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잉크>에서 토니 모리슨은 ‘여성의 관계를 남성과의 관계에 종속시키지 말자’고 했으며 ‘여성 친구와 보내는 시간은 노는 시간이 아니라 제대로 보내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여성의 중요한 우정’을 <술라>에서 다룬다. <술라>는 분명, ‘술라’와 ‘넬’ 두 여성의 기나긴 우정의 기록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만 설명하기에 이 작품은 그 두 여성 말고도 에바, 해나, 섀드랙 등 아주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작품에서 큰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두 여성의 우정 이야기라고만 소개하기엔 이 작품의 진가를 다 설명하지 못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야기는 한 편의 신화처럼 시작한다. 오하이오주 메달리언이라는 지역의 ‘보텀(Bottom)’ 마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부터 알려준다. 언덕배기 땅에 위치한 이 마을은 태생 자체부터가 백인들의 기만에서 비롯된다. 흑인이 노예로 살던 시절, 그들의 주인인 백인들은 어려운 일이 끝나면 그들에게 자유와 함께 저지대bottom 땅 한 뙈기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막상 땅을 주기가 아까웠던 백인들은 교묘한 술수를 부려서 언덕 위 땅을 주겠다고 한다. 놀란 노예들은 골짜기가 저지대 아니었느냐고 묻는다. 백인들은 “아이고, 아니야! 저 언덕 보이지? 저기가 저지대야. 비옥하고 기름진 땅이지. 하느님이 내려다보실 때는 저기가 바닥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보텀이라고 부르는 거야. 천국의 바닥이란 뜻이지. 그러니까 최고 좋은 땅이다 이 말이야.”(16쪽) 이렇게 교묘하게 노예들을 속여 그들에게 언덕 위에 있는 보텀 땅을 주고 아래쪽의 비옥한 골짜기 땅은 자신들이 갖는다. 자유민이 된 흑인들은 천국의 바닥, 보텀에서 백인들을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살아간다.
이런 배경을 가진 보텀 땅에서 태어난 술라와 넬이 이제 등장하는가 싶은데, 느닷없이 1차 세계대전, 전쟁터로 떠나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섀드랙’. 그런데 그는 전쟁터에서 커다란 트라우마를 얻고 돌아와 이 보텀에 정착해서는 ‘전국 자살일’을 만들고 해마다 1월 셋째 날이면 동네방네 종을 울리며 다닌다. 미치광이 같은 그의 존재는 보텀 주민들에게는 끔찍하고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이 보텀에서 은둔하며 지낼 뿐, 누군가에게 크게 해가 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이 보텀 땅과 섀드랙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조금 의아해지기도 한다. 술라와 넬과는 어떤 관련이 있기에 작가는 거의 상관없어 보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작품을 시작하는 것일까? 그 후로도 이 작품의 주인공 술라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어린 넬과 넬의 어머니, 에바, 에바의 딸 해나 등이 등장하고 나서야 ‘술라’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독자는 술라의 그 당찬, 아니 당차다는 말로만은 부족한 독특한 개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간의 모든 배경 설명과 여러 인물들이 먼저 소개되었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백인들의 술수로 척박하고 쓸모없는 언덕 위에 세워진, 보텀이라는 이름의 흑인들 마을도, 전쟁으로 인해 망가진 정신을 이끌고 이 마을에 은둔한 섀드랙이라는 인물도, 흑인이면서도 자신은 다른 흑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하게 통제된 훈육을 받고 자란 넬도, 남편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자기 몸을 희생해서(말 그대로 육체를 절단한다), 아이 셋을 키운 술라의 할머니 에바도, 엄마인 에바와 딸 술라 앞에서도 자기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자유로이 살아간 해나의 생의 궤적도 사실은 술라라는 인물의 특성과 개성을 살리기 위함이었음을, 그 존재의 특별함을 설명하기 위한 밑거름이었음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에바의 아들이자, 술라에게는 외삼촌인 플럼을 제외하고는 남성은 없다시피 한,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술라의 가족은 술라의 독립성과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술라의 할머니 에바는 술라처럼 강한 인물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술라와 대척점에 서기도 한다. 에바는 남편이 떠난 뒤로 아이 셋을 키우려고 자기 몸을 희생한다. 자신의 다리를 기차에 밀어 넣어 절단함으로써 보험금을 받아 아이 셋을 어렵지 않게 키운 것이다. 에바의 강인함은 이 작품 여러 부분에서 볼 수 있는데, 약물 중독자가 되어버린 아들 플럼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나 딸 해나가 위험에 처한 순간에도 그저 모성이라는 부드러운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인한 방식으로, 자기 일족을 그만의 방식으로 지켜나간다. 반면 해나는 이런 에바의 희생을 어느 정도는 누리고 살아가는 인물로, 자신의 쾌락과 욕망을 위해서 거리낌 없이 자유로운 성생활을 해나간다. 에바의 이런 강인함과 해나의 자유로움은 술라가 일찌감치 남자 없는 삶, 남자에 기대지 않는 삶,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삶을 가능하도록 결정짓는다.
“흠, 참을 수 없다느니 그딴 소리나 나불댈 생각은 마라. 결혼은 언제 할 셈이냐? 아기도 낳아야 할 테고. 정착을 해야지.”
