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지 않아서 웃지 않음
선우은실 지음 / 읻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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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읽으면서 비판적 시각을 갖기보다 생각의 전환을 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늘 그렇다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것들을 늘 그랬던 게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일일 수도 있다고 말해주는 책 <웃기지 않아서 웃지 않음>.

가족과의 관계 안에서 오는 돌봄, 관계, 가부장적인 가족 안의 모순, 결핍 등을 돌아보는 글들은 내 안의 이야기와 대입할 수 있어 좋았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나 <심슨가족>에 대한 해석은 생각지도 못한 해석이었는데 <웬그막>의 해석을 읽으며 낄낄댈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우스운 가부장의 모습을 다시 그려보고 있자니 예사롭지 않은 드라마였다는 걸 깨닫는다. 우스꽝스러운 상황들에 가볍게 웃기만 했던 상황이 문득 확 달라져버린 걸 알았다.

관계 단절의 이야기나 위계에 의한 관계, 웃음을 두고 피권력자와 권력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 공감 되었는데, 내가 겪었던 어떤 상황과 대입되기도 했다. 또 ‘서비스’라는 형태로 도처에서 강요되는 웃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 좋았다. 웃기지 않아서 웃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임을 곱씹어 생각해보게 됐다.

📖성장이란 ‘해주는 사람’을 찾느니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

이 문장은 마음에 확 와닿았는데 수많은 경험들 속에서 느꼈던 생각이 담겨 있어서였던 것도 같다.

📖 결핍은 본래 질긴 것이지만 내가 돌보지 않는다면 좁은 울타리에서 무한 증식할 뿐이다. 가뜩이나 자가 증식하는 결핍을 더 빠르게 배양하는 관계는, 그러므로 좋다고 할 수 없다(같이 질식할 뿐이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서로를 갉아 먹는 관계를 너무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내가 아는 이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문장이었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행동으로 잘 되지 않아 같이 질식하기 위해 굴로 들어가는 관계들을 떠올리며, 알면서도 끊어내지 못하던 관계들을 떠올리며 나의 생활 속 관계들을 또 한 번 점검한다.

여성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생활 속 상황들에 같이 분노했는데, 유부남인 주제에 은연 중인 말로 성적 관계를 원하는 말들이나, 범죄의 대상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자 ‘아닌’척 하기를 말하는 솔루션들에 대한 ‘화‘는 여성 문제에 대해 해결하려 하는 의지가 있는 사회인지 의문을 품게 했다.(사실 의지는 모든 여성들의 변화도 필요하다.)

관계 안에서의 시각들이 때때로 놓치고 지나가 버린 것들을 깨닫게 되는 책읽기였다. 불편한 마음이 들어도 그냥 그렇지 뭐 하고 지나쳤던 것들이 그냥 지나치고 말 일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되새기면서 생활비평의 시각을 가져봐야겠다는 의지를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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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는 육개장이 없어서
전성진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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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스에게 <베를린에는 육개장이 없어서>를 보여줬더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어떤 말을 했을까? 이 책을 끝까지 읽고 상상했다. 아마도 숭진을(작가님 이름은 성진이지만, 요나스는 발음을 잘 하지 못해 숭진이라고 불렀다) 꼭 안아주며 너무 멋지다고 말해주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겠지. 자신과의 추억을 써준 걸 무척 기뻐하며 요나스다운 음식을 차려줄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작가의 독일 정착기인 줄 알았다가, 집구하기 대작전인가? 지저분한 룸메이트와의 파란만장한 독일 생활기로 이동하더니, 눈물 찍 콧물 찍 우정기로 느껴졌다. 팔딱팔딱거리는 생동감 넘치는 우정기. 누구하나 평범한 사람은 없고(특히 요나스가 제일 괴짜지만, 뭔가 사랑스럽다, 작가가 사랑스럽게 쓴 것 같기도), 요나스와 숭진이 함께 사는 일상도 내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였다.

베를린에서 집을 구하던 전성진 작가에게 나타난, 아니 찾게 된 요나스. 29살 여자와 53살 남자와의 동거는 읽자마자 불길했다. 한국적 사고에 갇혀 있는 나로서는 무슨 큰일 날 일이라도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이 아저씨가 뭔 나쁜 짓을 해서 탈출기가 되는 거 아닌가 불안불안해 하며 읽었지만. 웃기고, 더럽고, 종종 성가시게 하는 아저씨일 뿐 어쩐지 순수한 매력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전 절대 같이 못 살았을 것 같아요, 작가님 최고…. 2년이나….)

