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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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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변하지 않았다

2년 전, <4천원 인생>을 읽고 난 후 느꼈던 우울이 <노동의 배신>에서 재현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 쓰여졌던 이 책은 2012년이 되어서도 유효하다. 노동은 더욱 궁핍해졌고, 나아진 것이 없다. 그게 더 우울하고 충격적이면 충격적이랄까? 세상은 발전하고 있고 좀 더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 안에서 빈곤의 늪은 더 넓어졌다.

 

2년 전, <4천원 인생>에서 4가지 노동을 만났다. 식당일과 집안일을 병행하는 아줌마의 노동, 마트라는 거대 자본에 그림자가 되어가는 젊은이의 노동,  온갖 궂은 일을 도맡하 하면서도 불법이라는 그늘에 갇혀 살아야 하는 불법 체류자들의 노동, 사람이 기계가 되는 기계적인 노동. 이 4가지의 노동을 4명의 기자들이 경험했다. 비인격적이고 부당한 대우에도 입을 열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그들을 밟아 누르고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기업과 사회. 그 누구도 그들의 권리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관심도 없다. 기자 4명이 관심을 갖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았고, 그들의 노동에 대해 폭로했지만 지금 변한 게 무엇인가? 마트에서 일하던 젊은이들의 삶과 노동은 더 나아졌을까? 식당에서 일하며 떳떳하게 휴일도 요구하지 못하고 사장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던 아줌마, 아니 엄마들의 삶과 노동은 나아졌을까?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도맡아 해주는 불법 체류자에 대해 더 따뜻한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기계보다도 천대받는 삶을 사는 기계적인 노동을 했던 이들의 삶은 어떻고?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한숨소리뿐. 4명의 기자들이 '몸으로 때우며' 보여줬던 노동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도 말한다. 이 책을 쓰고 난 후, 10년이 지났어도 나아진 것이 없다고. 경제불황으로 일자리는 더욱 없어졌고, 중산층이었던 사람들도 어느날 갑자기 저소득층이 되면서 노동의 공급은 많아졌고, 수요는 부족하다. 2000년도는 경제가 호황이었음에도 그 지경이었는데, 경제 불황에 맞닥드린 현재는 더해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변하지 않는 노동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다. 노동의 늪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다. 국가도 사회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노동은 변하지 않았다.

 

노동을 경험하다

그녀는 그동안 누렷던 삶을 포기하고 저임금 노동에 뛰어든다. 아주 엉뚱한 계기였지만, 시작하자고 마음을 먹자 철저하게 규칙을 세운다.

1. 자신이 받은 교육이나 원래의 직업으로 배운 기술에 의존해 일자리를 구하지 않는다.

2.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임금을 제일 많이 주는 일자리를 택하고, 그 일자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3. 어느 정도 안전과 사생활이 보장되는 선에서 제일 임대로가 싼 방을 구한다.

규칙을 정하긴 했지만, 후에 이 규칙들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삶이 아니라, 경험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른다. 사실 그녀가 해온 저임금의 노동들을 따라가고 있자면, 내 감정도 그녀와 함께 폭발하곤 했다. 아마 나 또한, 그것이 삶이 아니라 바라보는 입장이었기에 그러한 감정들을 분출했는지도 모른다. 정작, 그 노동들을 진짜 생활, 삶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노동자들은 부당한 대우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가 경험한 노동은 다양하다. 식당 웨이트리스, 청소부, 요양원 보조원, 월마트 판매 직원. 그녀는 그러한 노동을 경험하면서 의식주 때문에 고민하고, 1~2달러 사이에서 고뇌한다. 저임금으로 살아가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임금이 낮기 때문에, 그에 맞춰 값 싼 음식을 찾아야 하며 시도 때도 없이 굶어야 하고, 주거 문제로 고민해야한다. 임금이 낮기 때문에 투잡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녹록하지 않다. 모든 게 몸을 사용해야 하는 일이기에, 건강은 극도로 나빠져간다. 사실 몸만 힘든 거라면 뭐가 대수겠냐마는, 비상식적으로 인격과 권리를 무시해대는 통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이만저만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 대해 그녀만 분노한다.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것은 언제나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고, 그보다 심한 일도 비일비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용주는 주는 것보다 더 부려먹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노동자는 살아남기 위해 아픈 것도 참아야 한다. 하루를 쉬면, 하루를 살아내지 못한다. 임신도 반갑지 않다. 입이 하나 더 늘 뿐이다. 노동은 '생존' 싸움이고, 사투였다. 그녀의 감정들은 오르락내리락. 읽고 있는 내 감정 또한 오르락내리락. 경험하지 못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정신 싸움이었다.

