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읽지 마셔요. 절대 절대!!)


요시다 슈이치의 글을 읽을 때면 언제나 아주 현대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감정 '뚝뚝'이 흐르지 않는 문체에 예리하면서도 하드보일드라고 하는 서늘한 느낌도 없다. 하드보일드 문체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것도 과하면 지겹다. 너무 '가오'잡는 거 아냐? 같은 괜히 삐뚤어진 마음도 들기까지 한다. 일부러 찾아본 건 나지만.


'이 사람이라면 어떤 시선으로 볼까?'라는 질문이 항상 드는 작가다. 특히 감상적이지 않은 '악인'이라는 제목에 요시다 슈이치라면 어떤 사람을 악인이라 정의할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 책을 집었다. 책을 덮고 나는 세상에 찌든 평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쏘시오패스 같은 걸 생각했다. 미드를 끊어야 하나.



---------------스포일러 있는 줄거리


이야기는 263번 국도 미쓰세 고개를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후쿠오카와 사가를 연결하는 이 고개는 예전부터 음침하고 기분 나쁜 소문이 끊이질 않았지만 고속도로에 비하면 요금이 적어 이 루트를 선택하는 사람이 꽤 있다. 고개에는 주로 귀신을 봤다거나 하는 괴이한 소문이 돌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낮이라도 나무에 둘러쌓여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곳이라 요금을 생각하면 꾹 참고 갈만한 곳이었다.


여기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는 이시바시 요시노라는 보험사에 다니는 20대 여성. 시체의 신원이 밝혀지자 경찰은 빨리 조사에 착수한다. 후쿠오카 시내에서 사택에 거주하면서 동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요시노는 살해된 밤, 친한 동료 2명에게 클럽에서 만났던 부유한 집 자제인 날라리 마스오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게다가 그 마스오는 하필 행방불명 상태. 강력한 용의자 마스오는 방송에서도 저격당하고 형사에게 쫓기는 처지가 된다.


참고인 진술은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된다. 일단 그녀와 친한 동료 2명, 마코와 사리에게 진술을 받는다. 순진한 마코와 적당히 연애를 해본 사리의 기억은 다르다. 인간 관계는 무척 상대적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마코에게는 요시노는 미주알 고주알 거의 모든 걸 말했지만 막상 취조 비스무리한 걸 당하자 마코는 사건 있던 날 있었던 평이한 이야기만 한다. 사실 마코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왜 그런지 요시노한테 그 날 있었던 일 정도만 얘기를 하고 끝을 낸다.


아무리 둔한 여자라도 나쁜 직감은 대체로 잘 맞는다. 요시노는 그 날, 두 동료한테는 날라리를 만나러 간다고 했지만 사실 그 날 그녀가 만나러 간 남자는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에서 만난 유이치였다. 부잣집 날라리는 답장만 꼬박 할 뿐, 먼저 만나자는 얘기가 없어 자존심이 상하던 중에 손쉬운 남자 유이치를 만나 어느 정도 목적(?)을 취하려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요시노는 그날 밤 우연히 유이치를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마스오를 만나고 바로 눈 앞에서 유이치를 물 먹이고 마스오의 차에 올라탄다. 마스오는 하필 그 날,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았다. 스스로 '싼티'나는 여자가 취향이라고 했지만 저녁으로 마늘을 먹고 옆에서 계속 종알거리는 요시노가 너무 짜증난 그는 "어디서 마늘 냄새 안나?" 냐며 모욕감을 준다. 하지만 요시노는 껌을 씹으면서도 계속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 술을 마시고 운전하고 있던, 짜증이 극에 달한 마스오는 왠지 이런 여자가 살인을 당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너무 화가난 나머지 미쓰세 고개에서 요시노의 등을 뻥차면서 떨궈 버린다. 


이게 사건의 정황이었고 당황해서 잠적한 미스오가 다시 잡혀서 수사에 혼선을 빚기까지 사건의 정황이다. 소설의 반 이상은 살해된 그녀가 진짜 만나려고 했던 유이치를 쓰는데 할애한다. 유이치는 묘하게 남자다운 구석은 있지만 말수도 없고 음침한 남자이다. 게다가 자신과 비슷한 교육과정을 밟고 오지 않은 유이치와는 할 말이 더더욱 없다. 이 따분한 남자와의 만남은 결국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간다. 평범한 여자인 요시노는 생각보다 깜찍한 모양새로 남자들과 만났고 그녀와 비스무리한 경험을 했던 남자들은 그것이 자신의 삶을 뒤흔들까봐 무서워한다.


