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함께 있지만, 외로움을 느낀다. 대화를 나누지만, 진짜 이야기는 할 수 없다. 기쁨을 이야기해도 함께 기뻐하기 힘들다. 슬픔을 이야기해도 누구의 슬픔인지 알려하지 않는다. 그게, 지금 사회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정작 진짜 가진 것이 없는 사회. 그래서 함께 있어도, 포근하고 친밀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혼자 있기에는 사회에서 밀려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다.

 

"때로는 '혼자' 있고 싶다."라고 말하면, 이상한 취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꼭 별나라나 외계에서 온 사람인듯, 때로는 혼자 책을 읽고 싶고, 때로는 혼자 갤러리에 가서 전시 관람을 하고 싶고, 때로는 혼자 여행을 떠나고, 카페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누리기도 하고, 길거리를 쏘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시간을 아끼고 싶을 때가 있다. 이해받지 않아도, 이상하게 바라봐도, 그게 전혀 유쾌하지만 않은 것을 알아도 그런 시간들이 소중할 때가 있다. 이러한 시간이 필요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라고 하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와 말하지 않을 권리, 눈을 감거나 물을 먹는 순간도 타인에 대한 의식 따위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가 때로는 필요하다. 그 시간 속에서 나를 돌아볼 수 있다는 거창한 말을 빼고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수백수천가지다. 그것이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고독'의 시간이라 하겠다. 내가 박탈당하고 싶지 않은 시간, 때때로 찾고 싶은 시간, 강요받고 싶지 않은 시간 말이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 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 본문 31쪽

내가 공개하고 싶은 만큼 공개할 수 있고, 전하고 싶은 만큼 전할 수 있다. 남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뒤떨어졌다는 마음이 들며, 타인의 생각이 내 생각인 것처럼 비판없이 흡수하고 만다. 누군가가 먼저 달려가면, 이기지 못해 안달을 내며, 누군가가 돌아서면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안녕'하고 만다. 언제나 누군가와 접속되어야 하며, 혼자 있는 것을 극도로 불안해 하는 마음. 사실, 네트워크의 작동이 충분한 행복과 만족감을 주는 것도 아니며, 외로움을 위로해주지도 않는다. 그저, 비판없이 시대의 조류에 흘러가는 게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판단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그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입밖에 내지 않았던 말들로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미 온라인에 익숙해진 우리는 쉴 사이 없이 '접속'한다. 스마트폰의 활성화로 어디서든 언제든 누군가에 접속하는 것은 쉬워졌고, 누군가의 소식을, 의견을 듣는 것에 익숙해졌고, 내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쉼 없이 흘러나오는 말들과 의견 속에서 서로를 상처 입히기도 하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내뿜기도 한다. 생각보다는 말이 먼저 나가며, 그 말을 맞받아치는 행위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싸움에서 감정이 파괴된다. 프라이버시를 지키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프라이버시를 공개하는 것을 즐긴다. 그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존재를 알리기도 위함이지만, 집단에서 이탈해 외로워질까봐 두려워하는 또 하나의 모습이다.

 

지지 않으려 하며, 소유하길 좋아하고, 그것이 옳지 않아도 나빠도 모두가 그렇게 산다면 나도 그렇게 살기를 허락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서 문화, 관계, 성향마저도 기형적으로 드러난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넘치듯 흘러나온 풍요로움과 함께 우리가 얻게된 것은 풍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풍요 속에서 나타나는 정신적 빈곤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고, 그 현상 자체를 서로 부추기고 있는 이상한 형태를 띄고 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지 오래며, 중요하지 않아보이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되는 이상한 시대가 되었다.