그녀는 '노동을 하며' 분노를 참아내야 했다. 끝까지 가보겠다는 생각, 이러한 경험과 기록들을 멈출 수 없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안간힘에도 종종 한계에 도달하는 일이 생기곤 했다.

 

100만 달러짜리 콘도에 갔는데, 주인은 나를 부부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서는 샤워실 때문에 아주 속상하다고 했다. 샤워 부스의 대리석 벽에서 '피가 나듯' 물이 새 놋쇠로 만든 수도꼭지 손잡이에 떨어져 녹이 슬고 있다면서 대리석 사이의 이음새를 특별히 박박 밀어서 하얗게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당신의 대리석 벽이 피를 흘리는 게 아닙니다. 저것은 전 세계의 노동자 계급, 즉 대리석을 캐 나른 노동자들, 당신이 아끼는 페르시아산 카펫을 눈이 멀 때까지 짠 사람들, 당신이 가을을 주제로 아름답게 꾸며 놓은 식탁 위의 사과를 수확한 사람들, 쇠못을 만들기 위해 강철을 제련한 사람들, 트럭을 운전한 사람들, 이 건물을 지은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집을 청소하려고 허리를 굽히고 쪼그리고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흘리는 피입니다." - 본문 129쪽

 

그녀가 청소부로 일했을 때 경험한 일이다. 삶은 비현실적이다. 한 사람은 비현실적인 육체적, 감정적 노동을 강요받아야 하고, 한쪽은 강요한다. 청소는 적나라하다. 사람의 똥부터 체모까지 감당해야하고 참아내야 한다. 때로는, 감시라는 덫에 걸려야하고 청소 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도둑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아야 한다. 사회는 그렇게 비현실적인 일을 강요하고 있으며, 노동하는 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참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동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알고보면 모두 적이라는 것이다. 고되고 힘든 일 속에서 서로가 힘이 되어줄 것 같지만, 천만에 말씀. 그 안에서도 권력이 존재한다. 권력을 가진 자의 삶이 그다지 더 나아보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들이 작은 권력에도 눈치를 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자존감의 상실 때문이다. 아무도 그들을 칭찬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들에게 고마워하지 않는다. 고용주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만든다. 동료를 고자질하고, 내가 좋은 위치를 선점할 수도 있다. 노동의 늪은 생각보다 깊었다. 그것은 구조적인 문제였다.

 

피트의 말대로 일은 우리가 사회에서 '왕따'로 전락하지 않도록 구원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 자체가 왕따의 일로 눈에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역겹기까지 했다. 경비원, 청소부, 단순노동자, 성인의 기저귀를 갈아 주는 사람들. 이들은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는 민주 사회의 불가촉천민들이었다. 그리하여 테드 같은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카리스마가 부여된 것이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뚝뚝하고 잔인했지만 더 메이즈에서는 유일하게 더 나은 세상,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사복을 입고 직장을 나가고, 주말에는 재미로 쇼핑을 하는 세상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청소하는 집이 모자라면 그는 직원들을 ('정말 좋다'는) 자기 집으로 보내 일을 시켰다. - 본문 164쪽

 

실상, 사회는 그들을 저임금 노동으로 몰아내며 '왕따'를 시키고 있었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며 내일을 걱정해야 하고, 절약을 생활화하느라 술은 물론 옷도 제대로 사입지 않았다. 통조림이나 질나쁜 음식으로 하루를 버티기도 했다. 버는 돈의 대부분은 집세로 지출되고 있었고, 남은 돈으로 그야말로 '생존'을 해야했다. 뭔가 다른 삶은 꿈에 꿀 수도 없었다. 돈도 없었지만,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그야말로 일, 일, 일을 반복하는 삶이었다. 그 사이에 무엇인가 끼어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노동은 아프다

열심히 살아도 변하지 않는 삶과 만나야 한다는 것. 가난과 어깨동무하고 늪으로 빠져야 한다는 것. 노동이 삶을 나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은, 희망을 품고 사는 이들에게는 좌절을 양산한다. 하지만, 그녀가 본 노동자들은 좌절할 겨를도 없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고민할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그들의 삶이다. 수없이 많은 시간을 노동과 씨름한다고 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 그 참혹함이다.

