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시렁 - 등산이 싫은 사람들의 마운틴 클럽
윤성중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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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등산을 싫어하는 사람인가? 좋아하는 사람인가? 생각을 해보니 막 좋아하는 사람 같지는 않다. 정상에서 맛보는 쾌감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오르는 내내 숨이 차는 건 좀 싫은 것 같다. 내가 등산을 갈 때는 날씨가 좋은 날, 막걸리가 좀 땡기는 주말. 숨이 차게 오르곤 마시는 막걸리는 꿀맛. 물론 딱 한 잔이어야 한다. 산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생각 없이 마셨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이제 막 12살이 된 막내는 등산을 갈 때마다 후회하면서도 꼬시면 넘어오는데, 아차산에는 산을 오르는 길목마다 아이스크림 파는 분들이 계신다. 헥헥대고 올라가서 먹는 포기하고 싶을 때 먹는 아이스크림이 꿀맛이라나.

숲은 또 좋다. 제주도에서 걷는 숲길, 북한산 둘레길도 제법 좋다. 나무가 가득한 곳을 걷다 보면 분노가 사라지는 것 같다. 갑자기 세계 평화가 온 것 같은 기분. 숲은 특히 비가 내릴 때, 혹은 빛이 좋을 때가 좋다. 그렇다고 지리산 종주를 한다거나 겨울 한라산에 오를만한 용기는 나지 않는다. 적당히 동네에서 가까운 아차산 정도가 쉽고 빠르고,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정도다.

<등산 시렁>은 등산이 싫은 사람들을 꼬셔서 산에 데려가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이야기를 써야 하는 코너이기 때문에 작가는 이 사람 저 사람 꼬셔서 산에 데려간다. 이것도 재주다. 싫은데 같이 가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가 좋거나 궁금하기 때문에 못 이기는척 가주는 게 아닐까? 월간 <산>에서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랑도 가고, 시인이랑도 가고, 경쟁사 직원이랑도 가고, 사진기자랑도 간다. 패션잡지 기자랑 산에 올라가 낭독회도 하고, 산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소규모 사생대회를 열기도 한다. 산에서 이것저것 다 해보면서 함께 간 사람들과 수다를 떤다. 산에 오르고 내려오는 시간 동안 이야기는 계속되고, 속마음도 알게 되고, 서로 몰랐던 것들도 알아간다.

이것은 산이 주는 신비로움인지, 윤성중 작가의 독특한 코드 때문인지 모르겠다. 사실 그의 실험정신이 가득한 성향도 한몫하는 것 같다. 별 것 아니라고 함께 해보자는 등산 제안은 평소에 관심 없었지만 해볼 수도 있는 일, 해봐도 좋은 일이 되는 것 같다. 산은 무해하다. 물론 위험한 산도 있지만, 산 속에는 생명들이 모여 산다. 서로 다투지 않고. 산을 유해하게 하는 것은 사람일 뿐. 무해한 산은 언제든 오라고 우뚝 서있다. 올테면 와. 언제든지 만나줄 테니. 뭐 그런?

작가는 누군가의 고민을 듣기도 하고, 성취를 맛보게 하며, 의미를 찾아 주기도 한다. 산을 함께 올랐을 뿐인데. 신기한 일이다. <등산 시렁>은 등산을 한 에피소드들도 있지만, 작가의 엉뚱하고 유쾌 발랄한 이야기들도 담겨 있다. 등산복 브랜드에 전화하고 부탁새 매장에서 판매 체험을 해보고, 산악회를 뽑는 대학에 만학도인척하며 면접을 본 후 사실을 밝히고 인터뷰를 해보고, 꼬뮨 드 서울 멤버들과 남산 달리기를 해보고, 아내의 브라톱을 입고 뒷산을 달려가는, 골 때리는 이야기들이 방긋방긋 나타난다. 낄낄대고 웃다가 그의 도전과 실험 정신에 박수를 보냈다.