 

10대들은 필요 이상의 선택과 기회의 과잉에 노출되어 있으며, 신용카드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정신마저도 파산하고 만다. 아이는 이미 아이의 감성을 잃어버린지 오래이며,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은 성형 중독에 이르게 되고,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유행 속에서 자신의 개성 따위는 던져버렸다. 소비지향적 사회는 쇼핑을 독려하며, 공포와 불안이 질병을 권하며, 이런 질병 속에서도 건강을 찾는 것은 부에 따라 불평등하게 이루어진다. 고독하지 않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이 찾아왔다. 해결하려해도 끝이 없는 되물림과 도돌이표. 한쪽에서는 무너져 감을 알면서도, 한쪽에서는 박수치며 환영한다. 불평등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이익과 특권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공포, 욕망, 획일화, 불평등. 방심하고 있는 사이 아무도 모르게 스며들어 누군가의 삶을 죄의식없이 파괴한다.

 

그렇다면, 왜 자각하지 않는가? 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가? 풍요가 가득찬 세상에서 우리는 왜 점점 외로워지고 있는가? 사회는 점점 나를 밀어내고 있는데,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는데도 왜 받아주지 않는가? 사회가 권하는 것들은 왜 나를 불행하게 하는가? 믿어야 하는가? 믿지 말아야 하는가? 왜 비판하지 않는가? 왜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가?

 

언제나 위협당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그 해결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시대에 사는 것은 이러한 의문마저도 지워버렸다. 하지만, 이런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도 또 다른 강함을 찾게 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우리에게 전하는 편지 곳곳에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따뜻한 비판 뒤에 인간에 대한 응원이 담겨 있다. 점점 파괴되어 자신조차 잃어버리는 인간이지만, 그 사이에서 다시 대안을 찾아가는 것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도 있지만 분명 굴욕적인 것들도 있다. 나는 그 사명이 어떤 어려움을 안겨준다 할지라도, 결코 그처럼 굴욕적인 것들이든 아름다움이든 간에 둘 중 그 어느 하나에도 불성실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행복한 사람이 되는 비법들을 전달하면서 철저한 자기 확신에 차 있는 많은 작가들은 결국 그처럼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려는 저 신앙고백이 당연히 비난받아야 할 도발에 불과하다고 매도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카뮈는 조금의 그럴듯한 의심도 없이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바로 그와 같은 두 가지 임무들 중에서 언뜻 보기에 다른 한 임무를 더 많이 달성했다는 이유 때문에, 어느 '한쪽 편을 들어서' 다른 어느 한쪽을 희생하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양쪽 임무 모두를 달성할 수 없는 것이라 여기며 내팽개쳐버리는 일로 끝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카뮈는 자신의 표현대로, "비참한 고통과 태양 사이의 중간 쯤 어딘가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킨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참한 고통이 나에게 '태양 아래의 모든 것들은 보기 좋았다'라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게 했다면, 그 태양은 나에게 '역사가 모든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던" 셈이라고. 결국 카뮈는 자신이 "인간의 역사에 관해서는 비관적이지만, 인간에 관해서는 낙관적"이라고 고백했다. 왜냐하면 그가 주장했던 대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작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를 거부하는 유일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란 카뮈가 지적했던 것처럼, "단지 더 나아질 수 있는 하나의 기회에 지나지 않을뿐"이며, 그렇기에 "그처럼 자유롭지 못한 어떤 세계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지 당신이 실존한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반항의 행위가 되도록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 본문 386쪽 