노동은 아프다. 고통의 연속이다. 노동을 사는 사람들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값을 지불하지 않는다. 그들의 노동은 필요할 때 쓰고, 필요하지 않을 때 버려진다. 그 상황 속에서 항상 불안을 느껴야 한다. 덤으로, 사회가 둘러 놓은 불안정한 울타리 때문에 안전을 보장받을 수도 없다. 시장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매몰차다. 그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들의 노동도 배려받지 못한다. 국가는 불균형적인 시장에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받을 수 있는 혜택마저도 빼앗아 간다. 노동자들을 보호해야할 국가는 시장의 편에 서 있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이 책에 나와있는 모든 상황과 경험들은 미국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미국을 모델로 삼고 숨가쁘게 쫓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벌어질 일이다. 아니 벌어지고 있을 일이다. 진실은 그늘에 가려져 있다. 그늘은 타오르는 태양을 잠시 피해갈 수 있게 해준다. 태양이 물러나고 가면, 그늘을 모른척한다.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잊혀져 간다. 밤은 그늘을 삼킨다.

우리의 그늘은 어디쯤 있을까? 우리의 노동자들은 어디쯤 있을까? 아무렇지 않게 쓰여지고, 버려지는 노동자들은 절규하고 죽어간다. 그래도 모른척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들여다보고, 함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다. 내가 언제, 그 늪으로 빠질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늪지대를 수월하게 탈출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없앨 수는 없어도 바꿀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노동에 배신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날이 오길 바란다. 가난한 노동도 없고, 노동의 늪도 사라지는 그런 세상이 올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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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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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의 풍문을 들어보지 못한 이 누가 있을까? 공포를 불러오는 아이콘이 되어버린 뱀파이어. 그의 목숨처럼 끝없이 재생산 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즐거움과 재미를 준다. 소설, 영화, 그림 등 다양한 형태로 회자되고 이야기되는 뱀파이어. 그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책은 뱀파이어의 통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구석구석 뱀파이어를 소재로 쓰여진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뱀파이어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사람의 욕망을 간접적으로 채워주는 대상인 것이다. 피를 빨아 생명을 유지하고, 밤에 활동한다는 것만 빼면 불멸의 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것도 가장 매력적인 모습으로 말이다. 늙지도 않을 뿐더러, 위험한 상황만 피할 수 있다면 죽지도 않는다. 거기에 냉혈하고 잔인해보여도 멋있는 외모와 가끔은 부드러운 모습까지 덧입혀지면, 인간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는 것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뱀파이어에게 피를 주고, 자신도 뱀파이어가 되려는 인간이 꼭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숨겨진 욕망을 잘 드러내는 게 뱀파이어가 아닐지.

 

두렵지만 가까이 가고 싶은 호기심. 그것은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는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유혈이 낭자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렛미인>,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이제는 너무 흔한 이야기라고 치부될 즈음 다른 스토리텔링으로 뱀파이어의 매력을 적극 활용한 예이다. 뱀파이어는 구시대의 이야기를 넘어,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뱀파이어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거나 해석하기 보다는, 주제별로 분류해 뱀파이어의 연대기를 나열하고 정리해 놓은 수준이다. 수많은 뱀파이어를 너무 많이 소개해 놓았기에, 사실 뱀파이어라는 캐릭터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몰입도가 떨어진다. 신화에서부터 21세기에는 게임 산업까지 침투했다고 하지만, 주로 문학작품, 특히 영화에서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기 때문에, 영화의 장면이나 서술이 많아 맥락 없이 읽히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수많은 이야기들을 재생산한 캐릭터이기에 이런 책의 발간도 의미있다고 생각된다.