이 책이 시종일관 산에 오르고, 산의 풍경을 묘사하고, 국내에 있는 산들을 찬양하며 소개했다면 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어쩌라고. 안 궁금해.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갑자기 ‘풉!’하고 웃다가 ‘나도 이번주는 등산 가볼까?‘ 어느새 동화되어 함께 등산을 갈 사람을 머릿속으로 물색하게 되는 신비로움이 있다. 등산을 싫어하는 사람이, 나도 좀 가봐? 들썩거리다 다짐이라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또 하나의 재미는 삽화다. 작가가 이야기마다 그려 넣은 그림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투박한 선과 화려한 색 조화에 놀라기도 하다가, 이건 그림인가 낙서인가 싶기도 하지만 묘하게 이야기의 장면들과 어울려 만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림도 글도 사람의 성향이나 성격이 담겨 있는데 꿍꿍이 없는 솔직함으로 달리고, 등산하고, 사람을 만나는 사람일 것 같았다. 좋아서 하는 사람 같다. 쓰고, 달리고, 등산하고 모두.

등산을 싫어하는 사람도 그와 간다면 산이 괜찮아 거 같다. 산을 오른다는 행위에 집중하지 않고,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러 간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슬렁슬렁 따라가다보면 정상에 오르게 되는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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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공부 - 똑바로 볼수록 더 환해지는 삶에 대하여
박광우 지음 / 흐름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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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죽음을 자주 마주하는 이의 일상은 어떨까,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쓰이던 책 <죽음 공부>.
건강한 삶도 있지만, 아픈 삶도 있다. 박광우 의사는 신경외과, 방사선종양학과 의사로 말기암과 파킨스병에 관심이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대부분 암과 파킨스병을 가진 사람이다. 똑같은 암이라도 증상과 징후는 모두 달랐다. 일상도 다르고, 가족들이나 환자의 건강상태나 성향에 따라 마지막도, 암을 맞딱드리는 상황도 다 달랐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말기암, 암, 유방암, 위암, 폐암으로 치환되는 게 얼마나 납작한 말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암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다양했다. 고통이 느껴질만큼 끔찍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삶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라면, 이러한 통과의례는 없길 바라는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이겨낼 수 없는 고통 속에 갇힌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되었다. 쉽지 않은 선택이라도 치유되지 않는 고통이라면, 끊임 없이 나를 쫓아오고 일상을 영위할 수 없을만큼 고통스럽다면 존엄사를 택하는 게 낫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더 또렷해졌다.

생의 집착과 간절함은 병을 만나고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까지나 살것처럼 굴다가, 병을 만나고 죽음을 마주하게 되어서야 더 간절해지는 생. 어떻게 죽는 게 나은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방법을 찾는 생. 그런 이야기들을 만나고 나면 더 생각이 많아졌다.

집으로 가서 죽고 싶은 사람, 살고 싶어서 가족을 괴롭히며 악다구니를 쓰고 막대한 빚을 남겨두고 가는 사람, 삶의 의지를 찾게 하려고 임종이 다가온 것을 숨기는 가족, 어떻게든 회복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간호에 전념하는 남편, 종교적 신념 때문에 초기에 암을 치료하지 않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30대 여성, 일밖에 모르고 살아왔던 일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사람, 병으로 고통에 지쳐가던 동거인이 죽여달라는 부탁을 들어준 친구, 엄마가 낫지 않을 거라는 의사의 말을 믿지 않는 가족.

이 책에는 병과 죽음을 마주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작가이자 의사가 만나온 죽음에 문턱에 있거나, 죽음으로 가는 환자들의 가족들, 당사자, 주변 사람들. 큰 병 앞에서 남은 일상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통증이 자주 찾아올 때, 일상을 조금 더 버텨보려고 항암치료를 받으며 버텨나갈 때, 다가올 고통이 두려워 치료조차 거부하다 더 큰 고통을 마주할 때, 등을 굽히지도 못하고, 몸을 펴지도 못하고 누워서 잠을 자지도 못하는 통증에 시달려야 할 때. 이러한 때에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갑자기 찾아온 고통 앞에서, 통증 앞에서 나는 의연할 수 있을까. 죽음을 준비할 수 있을까. 받아들이고, 남은 시간을 좀 더 의미있게 쓰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