유동하는 근대 세계의 위기와 불안, 공포, 정신의 피폐, 외로움. 많은 것에 둘러싸여 있지만, 정작 곁에 있는 것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시대. 이 시대는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바꿔나가야 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비되어버린 의식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돌리지 않고, 연대하고 합심하여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이 모든 현상은 인간이 만들어낸 결함이며, 그 결함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인간이기에. 인간의 삶은 '획득'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아주 특별한 희망'이 되어야 한다. 잃어버린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던지는 그의 일갈에 눈을 떠야 겠다. 이미 행복의 의미조차 잊고 사는 인간의 어리석음.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수많은 네트워크에서 헤엄치며 떠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성찰하고 되돌아보게 하는 '나'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껍데기로 사는 시간을 버려야, 진정한 '나'의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음을. 그것을 깨달아야 좀 더 잘 살 수 있는 세상임을. 이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야할 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뮤니스트]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때 '공산주의'는 막연한 공포였다. 우리의 교육은 '공산주의'를 알고 싶어하는 것 자체를 금지했고, 큰일이 나는 것처럼 굴었다. 그것은 하나의 민족이지만 두 개의 사상이 존재하는 독특하면서 슬픈 현실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무조건 '적'으로 간주되던 공산주의가 '적'이 아니라 하나의 '학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대학에 입학해서 깨달았다. 맑스에 열광하던 선배들이 꽤 많았고, 무슨 이야기인지 뚜렷하게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공산당 선언'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한 때는 '적'으로 간주되었던 공산주의에 관한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공산주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그 태동부터, 지난한 시대를 거쳐 소멸하기 까지의 정황들이 길게 이어져 있다. 그 역사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루어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노동자가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하나, 그 과정 속에서 혁명을 이루어내려 했던 사람들은 종국에 독재자로 전락했다. 모두가 평등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 권력이 강요되었다.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게 공산주의의 모토이지만, 결국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피를 흘렸다. 자신의 이념과 맞지 않으면 숙청되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의식 속에서 공산주의가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찾게 된다.

 

물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한 이념의 실현은 결국, 어떤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변질되기 마련이다.

누구나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갖는 평등주의를 실현하려 했지만, 사실 지도자들 조차도 그 평등주의에 맞도록 실천하고 살아온 것인지는 의문이다. 공산주의는 모두에게 희망적인 이념이었을지는 모르나, 결국엔 '괴물'로 변해 제 몸을 삼켜버렸다.

 

요즘에는 자본주의에 지친 이들이 모여 '코뮌'을 만들고 있다. 경쟁으로 피 터지게 싸우며,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함께 일하고, 함께 살고자 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이 코뮌들의 기원은 '공산주의'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조금 더 건강하며, 작지만 강한 힘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공산주의가 이미 무너져 버린 세계는 분명하나, 그것의 씨앗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를 생각하고, 모두가 '평등'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모여 건강한 모습으로 하나, 둘 태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은 '협력'이다. '협력'하지 못하는 세계는 무너져 내린다. 지탱할 힘을 갖지 못하면, 무너져 버리는 게 진실. 유럽의 몇몇 국가들이 다 함께 잘사는 방법을 택하고, 유지하는 것도 뼈아픈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원-실험-도약-확산-변형-종언으로 끝난 이 책은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세세하다. 사실 공산주의에 대한 자세한 이념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상황들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기에, 책을 따라가다보면 그 흐름을 놓치기 쉽다. 관심있고, 필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에 대한 부분만 발췌해 읽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이제는 학문이 되어버린 하나의 이념. 그 역사적 사실 앞에서,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고민해 보는 것도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시인 허연이 책을 이야기한다. 고전 탐닉 1을 읽고 느꼈던 그의 매력, 분명 2권에서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읽지 않은 고전 마저도 읽고 싶게 만드는 그의 이야기는 어렵지도, 쉽지도 않다. 딱 그가 쓴 시만큼 매력적이다.

 

 

 

 

 

 

 

 

 

 

 미디어 안에서 진중권은 성질이 더럽다. 욱하고, 비아냥 거리고, 짜증을 심하게 낸다. 강연을 하는 진중권은 정말 진지하다. 공부가 재미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책을 쓰는 진중권은 무겁다. 미디어 안에서의 진중권이 보이질 않는다. 각양각색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의 신간이 나오면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갖게 된다.