 

그로테스크한 조건을 갖은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나 사랑받을 것 같은 뱀파이어. 이 책의 뒷이야기들은 또 어떻게 채워질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 뱀파이어. 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해 우리를 즐겁게 해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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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

 

철학자가 생각하는 이 시대의 정치는 어떤 모습일까? 그 철학자가 이진경이기 때문에 더욱 궁금하다. 이 정부가 집권하고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은 이 책의 제목처럼 '뻔뻔하'기 그지 없었다. 상식 밖으로 굴러간 시대의 상황들 속에서 우리는 무력했고, 피로했다. 이런 시대를 이진경이 논한다니 조금 기대되고 흥분된다.

 

 

 

 

 

 

 

 

 

반하는 건축

 

건축하는 시인, 시 쓰는 건축가 함성호가 쓴 건축 이야기.

그렇기에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시대에 반反하고 공간에 반惑하는 건축 이야기라니, 단순히 건축을 설명하는 것 이상의 이야기가 있으리라 기대된다. 인문학적 관점으로 바라본 건축 이야기라면, 건축물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이야기들도 회자되리라 기대하며!

 

 

 

 

 

 

 

 

대한민국, 복지국가의 길을 묻다

 

이기적인 경쟁사회에 지쳐버린 우리는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다 함께 잘살기 위한 노력, 아주 미세하지만 조금씩 변화를 꾀하는 사람들. 사실,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은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이라고,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들은 절대 복지국가를 만들어줄리가 없다. 복지국가로 달려가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그 이야기들이 궁금하다.

 

 

 

 

 

 

 

루머사회

 

우리 사회는 수많은 루머들로 들끓고 있다. 특히 연예인의 루머라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한몫하려 날뛴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것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루머의 대상이 중요할 뿐. 정치인들은 루머를 이용해왔고, 시시때때로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루머들로 대중을 선동해왔다. 루머는 웃고 넘길 무엇이 아닌 것이다.

루머를 조종하는 이들은 루머 뒤에 감춰진 어떤 것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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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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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것이고, 모름에서 앎으로 가는 것이며, 멈춰있던 희식이 흐르는 것이다. '읽다'에 내포된 많은 것들이 이 세계를 만들어 냈으며, 많은 것을 창조해왔고, 전달과 전달을 거듭해 많은 것이 공유되어 왔다. 세상에 태어나 읽게 되면서, 알게 되는 모든 것들. 또 읽은 것을 해석하고 소화하면서 받아들이고 걸러지는 것들이 있다. 때론 같은 것을 읽어도 생각이, 의식의 형성이 달라질 때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다름을 제쳐두고라도 읽는다는 것은 '새로움'이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것이라고.

 

대학을 졸업 후, 개인적인 일들과 고통. 그 안에서 나를 달래기 위해 열중했던 것이 책을 읽는 것이었다.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읽으면서 만나게 된 세계는 때론 충격적이었고, 때론 절망적이었으며, 때론 새로웠다. 읽게 되면서 쓰기 시작했다. 읽고 쓰고를 반복했다. 그 과장 속에서 의식이 성장하는 것을 느꼈으며, 지나온 시간들을 성찰할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어제와 다른 내가 되어감을 느꼈다. 읽으면서 성장한다고 믿기에, 책을 놓을 수도 버릴 수도 없게 됐다. 책을 읽는 것은 나만의 세계에 빠져,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었으므로.

읽기에 빠진 사람은 행동할 수 있다는 것도 몸소 경험했다. 행동하지 않고 방관하는 사람이야 말로 아무것도 읽지 않으려 하고,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세상은 '읽고 있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변화시킨다. 읽는다는 것은 나 자신과 사투하는 일이기에, 세상을 향한 싸움과 많이 닮아있다.

 

원리주의자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수 없음'과 '읽기 어려움'에 맞설 용기도 힘도 없습니다. 나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말해왔습니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광기의 행위라고. 책을 읽으면, 읽고 말면, 아무래도 - 내가 잘못된 건지 세상이 잘못된 건지, 몸과 마음을 애태우는 이 물음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게 된다고. 사람들은 모릅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는 책을 그래도 읽는다는 것, 그 안에 있는 텍스트의 이물감, 외재성, 생생한 타자성을 모릅니다. 가혹하기까지 한 그 무자비함을 모릅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을 모릅니다. 그 놀랄 만한 '읽어라'라는 명령의 열정을 모릅니다.   - 본문 153쪽

이 책에서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구절에 다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읽는다는 것에서 탄생한 모든 것, 그가 예를 들고 있는 루터의 혁명과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의 근원은 모두 '읽기'에 있다. '성서'를 읽음으로써 일어난 혁명. '전태일'이 이루어낸 노동혁명도 분명 '읽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읽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 이루어지지 않았을 변화. 읽기가 만든 파급력은 곱씹을 수록 무섭고 대단하다.

