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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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우리가 쓴 것》 읽기를 마치고 다른 이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서 100자평을 훑어보러 알라딘에 접속했다. 과연 이 책을 읽었을까 싶은 이들의 원색적인 비난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런 거구나…. 문득 이 책에 실린 <오기>의 소설가 느꼈을 법한 심정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오기>는 명백히 조남주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읽힌다. 이 작품에서는 문제의 ‘그 작품’이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독자는 그 작품이 《82년생 김지영》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작가는 그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와 함께 숱한 비난에도 시달려야 했다. 그 책이 여성의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면, 여성주의 관점으로 쓰인 작품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근거 없는 비난에 시달렸을까? 그런데 그 작품의 작가는 그 이후 다른 작품집을 내고도 또 다시 비슷한 비난을 받고 있다.

문득 얼마 전 읽은 조애나 러스의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이 떠오른다. 조애나 러스는 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 숱하게 여성 작가들의 글을 폄하하며 그들이 글을 써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지우려고 해왔던 온갖 억압의 역사를 통쾌하게 반박한다. 그 책에 따르면 페미니스트 작가들을 향해서 흔히 쏟아지는 비난으로 ‘어휘가 기교적이지 않다’, ‘문체가 부적절하다’,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 또는 ‘신념을 담기에는 어조가 너무 사적’이며 ‘거리 유지가 안 되어 있다’(조애나 러스,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 204쪽) 등이 있다. 이는 조남주의 작품, 아니 조남주 작가에게 가해지는 대부분의 비난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가 만일 여성 작가가 아니었다면, 여성주의 관점의 작품을 쓰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비난에 시달렸을까? 작가와 그의 작품을 비난하는 이들은 그런 행위를 통해 작가에게 글 쓸 자유와 권리, 그리고 작품을 통해서 억압 받은 여성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목소리 내는 것을 짓밟고 싶은 것이리라.

여성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려는 이런 시도는 《우리가 쓴 것》의 여러 단편에서도 볼 수 있다. 자신보다 고작 몇 살 위인 남자 친구에게 완벽하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젊은 여성(<현남 오빠에게>)이 있으며, 이름도 없이 그저 ‘미스 김’으로 불리며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폐기물처럼 버려지는 젊은 여성 노동자가 있고(<미스 김은 알고 있다>), 여성주의 관점의 소설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비난과 악플에 시달리는 소설가가 있다(<오기>). 날마다 학교에서 불법촬영물 공포에 시달리지만 그 소녀들의 진실은 엄마에게조차 의심받는다(<여자아이는 자라서>). 한편으로는 억압적인 아버지가 사라짐으로써 가족들이 제 목소리를 찾고 화기애애해지는 삶을 다룬 작품(<가출>)도 있다. 이 작품에서 인상 깊은 장면은 어머니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딸이 비로소 인식하는 부분이다. 이사, 자식의 진학, 취업 같은 중요한 결정부터 여행지, 외식 메뉴, 텔레비전 채널 같은 사소한 결정도 모두 아버지의 뜻대로 하던 집안에서 엄마는 늘 중얼거리기만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라지자 엄마는 ‘간결한 문장과 정확한 발음으로 의견을 말’(96쪽)한다.

노년의 여성의 삶을 그린 두 작품도 인상 깊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부모의 바람 때문에 ‘말녀’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살며 자기 존재를 부정당해야 했던 여성과(<매화나무 아래>), 시어머니에서 어머니 그리고 딸로 이어지는 돌봄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노년의 여성(<오로라의 밤>)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두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작게나마 이룬다. 한 여성은 개명을 함으로써, 또 한 여성은 평생 꿈꾸던 오로라를 보러 가서 마음속에 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던 ‘그 소원’을 크게 외친다. 조금 결이 다른 작품이긴 하지만 코로나가 불러 온 계급 차이로 말미암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서로 말을 나눌 기회가 아예 막혀버린 가여운 아이들(<첫사랑 2020>)이 등장하기도 한다. 아이들, 그러니까 가장 약한 존재의 목소리가 차단당한다는 면에서는 이 작품도 앞선 작품들과 비슷하다.

소녀부터 젊은 여성, 그리고 노년의 여성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다양한 목소리, 파묻히거나 지워졌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파노라마처럼 나와 내 주변 여성들의 삶이 겹쳐지며 떠오른다. 보편적이지 않다는 비난, 지나치게 사적이라는 비난, 세계관이 좁다는 비난…. 그런 칼날의 말들이 과연 온당한가. 이 책 속 이야기들은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고, 겪을 법한 일들이다. 그렇기에 한 여성은 소설가인 다른 여성에게 내 이야기를 훔쳐서 쓴 게 아니냐고 되묻지 않는가(<오기>). 다행스럽게도 이 작품 속 여성들은 입 다물고 조용히 살지 않는다. 자기 이름을 찾고(<매화나무 아래>), 자기 목소리를 찾으며(<현남 오빠에게>), 소심하지만 은밀한 복수를 한다(<미스 김은 알고 있다>). 딸도 엄마도 소원을 이루고(<오로라의 밤>), 소녀들은 연대를 통해 자기를 보호하는 방법을 배운다(<여자아이는 자라서>).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맞서 꿋꿋이 목소리를 내, 항변의 글을 남긴 소설가(<오기>)처럼 조남주 작가도 계속 목소리 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첫사랑 2020>의 어린 약자들이 살아갈 세상은 조금 나아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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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8-12 11:3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이책 리뷰대회가 있길래 사서 다 읽었는데, 마감이 곧인데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전 <82년생 김지영>을 읽지 못했는데 때를 놓치고 나니 그동안 여러 매체에서 다루었기에 내용은 대충 알아서 손이 안 가더라구요. 그때문에 이 작가님께 왠지 모를 부채감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음으로써 약간 해소됐어요 ㅋ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최근 ‘페미검증‘등의 사태를 보면서 ‘입을 닫게 하는‘ 압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 반가운 글이네요.

잠자냥 2021-08-12 11:42   좋아요 7 | URL
쓰세요~ 쓰세요~ 괭 님은 쓸 수 있습니다! ㅎㅎ
부채감을 느끼셨다는 말 뭔가 와닿네요. <82년생 김지영>과 <우리가 쓴 것> 두 권을 읽으니 작가의 글쓰기 특성이 조금 감이 잡히는 느낌도 들었어요. 작가가 사회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건조하게 사실처럼 전달하려고 애쓰는 느낌도 들고요. 암튼 조남주 작가의 작품들은 완벽하게 제가 좋아하는 문학은 아니지만 이런 목소리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문학이 해야 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고요.....
요즘 백래시가 심하죠. 그만큼 여성들이 목소리 내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서괭 2021-08-13 12:24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의 응원에 힘입어 저도 리뷰를 올렸습니다^^

다락방 2021-08-12 11:33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항변의 글을 썼다는게 인상깊네요. 그리고 마땅히 그리해야 할 것 같고요. 옆에서 보는 사람들도 스트레스인데 작가 자신은 오죽했을까요. 저는 악플이나 저격글만 봐도 스트레스 폭발하는데요.. 뭐 이제는 좀 무뎌지긴 했지만.. 아니 글쎄 82년생 김지영의 작가가 김지영인 줄 아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책은 안읽어보고 김지영 그거 페미잖아, 라고... 하아- 갈 길 왜이렇게 멀어요..
잠자냥 님 리뷰는 제가 쓸 수 없는 리뷰라 언제나 감탄하며 읽곤 하지만 이번 리뷰는 특히 더 좋아요. 한국 작품을 읽고 쓴 리뷰는 더 잘 읽히는가.. 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봅니다.

