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기전에 만화책을 보고 있다. 만화도 이거 하나밖에 없기도 하지만.. 중학교 때 보고 재밌어서 일본어 공부(이 핑계로 만화든 잡지든 드럽게 많이 삼..) 겸해서 샀는데 나이 들고 보니까 진짜 재밌다. 사실 중학생 때는 조금 대사가 많아서 한국어라도 버겁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이런 고급스런 블랑제리 문화 따윈 모를 때 였으니 케잌 설명하는 부분은 쿨~하게 넘겨버렸다.


내가 드럽게 성숙했는지 내 친구들은 별로 안 좋아했다. 일단 그림의 문제도 있고. 일반적인 여중고생의 취향은 아니다. 아기자기하게 예쁜 얘기도 없다. 게다가 이 책이 재밌다고 추천할 때 당최 어디서 끓어읽어야 하는지가 애매하기도 하다. 서양골동/양과자점? 이게 맞기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베이커리를 파는데 동양과자점은 될 수 없으니) 이렇게 발음하기 힘든 무시무시한 제목도 공유를 힘들게 하는 원인 중 하나다.


일단 요시나가 후미는 내가 젤 좋아하는 만화가. 주로 게이물이 전문이다. 그 쪽(?) 취향은 아니라서 전 작품은 안 읽어봤고 [오오쿠]와 [사랑해야 하는 딸들] 정도 까지만.. 


아무튼 재미있는 것은 요 시리즈인데 남자들로 구성된 예능 토크쇼가 재미있는 이유는 필터링이 많이 없어서인 것과 같이 대사가 찰지다. 과자점 '앤티크'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와 네 남자의 과거 이야기, 상처가 중점이 되는 나름 힐링 만화다.


먼저 앤티크의 주인인 타치바나. 엄청난 대기업 일가 중 한명으로 경영 세습 순위에는 들지 못하지만 도쿄대 출신에 외무고시도 사법고시도 합격하는 '되는 남자'이지만 매번 여자에 차여서 좌절하고 무너지면서 금방 그만두고 자기네 회사 영업직을 지냈다. 같은 회사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실패함과 동시에 평소 숙원의 사업이었던 카페를 개점. 천재 제빵사(고급표현 : 파티시에) 오노를 고용하고 예쁜 여자들을 종업원으로 고용하고 싶었지만 오노의 성정체성과 여자를 두려워 하는 마음 때문에 실패. 어릴 때의 공포스러운 경험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자주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기도 한다. 진짜 '엄친아'이지만 여자에게 차이면 쉽게 그만두는 유리멘탈의 소유자에 가슴 큰 여자만 좋아하는 시시한 취향을 가졌다.  


파티시에인 오노는 천재 장인, 제빵사이기도 하지만 유흥가에서는 '마성의 게이'로 통한다. 뛰어난 실력이 있지만 오노가 가는 가게는 언제나 오노를 둘러싸고 종업원 간에 싸움이 생기거나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해서 언제나 금방 짤리거나 도망쳐 나오기 일쑤다. 이 오노를 일그러진(!) 사랑으로 밀어넣은 것은 어떤 남자. 그리고 원수는 외나무, 아니 직장에서 만나는데.. 


에이지는 고아원에서 자라난 문제아였다가 권투 재능 하나로 꽃미남 선수로 꽤 이름을 날리던 중에 각막박리 때문에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된다. 배운 것 없이 뭘 할까 고민하던 중 마침 서빙할 아르바이트 모집에 면접을 보게된 에이지는 오노의 케잌을 맛보고 사정을 해서 견습생으로 들어오게 된다. 주인보다 사부를 따르는 스무살의 에이지는 여자와 노는 기쁨은 잊고(이미 어릴 때 다 경험해보았으므로) 순수한 열정으로 케잌 장인의 길에 매진한다.


외모만 보면 치카케는 매트릭스 요원처럼 위압적이고 멋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자. 하지만 너무 순수하고 착해서 미워할 수 없는 착한 곰 캐릭터. 타치바나 집에 가정부를 했던 어머니를 따라 들어오게 되어 타치바나의 오른팔 같은 행세를 하지만 실제론 타치바나가 그의 뒤치닥 거리를 해주는 꼴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편안하고 믿음직한 느낌을 주는 치카케는 타치바나에게 은근한 힘이 된다. 착하고 순수한 치카케는 마성의 게이의 덫에도 걸려들지만 지나친 순수함으로 오노를 무장해제 시켜버린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도 엄청난 비밀이..(스포일러 : 자식이 있음- 이 사실보다 자식을 만든 이유가 진짜 웃김)