죽음까지 가는 길이 점점 길어지는 시대다. 병을 막고, 수명을 늘리고, 길고 길어지는 기대수명에 죽음도 두려움이 된다. 고통 없이, 너무 길지 않게, 병에 걸려 병원에 의존하지 않고 죽음에 이르고 싶은 게 모든 사람의 마음일 테지. 나 또한 그런 마음으로, 그런 기대를 하며 살아가지만 인간의 마음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시간이 있을 때, 지금, 현재를 잘 누리고, 불가항력적으로 죽음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시간이 찾아왔을 때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상상해보고 고민하며 읽었던 책. 다양한 돌봄에 대해 논의되고, 주변에 부모 돌봄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아지면서, 죽음에 대한 결정도 생각을 해두어야 할 때가 왔다는 걸 느낀다. 모든 걸 다 가진 사람도 죽음과 병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너무도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진실을 자주 잊고 산다. 잘 죽기 위해, 잘 살아가는 것부터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죽음 공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순간이 닥쳤을 때, 이만하면 잘 살아서 괜찮다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일상을 살아내고 싶다. 생과 좋은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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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내 몸을 공부할 때 - 소녀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여성이 알아야 할 몸과 마음 이야기
박혜연 지음 / 아몬드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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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대를 떠올려보면 누구도 몸에 대해, 여성으로서 맞딱드리거나 닥칠 수 있는 어떤 상황에 대해, 성적인 지식에 대해, 잘못된 인식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터부시하는 성에 대한 이야기. 금기라도 되는 듯 성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외면했다. 친구와도 자유롭게 나눌 수 없었던 이야기였고,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조금씩 내 몸에 대해 알아갔던 것 같다.

왜 우리는 알아야 할 것들을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고, 창피해하고, 주저하고 솔직하지 못할까. 더불어 진짜 생각해야 할 것들은 알아서 알아내라는 식이다.

남자와의 성관계를 가질 때 요구하거나 지켜야 할 기본적인 정보도 잘 교육되지 않고, 임신이 된 이후에야 여성의 ‘처신’에 대해 말하고 무지함을 꾸짖는다.

임신을 하면 변화하는 여성의 몸이 어떻게 변할지, 원치 않은 임신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상황, 피임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아이를 낳고 난 이후에는 어떤 몸의 변화와 마음의 변화가 있는지. 수많은 질문들은 아래아래로 묻어둔다.

첫 생리를 했을 때, 그 시기가 유년기였다. 소식을 들었던 친척 어른이 “이제 고생 문이 열렸네”라고 건넸던 말이 3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혹시 내가 잘못된 상황에 처한건지 당혹스러웠고, 엄마도 내 몸이 어떤 상태인지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배우지 못했으니 경험으로 전하는 말들이었을 텐데 그또한 긍정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내려오고 내려온 올바르지 않은 태도들. 예전과는 달라졌다고 해도 여성의 몸에 대해 여전히 잘 이야기되고 있지 않다.

<스무 살, 내 몸을 공부할 때>가 그래서 반갑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상황이거나 질문하기 어려울 때, 이야기를 나누기 불편한 마음이 들 때, 이해가 안 될 때 이 책을 꺼내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을 잘 모르면, 당혹스러운 일을 겪었을 때 혹은 건강하지 않은 상황에 닥쳤을 때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된다. 누군가에게 말했다가 험담을 할까봐, 혹은 창피한 마음에 입을 꾹 닫고 있다가 더 큰 일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몸의 변화는 마음까지 변화시킨다. 내 몸을 잘 지키려면 내 몸을, 내 마음을 잘 아는 게 먼저다. 잘 모를 때는 잘 아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좋다. 그렇다면 이 책을 열고 궁금한 것을 묻자.

모르는 건 창피한 게 아니다. 알려주지 않는, 적극적으로 논의하지 않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사회가 잘못되었을 뿐. 우리가 좀 더 적극적이면 좋겠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알 수 있도록. 성적과 진로만 이야기하지 말고,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이야기를 자꾸 나누면 좋겠다.