 

 

 

 

 

 

 

 

 

 

 우리 제발, 지구를 생각하고 살았으면. 환경에 대해 이렇게 무관심할 수가. 우리가 살아갈, 내 아이들이 살아갈 지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살았으면. 작은 움직임이 얼마나 큰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알았으면~

 

 

 

 

 

 

 

 

 

 

 

 

 전쟁이 없어지는 세계를 꿈꾼다. 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삶의 터전을 빼앗고, 정신마저 빼앗는 전쟁. 이러한 전쟁 안에서 피를 빨아 먹고 사는 인간들, 나라들. 인간이 모두 사라지기 전까지 전쟁도 사라지지 못할 테지. 전쟁 뒤에서 셈을 하고 있는 그들이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족 기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꽤 오래전에 어떤 책을 읽고 우리가 읽어왔던 동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다. <신데렐라>나 <빨간모자 소녀>, <헨젤과 그레텔> 등의 동화가 아름답고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라 꽤나 잔인하고 기이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교육은 많은 이야기들을 권선징악에 초점을 맞춰 가르친다. 아니, 당연히 그렇게 이해되도록 가르친다. 하지만, 그 안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관점과 시각을 살짝만 달리해도 이야기의 해석은 달라진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그렇게 믿었던 이야기가 사실은 다른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 그래?'라기 보단, '아니! 이럴수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우리가 읽었던 고전과 전래동화들에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는 것을. 하나의 사실만 이해하고 넘어갔다면, 그 뒤에는 또 다른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라는 아주 간단한 명제에서 시작한 전래동화와 고전들에는  '나쁜 사람' 뒤에는 또 다른 '나쁜 사람'이나 '나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생각지 못했는데,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불편한 진실들은 이야기를 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나타난다.

 

한을 품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에서 떠도는 '장화와 홍련'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나쁜 사람은 계모다. 하지만, 과연 계모만 나쁜 것인가? 왜 과년한 처자들을 시집 보내지 않고, 집에 가두어 두었던 것인가. 친아비라는 자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서 이야기의 해석은 달라진다.

아무리 딸을 얻고 싶은 마음이 컸다지만, 밤마다 누이가 여우로 변한다는 진실을 말했다고 아들을 내쫓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딸만 자식이고, 아들은 자식이 아니던가. 뒤틀린 자식 사랑이 가족을 죽게했다는 해석. 하나의 전래동화일 뿐이지만, 어떤 문제 의식은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본처의 본분은 어디서 유래된 것인가? 부정한 짓은 남자가 저질렀음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참아야했던 과거. 시샘과 질투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던 시대가 현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열녀라는 것은 무엇인가? 왜 남편이 죽으면, 정조를 지켜야하고, 따라 죽어야 하는가? 한 사람의 존엄한 생명은 무시되어도 마땅한가? 그게 올바른 길이라며 열녀비를 세우고, 그 정신을 지금까지 기리다니 이것은 정신병 수준이 아닌가?

 

그럼에도 비판없이 받아들인 이러한 이야기들. 이러한 이야기들이 주는 교훈을 비판없이 받아들인 덕에 우리의 무의식은 계모는 나쁜 사람, 정절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 자식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따라가고 있다.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이야기가 실생활로 이어져, 어떤 가치들을 획일화된 이미지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야기라는 것은 신비로우면서도 무서운 것이다. 어렵고, 난해한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미지화 시킨다. 하지만, 부작용이 따르는 것도 사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보았다. 백이면 백, 똑같이 이해하고 있던 이야기들이 사실, 다른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없이 받아들였다는 것. 의식하지 못한 채 읽고 받아들였던 것들이 꽤 독으로 작용되었을 거라는 점. 뭐 거창하고, 터무니없는 반작용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똑같이 받아들였던 이야기를 다각도로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꽤 의미있는 실험이 아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협동조합, 참 좋다 - 세계 99%를 위한 기업을 배우다 푸른지식 협동조합 시리즈
김현대.하종란.차형석 지음 / 푸른지식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잘 살고 있나요?

 

삶은 점점 풍요로워지고, 생활의 질은 높아졌습니다. 이제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대부분 살 수 있지요. 기업들은 점점 거대해져가고, 다양한 제품이 쏟아져 나옵니다. 우린 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별 비판없이 사용하기도 하고, 그들이 조종하는대로 믿기도 합니다. 연봉 수준은 높아졌고, 과거에 비한다면 대부분 잘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돈 없어서 '고기국'을 못 먹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상합니다. 삶이 질도 높아진 것 같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 말입니다. 교육의 질도 좋아져서, 조금만 노력하면 유학도 다녀올 수 있고 좋은 환경에서 공부도 할 수 있는데 왜 많은 청년들은 힘들다고 하는 걸까요? 왜 사람들은 점점 외로워져 가는 걸까요? 우리는 정말 잘 살고 있는 걸까요?