잠자냥 2021-08-12 11:45   좋아요 5 | URL
네, <오기>라는 작품을 읽다 보니 작가가 참 힘들었겠구나, 대체 어떻게 버텼을까 싶어지더라고요. 그런데 이 작품 100자평에도 심한 평들이 좀 있어서.... 에휴 ㅠㅠ
이번 리뷰는 작가에게 애잔한 마음이 들어서 더 그냥 술술 써진 것 같기도 합니다....

얄라알라 2021-08-12 15:22   좋아요 3 | URL
다락방님! 저도 잠자냥님의 글에 홀려서 국수 쭉 흡입하듯 쭈욱 읽었어요. 와우!
저도 다락방님의 ‘엉뚱한(?) 생각‘하심에 손 같이들어봅니다.

그나저나 작가 이름이 김지영이라 착각하고 저격하는 분들은....읽지도 않고 작품을 비난하시는 이들은, 어쩐대요.

잠자냥 2021-08-12 15:26   좋아요 3 | URL
북사랑 님 / 국수 쭉 흡입하듯이라는 표현이 눈에 쏙 들어옵니다. ㅎㅎ
유령 작가 김지영 ㅋㅋㅋ 세계 초 베스트셀러 작가 김지영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8-12 13:3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글보고 100자평 구경하고 왔어요 ㅎㅎ 일부 이상한 평점이 있어도 평점이 엄청 높더라는~!! 저도 82년생 김지영만 읽어 봤는데 이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

잠자냥 2021-08-12 14:37   좋아요 5 | URL
네, 일부 이상한 평이 있지요? 책 읽고 나서 하는 온당한 비판이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닌 거 같아서 좀 눈살이 찌푸려지더라고요.

hellas 2021-08-12 14:38   좋아요 6 | URL
저도 이 책 사놨는데... 지금 읽는 책 얼른 다 읽고 바로 읽어봐야겠네요.

공쟝쟝 2021-08-20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단편집이로군요, 자냥님 평을 보니 잡지나 엔솔로지로 만난 소설들이 보여서 읽을까 말까 싶다가 <오기>가 읽어보고 싶어지고 정화 평(!)도 써야겠다 싶어집니다! 불끈 💃🏻💃🏻

잠자냥 2021-08-20 16:20   좋아요 1 | URL
단편집이고 금방 읽을 수 있어요!
 
비밀요원 대산세계문학총서 53
조셉 콘라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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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콘래드의 작품은 처음 읽는다.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는 작가 중 하나였다. 그래도 언젠가는 읽어야 할 작가로 마음에 새겨두기는 했었고, 드디어 그의 작품 중 재미있을 것 같은 <비밀요원>을 읽었다. 스파이가 주인공이라니, 흥미진진할 것 같지 않은가. 실제로 이 작품은 재미있다. 단, 자극적이면서 이야기가 긴박하게 흘러가고 숨막힐 듯한,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를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이 작품이 그다지 재미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존 르 카레의 작품처럼 스토리가 천천히 진행하면서 이런저런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고급스러운 스릴러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도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다.

작품은 “벌록 씨는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명목상으로 가게를 처남에게 맡겼다. 그것은 손님과 거래를 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라는 뜻밖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작품이 스릴러라는 사실을 모르고 읽는다면 런던을 배경으로 한 여느 문학 작품과 별반 다르지 않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윽고 이어지는 “벌록 씨는 외형적으로 벌여놓은 장사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부인이 처남을 돌보고 있었다. 문은 낮에는 닫혀 있었고, 밤에는 조심스럽고 수상쩍게 약간만 열려 있다.” 이 문장으로 몇 가지 암시를 얻는다. 낮에는 닫혀 있고 밤에만 수상쩍게 열리는 가게, 이런 가게를 외형적으로만 유지할 뿐, 장사에 통 관심 없는 벌록이라는 인물. 촉이 좋은 독자라면 이 벌록이 문제의 ‘비밀요원’이겠구나 감을 잡게 된다. 그런데 벌록을 제외하고 이 가게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인물들, 그러니까 그의 아내와 장모, 처남 등은 조금 의아하다. 이 조그만 가게를 배경으로 범죄가 일어나는 것일까? 벌록이 신분을 위장하려고 결혼한 것일까? 아니면 모두가 평범한 가족으로 위장한 범죄조직인가 등등 온갖  생각을 하게 된다.

조금 더 읽다 보면 아리송해진다. 이 벌록이란 인물은 도무지 스파이 같지 않다. ‘살찐 돼지처럼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몸집이 큰 벌록 씨’라니, 아무리 위장이라고 해도 지나치다. 뚱뚱한 그의 몸에서는 게으름이 뚝뚝 떨어진다. 스파이 같은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기엔 그 비대한 몸이 크게 방해될 것 같다. 그는 어찌나 게으른지 ‘단순한 선동가나 노동 연설가, 혹은 노조 지도자초차 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 것들은 그에겐 너무나 귀찮기만 하다. 그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형태의 편안함’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의 인상이 썩 좋은 것도 아니다. 그는 ‘소규모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고용주와 비슷한’ 외모를 갖고 있는데, 그런 그에게는 ‘기술자가 아무리 부정직한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습득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가 있다. ‘악과 어리석음, 인간의 저질적인 공포를 이용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분위기’로 ‘도박장이나 매음굴 업주들, 사설탐정과 흥신소 직원들, 사이비 특허 약품 발명가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도덕적 허무주의의 분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주인공에게서 어디 한 부분 매력을 느낄 만한 요소가 없다. 책을 조금 더 읽어 나가면 실제로 벌록은 런던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대사관의 비밀요원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가 운영하는 가게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 대신 그곳에서 은밀하게 무정부주의자들의 모임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가관인 것은 그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 혁명을 일으키고자 만나는 또 다른 스파이들, 그러니까 런던에서 활동하는 혁명주의자들 모두가 하나같이 이 모양 이 꼴이라는 것이다. 벌록에게 명령을 내리는 러시아 대사관의 블라디미르는 살찌고 게으른 그를 질타하지만 그 자신도 입만 살아서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리는 인물이며, 게으르기 짝이 없는 데다가 여자 따라다니는 일에만 몰두하는 오시폰, 잔인한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테러리스트이지만 실제로 테러리즘을 실행해 본 적은 없는 윤트, 폭탄을 옷 속에 넣고 다니는 열등감 덩어리 폭탄 제조업자 교수 등 하나같이 그 ‘위대한’ 대의명분을 수행하기엔 부족하기 짝이 없고 뒤틀린 인간들일 뿐이다.