“전 다른 누구도 만들고 싶지 않아요. 제 자신을 만들고 싶어요.”
“이기적이구나. 어떤 여자도 남자 없이 떠돌며 살 수는 없어.”
“할머니는 그러셨잖아요.”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
“엄마도 그랬고요.”
“원해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니까. 혼자 외따로 살고 싶어 하는 건 옳지 않아. 네게 필요한 건…… 너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말해주마.”
술라가 일어나 앉았다. “저에게 필요한 건 할머니가 입 다무시는 거예요.”
(……)
“지옥불도 필요 없겠구나. 이미 네 안에서 불타고 있으니……”
“제 안에서 뭐가 타오르건 그건 제 거예요!”
“그리고 할머니가 불을 끄게 놔두기 전에 이 타운을 전부 다 동강내버릴 거예요!” (133~135쪽)
이런 술라와 어릴 때부터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되는 넬은, 술라의 집안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서 성장한다. 일찌감치 결혼에 안주한 넬의 어머니는 자신들보다 얼굴이 까만 흑인은 내심 경멸하며, 술라 일가처럼 자유분방한 흑인들과는 넬이 가까이 지내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흑인이면서도 흑인의 삶을 벗어나 저기 어딘가 백인처럼 살아가기를 바라는 넬이 어머니,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배우고, 보고 자란 넬은 어머니와 거의 같은 길을 걷는다.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돌보며 모범적으로 사는 어머니로서의 삶. ‘백인도 아니고 남성도 아니어서 그 어떤 자유와 승리도 그들 몫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알았기 때문에’ 서로 함께 ‘뭔가 다른 것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던’ 이 두 소녀, 술라와 넬은 이렇게 결혼이라는 한 과정을 통해 서로 조금씩 삶의 궤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술라가 도시로 떠나면서부터는 더더욱 그 간극이 커져간다. 마을을 떠났다가 10년 만에 돌아온 술라와 넬은 더는 서로 교감할 부분이 많지 않아 보인다. 술라는 제 엄마 해나가 그랬듯이 마을 남자 중 마음에 드는 이가 있다면 자유로이 그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고 이런 술라를 마을 사람들은 해나와 다를 바 없다며 손가락질 한다. 술라는 어느새 마을에서 마녀와도 같은 존재가 된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아는 건 아니야. 단지 모든 것을 다 할 뿐이지.”
“흠, 내가 하는 대로 하지는 않잖아.”
“내가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해서 네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줄 아니? 이 나라 흑인 여자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나도 알아.”
“어떻게 사는데?”
“죽어가고 있지. 바로 나처럼 말이야.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그 여자들은 그루터기처럼 죽어간다는 거야. 나, 나는 저 미국삼나무 중 하나처럼 쓰러지고 있고. 나는 정말로 이 세상에서 살아봤어.”
“정말? 그 증거로 보여줄 수 있는 게 뭔데?”
“보여줘? 누구한테? 얘, 내 마음은 내가 갖고 있어.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것도. 무슨 말이냐면, 나는 내 거야.”
“외롭잖아, 그렇지 않니?”
“그렇지. 하지만 내 외로움도 내 것이야. 지금 네 외로움은 누군가 딴사람 거고. 딴사람이 만들어서 너에게 건네준 거지. 그게 뭐 대단하니? 중고 외로움이지.” (205쪽)
서로가 함께여서 행복했던 어릴 적의 그 두 소녀는 어디로 갔을까.술라와 넬은 어느 순간 서로 전혀 다른 인생의 길을 걷고 있다. 넬이 보기에 술라에겐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넬에게는 남편도, 아이도, 가족도, 특정한 연인도 없는 술라의 삶이 처연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술라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하고야 만다. 그리고 대다수 흑인 여자들이 그루터기처럼 죽어갈 때 술라 그 자신은 삼나무처럼 쓰러져 가며, ‘이 세상을 살아봤다’고 의연하게 말한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외로움이 아닌, 오롯이 외로움조차 자기 것이라고, 나는 내 것이라고 말하는 술라. 그 어떤 희생도 순응도 거부한 술라의 삶은 천국 아래 땅이라는 보텀 마을 여느 흑인들의 삶과는 완전히 다르다. 자식을 위해 다리를 자르지도 않았으며, 더 이상 노예가 아닌데도 백인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구차한 미소를 짓지도 않고, 누군가의 몸에 불을 붙이느니 그 불을 지켜보며 자기 스스로 불꽃이 되기를, 아니 자기 안에서 타오르는 건 그 무엇이나 다 자기 것이라고 강렬하게 외치며 살아간다. 술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던 넬이지만, 마침내는 술라를 지켜보며 어린 시절의 자기를 떠올린다. 생애 처음으로 떠난 어머니와의 여행에서 근사해지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던 넬, 언젠가는 메달리언을 떠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넬, 앞으로 혼자서 떠날 머나먼 여행을 꿈꾸던 넬, ‘나다움’을 처음으로 자각했던 넬…… 그 시절의 자신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자기 자신으로 오롯이 살았던 불꽃같은 술라의 삶을 지켜보노라면 누구라도 넬처럼 잊었던 자기 자신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