 

읽게 된다는 것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알게 된다는 것은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고, 행동하게 된다는 것은 이루어 낸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루어 낸다는 것은 읽은 것을 받아들이고 소화시켜 나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읽을 수 있는 것은 기회를 갖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무엇을, 혹은 원하던 무엇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다는 것. 그것들이 모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아무리 읽어도 정말 그것이 그 책에 쓰여 있었는지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책이란 그런 것입니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 정확한 근거를 보여준다,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그저 자신의 망상일지도 모릅니다. 책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준거의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그래도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추궁해야 합니다. - 반복하겠습니까?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반복합니다. 책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 본문 81쪽

 

책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싸움은 시작된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책이 말하는 것과의 싸움. 이것은 때론 고통스럽고, 때론 유쾌하다.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해야 한다. 과연,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맞는지, 옳은지, 이대로 나아가야 하는지. 싸움과 싸움을 거듭한 끝에 가치관이 형성되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받아들인 많은 것들이 나를 만들어낸 것이다. 혼란에 빠졌을 때, 고뇌에 빠졌을 때, 분노에 휩싸였을 때. 읽기를 통해 만난 순간 순간들은 결국 내가 되었다. 읽기를 통해 내가 계속 달라지고, 만들어지면서 이것은 끝이 없는 싸움이여 끝나지 않을 성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읽기는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어 왔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읽기를 통해 문학, 철학, 예술, 역사 등 많은 것이 발달되어 왔다.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 살아간다는 것, 창조한다는 것, 변화를 꾀한다는 것은 모두 혁명이다. 혁명은 읽기와 함께한다.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통해 말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핵심이다. 세계가 나아가고 있는 것은 '읽는다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그의 기록 조각조각은 치밀했으며, 또다른 사유와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그가 쓴 것들을 읽게 함으로써, 나를 다른 세계로 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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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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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들은 누구인가?

똑같은 시대를 살아도, 한 발 더 사는 사람들. 가슴 아픈 것을 보면, 가슴 아파할 줄 알고, 고통스러운 것을 보면, 남들보다 몇 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자신의 아픔보다 시대의 아픔을 더 빠르게 느낄 줄 아는 사람들. 내가 아는 시인은 그렇다. 진짜 시인이라면 그렇다. 아름다운 말보다, 뼈 아픈 말을 꺼낼 줄 아는 이들이 시인 아니던가. 세상 사람들이 느끼고 있으나, 차마 말로 내뱉을 수 없는 것들을 말하는 이들이 시인 아니던가. 그래서, 시인은 아름답고도 슬픈 존재 아니던가. 김수영, 그야말로 찬란하고도 슬픈 존재다. 시대를 꿰뚫어 보며 온몸으로 고통스러워 했고, 시와 자신을 일치시키면서 살았다.

 

 