이들의 뒤를 쫓는 경찰은 어떠할까? 경찰 부국장은 특정 혁명주의자와 친분이 있는 귀부인의 눈치를 보아, 그가 범죄에 연루되어 있음이 틀림없는데도 그를 비호하기에 바쁘다. 그렇다고 이런 부국장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사건을 캐내려는 히트 반장은 정의로운가?  물론 그는 자기 일에 부국장보다는 충실하다. 그러나 그 또한 이중 스파이를 포섭해 그로부터 정보를 캐내 자신이 출세하는 것에 가장 혈안이 되어 있다. 이 두 사람 모두 무정부주의자들이 혁명으로부터 시민과 사회의 안전을 지키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출세와 권력을 좇는 일에만 눈이 멀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벌록의 가족은 어떠한가. 책을 읽는 이들은 누구나 벌록이 신분을 위장하려고 아내 ‘위니’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위니라는 여성은 어떨까? 그녀에게도 벌록 씨가 상상하지 못한(게으르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기에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과거가 있다. 위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편안한 삶을 살고자 아무런 애정도 없는 벌록을 선택한다. 물론 위니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몸이 불편한 어머니와 지능이 모자란 동생 스티비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두 사람을 부양하려고 위니는 도무지 실체를 알 수 없지만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어 보이는 벌록을 선택한 것이다. 위니, 위니의 어머니, 그리고 스티비 이 세 사람은 벌록의 실체는 알지 못한 채 그의 겉모습만 보고 저마다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믿는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 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살아간다. 그러나 이 완벽하게 소통이 막힌 가족에게는 엄청난 비극이 닥친다.    
 
<비밀요원>의 스파이 벌록은 블라디미르로부터 도시를 혼란에 빠뜨릴 엄청난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리니치 천문대를 폭파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실제로 천문대에서 폭파 사건이 일어난다. 이 작품에는 비참한 죽음도 있고 끔찍한 살인도 일어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런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는 스파이들의 숨 막히는 첩보전을 다루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허영과 위선에 찬, 게으르기 짝이 없는 무정부주의자, 혁명주의자들의 뒤틀린 생활과 삶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대의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그리고 그런 이들로부터 이 세계를 지키겠다며 정의를 운운하는 경찰 조직도 그들과 얼마나 다를 바가 없는지 보여주며, 이기적인 욕망으로 뒤틀린 인간들이 부르짖는 혁명이란 얼마나 비루하기 짝이 없는지를 쓰디쓰게 조소한다. 게다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지붕 아래 살아가지만 서로 진정한 교감이나 소통 없이 이루어진 관계가 얼마나 큰 비극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이 작품은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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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8-09 13: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풍자적인 작품인 것 같네요~ 잠자냥님의 별다섯이니 일단 담아두고 봅니다. 읽을 날이 오겠지요.

잠자냥 2021-08-09 14:17   좋아요 4 | URL
네, 근데 그 풍자가 과하지 않아서 더 품격 있었습니다.
아니, 근데 제 별 다섯을 그렇게 믿으십니까? 괭님 이러다 제가 똥을 된장이라고 해도.... 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08-09 14:15   좋아요 5 | URL
저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닙니다? 물론 잠자냥님이 똥을 된장이라고 하시면 똥냄새나는 된장이 나왔나부다 할 것 같긴 하지만…ㅋㅋㅋㅋ 책 한정입니다.😜

미미 2021-08-09 13: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헉 조셉 콘래드의 스릴러라니 바로 담습니다!😆

잠자냥 2021-08-09 14:09   좋아요 5 | URL
네, 전 이 작품부터 시작하는 바람에 콘래드 진입 장벽이 조금 더 쉬워진 느낌입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1-08-09 13: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암흑의 핵심>을 읽고서...
좌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다음에 6년 전에 이 책을 읽어야지
하고선 사두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
는 지도 모르겠네요. 만날 하는 타령 -
어디에 있는지 모린다.

잠자냥 2021-08-09 14:10   좋아요 4 | URL
<암흑의 핵심> 난해하다는 소릴 많이 들어서 그간 손이 안 갔는데요, 이 작품부터 읽으니까 다음 작품 읽을 계획이 저절로 세워지더라고요. 매냐 님도 이 책 찾아서 읽어보세요. 콘래드 전작 읽기에 도전하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Falstaff 2021-08-09 14:0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전 콘라드와 이 작품을 다룬 논문을 먼저 읽었다가,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논문을 읽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서, 찾아 읽고 논문도 다시 읽어본 책입니다. 그랬더니 눈이 밝아지더라고요.
얘기하신대로 리뷰 읽는 분들이 다른 쫄깃쫄깃한 스파이 소설 같은 것을 기대하셨다가는 낭패를 볼 게 거의 틀림이 없어서 ㅎㅎㅎ
그건 그렇고 정말, 리뷰는 이렇게 써야 하는데 말입니다. 햐.... 명문 아닙니까, 여러부우우우운?

잠자냥 2021-08-09 14:16   좋아요 7 | URL
오, 논문을 읽으셨군요. 이 작품 다 읽고 말씀하신 논문 읽어도 굉장히 좋을 것 같습니다.
스릴러라는 말만 듣고 사 읽는 분에게는 좀 뜨악할 작품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전통적인 스릴러 형식에서 벗어난 작품이라 더 좋았어요. ㅎㅎ

아이고 명문이라니요, 이렇게 띄워 주시니, 선물로 따귀 한 대 방지권 드리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1-08-09 15: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암흑의 핵심>에 빠져 고통받던 게 저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시원한 기쁨을 주는군요.
잠자냥님께 별 다섯을 받았단 말이지요. 흠흠. 그렇다면, 흠흠.

잠자냥 2021-08-09 15:41   좋아요 3 | URL
얼마나 고통스러운 작품인지 곧 읽어봐야겠습니다! ㅎ
이 작품은 신간도 아니고 출간된 지 꽤 지난 작품이니 천천히 나중에 한번 읽어보세요~

새파랑 2021-08-09 15: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별 다섯은 그냥 읽어야 하는 책이 맞는거 같아요 ^^ 게다가 대산문학총서라니~!!

잠자냥 2021-08-09 16:06   좋아요 4 | URL
대산문학총서는 믿고 읽으셔도 되고요, 제 별 다섯은... 음 가끔 취향 탈 수 있습니다. ㅎㅎㅎ

유부만두 2021-08-09 21: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는 저도 막 우아해졌습니다?!!!

잠자냥 2021-08-09 22:22   좋아요 2 | URL
하하하 그런 일이?!!!!