 

글로벌 금융 위기로 국가들이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숨가쁘게 발전만 외치던 기업들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재를 뽑을 수 없고, 회사를 위해 몸바쳐 일한 직원들 마저 정리해고를 해야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누군가를 희생해서 기업은 굴러갑니다. 상품의 가격도 높아져 갑니다. 게다가 그 상품도 믿을 수 없습니다. 의심과 의심이 쌓여가고, 대기업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을 가지면서도 관계된 협력업체나 그 기업에 줄을 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계속 살아나가야 하기 때문에 원가 절감이란 이유로 원자재 가격을 깎아도, 기술을 보다 싼 값에 요구해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요. 그렇게 기업은 횡포를 부리고, 그 안에서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 기업은 주주를 위해 일하고, 직원은 살아남기 위해 일하고, 직원들이 열심히 일해서 남긴 이익은 주주들이 가져갑니다. 이렇게 부유한 사람들은 더 부유하게 살고, 열심히 일한 사람들은 해고당하지 않으려고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상황은 나아질 줄 모르고, 악화되어 갑니다. 우리는 정말 잘 살고 있는 걸까요?

 

 

자본, 그것은 늪이 아니었나?

 

잘 사는 사람은 더욱 잘 살고, 대기업은 점점 거대화 되고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은 과연 있는 걸까요? 정말 보이지 않기에 없는 것은 아닐까요? '보이지 않는 손'은 소수 권력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 소수 권력들은 배를 불리고,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피라미드에 가장 꼭대기에 있는 누군가가 우리 모두의 삶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기업이 잘 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기업이 잘 되어야 나라가 잘 되고, 국민들이 잘 살 수 있다고. 그래서, 기업에게 많은 특혜를 주었고, 수출이 성장하는 것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과거에 제조업이 활성화 되면서 우직한 국민들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것이 기업과 국가를 위한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열심히 산다면, 어쨌든 좋은 일이 생길거라고 우리 모두에게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분명히 세상은 더 발전되었습니다. 국가의 경제 수준은 높아졌고 글로벌 기업들이 생겨났습니다. 이쯤해서 우린 잘 살아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기업을 일해 인생을 다 바쳐 일한 사람들, 지금 어디에 있나요? 그 시간을 보상받고 있으신가요? 그 주역들을 우린 기억하고 있나요? 그들은 잊혀졌고, 기업의 이름만이 남았습니다. 이제 국가 권력도 섣불리 대항하지 못하는 그런 기업들. 우리가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협박하며 유리하게 고지를 점령한 기업들. 

 

 

이제, 대안 경제가 필요하다

 

나 혼자만 잘 살고 싶어했습니다. 공부할 때도 내가 필기한 노트는 친구들에게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한 교실에 있어도, 우린 서로 경쟁자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웠습니다. 취직을 하는 것도 경쟁입니다. 내가 합격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경계해야 합니다. 취직을 하고 기업에 들어가서도 모두 경쟁자입니다. 위로 올라가는 길은 좁고, 사람은 많습니다. 어떻게든 올라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기업과 함께 일하는 협력업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을 따내기 위해서는, 원가도 낮추고 밤을 새우더라도 질을 높여야 합니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외롭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조금씩 지쳐갑니다. 이런 무한경쟁 시대에서, 밑도 끝도 없는 경쟁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빼앗아갔습니다. 회의가 듭니다. 후회가 듭니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친구보단 적이 많아진 삶. 이게 최선일까? 자본과 기업에 휘둘리며 사는 삶, 좀 바꿀 수는 없을까? 다행입니다. 자포자기하지는 않아서. 어쨌든, 그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빛을 찾으려 노력해서. 그리고, 우린 희망을 발견합니다.

