 독특하고 매력적인 세계에 푹 빠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 작가는 틀림없이 소외가 무엇인지, 차별이 무엇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라고.

《경계선》에서도 작가의 독특한 세계관은 여전하다. 그중 표제작인 <경계선>은 정말 놀라운 작품이다. 이 작품도 2018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2019년엔 국내에서도 개봉해 화제가 되었던 듯하다. 작품은 ‘티나는 사내가 나타나자마자 뭔가 숨기고 있음을 알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티나는 스웨덴의 카펠셰르 항구 출입국 세관에서 일하고 있는데 밀수품을 귀신 같이 찾아내는 능력이 있다. 티나는 이 문제의 사내, 즉 ‘보레’가 나타나자마자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내는데, 아무리 그의 짐을 수색해도 밀수품은 찾아낼 수가 없다. 단 하나 기묘한 게 있다면 ‘벌레 부화기 상자’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 이상한 남자는 짐 수색을 마친 뒤 출입국을 떠나면서 티나에게 ‘또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그녀 뺨에 슬쩍 입맞춤을 하고는 유유히 떠난다. 티나는 무슨 짓이냐면서 화를 내지만 참 이상하다. 마음 한구석에 묘한 감정이 일렁인다.

티나는 그 뛰어난 능력으로 큰돈을 벌고 편하게 살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걸 마다하고 외딴 집에서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다. ‘롤랜드’라는 남자 친구도 있지만 이름만 남자 친구일 뿐 그는 티나에게 기생해서 사는 존재일 뿐이다. 그 둘은 섹스도 하지 않는데 언젠가 한 번 시도했다가 티나가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바람에 그 이후로는 성관계를 전혀 하지 않는 사이로 지내고 있으며, 티나는 롤랜드에게 다른 여자랑 하고 와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 이후로 롤랜드는 주기적으로 다른 여성과 섹스를 하고 오고, 티나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사실 티나는 지나치게 못생긴 외모 때문에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줄 정도로 못생긴 그녀는 학교 졸업파티에서 쿵짝이 잘 맞았던 남자애로부터 “너랑 다 똑같은데 얼굴만 다른 여자랑 사귀고 싶다.”는 엿같은 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고, 그 이후로 사람들과의 정상적 교류를 거의 포기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롤랜드가 나타났고, 티나는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삶이 그다지 행복하지도, 즐겁지도 않기에 거의 체념 상태로 그가 남자 친구라는 이름 아래 자기 집에 하숙하는 걸 내버려 두고 있다. 혐오스러운 외모로 사람들에게 외면 받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설상가상으로 티나의 직업은 마을 사람들의 미움을 더 부채질한다. 마을 주민이 은밀히 갖고 들어오는 밀수품을 족족 잡아내고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법대로 처벌하니, 티나는 그야말로 ‘세관에서 일하는 마녀’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보레’ 이 기묘한 남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을 맞추고는 ‘또 볼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그 이후로 티나는 이 남자를 문득문득 떠올린다. ‘틀림없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그 숨기는 게 뭘까? 라는 궁금증도 있지만 실은 그 남자에 대한 기묘한 끌림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그의 겉모습이 호감을 주는 것은 아니다. 호감은커녕 티나처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외모이다. 땅딸막한 근육질 몸, 넓적하고 험상궂은 얼굴에 수염과 짙은 눈썹 등 지나치게 남자다워 보이는 과장된 남성성이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한다. 그런데 티나는 그런 그에게 자기도 모르게 끌리면서, 묘하게 동질감까지 느낀다. 단순히 자기처럼 외모가 혐오스럽기 때문일까?

얼마 후 보레는 다시 항구에 나타나고, 이번에는 그의 비밀,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을 알아내겠다고 굳게 다짐한 티나는 그를 또 불러 세운다. 여전히 뭔가 수상쩍다. 아무리 짐을 샅샅이 뒤져도 지난번의 그 벌레 부화기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게 눈에 띄지 않자, 티나는 남자 동료에게 그의 몸을 수색하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잠시 후 티나 앞에 나타난 남자 동료는 난처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은 당신이 조사해야 할 거 같은데요.”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데 이윽고 그가 또 말한다. “저 사람은 여자에요. 가슴도 나왔고… 성기가…….” 무슨 수술을 받았는지 엉덩이 바로 위 꼬리뼈 부근에는 커다란 흉터도 있다고 그는 덧붙인다. 아니 그 못생긴 남자가 사실은 여자라니, 티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그렇게 남자다운 남자가 여자라고?! 몸수색을 마치고 어리둥절해하는 티나 앞에 선 보레는 조금 수줍게(?)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난다. 그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티나는 보레를 향한 기묘한 관심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