바람돌이 2021-08-10 0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현실적인 스파이물이군요. 그래서 더 읽어보고싶어지네요. ^^

잠자냥 2021-08-10 10:12   좋아요 0 | URL
네, 실제로 거대한 대의명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가운데 저런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요. ㅎㅎ

2021-08-10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1-09-10 16: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는 잠자냥님 리뷰 중에 뭐가 당선될지 점쳐봐야겠어요 ㅋ

잠자냥 2021-09-10 16:12   좋아요 2 | URL
감사하니다~ 주로 신간 위주로 주는 것 같던데 가끔 이렇게 구간 리뷰에도 주네요? ㅎㅎㅎ

Falstaff 2021-09-10 16:15   좋아요 3 | URL
저는 별 네 개는 이해가 가는데, 심지어 품절 상품 독후감 올렸다가 이달의 리뷰 먹었답니다.
분명 알라딘이 개선되고 있거나, 미치고 있는 중일 겁니다. ㅎㅎㅎㅎㅎ

잠자냥 2021-09-10 16:25   좋아요 3 | URL
미치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선이라고 합시다. 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9-10 16:31   좋아요 1 | URL
괭님 / 저도 그거 예상해 보는 재미가 있는데, 항상 어긋나더라고요? ㅋㅋㅋ 전 이번 달엔 <소년을 읽다> 리뷰가 뽑히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그게 금주의 뉴스레터에 선정되었기도 해서) 역시나 땡! ㅋㅋㅋ

새파랑 2021-09-10 16: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당선 천재 잠자냥님 축하드려요 ^^ 전 도선생님 악어로 당선이 되었다는 ㅎㅎ 신간 위주가 아닌가봐요 ㅋ

잠자냥 2021-09-10 16:25   좋아요 2 | URL
ㅋㅋㅋ 당선 천재 ㅋㅋㅋㅋ 아이고 황송하옵니다. 네, 암요, 신간으로만 채우지는 않겠지요. ㅎㅎㅎ

mini74 2021-09-10 16: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축하드려요 ~ 고양이들에게 츄르 한 반 쏘시죠 ㅎㅎ헤

잠자냥 2021-09-10 17:23   좋아요 2 | URL
아이고 울집 뚱냥이들 어제 한 봉지씩 드셨는데! ㅎㅎㅎ 또 쏘죠 뭐! ㅎㅎ

그레이스 2021-09-10 17: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축하드려요~!
당선천재 맞아요^^

잠자냥 2021-09-10 17:23   좋아요 3 | URL
ㅎㅎ 감사합니다!

초딩 2021-09-11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2관왕 멋져요~~~~~

coolcat329 2021-09-23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이 책 읽으신 줄 몰랐어요. 리뷰를 이제야 봤네요.
콘래드 작품 솔직히 술술 넘어가는 재미는 없지만 종 잡을 수 없는 그 심오한 문장이 너무 좋아서 앞으로 계속 찾아 읽을거 같아요. 논문도 찾아 봐야겠습니다.

잠자냥 2021-09-23 23:03   좋아요 1 | URL
네, 정말 문장이나 그 깊이가 역시! 하는 생각이 들게 하더군요.
 
술라
토니 모리슨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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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잉크>에서 토니 모리슨은 ‘여성의 관계를 남성과의 관계에 종속시키지 말자’고 했으며 ‘여성 친구와 보내는 시간은 노는 시간이 아니라 제대로 보내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여성의 중요한 우정’을 <술라>에서 다룬다. <술라>는 분명, ‘술라’와 ‘넬’ 두 여성의 기나긴 우정의 기록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만 설명하기에 이 작품은 그 두 여성 말고도 에바, 해나, 섀드랙 등 아주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작품에서 큰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두 여성의 우정 이야기라고만 소개하기엔 이 작품의 진가를 다 설명하지 못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야기는 한 편의 신화처럼 시작한다. 오하이오주 메달리언이라는 지역의 ‘보텀(Bottom)’ 마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부터 알려준다.  언덕배기 땅에 위치한 이 마을은 태생 자체부터가 백인들의 기만에서 비롯된다. 흑인이 노예로 살던 시절, 그들의 주인인 백인들은 어려운 일이 끝나면 그들에게 자유와 함께 저지대bottom 땅 한 뙈기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막상 땅을 주기가 아까웠던 백인들은 교묘한 술수를 부려서 언덕 위 땅을 주겠다고 한다. 놀란 노예들은 골짜기가 저지대 아니었느냐고 묻는다. 백인들은 “아이고, 아니야! 저 언덕 보이지? 저기가 저지대야. 비옥하고 기름진 땅이지. 하느님이 내려다보실 때는 저기가 바닥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보텀이라고 부르는 거야. 천국의 바닥이란 뜻이지. 그러니까 최고 좋은 땅이다 이 말이야.”(16쪽) 이렇게 교묘하게 노예들을 속여 그들에게 언덕 위에 있는 보텀 땅을 주고 아래쪽의 비옥한 골짜기 땅은 자신들이 갖는다. 자유민이 된 흑인들은 천국의 바닥, 보텀에서 백인들을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살아간다.

이런 배경을 가진 보텀 땅에서 태어난 술라와 넬이 이제 등장하는가 싶은데, 느닷없이 1차 세계대전, 전쟁터로 떠나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섀드랙’. 그런데 그는 전쟁터에서 커다란 트라우마를 얻고 돌아와 이 보텀에 정착해서는 ‘전국 자살일’을 만들고 해마다 1월 셋째 날이면 동네방네 종을 울리며 다닌다. 미치광이 같은 그의 존재는 보텀 주민들에게는 끔찍하고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이 보텀에서 은둔하며 지낼 뿐, 누군가에게 크게 해가 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이 보텀 땅과 섀드랙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조금 의아해지기도 한다. 술라와 넬과는 어떤 관련이 있기에 작가는 거의 상관없어 보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작품을 시작하는 것일까? 그 후로도 이 작품의 주인공 술라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어린 넬과 넬의 어머니, 에바, 에바의 딸 해나 등이 등장하고 나서야 ‘술라’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독자는 술라의 그 당찬, 아니 당차다는 말로만은 부족한 독특한 개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간의 모든 배경 설명과 여러 인물들이 먼저 소개되었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백인들의 술수로 척박하고 쓸모없는 언덕 위에 세워진, 보텀이라는 이름의 흑인들 마을도, 전쟁으로 인해 망가진 정신을 이끌고 이 마을에 은둔한 섀드랙이라는 인물도, 흑인이면서도 자신은 다른 흑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하게 통제된 훈육을 받고 자란 넬도, 남편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자기 몸을 희생해서(말 그대로 육체를 절단한다), 아이 셋을 키운 술라의 할머니 에바도, 엄마인 에바와 딸 술라 앞에서도 자기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자유로이 살아간 해나의 생의 궤적도 사실은 술라라는 인물의 특성과 개성을 살리기 위함이었음을, 그 존재의 특별함을 설명하기 위한 밑거름이었음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에바의 아들이자, 술라에게는 외삼촌인 플럼을 제외하고는 남성은 없다시피 한,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술라의 가족은 술라의 독립성과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술라의 할머니 에바는 술라처럼 강한 인물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술라와 대척점에 서기도 한다. 에바는 남편이 떠난 뒤로 아이 셋을  키우려고 자기 몸을 희생한다. 자신의 다리를 기차에 밀어 넣어 절단함으로써 보험금을 받아 아이 셋을 어렵지 않게 키운 것이다. 에바의 강인함은 이 작품 여러 부분에서 볼 수 있는데, 약물 중독자가 되어버린 아들 플럼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나 딸 해나가 위험에 처한 순간에도 그저 모성이라는 부드러운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인한 방식으로, 자기 일족을 그만의 방식으로 지켜나간다. 반면 해나는 이런 에바의 희생을 어느 정도는 누리고 살아가는 인물로,  자신의 쾌락과 욕망을 위해서 거리낌 없이 자유로운 성생활을 해나간다. 에바의 이런 강인함과 해나의 자유로움은 술라가 일찌감치 남자 없는 삶, 남자에 기대지 않는 삶,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삶을 가능하도록 결정짓는다.


