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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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우리가 쓴 것》 읽기를 마치고 다른 이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서 100자평을 훑어보러 알라딘에 접속했다. 과연 이 책을 읽었을까 싶은 이들의 원색적인 비난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런 거구나…. 문득 이 책에 실린 <오기>의 소설가 느꼈을 법한 심정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오기>는 명백히 조남주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읽힌다. 이 작품에서는 문제의 ‘그 작품’이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독자는 그 작품이 《82년생 김지영》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작가는 그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와 함께 숱한 비난에도 시달려야 했다. 그 책이 여성의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면, 여성주의 관점으로 쓰인 작품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근거 없는 비난에 시달렸을까? 그런데 그 작품의 작가는 그 이후 다른 작품집을 내고도 또 다시 비슷한 비난을 받고 있다.

문득 얼마 전 읽은 조애나 러스의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이 떠오른다. 조애나 러스는 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 숱하게 여성 작가들의 글을 폄하하며 그들이 글을 써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지우려고 해왔던 온갖 억압의 역사를 통쾌하게 반박한다. 그 책에 따르면 페미니스트 작가들을 향해서 흔히 쏟아지는 비난으로 ‘어휘가 기교적이지 않다’, ‘문체가 부적절하다’,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 또는 ‘신념을 담기에는 어조가 너무 사적’이며 ‘거리 유지가 안 되어 있다’(조애나 러스,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 204쪽) 등이 있다. 이는 조남주의 작품, 아니 조남주 작가에게 가해지는 대부분의 비난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가 만일 여성 작가가 아니었다면, 여성주의 관점의 작품을 쓰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비난에 시달렸을까? 작가와 그의 작품을 비난하는 이들은 그런 행위를 통해 작가에게 글 쓸 자유와 권리, 그리고 작품을 통해서 억압 받은 여성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목소리 내는 것을 짓밟고 싶은 것이리라.

여성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려는 이런 시도는 《우리가 쓴 것》의 여러 단편에서도 볼 수 있다. 자신보다 고작 몇 살 위인 남자 친구에게 완벽하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젊은 여성(<현남 오빠에게>)이 있으며, 이름도 없이 그저 ‘미스 김’으로 불리며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폐기물처럼 버려지는 젊은 여성 노동자가 있고(<미스 김은 알고 있다>), 여성주의 관점의 소설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비난과 악플에 시달리는 소설가가 있다(<오기>). 날마다 학교에서 불법촬영물 공포에 시달리지만 그 소녀들의 진실은 엄마에게조차 의심받는다(<여자아이는 자라서>). 한편으로는 억압적인 아버지가 사라짐으로써 가족들이 제 목소리를 찾고 화기애애해지는 삶을 다룬 작품(<가출>)도 있다. 이 작품에서 인상 깊은 장면은 어머니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딸이 비로소 인식하는 부분이다. 이사, 자식의 진학, 취업 같은 중요한 결정부터 여행지, 외식 메뉴, 텔레비전 채널 같은 사소한 결정도 모두 아버지의 뜻대로 하던 집안에서 엄마는 늘 중얼거리기만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라지자 엄마는 ‘간결한 문장과 정확한 발음으로 의견을 말’(96쪽)한다.

노년의 여성의 삶을 그린 두 작품도 인상 깊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부모의 바람 때문에 ‘말녀’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살며 자기 존재를 부정당해야 했던 여성과(<매화나무 아래>), 시어머니에서 어머니 그리고 딸로 이어지는 돌봄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노년의 여성(<오로라의 밤>)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두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작게나마 이룬다. 한 여성은 개명을 함으로써, 또 한 여성은 평생 꿈꾸던 오로라를 보러 가서 마음속에 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던 ‘그 소원’을 크게 외친다. 조금 결이 다른 작품이긴 하지만 코로나가 불러 온 계급 차이로 말미암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서로 말을 나눌 기회가 아예 막혀버린 가여운 아이들(<첫사랑 2020>)이 등장하기도 한다. 아이들, 그러니까 가장 약한 존재의 목소리가 차단당한다는 면에서는 이 작품도 앞선 작품들과 비슷하다.