 

'협동조합'. 우리나라 협동조합들 '농협', '신협', '축협' 등을 생각해보면,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것들은 이름만 협동조합일뿐, 기업과 다르지 않습니다. 농민의 편에 서야할 농협은 자본의 편에 서 있으니, 우리의 일상에 있는 협동조합은 기업처럼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곳일 뿐이라고 생각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협동조합은 경제의 대안이 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만 잘 사는 게 아니라, 모두가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곳. 그곳이 바로 협동조합입니다.

 

 

세계 속의 협동조합

 

우리는 경쟁에 익숙할까, 협동에 익숙할까. 경쟁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학습된 것은 아닐까. 볼로냐 대학의 자마니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경쟁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타인을 이겨야 자신이 승리하는 경쟁 Positional competition이 있고, 또 다른 경쟁이 있습니다. 바로 협력적 경쟁Cooperative competition입니다." 나도 이기고, 너도 이기는 경쟁, 함께 일하면서 둘 다 이기는 경쟁. 자마니 교수는 협동조합은 바로 이런 '협력적 경쟁' 방식으로 일한다고 했는데 그라나롤로의 직원은 그 협력적 경쟁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듯했다. 

-  본문 69쪽 

 

이 책은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시작합니다. 협동조합이 일상이 된 도시, 볼로냐. 볼로냐가 속한 에밀리아로마냐 주의 1인당 국민소득은 5만 달러라고 합니다. 유럽연합에서 소득이 높은 5개 지역 중 하나. 볼로냐의 인구는 약 37만여 명. 우리나라 경남 진주시와 비슷한 규모라고 합니다. 작은 도시, 하지만 끈끈한 힘을 가진 도시. 가난했던 도시가, 경제적인 힘을 갖게 된 것은 협동조합 때문이라고 합니다. 에밀리아로마냐 주에는 협동조합이 무려 8,000개나 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전체 협동조합의 반이 이 주에 있는 것이죠. 이 지역 사람들의 임금은 이탈리아 평균 임금의 두 배, 실업률은 3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정말 그야말로 꿈에 도시라고 할 수 있죠. 이 도시는 우리의 마트와 비슷하지만 협동조합으로 운영되는 '콥Coop'부터 택시, 감자와 양파 재배 농민 협동조합인 '코메타', 주택 협동조합 '콥안살로니', 낙농 협동조합 '그라나롤로', 유치원 협동조합 '카라박 프로젝트' 등 협동조합의 종류가 너무도 다양합니다.

 

이 협동조합들은 큰 이윤을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아닙니다. 서로 연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iCoop'이나 '생협(생활협동조합)'처럼 더 좋은 농산물을 적당한 가격에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콥Coop'. 상품을 믿고 살 수 있는 것은 물론, 사는 소비자나 파는 농민이나 어느 한 쪽도 손해보지 않고 경제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상품을 사면서도 의심하지 않아도 되고, 농민은 가격 폭락 등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니 서로가 만족할 수 있게 됩니다. 소비자는 협동조합을 많이 이용한 만큼 할인도 받을 수 있고, 많은 금액은 아니어도 배당을 받게 되죠. 이용하면 이용할 수록 나에게 이익이 되고, 생산자에게 이익이 됩니다.

 

낙농 협동조합 '그라나롤로'는 이탈리아에서 우유 시장점유율이 1위일 정도로 탄탄한 협동조합입니다. 제품 품질을 높게 유지하고, 출하 가격을 조정하고, 기준을 정해두고 원유를 수집합니다. 소가 위생적인 물을 먹고,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지부터 점검하고, 소비자가 우유와 유제품 생산자를 추적할 수 있게 합니다. 기업은 품질관리를 철저히한 농가에게 높은 가격을 책정해주고, 기업은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습니다. 고용 불안 문제를 최소화하고, 서로 경쟁하는 분위기보다는 협동하는 문화를 갖고 있는 기업이라면 누구나 일하고 싶을 테죠. 게다가 '사회적 책임'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어려운 나라에 도움을 주는 것도 적극적입니다. 경쟁에 치이며 불안을 느끼지 않고, 자부심을 느끼며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기업. 사먹는 소비자도 제품을 생산하는 생산자도, 원제품을 제공하는 농가도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기업이라면 대안 경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전 세계 155개국의 나라 중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를 차지한 '덴마크'. 그곳에도 협동조합이 있습니다.