“흠, 참을 수 없다느니 그딴 소리나 나불댈 생각은 마라. 결혼은 언제 할 셈이냐? 아기도 낳아야 할 테고. 정착을 해야지.”
“전 다른 누구도 만들고 싶지 않아요. 제 자신을 만들고 싶어요.”
“이기적이구나. 어떤 여자도 남자 없이 떠돌며 살 수는 없어.”
“할머니는 그러셨잖아요.”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
“엄마도 그랬고요.”
“원해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니까. 혼자 외따로 살고 싶어 하는 건 옳지 않아. 네게 필요한 건…… 너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말해주마.”
술라가 일어나 앉았다. “저에게 필요한 건 할머니가 입 다무시는 거예요.”
(……)
“지옥불도 필요 없겠구나. 이미 네 안에서 불타고 있으니……”
“제 안에서 뭐가 타오르건 그건 제 거예요!”
“그리고 할머니가 불을 끄게 놔두기 전에 이 타운을 전부 다 동강내버릴 거예요!” (133~135쪽)


이런 술라와 어릴 때부터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되는 넬은, 술라의 집안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서 성장한다. 일찌감치 결혼에 안주한 넬의 어머니는 자신들보다 얼굴이 까만 흑인은 내심 경멸하며, 술라 일가처럼 자유분방한 흑인들과는 넬이 가까이 지내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흑인이면서도 흑인의 삶을 벗어나 저기 어딘가 백인처럼 살아가기를 바라는 넬이 어머니,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배우고, 보고 자란 넬은 어머니와 거의 같은 길을 걷는다.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돌보며 모범적으로 사는 어머니로서의 삶. ‘백인도 아니고 남성도 아니어서 그 어떤 자유와 승리도 그들 몫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알았기 때문에’ 서로 함께 ‘뭔가 다른 것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던’ 이 두 소녀, 술라와 넬은 이렇게 결혼이라는 한 과정을 통해 서로 조금씩 삶의 궤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술라가 도시로 떠나면서부터는 더더욱 그 간극이 커져간다. 마을을 떠났다가 10년 만에 돌아온 술라와 넬은 더는 서로 교감할 부분이 많지 않아 보인다. 술라는 제 엄마 해나가 그랬듯이 마을 남자 중 마음에 드는 이가 있다면 자유로이 그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고 이런 술라를 마을 사람들은 해나와 다를 바 없다며 손가락질 한다. 술라는 어느새 마을에서 마녀와도 같은 존재가 된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아는 건 아니야. 단지 모든 것을 다 할 뿐이지.”
“흠, 내가 하는 대로 하지는 않잖아.”
“내가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해서 네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줄 아니? 이 나라 흑인 여자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나도 알아.”
“어떻게 사는데?”
“죽어가고 있지. 바로 나처럼 말이야.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그 여자들은 그루터기처럼 죽어간다는 거야. 나, 나는 저 미국삼나무 중 하나처럼 쓰러지고 있고. 나는 정말로 이 세상에서 살아봤어.”
“정말? 그 증거로 보여줄 수 있는 게 뭔데?”
“보여줘? 누구한테? 얘, 내 마음은 내가 갖고 있어.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것도. 무슨 말이냐면, 나는 내 거야.”
“외롭잖아, 그렇지 않니?”
“그렇지. 하지만 내 외로움도 내 것이야. 지금 네 외로움은 누군가 딴사람 거고. 딴사람이 만들어서 너에게 건네준 거지. 그게 뭐 대단하니? 중고 외로움이지.” (205쪽)


서로가 함께여서 행복했던 어릴 적의 그 두 소녀는 어디로 갔을까.술라와 넬은 어느 순간 서로 전혀 다른 인생의 길을 걷고 있다. 넬이 보기에 술라에겐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넬에게는 남편도, 아이도, 가족도, 특정한 연인도 없는 술라의 삶이 처연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술라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하고야 만다. 그리고 대다수 흑인 여자들이 그루터기처럼 죽어갈 때 술라 그 자신은 삼나무처럼 쓰러져 가며, ‘이 세상을 살아봤다’고 의연하게 말한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외로움이 아닌, 오롯이 외로움조차 자기 것이라고, 나는 내 것이라고 말하는 술라. 그 어떤 희생도 순응도 거부한 술라의 삶은 천국 아래 땅이라는 보텀 마을 여느 흑인들의 삶과는 완전히 다르다. 자식을 위해 다리를 자르지도 않았으며, 더 이상 노예가 아닌데도 백인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구차한 미소를 짓지도 않고, 누군가의 몸에 불을 붙이느니 그 불을 지켜보며 자기 스스로 불꽃이 되기를, 아니 자기 안에서 타오르는 건 그 무엇이나 다 자기 것이라고 강렬하게 외치며 살아간다.  술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던 넬이지만, 마침내는 술라를 지켜보며 어린 시절의 자기를 떠올린다. 생애 처음으로 떠난 어머니와의 여행에서 근사해지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던 넬, 언젠가는 메달리언을 떠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넬, 앞으로 혼자서 떠날 머나먼 여행을 꿈꾸던 넬, ‘나다움’을 처음으로 자각했던 넬…… 그 시절의 자신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자기 자신으로 오롯이 살았던 불꽃같은 술라의 삶을 지켜보노라면 누구라도 넬처럼 잊었던 자기 자신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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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8-03 13: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헝 조만간 읽고 이 리뷰 자세히 볼 거예요!

잠자냥 2021-08-03 14:10   좋아요 3 | URL
네, 저도 괭님 <술라> 리뷰 기다릴게요~ ㅎㅎ

독서괭 2023-09-18 18:31   좋아요 1 | URL
조만간이 2년이 되었습니다 ㅋㅋㅋㅋ 아놔, 이 책 짧은데 리뷰 쓰기 되게 힘들더라고요. 어쩜 이렇게 잘 쓰셨어요?

잠자냥 2023-09-18 22:41   좋아요 0 | URL
나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앜 미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21-08-03 13: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 술라...

술라는 모름지기 두 번은 읽어야
모리슨 선생에 대한 예우가 아닐
까 욱여 볼랍니다.

잠자냥 2021-08-03 14:10   좋아요 2 | URL
맞아요. 그런 거 같습니다. 이건 나중에 한 번은 더 읽어보려고요.

바람돌이 2021-08-03 14: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술라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네요. 조만간 읽도록 킵해두겠습니다. ^^

잠자냥 2021-08-03 14:50   좋아요 2 | URL
네! 요즘 페미니즘 공부하는 분들이 읽어도 반할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coolcat329 2021-08-03 16: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고 싶은 책인데 요즘 정말 죽어라 참고 있습니다. 이 책 보관함에 오래 들어있는 책이에요. 일단 빌러비드부터 읽어보겠습니다.
폴스타프님이 이 책 읽기가 쉽지 않다고 하셨던걸로 기억하는데 잠자냥님 리뷰 읽어보니 쉬워보이기도 해요. ㅋ

잠자냥 2021-08-03 16:15   좋아요 3 | URL
공쟝쟝 님이 책 사는 사람이 젤루 똑똑하다고 했어요. 참지 말고 언능 사세요.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8-03 16:34   좋아요 6 | URL
토니 모리슨 책이 쉬운 건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근데요, 다 읽고나서 후회하는 것도 하나도 없어요!! ㅋㅋㅋㅋ

이 책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하여튼 토니 모리슨.... 생각하는 거 자체가 보통 사람들하고는 완전히 다른 거 같아요!
세상에나, 언덕 꼭대기에 있는 땅 이름이 보텀이라니, 하이고 참. 이름이 뭐더라... 술라 엄마가 하는 행동 하나만 기억해도 ㅋㅋㅋㅋ 본전 뽑는 거예요.