#스무살내몸을공부할때 #아몬드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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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지 않아서 웃지 않음
선우은실 지음 / 읻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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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읽으면서 비판적 시각을 갖기보다 생각의 전환을 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늘 그렇다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것들을 늘 그랬던 게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일일 수도 있다고 말해주는 책 <웃기지 않아서 웃지 않음>.

가족과의 관계 안에서 오는 돌봄, 관계, 가부장적인 가족 안의 모순, 결핍 등을 돌아보는 글들은 내 안의 이야기와 대입할 수 있어 좋았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나 <심슨가족>에 대한 해석은 생각지도 못한 해석이었는데 <웬그막>의 해석을 읽으며 낄낄댈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우스운 가부장의 모습을 다시 그려보고 있자니 예사롭지 않은 드라마였다는 걸 깨닫는다. 우스꽝스러운 상황들에 가볍게 웃기만 했던 상황이 문득 확 달라져버린 걸 알았다.

관계 단절의 이야기나 위계에 의한 관계, 웃음을 두고 피권력자와 권력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 공감 되었는데, 내가 겪었던 어떤 상황과 대입되기도 했다. 또 ‘서비스’라는 형태로 도처에서 강요되는 웃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 좋았다. 웃기지 않아서 웃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임을 곱씹어 생각해보게 됐다.

📖성장이란 ‘해주는 사람’을 찾느니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

이 문장은 마음에 확 와닿았는데 수많은 경험들 속에서 느꼈던 생각이 담겨 있어서였던 것도 같다.

📖 결핍은 본래 질긴 것이지만 내가 돌보지 않는다면 좁은 울타리에서 무한 증식할 뿐이다. 가뜩이나 자가 증식하는 결핍을 더 빠르게 배양하는 관계는, 그러므로 좋다고 할 수 없다(같이 질식할 뿐이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서로를 갉아 먹는 관계를 너무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내가 아는 이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문장이었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행동으로 잘 되지 않아 같이 질식하기 위해 굴로 들어가는 관계들을 떠올리며, 알면서도 끊어내지 못하던 관계들을 떠올리며 나의 생활 속 관계들을 또 한 번 점검한다.

여성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생활 속 상황들에 같이 분노했는데, 유부남인 주제에 은연 중인 말로 성적 관계를 원하는 말들이나, 범죄의 대상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자 ‘아닌’척 하기를 말하는 솔루션들에 대한 ‘화‘는 여성 문제에 대해 해결하려 하는 의지가 있는 사회인지 의문을 품게 했다.(사실 의지는 모든 여성들의 변화도 필요하다.)

관계 안에서의 시각들이 때때로 놓치고 지나가 버린 것들을 깨닫게 되는 책읽기였다. 불편한 마음이 들어도 그냥 그렇지 뭐 하고 지나쳤던 것들이 그냥 지나치고 말 일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되새기면서 생활비평의 시각을 가져봐야겠다는 의지를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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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는 육개장이 없어서
전성진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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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스에게 <베를린에는 육개장이 없어서>를 보여줬더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어떤 말을 했을까? 이 책을 끝까지 읽고 상상했다. 아마도 숭진을(작가님 이름은 성진이지만, 요나스는 발음을 잘 하지 못해 숭진이라고 불렀다) 꼭 안아주며 너무 멋지다고 말해주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겠지. 자신과의 추억을 써준 걸 무척 기뻐하며 요나스다운 음식을 차려줄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작가의 독일 정착기인 줄 알았다가, 집구하기 대작전인가? 지저분한 룸메이트와의 파란만장한 독일 생활기로 이동하더니, 눈물 찍 콧물 찍 우정기로 느껴졌다. 팔딱팔딱거리는 생동감 넘치는 우정기. 누구하나 평범한 사람은 없고(특히 요나스가 제일 괴짜지만, 뭔가 사랑스럽다, 작가가 사랑스럽게 쓴 것 같기도), 요나스와 숭진이 함께 사는 일상도 내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였다.