강신주는 그 열정과 자유, 인문학적 정신을 이 책에 담았다. 『김수영을 위하여』는 한 개인이, 김수영에게 바치는 책이다. 김수영을 해석하고 해설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는 책처럼 느껴진다. 그 안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것들은 우리 시대에 들어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김수영이 비판하고, 아파하고, 안타까워한 시대와 지금의 시대는 별반 다를 게 없다. 반복을 거듭한 시대는 진화하기는커녕 제자리를 걷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어쩌면 더 와 닿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노해야하는 시대에서 시대에 분노했던 김수영을 만난다는 것, 그것은 시원하고 즐거우면서도 반성해야하고 되돌아보아야 하는 일이었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가 이야기했던가? 인간의 자유는 '대상적 활동(objective activity)'에 있다고 말이다. 앞에(ob) 던져져(ject) 나의 활동을 방해하는 저항에 대해 능동적(active)으로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다. 급류를 헤엄치는 물고기를 생각해 보라. 강풍에 몸을 맡기고 활공하는 까마귀를 생각해 보라. 급류를 따라 흘러가는 물고기는 오직 죽은 물고기뿐이고, 강풍에 날려 가는 새는 오직 죽은 새 뿐이다. - 본문 30쪽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자유를 놓아버린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리고,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가. 하나의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이들, 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이들, 자유라는 것은 그냥 놓여진 것일 뿐 얻어내야 하는 것임을 망각한 이들. 누군가의 삶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이들. 자유 의지를 멀리 날려버린 이들. 생각하지 않고, 각성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지 못한다면 결국, 저 위의 권력이 원하는대로 사는 것임을 부인해도 부인될 수 없는 시대.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려고 몸부림친 김수영의 시와 정신은 시대의 부끄러움을 또렷히 보여주는 글들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것을 다시 일깨웠고, 작가의 이야기에 덧붙여 그를 마음과 정신을 상상하게 되면서 그가 내게 다가오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는 분명 쓰고 싶은 것을 썼지만, 그것이 꽃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삶의 즐거움이라던가 이런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의 삶은 시대의 급류와 맞물리며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그는 누군가를 원망할 대상이 필요한 시절도 있었다. 그는 전쟁에 휩쓸려 거제수용소에 끌려가 죽음의 나락에 빠져 보았고, 죽을 힘을 다해 돌아왔지만 아내는 친구의 아내가 되어 집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를 찾으려 갔지만, 아내는 쉽게 따라나서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온 아내를 받아들여야 하는 그는 고통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닌척해도 상처난 정신은 돌이킬 수 없는 일. 불행은 쉽게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설움은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온몸에 내재되어 있는 참혹한 상처와 설움, 분노의 씨앗들이 김수영을 김수영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시여, 침을 뱉어라>(1968.4)

 

 

온몸으로 쓰는 시, 온몸이 살아서 나오는 시, 온몸이 밀어내어 나오는 시, 그것은 시의 진실, 그리고 시의 의미일 것이다. 또한, 그의 모든 시들은 온몸으로 썼다는, 온몸을 밀어내며 썼다는 말일 것이다.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시를 완성해내기 위해 그는 상처와 고통으로 온몸을 밀어내었고 그렇게 탄생된 시들은 읽는 이 마저도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김수영의 이상은 분명하다. 모든 사물이나 사태처럼 각 개인은 단독적인 존재여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가 단독적인 존재가 아닌데 단독적인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단독성을 되찾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인간은 교육과 관습, 권력이라는 외적 압력 때문에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외부가 강제하는 제스처로 살아가는 순간, 우리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것이 원하는 바대로 살아가는 것은 우울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주인이라면, 반대로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은 노예다. 그러나 그 누가 노예로 살고 싶겠는가? 이것은 교복을 입을 수밖에 없는 학생들, 특히 여고생들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보면 분명해진다. 획일화를 강요하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자신이 입는 교복에 깨알 같은 변형을 주면서 자신의 단독성을 표출한다.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교복 양식이 계속 출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것이 시의 원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본문 152쪽

 

 

개인은 시대에 잡아 먹힌지 오래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슷한 방향으로 비슷하게 수긍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잡음 없고, 피곤하지 않게 사는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한 '개인'을 '모두'에 집어 넣는다. 개인은 '우리'가 되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한다. '우리' 속에 속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나혼자 튀는 것, 그것은 언제나 미움을 받아왔다. 튀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하지만, 생각해보면 튀는 이들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 몸부림 치는 이들이었다. 튀고 싶어서가 아니라, 똑같은 것이 싫어서, 비슷한 삶을 거부하기 위한 반항이었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 행위였다. 이제야 안다. 우리 사회는 누군가가 '단독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싫어한다.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지지만, '단독적인 존재'를 향한 야유는 생각보다 강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남 생각이 내 생각인 것처럼 덧칠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남의 생각대로 살면서도 내 생각대로 산다는 착각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다. 생각해보면, '단독적인 존재'를 유지하고 산다는 것은 조금 더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깨어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의 단독성을 표출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그 몸부림 속에서 나오는 것들은 김수영의 '시'였고, 김수영의 '글'이었다.