빌러비드 먼저? 동의합니다. 두 번째로 솔로몬의 노래!

잠자냥 2021-08-03 17:45   좋아요 4 | URL
네, 저도 토니 모리슨 이제까지 읽은 책보다 앞으로 읽을 책이 더 많은데, 읽을수록 감탄하게 되는 작가입니다. 전작 읽어야 마땅한 작가랄까요. 아주 어린 나이에 읽지 않고 요즘 읽기 시작한 게 더 다행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요. ㅎㅎㅎ

공쟝쟝 2021-08-03 18:19   좋아요 4 | URL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술라, 중얼중얼 (어떡하지? 초조 어떡하지? 공포... 나 이제 실업급여 곧 끝나는 데....)

coolcat329 2021-08-03 18:26   좋아요 4 | URL
빌러비드 솔로몬 술라 재즈로 나가겠습니다. 재즈를 한 20년전인가 제목만 보고 샀다가 2장도 못 읽고 덮어버린 책이라 오기로 다시 사두었습니다. ㅋ

붕붕툐툐 2021-08-03 23: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빌러비드 읽다 포기한 1인으로서 이건 좀 덜 어렵냐고 여쭙고 싶네용~😊

잠자냥 2021-08-04 00:45   좋아요 1 | URL
네, 어렵지 않고 재미납니다. 일단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아요. 앉아서 집중하면 두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을 분량. 근데 툐툐 님 방학 숙제해야죠? :P

그레이스 2021-08-04 08:25   좋아요 1 | URL
비러비드가 환상적 요소가 있긴 하죠!
저는 술라 라고 해서 로마의 그 술라 인줄 알았어요 ^^
 
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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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펠리시아의 여정>을 읽은 지 한 달쯤 지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게도 ‘힐디치’, 그가 생각난다.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분명 ‘펠리시아’다. 그러나 그 대척점에는 힐디치가 있다. 이 두 사람은 선(善)과 악(惡)이 공존하듯이 이 작품에서 함께 한다. 가족 몰래 집을 나와 조니를 찾아 길을 떠난 순진한 펠리시아는 낯선 영국 땅에서 처음 힐디치 씨를 만난다. 그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퉁퉁한 체구에 안경을 쓴 단정한 외모의 중년 남성이다. 오갈 데 없이 곤경에 처한 펠리시아를 눈여겨보고 그녀에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도 한다. 다만 그 도움이 진정으로 그녀를 위한 것인지 의아한데, 펠리시아는 경계하면서도 사람을 잘 믿는 구석이 있기에 그의 도움을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인다. 심지어 그처럼 친절한 사람은 드물리라 생각하며 진심으로 감사한다.


힐디치에게도 어쩌면 처음에는 진심으로 그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펠리시아 이전에도 많은 여성들을 ‘도와’주었다. 남편에게 학대당해 집을 나왔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심리적으로 무너진 상태에 있는 여자들에게 접근해 이야기를 들어주고 다정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따뜻한 차나 음식을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런데 이 도움은 상대를 위했다기보다는, 상대를 위한다는 착각 때문에 결국 순수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롯이 자기 자신을 위한, 선을 가장한 악이 되고 만다. 게다가 그가 아무리 그들에게 잘해주어도, 그들의 눈 속에는 다른 사람이 담겨 있었고, 마침내는 그의 곁을 떠난다. 펠리시아처럼.


힐디치에게도 선이 그 방향을 잃지 않고 제대로 내비친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그처럼 관목 숲에 둘러싸인 단독주택에서 평생 고독 속에 방치된 채 타인과 정상적인 소통도 할 줄 모르고, 인간관계를 제대로 하는 방법도 모른 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탐욕스러운 식욕으로 달래며 몸만 점점 비대해진 덜 자란 어른으로 자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사랑다운 사랑이나, 존중다운 존중을 받아본 적 없는 이 안쓰러운 남자는 공장의 나이 어린 직원들이 회사 동료, 그것도 나이 든 사람에게 응당 대하는 예의를 자신에 대한 존경이나 애정, 신뢰로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여전히 혼자인 채 쓸쓸하게 살아간다. 엘시, 샤론, 베스, 게이, 재키 등 하이에나처럼 자신을 사랑해줄 누군가를 찾아다니며…….


트레버의 작품은 누구도 섣불리 단죄하지 않고, 그 누구의 삶도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 아주 쓸모없는 이의 삶도 저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힐디치는 분명 소름끼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많은 거짓말을 너무나 교묘하게 하고, 그것으로 욕망을 채웠으며, 해서는 안 될 행동도 여러 차례 했을 것이다. 펠리시아에게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 소름끼치는 인물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외따로 떨어진 커다란 집에서 기대고 의지할 사람이라곤 엄마밖에 없던 어린 힐디치. 정상적인 남성으로 자랄 본보기가 될 만한 성인 남자를 본 적이 없는 외로운 소년 힐디치. 그런 데다가 자신을 바로 잡아주고 제대로 된 사랑과 보호를 해야 할 엄마는 그릇된 방식으로 아들을 사랑한다. 이렇게 비뚤어진 세계에서 자란 힐디치는 누군가의 애정과 관심, 존중에 목이 마르기만 하다. 그가 아무런 사이도 아닌 펠리시아를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연인이라고 말하며 행복해 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혐오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럽다는, 가엾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펠리시아가 선의 모습을 했지만 결코 선은 아니었던, 온갖 이기적인 각자의 욕망에 상처받다가도 마침내 아주 평범하지만 오롯이 선 그자체로 빛나는 선을 마주하고 위안을 얻은 것처럼 힐디치에게도 그가 잘못된 길로 접어들기 이전에 그런 선한 손길이 뻗쳤더라면, 그는 그토록 끔찍하고 거짓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의 죽음을 마땅한 인과응보라고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 죽음에서도 한없이 쓸쓸한 그림자를 본다. 그 작은 한줄기 선함조차 닿지 않아 그렇게 끝내 타인을 고통의 수렁에 몰아넣고, 또 자기 자신도 지옥으로 몰아가게 되는 안타까운 삶. 이 나쁜 남자조차도 이렇게 연민어린 눈으로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트레버의 시선이야말로 또 다른 선함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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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7-23 12: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모레 읽을 예정이라서 본문은 아쉽게도 스킵!
다 읽고 독후감 쓴 다음에 와서 한 수 배우겠습니다!! ^^

잠자냥 2021-07-23 12:40   좋아요 3 | URL
잘 하셨습니다. 이건 웬만하면 사전 정보 없이 읽는 게 이 책의 제대로 된 맛을 즐기는 겁니다요!
전 이 책 리뷰 2개나 썼어요(덕분에 2개 다 올라가는 거 처음 알았습니다). ㅋㅋㅋㅋㅋ 나중에 2개 다 읽으세요~ ㅋㅋㅋㅋ