이런 성격을 가진 남자 네 명이 드글드글하게 나와서 4권을 빼곡히 채우지만 전작 화려한 작가답게 화면 전환이 세련됐다. 그들에게 얽혀 있는 과거의 상처와 현재가 적절히 혼합되어 캐릭터의 행동을 이해시켜준다. 그리고 화려한 케익과 에프터눈 티의 향연까지. 열심히 읽으면 무스가 어쩌고 버터의 온도가 어쩌고 딸기의 원산지가 어쩌고.. 제법 세련되어 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세일러문의 왕방울만한 눈을 갖지 않은 현실적인 그림체와 실생활에서 보는 소재로 현실성을 크게 부여하지만 이것은 만화다. 재벌가 + 외무고시, 사법고시를 대충 패스 + 손만 대면 스트레이트도 게이를 만들어버리는 마성의 게이.. 뭐 그래도 이야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천재 파티시에를 고용해서 넉넉한 자본력으로 시작한 앤티크이지만 홍보를 위한 방송에서 여러 제빵점과 만나는 바람에 오노를 힘들게 하기도 하고 오노의 옛사랑이 날아와서 해적을 쳐놓자 파티시에를 뺏길 위기에 놓였던 타치바나는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내가 만약 너랑 자면 너는 우리 가게에 있어줄래?!" 같은 대사까지 막막 던지면서 은근 힘겨운 경영을 이어간다. (진짜 힘겹게 경영하는 자영업자는 이런 게 제일 만화같다고 여길 수도.) 


이 4명의 주인공도 주인공이지만 여자 인물들도 상당히 독특하고 생활력이 팔딱팔딱 한다. 생활력이 팔딱팔딱한 점이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기도 하고 현실감을 주지만 반대로 현실감이 떨어지기도 한다. 타치바나를 거쳐간 여인들의 헤어짐의 이유나 ("넌 너무 무리를 하고 있어." 혹은 "다른 애들이 뭐라 그러는 줄 알아? 같은 안경이라면 오노가 더 귀엽다고...그래도 걔랑 있으면 내가 필요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도쿄대 출신이지만 일을 못해서 좌절하는 여자친구에게 청혼을 하자 자존심 상한 듯 걷어차거나.. 솔직히 재벌가 남자가 아름답게 청혼하면 그렇게 쉽게 거절할 수 있는 여자가 얼마나 되려나. 중학교와 성인 사이의 갭은 엄청난 건지 당시에는 이런 생각없이 순수하게 쭉쭉 읽었었는데. 쩝.


또 스치는 에피소드에서 권투선수의 아이를 가진 '물장사'하는 언니가 끝내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하는 내용, 아이를 갖고 싶어서 치카케에게 매달리는 타치바나의 전 여친인 능력있는 작가까지... 아이를 만들고 싶었던 30대 후반의 작가가 허우대 좋은 치카케를 처음 대면했을 때의 대사가 진정 베스트다. '머리는 나쁠 것 같지만 팔팔한 정자를 갖고 있을 것 같은 남자...' 라고 생각한 그녀는 치카케에게 사정한다. "저기 당신하고 자고 싶어! 나 시간이 없어! 제에발..?!" 


가장 큰 줄기인 타치바나가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한 과정은 이야기 끝에 조금 해소가 된다. 조금 현실과 동떨어지는 내용이지만 탄탄한 스토리와 교양으로 재미와 감동은 보장한다.




* 드라마화 되었다고 하는데 안 봤다. 앞으로도 볼 계획 없다. [허니와 클로버]를 스무살이 넘어서 읽고 눈물을 줄줄 흘려서 영화도 조금 볼까 했더니 시작하자 마자 껐다. 굳이 같은 기분을 느낄 필요는 없지.

   

* 비추천 : 게이 이야기를 절대적으로 안 좋아하는 사람. 글루텐 다이어트 중인 탄수화물 중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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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3-30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로도 만들어 진 걸로 기억하는데요? 어즈버~~~ㅠㅠ
저는 다시 일본어 공부 한다고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교보에서 하루키의 색채가 있는... 그거 사왔는데 언제 읽을 지!!ㅠㅠ

뽈쥐의 독서일기 2015-03-30 20:30   좋아요 0 | URL
영화까지 만들어 졌나요~? 인기가 대단하네요. 스토리도 탄탄하긴 하지만서두..ㅎㅎ
우와 하루키 책으로 일본어 공부하시는군요. 대형서점 가면 공부가 마구마구 하고 싶어지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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