팬티만 입고 거실을 돌아다니고, 함께 사는 집이니 방문을 열어 놓자고 하고, 청소는 거의 하지 않고, 부엌은 엉망이고, 시도 때도 없이 노크하고 문을 열어 뭐하냐고 묻고, 이런 요나스와 2년을 함께한 요나스와 최장 룸메트. 그 오랜 시간을 함께 살며 나눈 이야기, 에피소드가 가득 담겨 있다. 특히 맛깔스러운 것은 전직이 요리잡지 기자였던 작가가 음식과 에피소드를 자연스럽게 엮어줘 군침을 흘리게 한다는 것.

어떤 음식을 먹을 때, 생각나는 추억이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함께 먹은 음식들 속에 곁들인 이야기가 새록새록 생각날 테니, 정말 특별하고 즐겁지 않을까? 전성진 작가가 음식과 함께 부려놓은 이야기는 멋지고 유쾌한 성찬 같다. 누구나 먹어도 탈나지 않고, 함께 웃을 법한. 그래서 기분이 좋아질 법한.

요나스의 아들 일리아스와 나눈 이야기와 함께 간 클럽에서 경험한 에피소드, 요나스의 캠핑장 초대를 애써 미뤄두다가 한국 친구들과 함께 가서 생각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 에피소드, 요나스가 쓰러져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다가 만난 놀라운 병원식, 작가가 겪은 인종차별 이야기.

산문집은 맛있는 음식이 잔뜩 있는 메뉴판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새 집을 찾아서 결국 함께 사는 것은 2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숭진을 그리워하는 요나스의 짧은 메일은 눈물이 핑돌게 한다.

생활은 생활이기 때문에 내가 읽은 이야기는 단편적이었을지 모른다.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게 쉽지도 않을 뿐더러 국적과 나이도 다르고, 문화와 생활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만약 요나스가 숭진을 괴롭히는 괴팍한 중년 아저씨에 불과했다면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을까? 함께 사는 게 어렵고 고단하기도 했겠지맞 함께 한 다정한 시간들, 서로를 살핀 순간들, 그렇게 쌓인 우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을 탄생한 게 아닐까.

타인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한 요나스. 지금 삶을 잘 사는 게, 나의 행복이 중요하다는 걸 가르쳐준 요나스가 있었기에 숭진의 독일 생활이 많이 외롭지만은 않았을 거다. 이런 관계들은 늘 부럽다. 어디서라도 만나지 못할 것한 관계들이 우정을 나누게 되는 시간들은 더 특별하니 말이다.

”나는 오늘 너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얘기를 하는 일이 즐거워. 그게 전부야.“
….
”무엇보다 나는 그저 지금의 삶이 행복하고 즐거워. 내가 지금 살아 있으면 됐어.“

죽고 싶다는 생각이 잦아진 작가가 죽음에 대해 물으면, 현재를 살라고 말해주는 요나스. 맛있는 걸 먹고, 좋아하는 것을 하고 그것으로 하루하루 일상을 채우라는 요나스의 조언은 눈물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제목에 육개장이 왜 등장하는지는, 책을 끝까지 읽는 독자만이 알게 되는 보물찾기. 나조차 조금 갑작스럽고, 당황했지만. 그와 함께한 이야기를 이렇게 남겨두었으니, 요나스가 어디에선가 말하고 있지 않을까?
“알레스 굿”

#안온북스 #베를린에는육개장이없어서 #전성진 #책 #리뷰 #서평단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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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의 일 - 11년간의 모든 기록이 담긴 29CM 카피라이터 직업 에세이
오하림 지음 / 흐름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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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하다.
정갈하다.
담백하다.

자신이 하는 일을 이렇게 담담히 설명하면서도 영감을 주는 말들을 가득 담을 수 있을까? 잘 지워서 잘 고른 말들이 조곤조곤 적혀 있다. 차분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을 느꼈다. 책을 읽으면서.

정보와 이야기가 넘쳐나, 뻔한 것들이 외면 받기 좋은 시대에 은유적이고 담백한 표현으로 상품의 장점을 잡아 끄는 일. 그런 일을 잘 해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조용하지만, 치열한 싸움들이 오가는 광고 시장. 1초 이상 머무르게 하는 카피를 쓰는 일. 그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수집하고, 배열하고, 쓰고, 지우고, 걷어내면서 그녀는 언제나 치열했겠지. 치열함을 지나와 담담한 걸까.