독서괭 2021-07-23 12: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리뷰도 여러 개가 올라가는군요. 리뷰 잘 읽었어요! 2개의 리뷰 모두 좋네요. 이번 리뷰는 힐디치에 집중하셨군요.
힐디치가 굳이 젊은여자를 찾아 ‘젊은여자와 만나는 중년남성‘으로 자신을 정체화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으스대고 싶어하는 점이 참 혐오스럽더라구요... 결국 수단으로 이용할 뿐인 게 아닌지. 암튼 참 인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잠자냥 2021-07-23 12:57   좋아요 4 | URL
그러게요! 두 개 안 올라가면 어쩌나 했는데 올라가네요? 저 도배중? ㅋㅋㅋㅋㅋ
지난번 리뷰는 스포일러 감추느라 힐디치 이야기를 전혀 하지 못한 감이 있었습니다.
힐디치 참 소름끼치는 사람인데 눈앞에 선하게 그려져요. 트레버가 묘사를 참 잘한 거겠죠.

Falstaff 2021-07-23 12:58   좋아요 2 | URL
아이고 세상에, 댓글도 스포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7-23 13:08   좋아요 1 | URL
그만 읽으세욧!!!

독서괭 2021-07-23 13:09   좋아요 1 | URL
아이고 죄송합니다;;;

다락방 2021-07-23 13:59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도 지금 이 댓글 읽으면서 으앗 댓글이 리뷰보다 더 많이 말한다! 했는데 ㅋㅋㅋㅋㅋ저도 읽기전이라 이건 스포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그렇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좋은 소설이란 아무리 스포를 당해도 주어야 할 것들을 다 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다음주에 읽을 예정인데 예정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렇습니다.
그런데 잠자냥 님의 리뷰와 독서괭 님의 댓글을 보노라니, 어쩐지 분노의 리뷰를 쓸 것 같은 느낌적 느낌..


그럼 이만..

잠자냥 2021-07-23 14:16   좋아요 2 | URL
눈 감아요~ 눈 감아~ <펠리시아의 여정> 안 읽은 분들은 댓글에서도 눈 감아~
다락방 님은 아마 이 책 읽으면 만자 내외가 아니라 이만자 내외도 부족할지 몰라요! ㅋㅋㅋㅋ

새파랑 2021-07-23 1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면서 ˝힐디치˝가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오히려 ˝조니˝가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둘다 의도적 거짓말을 한 거긴 하지만 🤔

잠자냥 2021-07-23 15:24   좋아요 2 | URL
(다락방님, 폴스타프 님 이 댓글도 읽지 마세요)


어우 조니... 어우...... 욕 나와요. 근데 현실에서 많은 여자들이 그런 남자한테 순진하게 넘어간다는 ㅠㅠ

mini74 2021-07-23 16: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력조차 찾아 볼 수 없는 조니 ㅎㅎㅎ 여기서 두드려 맞고 있네요 ㅎㅎ

잠자냥 2021-07-23 17:23   좋아요 2 | URL
어우 증말 그러게 말이에요!

Falstaff 2021-07-30 1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독후감 쓰기가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힐디치 시각에서 쓰는 것이 어떨까, 진지하게 생각했었는데 ㅋㅋㅋ 이 리뷰를 읽어보니 감상이 새롭네요.
힐디치는 악당입니다. 동정하지 마세요. 같은 환경에 있다고 전부 힐디치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저도 힐디치의 엽기 행각이 드러나자마자 그의 입장에서 독후감 쓰겠다는 생각을 싹 버렸습니다. 근데 완전히 바꾸진 못한 거 같아요. ㅎㅎㅎㅎ
읽어가면서, 트레버 치고는 별거 없다 싶었는데, 난데없이 힐디치가 확 변모를 해버려서 아이고 참. ㅎㅎㅎ 재미있었습니다.

잠자냥 2021-07-30 11:22   좋아요 2 | URL
다 읽으셨군요! 폴스타프 님의 리뷰도 기대하겠습니다.
힐디치 악당이죠. 그런데도 조금 불쌍해요. 소름끼치면서 불쌍한.... 그래서 약간은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 생각도 났습니다. 현실에서 힐디치 같은 인간이 있다면 일말의 동정심도 안들 텐데, 문학에서는 그게 되더라고요. ㅎㅎㅎ 트레버의 작품이 참 그런 힘이 있지요.

독서괭 2021-08-31 10: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우수상 축하드려요!! 어제 발표했는데 이제야 봤네요. 잠자냥님 적립금 떨어질 날은 언제 올 것인가..

잠자냥 2021-08-31 10:14   좋아요 2 | URL
으아, 감사합니다. 어제 메일 왔더라고요.
적립금 줄어들어 슬펐는데 다시 조금 채웠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1-08-31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잠자냥 2021-08-31 10:2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1-08-31 1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 역시 잠자냥님은 잠만 자는게 아니었군요. 적립금 천재~!!

잠자냥 2021-08-31 11:12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주로 잠자다가 가끔 책보고 글 씁니다. ㅎㅎㅎ

Azalea 2022-06-25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가 아무리 그들에게 잘해주어도, 그들의 눈 속에는 다른 사람이 담겨 있었고, 마침내는 그의 곁을 떠난다. 펠리시아처럼. 이라고 쓰셨는데... 다른 여자들과 펠리시아는 떠난 방식이 다르지 않나요. 펠리시아만 그 집에서 살아나온게 아닌가요...?

2022-06-26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토마시 예드로프스키 지음, 백지민 옮김 / 푸른숲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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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를 일컬어 ‘벽장 속 게이 또는 레즈비언’이라고 말한다. 이성애자처럼 자신의 성적 취향을 밝혀도 사회가 아무런 차별도 억압도 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자기 성정체성을 떳떳하게 드러낼 것이다. 아니 이성애자가 나, 이성애자야 하고 굳이 말하지 않듯이, 그런 세상이라면 동성애자도 굳이 자신의 성적 취향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구상 대부분의 사회가 그렇지 않기에, 오늘도 어느 나라 어느 장소에서는 그들의 성적 취향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차별받고 폭력을 당하며 또 때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목숨을 잃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벽장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고이 숨기고 살아간다. 이토록 살아가기 벅찬 힘겨운 세상에 굳이 그 사실을 드러내 이중으로 시달리고 싶지는 않기에.

그럼에도 자유가 허용되는 사회에서는 용감하게 자신이 그런 사람임을 밝히고 살아가는 이들이 분명 있다. 우리나라도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몇 년 전부터는 퀴어퍼레이드도 열리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이들도 많아졌다. 이 땅에서는 그런다고 해서 누군가의 증오와 혐오로 살해당하지는 않는다(물론 자살하는 이들은 분명히 있다. 여기서 내가 뜻하는 것은 성정체성 때문에 일어나는 ‘살인’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마저도 허용되지 않은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아니 대체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일까.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는 그렇게 암담한 사회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고 살아가는 게이 소년의 이야기이다. 벽장 속의 벽장에 갇힌 한 소년, 아니 두 청년의 이야기- 1980년대 사회주의 제체 하의 폴란드는 자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암흑, 그러니까 ‘어둠’과도 같은 사회이다. 빵 한 덩이 얻으려면 길게 줄을 서야 하고, ‘자유’의 소식을 들려주는 라디오방송은 남몰래 들어야만 하고, 혹시라도 이런 체제 비판적인 소리를 하면 언제 어떻게 당에 고발당할지 몰라 모두가 숨죽이고 사는 세상.