베를린에서 집을 구하던 전성진 작가에게 나타난, 아니 찾게 된 요나스. 29살 여자와 53살 남자와의 동거는 읽자마자 불길했다. 한국적 사고에 갇혀 있는 나로서는 무슨 큰일 날 일이라도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이 아저씨가 뭔 나쁜 짓을 해서 탈출기가 되는 거 아닌가 불안불안해 하며 읽었지만. 웃기고, 더럽고, 종종 성가시게 하는 아저씨일 뿐 어쩐지 순수한 매력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전 절대 같이 못 살았을 것 같아요, 작가님 최고…. 2년이나….)

팬티만 입고 거실을 돌아다니고, 함께 사는 집이니 방문을 열어 놓자고 하고, 청소는 거의 하지 않고, 부엌은 엉망이고, 시도 때도 없이 노크하고 문을 열어 뭐하냐고 묻고, 이런 요나스와 2년을 함께한 요나스와 최장 룸메트. 그 오랜 시간을 함께 살며 나눈 이야기, 에피소드가 가득 담겨 있다. 특히 맛깔스러운 것은 전직이 요리잡지 기자였던 작가가 음식과 에피소드를 자연스럽게 엮어줘 군침을 흘리게 한다는 것.

어떤 음식을 먹을 때, 생각나는 추억이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함께 먹은 음식들 속에 곁들인 이야기가 새록새록 생각날 테니, 정말 특별하고 즐겁지 않을까? 전성진 작가가 음식과 함께 부려놓은 이야기는 멋지고 유쾌한 성찬 같다. 누구나 먹어도 탈나지 않고, 함께 웃을 법한. 그래서 기분이 좋아질 법한.

요나스의 아들 일리아스와 나눈 이야기와 함께 간 클럽에서 경험한 에피소드, 요나스의 캠핑장 초대를 애써 미뤄두다가 한국 친구들과 함께 가서 생각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 에피소드, 요나스가 쓰러져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다가 만난 놀라운 병원식, 작가가 겪은 인종차별 이야기.

산문집은 맛있는 음식이 잔뜩 있는 메뉴판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새 집을 찾아서 결국 함께 사는 것은 2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숭진을 그리워하는 요나스의 짧은 메일은 눈물이 핑돌게 한다.

생활은 생활이기 때문에 내가 읽은 이야기는 단편적이었을지 모른다.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게 쉽지도 않을 뿐더러 국적과 나이도 다르고, 문화와 생활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만약 요나스가 숭진을 괴롭히는 괴팍한 중년 아저씨에 불과했다면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을까? 함께 사는 게 어렵고 고단하기도 했겠지맞 함께 한 다정한 시간들, 서로를 살핀 순간들, 그렇게 쌓인 우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을 탄생한 게 아닐까.

타인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한 요나스. 지금 삶을 잘 사는 게, 나의 행복이 중요하다는 걸 가르쳐준 요나스가 있었기에 숭진의 독일 생활이 많이 외롭지만은 않았을 거다. 이런 관계들은 늘 부럽다. 어디서라도 만나지 못할 것한 관계들이 우정을 나누게 되는 시간들은 더 특별하니 말이다.

”나는 오늘 너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얘기를 하는 일이 즐거워. 그게 전부야.“
….
”무엇보다 나는 그저 지금의 삶이 행복하고 즐거워. 내가 지금 살아 있으면 됐어.“

죽고 싶다는 생각이 잦아진 작가가 죽음에 대해 물으면, 현재를 살라고 말해주는 요나스. 맛있는 걸 먹고, 좋아하는 것을 하고 그것으로 하루하루 일상을 채우라는 요나스의 조언은 눈물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제목에 육개장이 왜 등장하는지는, 책을 끝까지 읽는 독자만이 알게 되는 보물찾기. 나조차 조금 갑작스럽고, 당황했지만. 그와 함께한 이야기를 이렇게 남겨두었으니, 요나스가 어디에선가 말하고 있지 않을까?
“알레스 굿”

#안온북스 #베를린에는육개장이없어서 #전성진 #책 #리뷰 #서평단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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