“온 세상이 남의 약점을 잡느라 바쁘고 단점을 숨기기에 바쁜데, 장점만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일을 한다는 것은 꽤 낭만적인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주 감동하고, 자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 습관이 된 건 덤입니다.” - <좋은 점을 찾아 큰 소리로 외치는 일> 중에서 -

이런 문장들이 좋았다. 클라이언트와의 부딪힘도 있었을 테고, 기획자와의 지난한 토론도 있었을 테고,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머리를 싸매며 괴로워 한 날들도 있었을 텐데 ‘카피라이터’라는 일과 자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사람. ‘굳이’를 발견하고 사랑하는 힘을 갖는 사람. 이런 카피라이터를 만난다면 브랜드 담당자는 고맙지 않을까?

쓰고 지우고, 장면을 그려주고, 우리말을 잘 쓰기 위해 노력하고, 아무나 할 수 있는 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 본질을 꿰뚫어보고, 다가감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 [카피라이터의 일]을 쓴 오하림 작가는, 카피라이터는 그런 사람인 것 같다

이 책은, 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지만 글을 쓴 사람의 태도와 생각이 잘 드러나 좋다. 카피라이터를 꿈꾸기 전에,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를 갖추는 게 좋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글을 쓰기 전 태도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고르고 골라서 잘 표현하는 일은 누구나에게 중요하다. 말로 잘 전해지는 것도 좋지만, 나는 글로 잘 전해지는 말들을 더 좋아한다. 곰곰이, 오래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작가가 자신의 일을 잘 해내기 위해 매일매일 공든 탑을 쌓듯이 애쓰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일들도 같이 해나가는 건 좋아하는 일을 더 좋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은 아닐까. <내가 광고회사 힘들다 그랬잖아> 페이지를 운영한 것도, <도보마포>를 운영하는 것도, <일본광고> 페이지를 운영하는 것도 자신의 일을 더 잘해내기 위한 그녀의 마음같다.

지금부터 해야할 일까지 깨알같이 정리해 내놓은 걸 보면 앞으로도 일을 잘 해내고,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일을 잘 사랑하는 것, 일을 좋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쉽지 않지만 필요하다. 일이 내 피곤을 채우기도 하지만, 내 마음을 채워주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게 된다.

[카피라이터의 일]을 읽으며, 나의 일에 대해 깊게 생각해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떤 태도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해나가야할지 정리해보고 싶어졌다. 잘하고 싶은 일이라면, 잘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도 나의 일일 것이다.

적당히를 모르는 사람으로, 지나친 애정을 재능삼아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에 마음을 다하는 것.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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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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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을 들었다.

노회찬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책을 선물했다.

어떤 뜻이 있었을까. 많은 뜻이 있었겠지.

내심, 쓰윽, 마음에 무엇인가가 훑고 지나갔다.

 

<82년생 김지영>은 또박또박 힘주어 쓴 글이었다.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서른네 살이다. 3년 전 결혼해 지난해에 딸을 낳았다."로 시작되는 소설은 한 여자의 삶을 꾹꾹 눌러 쓴 르뽀 같았다.

바꾸어 써 보았다.

 

"나는 우리 나이로 서른일곱 살이다. 14년 전 결혼해 삼남매를 낳았다."로 <81년생 나>를 써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디테일한 삶은 다르지만, 울컥 거렸던 감정들은 다를 것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여자, 엄마, 그리고 꿈을 꾸는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김지영 씨는 작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다 출산과 동시에 퇴사했지만, 나는 아이를 낳은 후 광고회사에 문을 두드려봤지만, 유부녀 그리고 어린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 당하기 일쑤였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최종 면접에서 들어야 했던 말은

 

"정말 뽑고 싶었는데요. 야근이나 철야가 많아서 아이 때문에 다니기 힘드실 거에요. 다른 좋은 자리에서 뵈었으면 좋겠어요."

 

경험담을 비슷한 직종의 카페에 올렸더니, 회사 이미지가 있으니 글을 삭제해 달라는 요구도 받았다. 자기도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아래 직원까지 아이가 있으면 본인이 곤란하다는 여자 상사도 있었다. 10년도 넘은 이야기지만, 꽤나 진한 서러움으로 남아 있다.