이런 분위기 속에 소년 ‘루드비크’는 할머니와 엄마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아무런 고통 없이 자라난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아홉 살 무렵, 자신이 남들과 다르게 또래 소년을 욕망한다는 것을 깨닫고 혼란에 빠진다. 이런 소년의 성향을 눈치라도 챘던 것인지 할머니는 루드비크가 소년답지 못한 행동을 하거나 엄마와 오랫동안 한 침대를 쓰면서 지나치게 친밀한 사이로 지내는 것도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본다. 그렇게 키우면 비정상적인 애가 된다면서 딸에게 경고를 준다. 루드비크는 할머니의 ‘비정상’이라는 말에 바락바락 성을 내며 분노한다. 자신은 비정상이 아니라고. 어쩌면 이미 그 어린 시절에 자신이 남과 다름을, 그리고 그 남과 다르다는 이유가 앞으로 살아갈 자신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줄 알았기에 자기는 비정상이 아니라고 그렇게 소리 높여 주장했던 것은 아닐까.

혼란과 수치심, 갈망…… 그런 시기를 보내며 루드비크는 대학생이 된다. 그리고 드디어 너, ‘야누시’를 만난다. 그것도 어느 찬란한 여름날 당에서 의무적으로 강요한 농촌활동에서……. 사실 이 작품은 애초에 현재 미국 뉴욕에 사는 ‘나’, 루드비크가 지난날의 연인인 ‘너’ 야누시에게 편지 형식으로 글을 쓰고 있기에 이 두 사람이 지금은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루드비크는 폴란드를 떠나 미국이라는 자유로운 체제로 옮겨 왔음을 독자는 이미 알고 시작한다. 그렇기에 이 두 사람이 그 여름, 그 눈부신 계절, 열여덟이라는 찬란한 나이에 만나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 때문에 행복하면서도 고통받고, 결국은 헤어지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음을 독자는 알고 시작하는 셈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 그리고 한없이 서로에게 빠져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던 순간, 체제에 비판적인 루드비크와 달리, 폴란드 사회주의 체제를 신봉하는(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야누시와의 어쩔 수 없는 갈등 등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루드비크는 할머니와 엄마로부터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할머니와 엄마가 듣던 자유유럽 방송을 접하며 자란다. 자유가 있는 세상의 가치를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에 이 체제의 모순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이 체제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은, 사랑은 위험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숨겨야 한다. 그래서 자유를 더 갈망한다. 그에 비해 야누시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서구 사회라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 평등적인 교육의 기회를 얻었고, 병든 가족도 당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서방의 자유를 꿈꾸는 루드비크의 행위는 그가 보기에 몽상가적 기질일 뿐이며, 당에 충성하면 언제든 성공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은 나날이 굳건해져만 간다. 그렇기에 야누시는 루드비크와 이 체제 안에서 성공해서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그는 그럴 자신이 있다. 체제를 벗어나자고 어둠 속에서 함께 헤엄쳐 나가자고 말하는 루드비크와 이 체제 안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자는 야누시, 두 사람의 사랑은 과연 어떻게 될지, 루드비크가 이미 뉴욕에서 저 멀리 떨어진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데도, 궁금증에 책장이 빠르게 넘어간다.

이 작품은 여러 장점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책 한 권이 큰 역할을 한다는 점은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루드비크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다가 용기를 얻게 되는 계기도, 또 무엇보다 루드비크와 야누시가 가까워지는, 아니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계기도 바로 이 책 한 권, 그러니까 제임스 볼드윈의 <조반니의 방>에서 시작된다는 설정은 너무나 공감이 간다. 그리고 그 책은 두 사람 사이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게다가 이 작품에는 앨런 홀링허스트의 <수영장 도서관>처럼 성착취도 없고(나는 <수영장 도서관>의 그 부잣집 게이들이 자기보다 한참 어린 소년들을 탐하는 것을 성착취로 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처럼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려고 여성을 이용하지도 않는다, 물론 어떤 이의 눈에는 야누시가 하니아를 그렇게 이용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야누시는 그 체제 아래서 살아남으려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루드비크에게 중요한 순간에 누구보다 힘이 되어준 그 두 여성 캐릭터, 카롤리나와 하니아도 좋았다. 나는 그래서 이 착하고 슬픈 소설을 마음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루드비크가 야누시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 자유 없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야누시는 또 얼마나 그 억압된 체제 아래서, 여전히 벽장 속 벽장에 갇힌 채 살아가고 있을까. 두 남자의 사랑이 끝내 먹먹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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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7-19 1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지금 <수영장 도서관> 읽고 있는데 엉뚱하게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에서 스포일을. 크.... 하긴 뭐 수영장에서 헤엄치지 뭐 하겠습니까. ㅋㅋㅋㅋ

잠자냥 2021-07-19 14:52   좋아요 1 | URL
아함, 아니 저런! 죄송! 하지만 제가 이글에서 쓴 <수영장 도서관>의 내용은 전혀! 스포일러 아닙니다! ㅎㅎㅎㅎ 그 책의 엄청난 비밀은 따로 있습니다. 안심하고 읽으세요~ㅎㅎㅎㅎ

독서괭 2021-07-19 1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홋 리뷰 읽지 말라고 하셨지만 읽었습니다. 예전엔 스포일러를 되게 경계했는데 이젠 장르물 외에는 괜찮더라구요~ㅎㅎ 서간소설이가 보네요. 몽마르트르유서도 읽어야 합니다만..

잠자냥 2021-07-19 15:18   좋아요 1 | URL
편지 형식이긴 한데, 딱히 편지 느낌은 크게 안 들어요. ㅎㅎㅎ

레삭매냐 2021-07-19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영장 도서관보다 왠지 낫다는
느낌이 빡! 듭니다.

그 분야 쪽은 아무래도 저하고
는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잠자냥 2021-07-19 16:23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이 작품은 그렇게 적나라한 묘사가 없습니다. (아쉬워 하는 분들 있는 거 아닌지 원;;; ㅋㅋㅋㅋ)

새파랑 2021-07-19 1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영장과 수영 ㅋ 이런 내용의 책을 많이 안읽어봤는데 요즘 많이 올라와서 급 관심이 생깁니다 ㅋ 잠자냥님 🌟5개는 확실하니~~!!

잠자냥 2021-07-19 16:36   좋아요 2 | URL
수영장과 수영에 관한 책은 확실히 아닙니다! *껄껄껄* ㅎㅎㅎㅎ

바람돌이 2021-07-20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표지가 마음에 안들어서 패스하려고 했는데 말이죠. 잠자냥님 글 읽으니 꼭 봐야할 책같은 느낌이 팍 옵니다. ^^

잠자냥 2021-07-20 09:28   좋아요 0 | URL
아하 그러셨군요. 한번쯤 읽어보세요~ 괜찮은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