 

덴마크 협동조합연합회의 엘사 브라네르는 협동조합과 덴마크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덴마크에는 서로 돕는 전통이 예로부터 내려오고 있어요. 당신이 자신만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거죠. 이것이 덴마크 복지 정신의 기본이기도 하고요. 당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 이런 협동 정신과 덴마크는 뗄 수 없는 관계죠."    

- 본문 95쪽

 

1970년만 해도 에너지의 99퍼센트를 수입했던 덴마크는 현재 에너지 자급률이 145퍼센트입니다. 이 성과의 기반은 풍력발전이었습니다.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성장 전략과 원자력 포기. 그대신 풍력발전을 곳곳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풍력 협동조합 '비도우레'도 있습니다. 마을 주민이 풍력발전기의 주민입니다. 그 때문에 님비 현상도 잠재울 수 있었죠. 단 네명이 각자 50크로나씩 출자해 만든 조합이 지금은 2,268명 자본금 540만 3,000크로나로 크게 늘었다고 합니다. 조합원들의 수익이 연 이자율 11퍼센트. 환경보호에도 기여하고 돈도 벌 수 있는 협동조합입니다. 그 지역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한 기업에 돌아가지 않고, 협동조합의 소유주들에게 분배되는 것. 그것은 에너지 사업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속 가능한 은행을 지향하는 협동조합 은행 '메르쿠르', 글로벌 축산 협동조합 기업 '대니쉬 크라운', 유가공 협동조합 기업 '알라푸즈', 코펜하겐 도시 꿀벌 협동조합 'BYBI' 등 협동조합의 종류도 형태도 다양합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모두가 함께 지속가능한 기업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빈곤, 환경 등의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환경과 경제가 위기에 봉착한 지금, 우리 경제 구조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 우리 사회가 가는 방향이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열린 경제구조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외된 사람들을 다시 노동에 복귀시키는 사람도 필요하고, 환경을 가꾸는 사람도 필요하고, 또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기보다는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가 바로 그런 일이죠." 

- 본문 131쪽 (올리베르 막스웰, BYBI)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어하는 덴마크 청년의 말. 사람을 부자로 만들기보다는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 시작한 코펜하겐 도시 꿀벌 협동조합 'BYBI'.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노숙자들과 시작한 양봉사업은 2010년 유럽 최고의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벌이 사라지는 도시에 벌을 불러들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노숙자들에게 일을 제공한다. 청년의 작은 생각이, 사회와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뉴질랜드의 세계 1위 유제품 수출 기업 '폰테라', 뉴질랜드 농업의 미래를 책임지는 '영파머스 클럽',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키위 브랜드 '제스프리', 스위스의 소비자 협동조합 '미그로', 네덜란드 협동조합 은행 '라보방크', 캐나다의 산악제품 협동조합 '엠이시', 영국의 돌봄 협동조합 '체비엇 케어', 라이브러리 협동조합, 협동조합 펍(영국의 대중 술집) '폭스앤하운즈', 영국의 최대 소비자 협동조합 '코오퍼러티브 그룹', 미국의 협동조합 '선키스트, 웰치스, 블루다이아몬드'.