 

 

김수영은 시인만큼은 모든 사람이 시인일 수 있는 사회를 꿈꾸어 왔다. 그래서, 동시대의 시인들이 현실의 낡음은 자각하지 않고 남의 제스처를 흉내내 시만 새롭게 쓰려는 모습을 보며 절망했다. 억압된 시대에 자신만의 제스처로 단독적인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고, 아름답게 포장하는 시를 써내려고만 했으니, 그의 고민은 컸을 것이다. 설움도 없고, 자신만의 제스처도 없는 시인들에게 "뒤떨어진 현실에서 뒤떨어지지 않은 것 같은 시를 위조해 내놓"고 있다고 일갈할 수 있었던 것은 시인들의 태도에 대한 강한 분노였다. 온몸을 밀어내며, 온몸으로 살아내며 쓰는 그에게는, 시대의 아픔과 슬픔을 외면하고,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시인들의 태도가 얼마나 슬펐을지.

시대는 흐르고 있었다. 혁명인 듯 보였지만, 혁명이 아니었고, 권력을 깨부순 듯 보였지만 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믿고 있는 대중을 속이고, 결국 다른 권력이 모습만 바꾼 채 지배한다. 4.19혁명을 온몸으로 경험한 그는 실패를 인정했지만, 또 다른 혁명을 꿈꿨다. 완전한 혁명은 모든 사람이 혁명가가 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 그는 혁명의 좌절을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자유를 꿈꿨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재와 억압에 대한 분노로 민주주의를 외친다고 할지라도, 그들 내면은 이미 권위주의로 훈육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면 가난한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권력이 없던 사람이 소망하던 권력을 얻으면 권력이 없는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바로 이 점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선(善)과 정의(正義)의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일종의 피해의식 탓에 그들은 언제든지 억압받는 자로 변신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노예는 주인이 되기를 소망할 뿐, '주인과 노예'라는 억압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하나의 왕조를 붕괴시킨 혁명이 항상 화장을 새롭게 고친 또 다른 왕조로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 준다. 억압으로부터 인간, 혹은 자유를 회복하고자 한 혁명의 결말치고는 아이러니하다. - 본문 346쪽

 

 

온몸이 더러워지는 진창에 빠져, 나를 알아볼 수 없는 순간이 온다고 하여도, 끝까지 나아가겠다는 시인의 신념과 의지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자유 의지와 살아있음을 이야기 했고, 그 어떤 것도 그를 막아설 수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억압과 독재 위에 살고 있다. 아무리 자유로워졌다고 하여도, 정신은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어딘가를 서성이며 헤매이고 있다. 권력에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간들은 자유의지를 희미하게 했고, 오로지 힘이 나의 존재를 구원해줄 것이라 믿고 살아 왔다. 그것은 '나 자신', '나의 온몸'으로 살아가는 시간이던가? 그 삶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김수영은 현재의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아직도 그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우리가 혁명을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쳇바퀴 돌 듯 계속 회전만 하기 때문이리라.

 

 

그의 시는 정신이다. 이루어내야할 정신이다. 삶이다. 세상이다. 모든 사람이 혁명가가 되는 세상을 바라는 꿈이다. 모두가 시인이 되는 세상이 오길 바라는 희망이다. 자각이다. 일깨움이다. 서러움이자, 고통이다. 뼈아픈 일침이다. 진실이다.

외면하고 싶은 것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 그것이 시작일 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의 시가 더욱 소중하다. 모두가 외면했던 진실들과 당당히 마주하며, 거대한 시대와 맞선 그. 그리고 그를 다시 한번 읽게 해준 강신주.

거대한 도끼가 되어 시대를 내리찍은 그의 시. 그의 시와 그의 마음, 그의 모든 것이 이 시대를 나아가는 열쇠가 되길 바란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푸른 하늘을>(1960. 6. 15)

 

 

 

 

시인을 생각하다

이 세상의 시인들은, 온몸을 밀어내 시를 쓰는 시인들은, 시인이었고, 시인인, 시인일 것인 시인들은 이 세상을 참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속적이나 벗어날 수 없는 자신들의 공간에 갇혀, 그 순수한 마음을 감추어 보려고 술을 마시고, 어둠을 벗삼고 세상과 단절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눈을 뜨기만 해도 괴로운 세상 속에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는 걸 알기에, 온 몸을 밀어내 혼자 시를 쓰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시를 쓰지 않는 시인도 시를 쓰는 시인도 어딘가에서 고통에 몸부림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리다. 시인의 시는, 시 속의 시인은, 시 밖의 시인은 항상 진실과 마주하며 고통을 걷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을 아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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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3 17: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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