가해자는 여전히 잘(?) 살아간다. 조용히 은밀하게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일도 계속 이어간다. 친구도 말수도 아주 적은 이 젊은 남자는 실은 아주 외롭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도 버림 비스무리한 것을 받았을 때도 늙고 병든 조부모의 팔다리 노릇을 할 때도 말없이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할 뿐이다. 그를 취직도 시켜주고 애정있게 봐주는 외삼촌도 여자도 만나지 않는 그를 안쓰럽게 볼 뿐이다. 거의 세상과 교류없이 사는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방식은 그렇게 타당하지 않다. 인터넷과 매춘 등으로 여자를 만나지만 여자가 생각없이 뱉는 달콤한 말에 쉽게 의지하고, 스치듯 다른 남자를 떠올리는 말에는 크게 분노하는 아주 외로운 남자였다.   


외롭거나 상처를 입은 사람은,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서 자신이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된다해도, 조금이라도 따뜻한 곳에 끌리는 법이다. 따뜻한 곳으로 가기 위해 현실의 일이나 이성 쯤은 쉽게 마비된다. 암울할 일만 더 심해질 그의 삶에 나타난 한 뼘의 따뜻함에 그는 무모한 도주를 결심하게 된다. 

 

--------------------------- 대충 줄거리 끝.



유이치의 외로운 삶은 그를 결과적으로 괴물로, 악인으로 만들었지만 온전히 자신만이 그렇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방임된 삶, 그를 같잖게 보는 시선,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성격. 하지만 유이치는 본능적으로 따뜻함을 원했고 온기가 있는 곳에는 무모하게 뛰어드는 면도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유이치이지만 '악인'은 꼭 그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살해된 요시노, 건방진 양아치 마사오 같은 평범한 이들은 쉽게 유혹에 빠지고 순간적으로 쉽게 악해졌다. 또 유이치를 버린 생모나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가버린 직업 여성,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 은근히 유이치에게 기대고 마는 할머니도 어느 정도 유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람과의 관계는 상대적이다. 누구한테는 기분 나쁘고 싫은 사람이 누구에게는 귀엽고 좋은 사람이 된다. 살해된 요시노는 부모에게는 고명딸이지만 만남 사이트에서 만난 다른 사람에게는 굉장히 귀여운 여자, 마스오에게는 천박한 여자애, 마코에게도 만남 사이트같은 데서 남자를 구하는 애라는 최종적인 평판을 얻는다. 또 나중에 그와 도주를 결심하는 여자 미쓰요는 쌍둥이 동생에게는 왠지 섬뜩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겉으로는 성숙한 장녀언니고 유이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따뜻한 여자가 된다. 마지막으로 유이치는 친모에게는 돈이나 뜯는 나쁜놈, 할머니에게는 왠지 여성의 본능을 일으키는 사랑하는 손자, 요시노에게는 왠지 기분 나쁜 놈, 미쓰요에게는 눈물 짓게 만드는 아련한 사람.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 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지만, 약인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빼면 악인이다. 사실 징글징글한 악인만 아니면 대체로 처음에는 약인이었던 사람이 순간적으로 악인으로 변한다. 점 하나를 빼듯이 자제심을 빼버리고 나면.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약하다. 나도 그렇다.

그런데 도저히 그 남자에 관한 말은 젊은 형사에게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말을 하면 자기도 요시노 같은 부류의 여자로 보일 것 같았다. 만남 사이트 같은 데서 남자를 구하는 여자의 친구. 그렇게 보이기 싫어서 젊은 형사에게 말할 수 없었다. (p.95)

미아는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을까. 아마 그녀는 스스로 의식하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미아 같은 여자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나 같은 남자가 20년이나 잊지 못할 말을 건네주는 여자였던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p.278)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 하는.(p.439)

"요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지. 자기에겐 잃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강해진 걸로 착각하거든. 잃을 게 없으면 갖고 싶은 것도 없어. 그래서 자기 자신이 여유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뭔가를 잃거나 욕심내거나 일희일우하는 인간을 바보 취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안 그런가? 실은 그래선 안 되는데 말이야." (p.448)

그런데 그 사람, 제 예상과는 달리 "원치 않는 돈을 뜯어내는 것도 괴로워"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럼 안 뜯어내면 되잖아"라며 웃었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렇지만 양쪽 다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하니까" 라고 하더라고요. (p.466)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6-01-30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뽈쥐님, 좋은 저녁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