보레가 알고 보니 여자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나 또한 한방 먹은 듯 티나처럼 아니 뭐라고 띠용? 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 ‘띠용?’이 한 번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이후 계속 이어진다. ‘띠용?’ ‘띠용?’ ‘띠용?’ ‘띠용?’의 연속이다. 그러면서 내가 갖고 있던 편견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해준다. 남성다운 외모를 하고 있다는 묘사만 읽고 자연스레 보레를 ‘남자’라고 단정한 나의 이 몹쓸 편견이여! <경계선>은 이렇게 여러 번 젠더와 인종에 관한 사람들의 편견을 무너뜨린다. 나와 다른 이질적인 존재에 대해 견고하게 쌓아올린, 머릿속의 ‘경계선’을 여지없이 허물어버린다. 이 책에 실린 거의 모든 작품들이 그렇게 우리 머릿속의 경계선을 지우는 데 일조한다. 이 작품들을 읽다 보면 이 ‘다른’ 존재들, 다르기 때문에 비정상이라 정의내리고,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된 존재들보다, 그런 이들을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인간들의 머릿속 ‘경계선’이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 경계선이 곧 인간 개개인의 삶을 ‘감옥’으로 만들고 ‘벽이 어디 있는지, 자유의 한계’(18쪽)를 더 또렷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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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09-08 13: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렛미인! 자냥님 좋다시니 저도 영화 볼래요! 알고는 있었는데 선뜻 봐지지 않았던? 그리구 티나의 이야기 말이죠 ㅋㅋ 수상한 가방 ㅋㅋ 왜 뜬금없이 전 걔속 그 가방안에 마법으로 봉인된 신비한 동물들이 들어있을 것 같은지? ㅋㅋㅋ (영화 신비한 동물사전)ㅋㅋㅋ 그러면서 읽다가 예상치 못한 독후감 전개ㅋㅋ 머릿속이 산란한 좀 늦은 점심시간입니다! (두부제육볶음먹으면서 읽었어요!!) ㅋㅋㅋ

잠자냥 2021-09-08 14:27   좋아요 4 | URL
ㅋㅋ 신비한동물사전 ㅋㅋㅋㅋㅋㅋ 아 증말 그러면 갑자기 코미디 장르가 되고 ㅋㅋㅋㅋ
<렛미인>영화 정말 좋아요. 헐리우드 리메이크 버전 말고 오리지널(2008년 스웨덴 작품)로 보세요!!

공쟝쟝 2021-09-08 14:41   좋아요 3 | URL
스..스웨덴이요…? ㅋㅋㅋ 찾아보...볼께요…!! 그리고 제가 먹은 제육볶음은 재난지원금으로 사먹은 거예요!! (여기에다가 재난지원금을 자랑하고 싶었다…!!! 대체 왜? 🙄)

잠자냥 2021-09-08 16:08   좋아요 2 | URL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렛 미 인> 영화는 스웨덴 버전입니다!!!

독서괭 2021-09-08 13: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띠용?? 잠자냥님 글 읽다가 함께 띠용하는 바람에 <경계선>에 대한 흥미가 사라졌다.. 가 아니고 그 뒤에도 계속 띠용이 나온다니 더 궁금하네요 ㅎㅎ

잠자냥 2021-09-08 14:27   좋아요 3 | URL
그 띠용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띠용! ㅋㅋㅋㅋㅋ 단편이긴 한데, 100쪽 넘어가는 분량에 띠용이 여러 번~

새파랑 2021-09-08 14: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남성과 여성의 경계선 사이에 있어서 제목이 <경계선> 인가요? ㅎㅎ 저도 잠자냥님 글 보다가 띠용하게 되네요 😅

잠자냥 2021-09-08 16:08   좋아요 4 | URL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니랍니다~

다락방 2021-09-08 15: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 <렛미인> 오만년전에 봤는데요, (근데 헐리우드 리메이크 버전도 있어요?? 그건 몰랐네요 ㅎㅎ) 그 영화를 딱히 재미있게 보지 않았고 그래서 이 책에 대해서도 넘어가려고 했는데, 저 경계선... 내용도 내용이지만 띠용띠용띠용띠용 이라니.. 대체 왜... 그런가 싶어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읽으면서 몇 번 띠용하는지 체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띠용띠용~

잠자냥 2021-09-08 16:11   좋아요 3 | URL
스웨덴 버전이 좋아서 그런지 몇 년 뒤에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 했더라고요. 아니, 뱀파이어물 좋아하시는 분이 <렛 미 인>은 딱히 재미 없으셨군요! ㅎㅎ 일단 저보다 한 번은 덜 띠용하겠군요.

다락방 2021-09-08 16:29   좋아요 3 | URL
저는 성인 뱀파이어를 …. 🙄

레삭매냐 2021-09-08 17: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호라 이 냥반이 <렛미인>의
작가였군요. 영활 참 재밌게 봤었는데 -
북구 스탈의 뱀퐈야 영화...

<경계선>도 영화로 있다고요.
한 번 구해봐야겠습니다.

잠자냥 2021-09-08 18:10   좋아요 1 | URL
네 이 양반이 그 양반입니다. 경계선 영화는 저도 보려고요. ㅎ

Falstaff 2021-09-08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윽! 이거 뭔데 또 별이 다섯이야!
아이고, 오늘 성묘 미리 땡겨서 하고 왔더니 온몸이 작신작신 쑤시는데 별이 닷개라니 참 나....
추운 동네 사는 인간들은 긴 겨울 동안 할 일이 읎어서 만날 책 읽고 글만 쓰나봐요!!!! ㅋㅋㅋ

잠자냥 2021-09-08 22:05   좋아요 1 | URL
근데 이건 단편 모음입니다! 참고하세요~ (참 그리고 판타지이기도 하고요!)

캐모마일 2021-09-08 2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렛미인 영화 여러 번 보고 소설 원작도 책장에 꽂혀 있는데,(근데 안 읽고 있네요...) 덕분에 소설집 출간을 알고 가네요. 일단 렛미인 원작부터 읽고 경계선을 읽으면서 저도 인간들의 머릿속 경계선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봐야겠습니다.

잠자냥 2021-09-08 22:06   좋아요 2 | URL
네, <경계선>에는 <렛미인> 외전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