 

친정엄마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찌감치 경력단절녀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살림과 육아를 반복하는 하루하루를 지내다, 김지영 씨처럼 혼이 탈출하는 일이 반복되었을 지도 모른다. 매번 취업의 문터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울곤 했다.

 

'나는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거절당해야 하는 것인가. 아이가 있다는 것은 내가 쓸모 없는 사람이라는 말인가. 왜 아무도 나를 허락하지 않는가.'

 

많은 시간, 외로웠다. 남편과 친구들의 응원과 위로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물론 아이들까지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삶, 회사가 원하는 삶을 살고 나서야 나를 인정해주는 사회가 야속했다. 아이가 있는 여자라서 변명이 많다 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밤낮 없이 일하고 나니, 아이러니하게 아이 있는 여직원들이 불편해하는 일도 생겼다. 너무 열심히 해도, 적당히 열심히 해도 이상한 굴레에 빠지는 것 같았다.

 

10년 만에 셋째를 갖게 되면서 3개월 출산휴가를 냈을 때도 가장 바쁜 시기에 낸다고 눈총을 받아야 했고, 2개월 만에 출근하면 안 되느냐는 전화도 받았다. 육아 휴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복귀해서는 아이가 없는 것처럼 일을 해내야 했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지만, 언제나 눈치가 보였다. 아이를 낳은 게 죄를 지은 것 같았고, 그런 마음이 들수록 더 아무렇지 않게 일했다.

아이가 있는 상사는 "나는 애가 없느냐"라는 말을 종종하면서, 힘들다는 말도 꺼낼 수 없게 입을 막았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던 대표는 종종 아이를 픽업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면서도, 임신을 준비하는 직원에게 가장 바쁜 연말을 피해 아이를 낳으라는 말을 농담처럼 던졌다.

여자 비율이 높아 '여성기업'으로 인증받은 회사의 현실이 이랬다.

겉으로 평범해 보이는 내 삶은 나의 엄마의 희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내가 살아내기 위해서는 마음 한쪽 구석에 죄책감을 키우며 버텨야 했다.  

 

친할머니에게는 "여자가 시집 잘 가는 게 남는 거다"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남자 잘 만나야, 여자 팔자가 피는 거다"라는 말도 들었다.

"여자가 잘 들어와야, 집안이 잘 되는 거다"라는 말도 들었다.

 

결혼을 했더니 시어머님이 그런다.

"아들이 잘 되야, 가족 모두 편안하다"

"장손이 잘 되야, 다른 애들도 다 잘 된다"

"남자는 부엌에 들어오는 거 아니다"

라는 이상한 말들을 주문처럼 들어야 했다.

 

2005년생 삼남매 중에 둘째로 태어난 딸은 6살이던 어떤 날 엉엉 울었다.

"왜 할머니는 오빠만 더 사랑해?"

때때로 일어나던 차별의 말과 행동들이 아이의 마음을 할퀴고 할퀴어 눈물로 터졌다.

친정 엄마가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기집애가 말이야"라는 말에 화를 내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기 살아야 한다.

이상한 논리를 강요받는다.

왜 차별 받아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이면, 기가 세다거나 드세다는 이상한 말을 듣는다.

 

2005년생인 딸은 내가 겪었던 세상에 살지 않길 바란다.

1982년생 김지영이 살아온 삶과 조금 달랐으면 좋겠다.

꿈을 쫓기 위해 아이나 결혼을 포기하거나, 결혼을 했기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삶은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를 키워야 해서 경력을 단절되고, 독박육아를 하느라 우을증에 걸리고, 일로 돌아가려하니 자리가 없는 그런 이상한 나라의 여자가 되지 않길 바란다.

이런 상황들이 자연스럽지 않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세상에 살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 겠다"

 

새드엔딩으로 끝나는 이 문장이, 해피엔딩으로 바뀌는, 그렇게 기록되는 날이 오길 바라며.

쓸쓸하고 서럽게, 오늘의 81년생, 나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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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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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을 읽고 나면 기억이 조각조각 흩어진 듯한 기분을 느낀다. 잊게 되는 것도 있고, 마음 속에 각인되어 한동안 생각나는 인물들도 있다. 좋은 작가가 쓴 이야기는 감정이입의 농도가 훨씬 높다. 내가 주인공인 된 것처럼 아픔, 기쁨, 슬픔, 상처까지도 샅샅이 느껴진다. 김애란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런 느낌이 든다.