소녀부터 젊은 여성, 그리고 노년의 여성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다양한 목소리, 파묻히거나 지워졌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파노라마처럼 나와 내 주변 여성들의 삶이 겹쳐지며 떠오른다. 보편적이지 않다는 비난, 지나치게 사적이라는 비난, 세계관이 좁다는 비난…. 그런 칼날의 말들이 과연 온당한가. 이 책 속 이야기들은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고, 겪을 법한 일들이다. 그렇기에 한 여성은 소설가인 다른 여성에게 내 이야기를 훔쳐서 쓴 게 아니냐고 되묻지 않는가(<오기>). 다행스럽게도 이 작품 속 여성들은 입 다물고 조용히 살지 않는다. 자기 이름을 찾고(<매화나무 아래>), 자기 목소리를 찾으며(<현남 오빠에게>), 소심하지만 은밀한 복수를 한다(<미스 김은 알고 있다>). 딸도 엄마도 소원을 이루고(<오로라의 밤>), 소녀들은 연대를 통해 자기를 보호하는 방법을 배운다(<여자아이는 자라서>).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맞서 꿋꿋이 목소리를 내, 항변의 글을 남긴 소설가(<오기>)처럼 조남주 작가도 계속 목소리 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첫사랑 2020>의 어린 약자들이 살아갈 세상은 조금 나아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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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8-12 11:3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이책 리뷰대회가 있길래 사서 다 읽었는데, 마감이 곧인데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전 <82년생 김지영>을 읽지 못했는데 때를 놓치고 나니 그동안 여러 매체에서 다루었기에 내용은 대충 알아서 손이 안 가더라구요. 그때문에 이 작가님께 왠지 모를 부채감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음으로써 약간 해소됐어요 ㅋ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최근 ‘페미검증‘등의 사태를 보면서 ‘입을 닫게 하는‘ 압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 반가운 글이네요.

잠자냥 2021-08-12 11:42   좋아요 7 | URL
쓰세요~ 쓰세요~ 괭 님은 쓸 수 있습니다! ㅎㅎ
부채감을 느끼셨다는 말 뭔가 와닿네요. <82년생 김지영>과 <우리가 쓴 것> 두 권을 읽으니 작가의 글쓰기 특성이 조금 감이 잡히는 느낌도 들었어요. 작가가 사회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건조하게 사실처럼 전달하려고 애쓰는 느낌도 들고요. 암튼 조남주 작가의 작품들은 완벽하게 제가 좋아하는 문학은 아니지만 이런 목소리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문학이 해야 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고요.....
요즘 백래시가 심하죠. 그만큼 여성들이 목소리 내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서괭 2021-08-13 12:24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의 응원에 힘입어 저도 리뷰를 올렸습니다^^

다락방 2021-08-12 11:33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항변의 글을 썼다는게 인상깊네요. 그리고 마땅히 그리해야 할 것 같고요. 옆에서 보는 사람들도 스트레스인데 작가 자신은 오죽했을까요. 저는 악플이나 저격글만 봐도 스트레스 폭발하는데요.. 뭐 이제는 좀 무뎌지긴 했지만.. 아니 글쎄 82년생 김지영의 작가가 김지영인 줄 아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책은 안읽어보고 김지영 그거 페미잖아, 라고... 하아- 갈 길 왜이렇게 멀어요..
잠자냥 님 리뷰는 제가 쓸 수 없는 리뷰라 언제나 감탄하며 읽곤 하지만 이번 리뷰는 특히 더 좋아요. 한국 작품을 읽고 쓴 리뷰는 더 잘 읽히는가.. 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봅니다.

잠자냥 2021-08-12 11:45   좋아요 5 | URL
네, <오기>라는 작품을 읽다 보니 작가가 참 힘들었겠구나, 대체 어떻게 버텼을까 싶어지더라고요. 그런데 이 작품 100자평에도 심한 평들이 좀 있어서.... 에휴 ㅠㅠ
이번 리뷰는 작가에게 애잔한 마음이 들어서 더 그냥 술술 써진 것 같기도 합니다....

얄라알라 2021-08-12 15:22   좋아요 3 | URL
다락방님! 저도 잠자냥님의 글에 홀려서 국수 쭉 흡입하듯 쭈욱 읽었어요. 와우!
저도 다락방님의 ‘엉뚱한(?) 생각‘하심에 손 같이들어봅니다.

그나저나 작가 이름이 김지영이라 착각하고 저격하는 분들은....읽지도 않고 작품을 비난하시는 이들은, 어쩐대요.

잠자냥 2021-08-12 15:26   좋아요 3 | URL
북사랑 님 / 국수 쭉 흡입하듯이라는 표현이 눈에 쏙 들어옵니다. ㅎㅎ
유령 작가 김지영 ㅋㅋㅋ 세계 초 베스트셀러 작가 김지영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8-12 13:3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글보고 100자평 구경하고 왔어요 ㅎㅎ 일부 이상한 평점이 있어도 평점이 엄청 높더라는~!! 저도 82년생 김지영만 읽어 봤는데 이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

잠자냥 2021-08-12 14:37   좋아요 5 | URL
네, 일부 이상한 평이 있지요? 책 읽고 나서 하는 온당한 비판이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닌 거 같아서 좀 눈살이 찌푸려지더라고요.

hellas 2021-08-12 14:38   좋아요 6 | URL
저도 이 책 사놨는데... 지금 읽는 책 얼른 다 읽고 바로 읽어봐야겠네요.

공쟝쟝 2021-08-20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단편집이로군요, 자냥님 평을 보니 잡지나 엔솔로지로 만난 소설들이 보여서 읽을까 말까 싶다가 <오기>가 읽어보고 싶어지고 정화 평(!)도 써야겠다 싶어집니다! 불끈 💃🏻💃🏻

잠자냥 2021-08-20 16:20   좋아요 1 | URL
단편집이고 금방 읽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