 

세계에 포진해있는 협동조합은 규모나 업종이 다양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협동조합이 추구하는 것은 지속가능한 경제, 행복한 삶입니다. 나 혼자 빨리 앞서가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모두 함께 오랫동안 즐겁게 살자는 마음입니다. 물론 원가로 경영을 하고, 민주적인 1인 1표 방식이 의사 결정에 걸림돌이 될 수 있고, 사기업보다 비교적 낮은 급여는 고급 인재 확보에 불리하다는 점도 제기됩니다. 하지만, 잘 운영되고 있는 협동조합에겐 그런 문제들이 걸림돌이 되어 보이진 않습니다. 사업의 잉여금은 최대한 공동자본금으로 적립해 위험에 대비하고, 그 다음으로 이용 배당을 합니다. 주주를 위한 이익배당이 없으니 순이익률이나 투자 수익률 같은 수치가 좋게 나올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하나의 수치일 뿐. 네덜란드 협동조합 은행 '라보방크'는 100년 이상 무배당으로 잉여금 전액을 적립해 자본 조달의 어려움을 자체적으로 극복했습니다.

 

 

협동조합을 꿈꿔 볼까요?

 

2010년 9월 배춧값 파동으로 배추 한 포기가 1만 5000원으로 치솟았을 때, 한살림과 아이쿱생협 매장에서는 2,000원에 못 미치는 평소 가격 그대로 배추를 팔았습니다. 김치를 담을 때 필요한 무, 대파, 마늘 같은 김장 채소류도 값이 올랐지만, 동결했습니다. 이듬해에는 배춧값이 300원 까지 폭락해 농민들은 밭을 갈아 엎었지만, 한살림과 아이쿱생협과 거래한 농가는 계약한 대로 지급해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수익이 날 때마다 일정 금액을 가격 안정기금으로 적립했기 때문이죠. 이것은 신뢰였고, 협동조합의 힘이었습니다.

 

꿈같은 이야기들이 조금씩 조금씩 힘을 얻고 있습니다. 법개정으로 올해 12월부터는 5인 이상만 모이면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겐 무궁무진한 아이템이 있습니다. 대기업에 굽신거리지 않아도, 못살겠다고 파업을 하지 않아도 될지 모릅니다. 모두가 '협동'한다면 말입니다. 대기업이 만든 빵집, 대기업이 만든 치킨집, 대기업이 잠식한 피자집에서 고통받는 상인들이 힘을 모은다면 동네 빵집, 동네 치킨집, 동네 피자집이 서로 도우며 더 잘 살 수도 있습니다. 대기업이 문어발처럼 뻗어나가는 업종들. 소상인과 자영업자의 등골을 빼먹고, 착취하는 기업들의 횡포에 대항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버스회사 사장, 택시회사 사장만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를 바꿀 수 있습니다. 3대 통신사의 횡포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2012년 유엔은 "협동조합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 Cooperative Enterprises Build a Better World"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작은 사람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기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사람들이 협동조합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그전에는 돈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내가 쓴 돈의 흐름을 알 수 있고, 그 돈이 지역에서 재투자되고, 윤리적으로 사업하고, 노동자와 환경을 존중하는 협동조합 기업의 가치를 재인식하게 됐습니다. 내가 민주적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조직이니까 신뢰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확산된 겁니다.

 

마리아 엘레나 차베스(국제노동기구 국장)        - 본문 285쪽

 

 

자본을 쫓다가 위기를 맛본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이 답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너무 지쳐있었지도 모릅니다. 잘 살자고 열심히 살았는데, 누군가만 잘 살고 있었고, 돌아온 답은 불안과 소외감. 그렇다면, 무언가 잘못되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책은 답을 주진 않지만, 힌트를 줍니다. 협동조합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어떻게 기업을 운영해 나가고 있는지. 경쟁하면,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하지만 함께 가면 다같이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것. 나만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모두를 생각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이야기입니다. 작은 힘이 모여 큰 힘이 되는 세상. 우리도 이제 협동조합을 꿈꿔 볼까요?

 

 

 

우리나라의 생활협동조합

 

iCOOP 생협연합회  www.icoop.or.kr 

 
두레생협연합 www.dure.coop/

 

한살림 www.hansalim.or.kr

 

원주 생협 www.wcoop.or.k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