 

김애란 작가가 세상과 이야기하고, 사람을 느끼는 방법은 특별하다고 생각해왔다. 그 특별함이 무엇일까 매번 곰곰히 생각하곤 했는데, 언제나 답을 내리는 것은 '디테일'이다. 누군가의 삶을 엿본 것 같은데, 그 안 어딘가 내가 했던 생각과 감정, 그리고 행동들이 숨어 있다. 일상 속에서 무심하게 지나치고, 습관처럼 해온 행동들이 이야기 속 어디에서 문득 튀어나온다.

 

'아, 나도 그랬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일상의 언어 안에 숨겨진 고통을 들여다 보고 있자면 가끔, 가슴을 움켜쥐게 된다.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나는 자꾸 되씹는다.

 

'단편의 제목은 생각나지 않아도, 그 여자 얼마나 아팠을까. 그 아이 얼마나 허망했을까. 그 남자 참 세상 더럽다고 생각되겠지.'

 

<바깥은 여름>, 한 여름이 일찍 다가와 무덥던 어떤 날 펼쳐든 책이었는데, 책을 덮고 나니 서늘하다. 단편들을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 상황도 시간도 다른 '상실감'이 한 번에 찾아든 것 같다.

시간이 정지된 듯 어이 없고, 기가 막혀서 입 밖으로 내뱉을  수도 없는 일.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하고, 숨이 턱 막히다가 기운이 쭉 빠져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일. 그런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다.  

 

죽음, 위선, 외면, 무관심, 상처 위에 한 번 더 나는 상처.

 

대출로 마련한 집에서 행복을 꿈꾼 단란한 가정에 찾아든 아이의 죽음. 아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어린이집에서 무심히 보내온 복분자액이라니. 그 액이 온 집을 덮어버리다니. 피칠갑을 한 마음에 피바람이 한 번 더 몰아치고, 이렇게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그런 마음이 오롯이 전해져 가슴을 파고드는 '입동'

 

어느날 죽어 돌아온 남편을 가슴에 품고 떠난 스코틀랜드. 슬픔을 폭발하지 못한 채 묵묵히 안으로 끌어안은 여자에게는 온몸에 분홍색 반점이 퍼진다. 마음의 고통이 온몸을 점령하고 돌아온 집에 도착한 편지. 인정할 수 없었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터져나오는 주인공의 눈물에 왈칵 눈물을 쏟고 만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멀어지는 감정의 과정을 동의할 수 밖에 없었던 '건너편'

 

유기견이었던 친구 에반에게 평온한 죽음을 선물하고 싶었던 찬성이의 감정의 변화를 사실적으로 포착한 '노찬성과 에반' 에반의 안락사를 위해 전단지 배포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지만, 순수한 욕망에 타협하며 에반의 죽음을 조금씩 뒤로 미루는 아이의 감정의 변화가  너무도 이해되서 마음이 아팠던 이야기.

 

가리는 손, 풍경의 쓸모, 침묵의 미래까지.

 

일상에서 어느날 갑자기 찾아든 사건들로 평온한 삶은 산산히 조각나지만, 쓸어담고 추스려야 하는 건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사건이 벌어지고 나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긴 힘들다. 누구도 내가 느낀 상실감을 모두 알 수 없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겪은 상실감은 무엇이었던가. 혹은 내가 타인에게 상실감을 준 적은 없었나. 생각해보게 된다.

부당한 편견을 보고도 침묵한 적은 없었나.

소중한 이들에게 상처준 적은 없었나.

결국, 나도 김애란 단편들의 어떤 곳에 앉아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방관, 무관심, 외면, 위선

 

어느 것 하나 자유로울 수 없다.

나도 쉽게 고개를 돌렸고, 쉽게 모른척했다.

어떤 날은 '입동' 안 어딘가에 있었고, '건너편'의 주인공이었으며,  '노찬성과 에반'의 찬성이이기도 했다.

 

김애란 작가는 또 이렇게 내 마음 어딘가를 두드린다.

일상 어딘가에서 내가 저질렀을지 모르는 어떤 일들을. 어떤생각들을. 어떤 합리화를. 모른척 마음 안에 봉인해 버린 어떤 사건들을.

어디론가 흩어져 버린 내 삶의 한 부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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