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는 회사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요즘 회사가 좀 뒤숭숭하다. 부당해고가 분명한데 결국 내가 존경하던 상무님이 오늘 해임되었다. 마지막으로 직원들 앞에서 인사를 하시는데, 그분 말씀을 듣다가 기어이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30년 가까이 몸담은 회사에서 쫓겨나듯이 짐을 싸는 그분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회사에 노조가 있기는커녕, 내가 속한 직업군은 노조 자체가 없다. 부당함과 속상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이렇게 눈물을 흘릴 뿐이지만 내일 당장 출근할 곳이 사라진 그분의 심정은 어떠할까. 젊은 시절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회사에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나가야만 하는 그분의 심정을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자기 회사처럼 일했어도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 대다수 노동자의 삶일 것이다. 나 또한 지금은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처지이지만 언제고 폐기처분되어 내 자신 때문에 눈물을 삼키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노동자란 어떤 존재인가, 노동자의 삶이란 무엇인가. 새삼 생각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입사해 이런저런 회사를 다니면서 경력을 쌓고 이 나이에 이르렀다. 몇 년씩 재충전을 핑계 삼아 백수로 지낸 나날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내내 일을 해왔다. 회사의 그분은 거의 쉼 없이 일하신 것 같다. 그런데도 회사 경영진의 눈 밖에 나면 부당하게 해고를 당해도 손쓸 방법도 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내쫓기게 된다. 어쩌면 나는 운이 좋은 편인지도 모른다. 몇 번 이직을 하는 내내 단 한 번도 정규직이 아니었던 적은 없다. 비정규직이거나 파견근무를 하거나 용역 업체의 소개를 받아 어딘가 내가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 곳에서 일하며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면서도 제대로 된 항변 한마디 못하다가 그것도 부족해 부당하게 폐기처분 당하는 일을 겪은 적은 없다. 그렇기에 오늘 아침 내가 흘린 노동자로서의 눈물은 계약직과 파견, 용역근무가 횡행하는 오늘날 이 땅에서 어쩌면 정말 사치스러운 눈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노동자로서 참 고단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읽노라니 지금의 내 처지에 나도 모르게 안도하게 된다. 그만큼 이 책에 그려진 346만 명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삶은 퍽퍽하기 그지없다. 퍽퍽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당신의 월급이 400만 원이라고 가정하자,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절반에 해당하는 거의 200만 원 가까이를 누군가가 중간에 가져가고 자신의 월급 통장에는 다달이 200여 만 원의 급여만 들어온다면, 이런 시스템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노동자가 얼마나 될까?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은 지금 대한민국 노동 시장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법적으로 제재할 아무런 근거가 없어서 중간착취를 일삼는 용역/파견 업체는 나날이 호황을 이룬다. 대기업 임원을 하다가 은퇴한 은퇴자들에게 가장 좋은 일거리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재벌 친인척들이 용역업체를 만들고 직접 운영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원청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있는 이들이 하청을 만들고 노동자를 착취하면서 자유롭게 배를 불리고 있는 것이다.
간접고용 노동자란 나처럼 사용자(회사)와 1대 1로 직접 계약서를 작성하고 일하는 노동자가 아닌, 용역/파견 업체를 통해 소개 받아 어떤 기업으로 파견 근무를 나가는 이들을 말한다. 이때 파견 근무자는 자신이 일하게 되는 회사(원청)와 직접 계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용역(하청) 업체와 계약을 맺는다. 원청은 노동자가 아닌 하청과 계약을 하는 것이므로 노동자에 대한 모든 법적 책임에서 자유롭다. 원청은 노동자의 통장에 직접 월급을 꽂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청을 통해 임금을 지불하므로 하청은 온갖 명목으로 노동자의 월급에서 중간착취가 가능하다. 은행경비원, 파견직 사무보조원, 청소 노동자, 박물관 주차관리원, 콜센터 상담사, IT 개발자, 건설 노동자 등등 직종도 다양하다. 건설 노동자의 경우 일을 나눠주는 ‘팀장’이 월급이 들어오는 날 은행 앞에서 돈을 갈취하다시피 한다는 이야기(이른바 ‘똥떼기’)는 충격에 가까웠다. 그 금액도 상당하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이렇게 떼이면서도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마저 빼앗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부당함을 참으면서, 자신의 직무와 상관없는 가욋일까지 하게 된다. 회사의 그분처럼 정규직으로 30년 가까이 일했어도 부당해고 앞에서는 한없이 약자일 수밖에 없는데, 364만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삶은 더 말해 무엇 하랴. 게다가 착취는 더 약한 자들을 향해 흐르기에 이주민 노동자는 더 악랄하게 착취당한다. 그중에서도 아프리카 대륙 출신 노동자들은 더 많이 돈을 떼인다. 이것이 과연 인간의 얼굴을 한 노동 시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거대한 부조리, 피해자는 선명한데, 가해자는 가물거리는 풍경, 억울한 사람은 있는데 다들 내 책임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지옥’(17쪽)이 지금 이 땅의 노동 풍경이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에는 용역/파견업체에 분노했다. 정녕, 진심으로 이들의 폭주를 막을 법이 없는 것인가 의아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니, 노동자를 대체용품보다 못하게 사용하면서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원청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 원청들이 이토록 편리하게(유연하다는 말로 포장한) 노동자를 사용하고 해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이 나라 법 제도가 정말 잘못된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물론 이런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최저임금이 유례없이 인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은 허점투성이라 악용되기 일쑤이고, 최저임금이 아무리 상승했다 하더라도 용역업체에서는 식대나 마땅히 지급해야 할 보호 장비처럼 다른 비용에서 착취함으로써 월급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맴돈다. 그리고 입법가들은 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들을 보호할 법안 만들기에 관심이 없다. 간접고용 노동자를 보호할 법안은 발의-방치-폐기 순을 밟으며 줄곧 제자리걸음 중이다. 이 책을 쓴 한국일보 기자들이 직접 국회의원들을 만나 이 법안을 발의하고자 애쓰지만, 극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 귀하신 분들을 만나기조차 어렵다. 정부도 원론적인 답변만을 할뿐이다. 대체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편은 어디 있는 것일까. 과연 있기는 있을까.
제도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아무리 제도를 잘 만들어놓아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중간착취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137쪽)이라는 말이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다. 제도와 법이 만들어져도 그 빈틈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착취의 지옥도는 사라지지 않을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과연 이렇게 사용자(원청) 중심이고 법도 제도도 정재계, 권력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에서 약자 중의 약자인 364만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회의적인 생각과 함께 체념부터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만난 100여 명의 노동자 중에는 지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기사들이 계속 반복된다면 언젠가는 국회의원 귀에 대통령 귀에 들어가겠지요? 그럼 좀 변하려나요?”(242쪽) 묻는 그들의 가족도 있다. 한국일보 기자들의 이 취재 덕분에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척, 움직이는 척이라도 하는 국회의원들도 있다. 그리고 나처럼 소시민이면서도 이제껏 몰랐던 이 지옥도를 접하고 364만 간접고용 노동자의 삶을 전과 달리 관심 있게 살펴볼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연대의 마음이 싹트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영원히 달라지지 않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티끌만큼이라도 이 책에,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잘못된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 조금은 빨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